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언제나 최악을.
* * *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지로 참으며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내 뒤로 굳은 표정의 키아나가 따라 나왔다.
우리는 대충 방향을 가늠해 동쪽으로 향했다.
"에이든 동무!!!"
한창 움직이는데 옆에서 이지수가 등장했다.
이지수는 뭔가 잔뜩 샀는지 빵빵한 가방을 두 개나 메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김종인도 그와 비슷하지만 크기는 더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김종인의 표정이 곧 죽을 사람처럼 푸르딩딩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필사적으로 이지수를 가리키는 게 이지수가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했다.
저저 시발 불안하더라니.
"마침 보지가 가려웠는데 잘 만났습네다! 헤헤."
이지수가 마냥 해맑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야 멈춰. 너 그 가방에 뭐야?."
김종인의 표정에 불안해진 나는 황급히 이지수를 막았다.
"이거 말입네까? 그게... 그냥 잡다한 혁명적인 것들 입네다! 헤헤."
내 물음에 이지수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지 말고! 거기서 가방 열어서 내게 보여봐."
"그.. 진짜 혁명에 필요한 도구들입네다!"
이지수가 가방을 내려놓고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열었다.
가방 안에 가방이 터질 것처럼 갈색 막대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거 뭐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길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폭탄입네다! 폭탄!!"
이지수의 눈치를 보고 있던 김종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이잇! 갈색 소시지로 말 맞추지 않았습네까?! 배신이라니 혁명으로 응징해야 합네다!!"
대뜸 일어나 김종인에게 달려드는 이지수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시발 필요한 거 사랬지 누가 저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사라고 했어? 그리고 무슨 수도라도 터뜨릴 생각이야? 무슨 폭탄을 저렇게 많이 샀어!"
괜히 터질까 봐 두려워 가방을 슬쩍 김종인 쪽으로 밀었다.
끼루루룩!
그러자 김종인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 카드에 얼마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자꾸 긁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네다..."
이지수가 내 눈을 피하며 가슴을 슬쩍 모았다.
분홍색분홍색
중얼거리는 이지수의 말을 무시했다.
"천오 찾은 거 같으니까 환불해서 동쪽 황금빛 분수대라는 곳으로 와."
나는 일부러 표정을 굳히며 엄하게 말했다.
"죄송합네다 동무.. 제가 천오 동무를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꼭 환불해서 가겠습네다.."
내 엄한 목소리에 잔뜩 풀이 죽은 이지수가 울먹거리며 내게 사과했다.
막상 매번 사고 치는 애가 저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니 마음이 약해졌다.
뭉개진 이지수의 가슴 때문이 아니라. 의기소침해 보여서.
"... 사는 건 상관없는데 너무 많이 샀잖아. 네 손에 들 수 있는 만큼만 놔두고 환불해."
그 모습이 괜히 안쓰러워 이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앗! 역시 동무도 혁명을 느낀 게 분명합네다!! 역시 우리는 혁명 동지입네다!! 금방 갔다 올 테니! 이따 제 보지 좀 긁어 주십쇼!!"
금세 기운을 차린 이지수가 힘차게 경례를 올리고 가방을 챙겼다.
이제는 보지 긁어달라는 말을 인사처럼 하네 미친.
"내가 이번만 용서해 드리는 겁네다!"
이지수가 김종인의 등을 밀치며 뛰어갔다.
김종인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황급히 이지수를 따라갔다.
위기를 넘긴 우리는 다시 동쪽 분수대로 향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주변의 끔찍한 모습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혔다.
옆에 나체의 여자가 목줄을 한 채로 울면서 기어갈 때 더이상 참지 못한 키아나가 검을 살짝 뽑았다.
그 살벌한 모습에 나는 황급히 키아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 손길에 가면 아래로 드러난 키아나의 아름다운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잠시 고민하던 키아나가 깊은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키아나의 손이 마치 칼날처럼 싸늘했다.
우리는 마치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주변의 소리를 무시하고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동쪽 황금빛 분수대에 도착했다.
분수대는 정말 이름처럼 영롱한 황금빛 물을 뿜어냈다.
하지만 더러운 이곳에 저런 분수대가 있으니 괜히 더러워 보였다.
분수대 앞에는 고급스러운 나무로 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행사가 제법 인기가 많은지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우리는 그 끝에 섰다.
잠시 뒤 무대 위로 화려한 가면을 쓴 여자와 남자가 올라왔다.
여자는 가슴이 푹 파인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가슴이 탐스러웠다.
그리고 가면 위로 드러난 검은 단발과 걸을 때 드러난 목에 있는 검은 뱀 문신.
식당에서 들은 특징과 일치했다.
"병약 미소녀의 구토 쇼 시작합니다!!!"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쳐 사람의 이목을 한 번에 끌어모았다.
"소개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병약 미소녀!!"
남자가 무대의 옆쪽을 향해 양손을 쭉 펼쳤다.
그리고 어디선가 요란한 북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천오였다.
뭔가 야해 보이기 위해 옷의 이곳저곳을 뜯어놓았지만, 그냥 못 먹은 애 같았다.
멍한 표정으로 올라오는 천오의 다리에는 약간 굵은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그 쇠사슬은 얇은 천오의 발목과 대비되어 더욱 무거워 보였다.
웩
이내 올라와 무대 중앙에 선 천오가 입에서 붉은 액체를 뱉어냈다.
나는 피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랐지만, 잘 보니 토마토를 다진 거였다.
"와아! 진짜 병약 미소녀잖아!"
"방금 피도 토한 거 봤어? 그 피 내가 사지!!"
주변에 있는 미친놈들이 그 모습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열기가 내 기분을 묘하게 나쁘게 했다.
천오는 멍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그저 서 있었다.
"자자! 그럼 지금부터 병약 미소녀의 구토 쇼 시작하겠습니다!! 룰은 간단합니다! 경매를 열어 낙찰받은 분이 이 병약 미소녀에게 원하는 것을 먹이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인 사내가 천오의 입을 열었다.
"처녀인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손을 들고 큰 소리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처녀는 물론이고 남자와의 접촉이 일절 없는 완벽한 병약 처녀 미소녀입니다!"
천오를 수식하는 말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그럼 저거를 살 수도 있나?!"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물었다.
"물론 돈이 충분하다면 그럴 수 있지만... 생각하시는 것보다 가격이 나가는 소녀입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남자의 말에 주머니에 있는 돈을 매만졌다.
될 수 있으면 평화롭게 해결해야 했다.
이미 나를 노리는 건 공화국 하나로도 충분하니까.
"빨리 시작하지! 후우."
"하하!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남자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1골드! 나는 내 양말을 먹일 거야!"
잔뜩 때 묻은 양말을 든 사내가 신나서 소리쳤다.
그걸 왜 처먹여 시발.
"2골드! 흐흐.."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좆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더러운 열기 속에서 가격은 점점 올라갔다.
주변 사람들이 각각 손에 괴상한 걸 쥐고 천오를 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게 내 기분을 더럽게 했다.
가면에 가려진 내 인상이 점점 찌푸려졌다.
"100골드! 흐흐."
살집 있는 사내가 손을 들고 음흉하게 웃었다. 그 손에 붙은 살집이 흉하게 출렁였다.
"무슨 먹이는 거에 100 골드나 쓰나... 그 돈이면 저기서 엘프 암컷을 살 수 있는 금액인 것을..."
사내의 입에서 나온 100 골드라는 거액에 다른 사람들이 혀를 찼다.
생각보다 큰 금액에 다들 포기하는 눈치였다.
"닥쳐라. 그런 풀뿌리 년들과 병약 미소녀를 비교하지 말라고! 숲에서 할 것 없어서 교미만 하는 그 풀뿌리 년들과 병약 처녀 미소녀는 그 가치가 다르니까!"
사내가 주변의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입에서 침까지 튀겨가며 소리쳤다.
"이 내 정액과..."
사내가 이상한 고무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고무 안에는 꺼림칙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꾸욱.
키아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내 잔고가 얼마 있는지 되새겼다.
있나? 잘 모르겠는데.
몰라 일단 지르고 생각하자.
"200 골드."
나는 손을 들어 말하며 사내의 말을 잘랐다.
200 골드?!
주변에 있는 놈들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다.
"사저 여기 있어요. 갔다 올게요."
키아나에게 부드럽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검 손잡이를 매만지며 무대로 올라갔다.
무대 위에 있는 남자는 별 볼 일 없었다.
문제는 그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
꽤 까다로울 듯했다.
"와! 200 골드!! 더 없나요?! 과연 이분은 병약 미소녀에게 무엇을 먹이고 싶어서 200골드나 되는 거금을 투자하셨을까요?! 정말 기대됩니다!"
남자가 과장되게 말하며 나를 가리켰다.
"흠.. 구매는 얼마야?"
무대에 올라가 남자를 보며 물었다.
"음 구매라면... 저희가 꽤 많은 값을 지불하고 데려왔거든요. 그래도 손님이 200 골드로 낙찰하셨으니까 상품성이 떨어질 테고... 그런 걸 고려하면 아마 300 골드는 주셔야 하지 않을까?"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식당 주인이 받은 돈은 2골드였다.
얼마를 헤쳐 먹는 거야.
미친 새끼들이네.
"2 골드인 걸로 아는데 말이야."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올라 나도 모르게 눈이 찡그려졌다.
"그거는 잘못된..."
"잠깐. 어이 너 200 골드 있는 거 맞아?"
여자가 당황한 남자를 막고 늘씬한 다리를 움직여 다가왔다.
나는 그녀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한 발자국만 더 오면 좋겠다고 생각한 위치에서 여자가 멈췄다.
생각보다 감이 좋은 듯했다.
"제가 학생이라. 학생 할인 없나요?"
예상외의 전개에 무대 아래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호호! 학생 할인이라니.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학생이 이런 곳을 오면 안 되지."
여자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이 내 시선을 잡았다.
"야박하네요. 자라나는 새싹을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등쳐먹을 생각만 하다니."
거리를 다시 쟀다.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자라나는 새싹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클 만큼 큰 것 같은데? 꼬마야 실력은 제법 괜찮은 듯한데... 사회 경험이 없나 보구나?"
여자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충분한 거리였다.
"그렇게 건방지게 살면 오래 살 수 없어요. 여기는 암흑 시장이야 꼬마야."
가면 아래로 드러난 여자의 붉은 입술이 호선으로 휘었다.
"아 그래요? 암흑 시장인지 몰랐네요. 근데 저 아이 제 건데 돌려주시죠?"
볼에 닿은 여자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흐음 미안하지만 내가 이미 사서 말이야. 내 것이거든."
여자의 입꼬리가 삐쭉 올라갔다.
"그럼 그쪽은 제가 아까 길 가는 사람에게 40 실버 주고 샀으니까 제 거네요? 사회 경험이 없어서 조금 비싸게 산 것 같은데... 이왕 샀으니까 써줄게요. 벌려봐요."
나는 이죽거리며 천천히 여자의 손을 밀어냈다.
내 욕지기에 가면 아래로 드러난 여자의 입꼬리가 굳었다.
주변에 무거운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남자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40 실버면 너무 적게 주고 산 것 같은데.. 그래도 내 것에 박고 감격해서 운 남자가 제법 있거든. 100 골드는 줘야 하지 않을까?"
여자가 손을 아래로 내리며 중얼거렸다.
"아 그래요? 아무리 봐도 이미 쓸 만큼 써서 허벌일 것 같은데... 실제로 보니 40 실버도 많이 줬다는 생각이 드네요. 쩝."
여자의 손이 허리띠를 잡았고 나는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꼬마야 너가 잘 모르나 본데. 그 검 뽑으면 인생이 많이 고달파질 거야. 우리에게 찍히면 제국 제일검 정도가 되지 않는 이상 살기 힘들거든."
허리띠를 잡은 여자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여기서 미친 노망난 노인네가 왜 나와.
호흡을 깊게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시간이 약간 느려졌다.
"..어때? 10 골드 줄 테니까 이것 좀 먹어 보겠나? 입술밖에 안 보이지만 오지게 이쁠 것 같은데 말이야 흐흐."
아까 경매에 진 사내가 키아나에게 흉한 물건을 내밀고 있었다.
나를 뚫어지라 보고 있는 키아나의 눈에서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이미 키아나는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참는 듯했다.
"동무!! 에이든 동무!! 저 잡것들이 환불 안 해준다고 합네다!! 이거 순 사기꾼 소굴이 따로 없습네다!!"
반대쪽에서 이지수의 외침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까와 같은 가방을 메고 있는 이지수와 김종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그 많은 폭탄을 환불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이번에는 멍하니 서 있는 천오를 살폈다.
어느새 천오는 고개 들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흐리멍덩했던 천오의 눈동자에 감정이 깃들며 굳어있던 천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굳이 천오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천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천오는 나를 보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시발 지금 그러고 있을 때냐고.
그 답답한 모습에 열이 확 뻗쳤다.
"여기는 암흑 시장이야 애송이. 지금 그 검을 뽑으면 평생 잠들 때마다 누가 목에 검을 찔러넣을까 걱정해야 하고 물을 마실 때마다 독 걱정을 해야 될 거야. 또한 낯선 여자를 안을 때 보지에 칼이 들어 있을까도 걱정해야 하지."
여자가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말들을 늘여 놓으며 내 정신을 흩트려놓았다.
여자 뒤로 수십 명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그 앞에는 아까 내려간 남자가 있었다.
그들 모두 각자 흉흉한 기세를 뽐내는 게 상대하기 제법 까다로울 듯했다.
이거 또 좆됐네.
검 손잡이를 잡은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기운을 돌리며 다시금 상황을 확인했다.
그냥 여기 있는 새끼들이 다 좆 같았다.
2골드에 사놓고 300 골드 내놓으라는 저 도둑놈 새끼들도 좆 같았고.
헐떡이며 키아나에게 들이대고 있는 돼지 새끼도 좆 같았다.
의지 없이 그저 떠다니는 천오도 좆 같았고.
별 좆같은 이유로 나를 협박하는 여자도 좆 같았다.
다굴치려고 수십 명이 몰려오는 것도 좆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한 좆같음에 손에 힘이 들어가며 기운이 빠른 속도로 돌았다.
검을 뽑으려는 순간 스칼과 여자의 경고가 다시금 떠올랐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피를 파는 자들'은 평생 나를 낙인처럼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피를 파는 자들'은 실체가 뚜렷한 공화국과 달랐다.
그런 걱정들이 내 손을 붙잡았다.
소년이 언제부터 뒤를 신경 썼다고 그러나?
루나검의 웃음기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뭐래 시발 내가 얼마나 사려 깊은데.
검이라 그런지 좆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뒤를 생각한다는 사람이 제국의 황녀에 질내 사정을 실컷 했나? 크하하하!
밖에 싸는 건 교미왕의 선택지에 없어.
그리고 케이트도 별말 안 했단 말이야.
암묵적 동의 몰라?
뒤를 생각한다는 놈이 악마의 주둥이로 뛰어들었나.
그 이야기는 또 왜 꺼내는 거야 시발.
그때는 선택지가 없었잖아.
뒤를 생각한다는 놈이 공화국을 부술 생각을 하나? 푸하하하! 소년은 언제나 생각 없이 살았네. 한마디로 지 좆대로 살았다 이거지.
기왕 말할 거면 순화시켜서 말하지?
포부가 크다. 담력이 강하다. 이런 좋은 말들 놔두고 좆대로라니.
듣다 보니까 좀 섭섭하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고민은 나중에 하고.
그렇게 살다가 지금 이 꼴이 된 거 아닌가?
매 순간 선택이 최악으로 치달았고 말이야.
그럴지도.
그렇군.
그런데 마음은 편하지 않았나?
그럴지도.
우습게도 검의 말에 머리가 명쾌해졌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생각하고 살았다고.
기운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내 의지를 돋궜다.
기운이 회전할수록 내 의지가 뚜렷해졌다.
그냥 세상이 좆 같았다.
기운을 돌리던 나는 다시 천오와 눈이 마주쳤다.
천오의 큼지막한 눈이 내게 묻는 듯했다.
그에 나는.
"닥치고 눈 감아."
천오가 내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천오의 입꼬리가 전보다 더 올라갔다.
"꼬마야? 겁에 질린 거니?"
여자가 붉은 입술을 삐쭉 올렸다.
죽이기엔 아까운 가슴인데 말이야.
미안하게 됐어.
"비부바바!!!!!!"
나는 큰소리로 외치며 루나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비부바바?"
앞에 있는 여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내 몸처럼 느껴지는 기운들이 맹렬히 회전하며 온몸을 돌아다녔다.
팔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어린 시절 강자들에게는 다들 독창적인 고유기가 하나씩 있다고 읽었다.
물론 흔한 영웅서기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지만, 어린 내게는 진실로 느껴졌다.
검강을 피운 이후부터 나는 나만의 고유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아니면 도무지 미친 노인네에게서 살아나갈 방법이 없어 보였기에.
고유기란 각자 신념의 표현이었다.
각자의 일생을 꿰뚫는 염원을 담은 것 그게 고유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염원을 갈고 닦아 내 고유기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까지 쓸 기회가 없었지만, 상대가 방심하고 검이 검집에 들어 있는 지금.
내 고유기를 쓰기에 완벽한 상황이었다.
무릎을 굽히며 상체를 숙이고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으며 무게 중심을 움직였다.
검이 무거워졌고 내 입꼬리는 올라갔다.
고유기.
미친 노인네 양로원 보내기
끄드드드득
루나검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번개처럼 뽑혔다.
여자가 눈을 깜박이기도 전에 루나검이 여자의 가슴 부분을 수평으로 베어 넘겼다.
상체가 갈라진 여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깜박였다.
"끄윽 미친.. 네 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여자의 붉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몰라 시발. 일단 너는 무사하지 않네."
나는 이죽이며 루나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제야 여자의 상체가 무너지며 붉은 피를 뿜어냈다.
앞에 있던 나는 여자의 피를 흠뻑 맞아 몸이 뜨거워졌다.
그 피가 검은색이 아니라 내 기분이 묘해졌다.
"아!! 비부바바가 아니라 비비바바입네다!! 비비바바!!! 혁명이다!! 혁명이야! 비비바바!"
흥분에 가득 찬 이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쾅쾅쾅!!쾅!콰아아아앙!
그 뒤에 이어지는 폭탄 터지는 소리가 귀를 멍하게 했다.
문제는 그 터지는 소리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이어지는 폭발에 두꺼워 보였던 실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다가오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
"비비바바! 비비바바다! 으헤헤헤!!! 혁명 발싸!! 혁명이다!!"
이지수가 마냥 해맑게 웃으며 폭탄을 계속해서 멀리 던졌다.
"그만!!!..."
말리려는 찰나 천장에 균열이 쩌저적 가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짙은 균열이 천장에 생겼다.
'자네가 암흑 시장에 나타났다? 뻔한 결과지.'
그 모습에 스칼이 도망가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애미 시발... 진짜 터뜨려 버렸네.
또다시 최악으로 치달은 결과에 나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사연이 있다니까 사연이.
아직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천오를 황급히 잡아끌어 등에 업었다.
"꽉 잡아."
내 말에 천오가 내 목덜미를 꽉 안았다.
"사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주변을 정리한 키아나가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양손에는 이지수와 김종인이 들려 있었다.
"혁명! 혁명! 동무!! 저 보지가 찌릿찌릿합네다!!"
키아나에게 목덜미를 잡힌 이지수가 풀린 눈으로 소리쳤다.
이지수의 하체에서 떨어지는 물은 애써 못 본 척했다.
꺄아아악
으아아아악!!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제."
옆에 다가온 키아나가 애들을 내려놓고 내 옆에 붙었다.
키아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시발. 어쩌다 또 이렇게 됐는지."
욕지기를 내뱉으며 루나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게 있나. 네 놈이 건드리는 것은 늘 엉망이 되지 않았나. 크하하하.]
너 시발 묘하게 신나 보인다.
[크흠 소년이 하는 건 매번 끝이 이랬던 것을. 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다 죽을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하구만!]
너도 시발 쟤랑 적당히 놀아.
두꺼운 천장에서 모래가 떨어지며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부디 천장이 두껍지 않기를 바라며 기운을 폭발적으로 돌렸다.
근데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동기가 좀 더 필요해.
절실한 동기가.
그때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천장을 보고 있는 키아나가 보였다.
그리고 알차게 봉긋한 키아나의 가슴도.
부족한 동기를 채울 방법이 생각났다.
"사저. 여기서 나가면 가슴 만지게 해줘요."
"사제?!"
내 물음에 키아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제끼리 그럴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 키아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그런 거야? 원래 이상한 게 아닌가? 사제끼리 그런 걸 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가슴은..."
키아나의 얼굴이 금세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동무!! 저런 노잼녀 작은 가슴 말고 제 가슴을 만지십쇼! 저거는 작아서 만져도 맛없을 겁네다!! 저 이지수! 동무라면 언제든 오케이 입네다!! 물론 다른 것들도 동무가 원한다면 뭐든지..."
이지수가 분홍색 혀를 내밀며 히죽 웃었다.
"아니야!! 만지게 해줄게! 저 이상한 여자 가슴 만졌다가 사제까지 이상해질 수 있으니까! 그냥 내 거... 응응.. 사제라면.."
키아나가 황급히 이지수의 말을 잘랐다.
"약속한 거예요."
부족한 동기가 절로 채워졌다.
여기서 살아나가면 키아나 가슴을 만질 수 있다.
계속해서 되새기니 절로 의지가 샘솟으며 기운이 더욱 폭발적으로 돌았다.
허허... 소년이 전설의 검의 소유자라니 허허... 매번 새롭구만..
닥쳐 집중 깨지니까.
콰아아아앙!!!
흔들리던 천장이 마침내 떨어졌고
"사저 가슴 쫀득 가슴!!!"
기합을 외치며 천장을 향해 몸 안을 가득 채운 기운을 검에 담아 터뜨렸다.
"아악!!"
키아나가 이상한 기합을 외치며 나를 따라 검을 휘둘렀다.
우리가 뿜어낸 기운이 합쳐져 떨어지는 천장을 갈랐다.
'하아 이게 신의 사도라니... 엇?! 켜져 있었네?! 농담이야 농~담! 하하하! 우리 사도 화이팅이야! 나는 우리 사도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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