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43화 (143/233)

〈 143화 〉 잠깐의 휴식.

* * *

­ 대지신이 명하니 일어나라 나의 신도여...

자꾸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 내 사도야.. 일어나...

그 때문인지 무거운 정신이 천천히 돌아왔다.

­ 대지신 가라사대! 사도여! 일어나랏! 명령이닷!

시끄러 시발.

­ 제발! 일어나주세요! 제가 쓴 포인트가 많단 말이에요! 일어나서 일하라고!!

듣기만 해도 띠꺼운 목소리였다.

­ 일어나라고!!!!

결국 소음을 참을 수 없던 나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 휴.. 일어났네. 어디서 감히 먹튀를 하려고...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자꾸 시발.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정신이 돌아왔다.

옆을 보니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아직 숲 안인 듯했다.

한계까지 몸을 혹사해서 그런지 상처는 회복 되었지만, 짙은 피로감이 남아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다시 찬 신성력을 돌려 피로를 천천히 지워나갔다.

신성력이 지나간 곳이 허브를 바른 것처럼 시원해졌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키아나였다.

"아! 사제 일어났구나."

키아나가 후드를 넘기며 밝게 웃었다.

그 웃음에 잠시 세상이 밝아졌다.

"사저? 사저가 왜 여기에..?"

눈부심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사제가 걱정돼서 왔지. 몸은 좀 괜찮아?"

입가에 미소를 띤 키아나가 끌고 온 사슴을 옆에 놓았다.

미안해­

사슴을 보며 작게 중얼거린 키아나가 해체를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몸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직 피로감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키아나도 대륙 아카데미에 조교로 왔었지만, 일이 바빴는지 따로 대화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단둘이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예. 괜찮아요. 거기서 사저를 만나 다행이에요."

키아나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사제에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내 감사에 키아나가 작게 웃더니 열심히 단검을 움직였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가고 키아나는 능숙하게 사슴 해체를 마쳤다.

키아나가 나뭇가지에 뭉텅이 고기들을 꽂더니 그 위에 이런저런 향신료를 뿌리고 불 위에 올렸다.

타다닥­

기름이 튀며 불똥이 튀었고 이내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그래도 사제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네."

내 반대편에 앉은 키아나가 다시금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스승님에게 반년이나 붙잡혀 있었으니까요."

미친 노망난 노인네 새끼.

키아나의 말에 울컥 화가 치솟았지만, 억지로 눌렀다.

"그래도 그렇게 오래 버틴 건 사제가 처음이야. 자랑스러워해도 돼."

키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스럽기는 시발...

그 노인네 새끼 에이징 커브 오면 내가 반드시 배때지에 칼빵 놓는다.

꼭 편도로 보낼 거야.

"사저는 더욱 아름다워졌네요."

키아나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응? 아­ 고마워 사제."

내 말에 키아나가 자연스럽게 웃었다.

아마 평생 들었던 소리라 그런지 서아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서아 반응이 재밌는데 말이야.

타닥타닥­

모닥불에 기름이 튀어 불똥이 튀는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나저나 저 그 소식 들었어요. 사저."

"무슨 소식?"

키아나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모 때문인지 그 행동도 기품있어 보였다.

"사저보다 강한 사람과 혼인을 하겠다는.. 크흡­"

말하다가 차오른 웃음 때문에 작게 웃었다.

"... 그냥 가문에서 자꾸 압박해서 그렇게 됐어."

키아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대륙 아카데미에서도 사저를 보며 의지를 불태운 녀석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 반응에 참지 않고 웃었다.

실제로 키아나의 모습을 보고 학생들의 훈련 욕이 높아졌다.

웃기게도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열심히 훈련했다.

물론 그 훈련은 내가 아카데미를 뒤엎으면서 끝났지만.

"..."

키아나가 나를 슬쩍 노려봤다.

그 반응에 나는 입이 더 근질거렸다.

"검후라고 불린다던데... 사저 그렇게 강하면 혼인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음... 그럴 수도 있겠지? 상관은 없지만."

키아나가 고운 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걱정하지 마요. 내가 나중에 사저보다 강해진 다음 이겨줄게요."

내 옆에 있는 루나검을 키아나에게 들어 보이며 웃었다.

"응? 아하하! 그래 줄래?"

내 대답에 키아나가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키아나는 전보다 여유가 넘쳤다.

뭔가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예 걱정하지 마요. 사저를 그 미.. 아니 스승님처럼 외롭게 할 수 없죠."

사람이 얼마나 외로웠으면 미치고 노망까지 왔을까.

키아나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하하하! 그래, 고마워. 나도 사제라면 좋을 것 같아."

다시금 크게 웃은 키아가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자­ 이제 먹자. 배고플 텐데."

키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기가 꽂힌 꼬치를 내게 건네줬다.

향긋한 냄새에 절로 침이 고였다.

서둘러 꼬치를 받아 입에 냅다 넣었다.

풍부한 육즙이 터지며 향신료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나는 정신없이 고기를 뜯어 먹었다.

하나를 온전히 다 먹자 굶주렸던 배가 어느 정도 찼다.

키아나는 단검으로 고기를 살짝씩 잘라 먹었다.

그 모습에서 절로 기품이 느껴졌다.

"고기가 맛있네요. 합격이에요. 사저."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응? 합격?"

키아나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제 아내로서요. 나중에 꼭 제가 이겨드릴게요."

키아나를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아­ 하하하! 합격해서 다행이야. 사제랑 있으면 심심하지 않으니까."

키아나가 손에 들고 있던 고기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나저나 제가 얼마나 쓰러져있던 거에요?"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니 뒤늦게 혁명단 생각이 났다.

뭐 어련히 잘하고 있겠냐마는.

나는 이미 그들에게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죽을 뻔했잖아?

"한 3일 정도 누워 있었나? 상처는 금방 치료됐는데 사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라고. 그래서 가까운 성이라도 데리고 갈까 생각 중이었어."

키아나가 손가락을 접으며 대답했다.

3 일이나 누워있었다니.

신이 땍떅거린 것도 이해가 되는구만.

"그래도 사제가 혁명단에 들어간 것 같아서 일단은 숲에 있었지만."

"예. 어쩌다 보니 혁명단에 들어갔어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분명 나는 그저 퇴학당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은 매번 최악의 방향으로 꼬였기 때문에 별로 새삼스럽지 않았다.

다만 다음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걱정되긴 했지만.

"역시 사제야. 어디에서나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구나."

작게 중얼거린 키아나가 다시금 웃었고 세상이 조금 더 밝아졌다.

"제가 그렇기는 하죠. 이 상처들도 불쌍한 놈.. 아니, 사람들 구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라니까요?"

한결 여유로워진 키아나의 태도에 나는 마치 아이처럼 내 무용담을 늘여 놓았다.

키아나는 내 이야기에 아름다운 눈을 집중하며 열심히 반응했다.

저런 미인이 감명 깊게 들어주니 나는 이야기를 부풀리며 열심히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나는 공화국을 악마의 손에서 구해낸 영웅이 되어 있었다.

"고생했어 사제. 이제는 나도 도와줄게."

키아나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어서 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네. 당연하죠. 사저 이제 백수잖아요."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고­

"윽­"

키아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

"오..."

검문하는 병사가 후드를 올려 드러난 키아나의 얼굴에 넋을 잃었다.

"통과죠?"

내 물음에 정신을 차린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는 후드를 다시 깊게 눌러쓴 키아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매콤 주먹을 먹이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사저도 정말 귀찮겠어요. 보는 사람마다 저 반응이면."

후드를 좀 더 깊게 눌러쓴 키아나에게 말했다.

"응? 아니야 이제는 적응되서 괜찮아."

후드 아래로 드러난 키아나의 붉은 입술이 호선으로 휘었다.

이제 이 성만 지나면 바로 다음 성이 안수성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여행하듯이 여유롭게 움직였다.

혁명단에 빨리 합류해야 하지 않냐고 키아나가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들도 어린애들이 아니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나는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이처럼 평화롭던 시기도 거의 없었고 키아나 같은 미인과 돌아다닌 적도 없었으니까.

나는 공화국에게 수배 당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공화국은 나를 쫓지 않았다.

"오­ 저기 가볼래요? 파전이라는 게 꽤 괜찮더라고요."

나는 옆에 허름한 식당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나는 잘 모르니까 사제가 가자는 대로 갈게."

키아나가 순순히 나를 따라 움직였다.

허름한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 제일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아 주문했다.

잠시 뒤 주문한 파전과 막걸리가 나왔다.

"이건 이렇게 먹는 거래요."

나는 친절히 키아나에게 설명하며 파전을 소스에 찍어 먹었다.

키아나가 내 모습을 어쭙잖게 흉내 내며 식사를 시작했다.

맛이 괜찮은지 후드 아래로 드러난 키아나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 혁명단이 일어났다지­?"

"그래서 이 아래로 난리도 아니네!"

"어떻게 되려는지... 그래도 그쪽 조건이 더 좋던데.."

"쉬잇! 조용히 하게 지금 같은 시기에 말 잘못해서 끌려간 사람들이 한 둘인가?"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은가­ 이번에는 공화당도 좀 힘들어 보이던데.."

"그것도 그렇긴 해. 제국군과 신교들이 합심해서 압박 중이라지?"

"...그 자네만 알고 있게나. 김익한 수령이 악마에 씌웠다는 소리가 있다네. 그래서 신교들이..."

"우리도 혁명단에 가입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 공화당이 우리 쌀 한 톨까지 뺏어가지 않았나­."

나는 귀에 기운을 둘러 저 멀리서 조용하게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했다.

일단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제국군이랑 신교가 움직이다니 뜻밖의 일이었다.

의외로 혁명군에게 운이 따라주는 듯했다.

"크으­."

막걸리의 톡 쏘는 맛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모래 맥주만큼은 아니지만, 나름의 맛이 있었다.

"... 크으­."

나를 보던 키아나가 막걸리를 마시더니 작은 목소리로 따라 했다.

그래놓고 부끄러운지 살짝 드러난 볼이 불그스름했다.

"그래도 사저랑 이렇게 둘이 다니니까 정말 좋네요. 마음도 편하고."

그 모습에 작게 웃으며 다시금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네. 나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있은 지가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어."

키아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같이 잔을 들었다.

"사저는 귀족 아니에요? 그러면 맛난 거 먹고 배 두드리면서 사는데 마음 불편할 게 뭐 있어요."

크­ 막걸리가 지나가며 목이 따끔거렸다.

"... 그냥 부모님이 내 생각과 다르셔서."

키아나가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막걸리를 마셨다.

"크­ 해야죠. 크­"

"...크­."

내 독촉에 잠시 머뭇거리던 키아나가 작게 따라 했다.

"푸하하하!!"

그 모습에 참지 못한 나는 크게 웃었다.

"...놀린거지?"

키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검 손잡이를 잡고 있는 키아나의 손을 보고 정신이 확 깼다.

"아뇨! 그냥 귀여워서 그랬어요! 놀린 거 아니에요! 진짜 막걸리 마시면 이렇게 감탄을 뱉어야 해요!"

그 살벌한 모습에 나는 황급히 양손을 저으며 부인했다.

"그래? 알았어."

작게 웃은 키아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 오며 키아나와 몇 번이나 대련했지만, 내가 강해진 만큼 키아나도 아니 훨씬 강해져 있었다.

물론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키아나의 재능은 나와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으니까.

내가 미친 노인네한테 뒹구는 동안 키아나가 쉬고 있을 성격도 아니었고.

그래도 단 한 번도 닿지 못한 건 충격이었다.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종업원을 불러 막걸리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러고 보니 저는 사저에 대해 잘 모르네요. 사저 이야기 좀 해주세요."

새로 받은 막걸리 병을 흔들며 물었다.

"내 이야기..? 나는 사제와 다르게 재밌는 거 하나도 없는데."

키아나가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냥 사제에 대해 궁금해서요. 뭐 가족 관계라든지, 어쩌다 검을 잡았는지, 아니면 첫 연애 같은 것들이요."

막걸리가 영롱한 자태를 뽐냈고 나는 냉큼 키아나와 내 잔에 따랐다.

"...가족은 아래로 여동생 하나 있고. 검은 아버지의 것을 처음으로 잡았는데 손에 착하고 감겨서 들었어. 연애는 아직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정자세로 앉은 키아나가 마치 취조를 받는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에엑­ 그 외모로 연애를 해본 적 없어요? 에이 거짓말."

"진..진짜야! 이상한 건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는데... 사제는?! 사제는 연애해 봤어?!"

평정을 잃은 키아나가 언성을 높이며 고개를 들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키아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었다.

키아나의 질문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연애를 해봤는가...

교미는 했지만, 연애는 아닌 것 같은데.

사귀자고 말한 적도 없고.

간질간질하기는 했지만.

"음.. 저도 안 해본 거 같은데요."

나는 애매하게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야! 사제도 안 해봤잖아! 이상한 게 아니네! 그럼."

내 대답에 키아나가 안도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근데 사제는 저랑 외모가 다르잖아요. 사제는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고 저는... 음­ 잘생겼다고 하긴 좀 그렇잖아요?"

"... 어쨌든 결과는 똑같잖아. 둘 다 연애를 안 해봤으니까."

잠시 우물거리던 키아나가 다시금 밝게 웃으며 말했다.

더 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키아나의 손이 다시 검 손잡이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참았다.

근데 보통 사제가 이렇게 말하면 예의상 '아냐­ 사제도 잘생겼어.' 해주지 않나?

은근히 동의한 거잖아. 지금.

"그래도 걱정하지 마요. 나중에 내가 강해지고 시간 나면 사저랑 연애도 해줄 테니까."

나는 시원하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풋­ 그래 잘 부탁해 사제. 많이 노력해야겠지만."

조그맣게 웃은 키아나가 잔을 내밀어 마주했다.

강해지면 키아나를 가질 수 있다니.

그 어떤 보상보다 내 욕구를 불태웠다.

물론 그렇다고 키아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사제니까 좀 봐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건 없어. 승부는 정정당당해야지."

키아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야박하네.

쾅­!

그때 식당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으로 한 무리의 병사들과 반짝이는 반지를 양손에 잔뜩 낀 사내가 들어왔다.

얼마나 잘 처먹었는지 그 풍채가 당장 식탁에 올라도 위화감이 없을 듯했다.

"저.. 저분입니다!"

제일 앞에 있던 병사가 키아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까 검문하던 병사네.

기어코 저 새끼가 사고를 치는구나.

나는 잔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검 손잡이를 잡았다.

적당히 취한 상태라 검을 휘두르고 싶기도 했다.

후­

익숙한 일인지 키아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잔을 내려놓았다.

식당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그들을 피해 식당 밖으로 나갔고 식당 주인이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

마침내 살이 뒤룩뒤룩 찐 사내가 우리 식탁 옆에 섰다.

후으­

그 잠깐 걸은 것도 힘든지 사내가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안녕하십네까. 저는 대우성의 관리를 맡은 김종인이라고 합네다."

사내가 두툼한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인상을 살짝 찡그린 키아나가 그 더러운 손을 맞잡기 전에­

"뭐야."

나는 검을 뽑아 사내의 앞을 막았다.

"사제..?"

키아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올려다봤지만, 딱히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그쪽은 누구십네까?"

사내가 자신의 앞에 다가온 검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이 사람 미래 남편인데."

나는 시원하게 웃어주며 검을 사내에게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엣­?!

옆에서 키아나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냈고­

"이! 이놈이!!"

"감히!"

주변의 병사들이 제각기 병장기를 빼 들었다.

"그만. 아 실례했습네다. 연인이 함께 계셨군요.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네다. 저는 대우성의 관리를 맡은 김종인입네다."

손짓으로 병사들을 막은 사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야 이런 반응이 아닌데 원래?

보통 저런 악당같이 생긴 놈은 미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침을 질질 흘리며 겁박하는 쓰레기 아닌가.

"으음­ 예. 저는 에이든이라고 합니다."

찜찜한 마음을 참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긴히 드릴 부탁이 있는데 이곳에서 말하긴 좀 그러니­ 자리를 좀 옮겨도 되겠습네까?"

사내가 탐욕이 그득한 눈빛으로 허름한 식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봐봐!

딱 봐도 존나 쓰레기 같이 생겼잖아.

어디를 데려가려고!

"싫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시죠."

나는 사내의 손을 놓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크흠­... 알겠습네다."

사내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다시금 뒤쪽에 손짓을 하자 병사 하나가 다가오더니 의자를 깨끗하게 닦았다.

외모와는 다르게 꽤 깔끔한 성격인 듯했다.

나는 옆에서 인상을 굳히고 있는 키아나의 손을 잡아끌어 내 옆자리로 옮겼다.

키아나가 작게 손을 꼼지락거렸지만, 빼지는 않았다.

"주변 감시 잘하고 혹시나 그 눈이 있나 확인해라."

사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명령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두터운 얼굴이 사뭇 내 비위를 상하게 했다.

"빨리 말하고 꺼.. 큼큼 말해보게."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올 뻔했는데 키아나를 생각해 말을 가다듬었다.

"일단... 먼저 검후 키아나 님이 맞으십니까?"

사내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푸흡­

검후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예 과분하지만 그렇게 불립니다."

잠깐 나를 쳐다본 키아나가 시선을 돌려 대답했다.

"역시 맞군요. 그 하늘에서 내린 듯한 외모와 도도한 기품까지­. 소문에 과장이 하나도 없습네다. 아니 오히려 부족한 듯합네다."

사내가 눈을 밝히며 아부를 했지만, 딱히 키아나에게는 소용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키아나가 딱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크흠­ 그게... 제 아내가 악마에게 씐 것 같습네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본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야 또 악마야?

무슨 가는 곳마다 악마가 있어.

"악마요?"

저번에 만난 악마의 흉측한 모습이 떠올라 내 목소리가 절로 까칠해졌다.

"예예 거의 확실합네다. 밤마다 침실에서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제게 귀엽다고도 하지 않습네다."

덩치에 맞지 않게 침울한 사내의 태도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뭔 개 좆같은 소리야.

"그게 악마인 이유는 아닐 텐데. 그냥 부인이 다른 남자가 생긴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애초에 부모 말고 누가 그쪽을 보며 귀엽다고 합니까."

사내의 입에서 나온 좆같은 말에 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아닙네다!! 아내는 바람피울 사람이 아닙네다! 분명히 저를 테디­베어라고 부르며 매일 제 볼을 쓰다듬었었는데... 따흑­."

금세 침울해진 사내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병사가 냉큼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에 그려진 곰돌이 모양이 내 기분을 더럽게 했다.

"...안타까운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런 거로 악마에게 씌웠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키아나가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네다! 제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 점점 젊어지더니 이제는 거의 20살처럼 보입네다! 물론 저야 좋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우성에서 처녀들이 사라졌고 아내도 밤마다 없어졌습네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내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을 멈췄다.

"항상 사냥신교에 나가던 아내가 더 이상 성당 근처를 가지 않습네다."

말을 마친 사내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봤다.

"그렇게 의심되면 공화당을 찾아가야지 왜 우리한테 왔습니까."

사내의 이야기에서 냄새가 풍기긴 했지만, 굳이 귀찮게 얽히기는 싫었다.

"이미 수백 번 보고를 올렸습네다!! 하지만 이놈의 공화당은­ 아니아니.. 공화당은 바쁜 모양인지 제 보고를 모두 무시했습네다. 이미 저희 성의 처녀들은 거의 다 사라졌고 이제 옆에 있는 성의 처녀들마저 사라지고 있는 처지입네다!"

욕지기를 뱉어내던 사내가 황급히 목소리를 줄였다.

"제발 부탁드립네다... 제가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조사 중에 죽은 병사만 이십 명을 넘어갑네다!"

사내가 다급히 내 손을 맞잡으며 애원했다.

손에서 사내의 축축함이 느껴졌다.

존나 기분 나쁘네 시발.

나는 황급히 손을 빼내어 키아나에게 내밀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키아나가 내 손을 잡아줬다.

썩어버린 내 손이 키아나에 의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사내의 말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옆 성의 처녀라는 말이 걸렸다.

여기서 옆이면 안수성이잖아.

근데 안수성에 남은 처녀가 있나?

말악마들이...

­ 사도!! 받아! 포인트 벌어야지! 저번에 사도한테 포인트 다 썼단 말이야! 빨리 벌어와! 갚으란 말이야!!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동안 저 목소리가 말하는 포인트란 개념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신성한 행위나 믿음에 의해 포인트를 버는 듯했고.

그 포인트를 다시 투자할 수도 있는 듯했다.

이번에 포인트를 받아 신성력을 회복 시켜 버틴 것도 그 효과였다.

혹시 모를 앞으로의 상황에 대비해 포인트를 모아둘 필요가 있었다.

"정말­ 제 아내가 소싯적에 아름답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정말 아름다워졌습네다. 그래서 저는 기쁜 마음으로 인사했는데 저보고 '꺼져! 돼지 새끼야!'라고 소리 지르는 것 아니겠습네까? 악마가 씐 게 아니면 그녀가 제게 그럴 리 없습네다!!"

사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 애원했다.

캬­ 그 여자 말 참 잘하네.

일단 여자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돼지의 말에 따르면 미인이라니까.

악마가 아니라고 해도 미인을 보는 거니까 그다지 손해는 아니였다.

"그­ 시발 닥치고 어디 있는지나 말해요."

그 역겨운 모습에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욕지기를 뱉었다.

내 욕지기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키아나가 이내 작게 웃었다.

"지..지금은 내성 안에 있습네다! 제발 제 아내에게서 악마를... 아니 외모는 유지하고 악마만 뗄 수 있으면 그렇게 좀..."

사내가 눈치를 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키아나가 그런 사내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고.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나는 그런 키아나를 따라 황급히 인상을 찌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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