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Make 드숀 Great Again.
* * *
"하하 자네가 내 호위라니! 느낌이 좋군! 그래!"
털북숭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따로 수련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손에 담긴 힘이 제법이었다.
체격도 단단한 게 애초에 타고난 몸이 좋은 듯했다.
"저도 있습네다! 제가 우두머리 호위를 맡게 되다니! 저 이지수! 출세한 게 분명합네다!"
옆에서 이지수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이지수와 나는 같이 털북숭이의 경호를 맡게 됐다.
천오는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널어두고 둘만 털북숭이를 만나러 왔다.
"그래그래! 자네도 잘 부탁하네! 하하! 시작이 좋으니 같이 술 한잔해야겠구만!"
털북숭이가 침을 삼키며 서랍에서 영롱한 갈색빛의 술병을 꺼냈다.
저거 그거잖아. 존나 맛없던 거.
아직도 그 쓴맛이 혀끝에 남아있었다.
"저희는 임무 중이라 마실 수 없습니다."
"헤헤 술이라니 제가 술은 제... 맞습네다! 임무 중이라 마실 수 없습네다!"
내 거절에 이지수가 황급히 흐르던 침을 닦으며 소리쳤다.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나? 원래 술이 의리를 다지는 데는 즉효약일세."
털북숭이가 술잔을 빙글 돌리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사내새끼랑 의리 다질 생각 없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큼.. 하긴 임무에 대한 의리도 있을 테니 굳이 강요하지 않겠네. 내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야! 하하하!"
털북숭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꼴깍꼴깍 마셨다.
크으.
탄성을 뱉더니 냉큼 또 술잔에 술을 채워서 마셨다.
"그...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닙네까?"
그 모습을 보던 이지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닐세. 내 주량은 다른 사람의 100 배 정도 되거든. 이 병을 다 마셔야 다른 사람들 한 잔 마시는 정도가 되는 걸세. 술은 상대적인 거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한 털북숭이는 가득 차 있던 술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멈췄다.
나는 털북숭이가 술에 취해 기절하기를 원했는데 주량이 비범하다는 게 사실인 듯, 술병을 비우고도 털북숭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음.. 술이 없구만? 이게 마지막 술이라고 하던데... 대업을 앞둔 내게 술을 주지 않다니 너무한 놈들 아닌가?"
털북숭이가 빈 술병을 쪽쪽 빨아먹었다.
"대업을 앞두고 있으니까 안 주는 것 아닙네까?"
이지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지 아니지. 잘 생각해보게. 이제부터 나는 내 판단 하나에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텐데, 내가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나는 술이 절실하게 필요하네. 없으면 미쳐버리고 말 것이야. 그럼 자네의 임무는 실패가 될 걸세!"
"딱히 판단을 내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크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는 저들에게 내 이름을 빌려줬네. 저들이 이제 무엇을 하든 역사에는 내 이름이 기록될 거라 이 말이지. 그런 의미로 내 정신을 위하여 술 몇 병만 가져다주면 안 되겠나?"
털북숭이가 애절하게 나를 쳐다보며 빈 술병을 빙글 돌렸다.
다행인 점은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그 눈빛이 보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만약 나를 보는 눈망울이 보였으면 주먹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저한테 부탁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내성 안의 모든 술은 치웠다고 들었어요."
"크으!! 치밀한 놈들.. 어찌 지도자의 심리를 이토록 고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참으로 목적의식이 뚜렷한 놈들 이구만!!"
그 후로도 털북숭이는 한참이나 이런저런 불평들을 늘어놓았다.
혁명단이 회식을 안 하다는 등, 전담 시녀가 자꾸만 술을 숨긴다는 쓸데없는 불평들을.
"...근데 어쩌다가 혁명단에 합류하신 겁네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지수가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아 혁명단 말이군. 나는 사실 공화당 내에서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네. 처음에는 같이 마셔주던 공화당 사람들도 나를 피하더군. 나는 술친구를 찾기 위해 수도를 돌아다녔고. 소위 말하는 질이 안 좋은 놈들과 어울렸지. 음 근데 술이 없어서 말할 맛이 안 나는구만."
돌아보니 이지수의 얼굴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이거 안 되겠어! 혁명단의 우두머리로서 국민들이 잘 지내는지 확인해야겠구만! 밑의 놈들이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우두머리의 덕목 중 하나이지! 안 그런가? 하하!"
털북숭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냥 뒤통수 때려서 기절 시켜 놓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굳이 지금부터 쥐어박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러죠."
마침 내성 안이 따분하기도 했으니까.
***
"자네는 제국 출신이라 그랬지? 그렇다면 공화국의 맛을 잘 모르겠구만!"
"맞습네다!! 제가 몇 번이나 공화국의 맛을 알려주려 했는데, 자꾸만 거절하는 거 아닙네까!"
이지수와 털북숭이는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외국인에게 자꾸만 본토의 음식을 권하는 건 공화국민의 특성인 듯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시작은 가볍게 묵사발부터 하지. 날씨가 조금은 따뜻하니까 말이야."
털북숭이가 선글라스 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묵사발이라.. 좋습네다! 역시 해 쨍쨍 일 때는 묵사발이 최고입네다!"
그렇게 둘은 나를 끌고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왜 공화국 식당들은 죄다 허름한 거지?
털북숭이는 주문을 하며 술까지 같이 시켰다.
털북숭이가 술에 취해 기절하면 좀 더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굳이 막지 않았다.
"크으 이 맛이 바로 공화국의 맛 아닙네까! 에이든 동무도 한 번 드셔 보십쇼!"
이지수가 먹기 꺼림칙한 갈색의 뭔가를 내게 내밀었다.
"맞네! 이걸 안 먹으면 공화국에 왔다고 할 수 없지!"
털북숭이가 탁한 색의 술을 마셔 넘겼다.
나는 조금 꺼림직하긴 했지만, 이지수가 내민 음식을 받아먹었다. 물렁물렁했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물론 엄지를 올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둘이 뭔가를 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엄지를 들었다.
"크하하! 자네는 명예 공화국민일세!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내 엄지를 보고 털북숭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맞습네다! 아 우두머리 동무! 아까 하던 이야기마저 해주시면 안됩네까?"
이지수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에 든 잔을 돌렸다.
둘 다 술에 취해 기절하면 좋겠네.
아니면 내가 때려서 기절시킬까.
"음?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질 나쁜 놈들이랑 어울리셨다고 했습네다."
"그래, 질 나쁜 놈들과 어울렸지. 사실 그 친구들이 악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그저 먹고살 게 없었을 뿐이지. 끝자락에 내몰렸을 뿐이야. 그리고 고작해야 식당 음식을 훔치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거나 하는 정도였지."
털북숭이가 다시금 술잔을 채웠다.
"뭐 나는 대우가 어찌 됐건 수령의 아들이니 대우가 좋았네. 그래서 나는 먹을 수 있는 걸 최대한 많이 그들에게 가져다줬지. 우리 집에 있으면 썩을 뿐이니까. 아! 실제로 우리 집은 음식을 많이 버렸네. 우리 아버지가 곳간에 쌓아두는 걸 좋아하거든."
털북숭이가 허탈하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술잔을 쥔 이지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우리 집에 남은 음식들을 그들에게 가져다주고. 그들은 내 술 상대를 해주고. 서로 완벽한 거래 관계였지. 그래 누구도 손해 볼 거 없는 관계 말이야."
식당은 떠들썩했지만, 우리 자리만 묘하게 조용했다.
"그들은 점점 더 내게 많은 음식들을 요구했네. 그러다 보니 들고 가기에 내 손이 너무 무거운 거 아니겠나? 문득 귀찮아진 나는 한동안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네. 마침 그때 술 잘 마시는 놈이 하인으로 들어오기도 했고."
"그러다가 한 달 정도 지나니 생각나더군. 그래서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이나 볼까 해서 음식을 잔뜩 들고 찾아갔네. 거기에는 제일 어렸던 아이 한 명만 남아있더군. 황당해진 나는 물었지. 그들은 어디 갔냐고. 그러자 그 어린아이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내게 달려드는 것 아니겠나? 하하 그래서 아이에게 쥐여 뜯겼네."
털북숭이가 슬쩍 선글라스를 내렸다.
복슬복슬한 털과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눈이 선글라스 뒤에 있었고 그 중 왼쪽 눈은 흰자로만 차 있었다.
"참! 이건 비밀일세! 여하튼 나는 일단 아이를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들었네. 뭐 눈이야 두 개니까 하나쯤은 없어도 괜찮겠지 생각하며. 내가 가기 전 그들은 궁핍하긴 했지만,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였어. 하지만 내가 가져다주던 걸 먹다 보니 전에 먹던 음식을 도무지 못 먹을 정도가 된 거야. 사실 그들이 먹었던 건 음식이라기보다는 쓰레기였으니까. 내가 찾아가지 않자 그들은 굶주렸고 이윽고 의문을 품은 거야."
털북숭이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올렸다.
털북숭이의 눈이 다시 선글라스에 가려졌다.
"왜 자기들은 이런 걸 먹어야 하지? 그리고 그들은 꽤 높은 관리의 곳간을 털다가 잡혀서 형장에 목이 걸렸다더군.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말이야. 그래서 그 아이 혼자 남겨진 거고. 그 이후에 나는 '내 잘못인가?' 싶어서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못했네. 그리고 남은 아이마저 관리에게 달려들었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돌아왔지."
크으.
다시금 탁한 술을 마신 털북숭이가 갈색 물렁한 걸 주워 먹었다.
이지수는 식탁 아래로 손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찾아갔네. 늘 우리 곳간은 풍족했으니까 말이야. 이것을 저들에게 좀 나누어주자고. 대부분 버려지는 것들인데 왜 저렇게 쌓아 두느냐고. 내 말에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나?"
털북숭이가 빈 술병을 흔들며 툴툴거렸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짐승이라 베풀면 안 된다더군. 곳간에 쌓아둔 음식들은 식량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라고. 참지 못한 나는 아버지에게 욕지기를 뱉고 뛰쳐나왔지. 아마 그때 내가 사춘기였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 없으니. 그러고 나서 눈뜨니 이곳에 있더군. 대부분 술에 취해 있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말이야. 뭐 여기도 나름 나쁘지 않아."
끄윽
털북숭이가 만족스럽다는 듯 배를 두들기며 말을 마쳤다.
딱히 별다른 감상이 들진 않았다.
저런 일은 제국에서도 흔한 일이니까.
"음 너무 길어요. 다음부터는 그냥 술 마시다가 눈뜨니 혁명단이었다. 이렇게 말해요.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손을 들어 술을 더 시켰다.
"하하하.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머지는 다 핑계일 수도."
털북숭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
이지수는 전과 달리 고개 숙이고 조용히 있었다.
그래 시발 성안인데 무슨 일 있겠어?
나는 둘 중 하나라도 조용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술잔을 들었다.
"음? 자네도 마시려고? 괜찮겠나 임무 중인데 말이야."
"괜찮아요. 저 상남자라 술 잘 마시거든요."
털북숭이의 장난스러운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자고로 상남자라면 의리와 술이 제일 중요한 법이지!"
"그 시발 닥치고 마시면 안 돼요?"
"으음.. 그래도 내가 우두머리인데 욕은 조금... 알겠네!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나!"
하지만 털북숭이는 끝까지 닥치지 않았다.
***
그렇게 우리 셋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식당과 술집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셨다.
털북숭이를 사람들이 알아보는지 돈을 받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즐겁게 했다. 어디를 가도 무료라니.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듯 상황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악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하하! 자네 처음 봤을 때는 인상이 조금 그랬지만... 완전 의리 있는 사내구만!!"
"시발 제 인상이 어때서요? 그쪽은 수염이랑 선글라스만 씌우면 애비도 못 알아보겠구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친구 외모 이야기에 민감하구만! 하하!"
"저 이래 봬도 제법 인기 있어요 시발. 털북숭이랑 다르다니까. 야! 이지수 말해봐 내 인기를!"
"으으 에이든 동무 말입네까! 에이든 동무는 외모보다는 그 단단한 내면이 너무 매력적입네다! 말하다 보니 또 보지가 슬슬 간지럽습네다! 헤헤..."
혀가 잔뜩 꼬인 이지수가 휘청이면서 내 팔을 잡아 자기 가슴에 비볐다.
나는 털복숭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이지수의 가슴을 주물렀다.
이지수가 들뜬 숨을 내뱉으며 내게 조금 더 몸을 문질렀다.
"저 처자도 외모는 별로라고 하지 않나! 하하하!"
"그 시발.. 평균은 된다니까요! 평균은."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사내란 의리만 있으면 된다네!"
"아니 시발 못생기지 않았다니까!"
우리는 투덕거리면서 거리를 걸어 다녔다.
제법 시간이 늦어 이제 거리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자네처럼 의리 넘치는 사내를 만나게 되어 정말 즐겁구만! 주량도 마음에 들어! 하하하!"
털북숭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몸을 휘청였다.
그제야 나는 빈 거리가 을씨년스러운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많이 마신 술이 내 감각을 둔하게 했는지.
아니면 성안이라 나도 모르게 안심하고 있었는지.
나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세를 너무 늦게 눈치챘다.
소년!! 조심하게!
루나검의 목소리가 내 흐릿한 정신을 일깨웠고.
쏴아아아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황급히 기운을 돌렸다.
"시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욕지기를 뱉었고 털북숭이는 그제야 몸을 돌리며 나를 쳐다봤다.
"어? 자네! 처자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구만! 하하! 역시 의리 있는.."
털북숭이가 나를 보며 크게 웃었다.
나는 황급히 검 손잡이를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하자 시간이 천천히 느리게 흘렀다.
어둠 속에서 맹렬하게 쏘아져 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내게 하나, 털북숭이에게 둘, 이지수에게 하나.
나는 집중하며 네 개의 속도를 가늠했다.
속도는 제각각이었지만, 네 개는 동시에 표적에 도착한다.
날아오는 물체가 내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놈이 나를 보며 묻는 듯했다.
너는 무엇을 고를 거지?
이지수가 정신을 못 차리고 몸을 휘청였다.
털북숭이는 아직도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그분은 우리의 명분이네. 그분이 없으면 혁명 자체가 성립할 수 없어.'
김지훈의 말이 떠올랐다.
저 털북숭이가 그렇게 귀하면 시발 나한테 맡기면 안 되지.
나는 이를 악물어 정신을 깨우고 루나검에 기운을 쏟아부었다.
내게 날아오는 것까지 쳐낼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왼발을 내디디면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이지수 앞쪽으로 검을 내밀었다.
가까이 오니 물체의 모습이 보였다.
끝이 뾰족하게 된 짧은 봉이었다.
푸욱
내게 향하던 봉은 내 어깨에 박혔고.
카앙!
이지수에게 향하던 봉은 내 검이 쳐냈다.
봉에 담긴 힘이 얼마나 큰지 검을 잡은 손이 얼얼했다.
"끄으으으으윽!!"
털북숭이가 기이한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쓰러졌다.
나는 후속타를 대비해 어깨에 박힌 봉을 뽑고 신성력을 돌렸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불에 지진듯한 고통이 내 남은 술기운을 물렀다.
꺄르르
내 생각과 다르게 날카로운 기세가 사라졌다.
상대의 목적은 털북숭이의 목숨인 듯했다.
나는 여자의 웃음소리를 기억했다.
"도..동무?! 괜찮습네까?!"
이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그것보다 시발 저거 어떻게 하냐."
이지수의 손을 밀어내고 털북숭이에게 다가갔다.
털북숭이의 심장 부근에 하나, 명치 부근에 하나가 박혀있었다.
봉의 끝에는 메롱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꾸윽 흐으.. 다행이구만 술에 취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아파. 몸이 좀 무거울 뿐이네. 이래서 평소에 술을 게을리하면 안 되는 거지..."
털북숭이가 입에서 피를 뱉어내며 말했다.
누가봐도 가망 없어 보였다.
뒤져가는 털북숭이의 모습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좆 같기는 하지만, 제법 괜찮은 새끼였는데 시발.
"끄으을을... 자네 표정이 볼만 하구만."
털북숭이가 입에서 피가 나오는데도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그 흉한 모습에 몽롱했던 정신이 확 깼다.
'그분은 우리의 명분이네.'
자꾸만 떠오르는 말에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어깨에서 흐른 피가 내 얼굴에 묻었다.
"시발. 존나 튼튼하게 생겨서 좆만한 막대 두 개 박힌다고 죽어요?"
내가 술을 왜 마셨지 시발.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전에 눈치챘거나.
진짜 개 좆같네.
왜 나는 늘 최악으로 달려가지 못해 안달났냐고.
"끄으읍... 좆만하다니 이제야 처녀들의 심정을 알겠구..."
털북숭이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마지막 말조차 좆같은 말이었다.
"...에이든 동무 우리 큰일 난 거 아닙네까? 전쟁도 시작했다고 하던데 여기서 혁명군의 명분이 없어지면..."
이지수가 말끝을 흐리며 초조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게 방금의 공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그 전쟁이라는 거 취소할 수는 없나.
아니야, 그러면 내가 수배되잖아.
아니 그 전에 혁명단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미지수였다.
이거 시발 진짜 어떻게 하지.
또다시 꼬인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기 뭡니까! 이런 야심한 밤에!"
그때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달려왔다.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달빛 아래에 얼굴이 드러났다.
"...에이든? 여기서 뭐 하고.. 얼굴은 또 왜 피가 으악!! 시체다!!"
경비대원의 갑옷을 입고 있는 드숀이었다.
아니 이 새끼는 여기서 또 뭐 하고 있는 거야.
"드숀 시발 또 너냐?!"
드숀의 등장에 입에서 욕지기가 나왔다.
시체를 본 드숀이 땅에 주저앉아 구역질했다.
진짜 지랄 났네 시발.
"시발 좀 일어나봐요."
나는 착잡한 마음에 털북숭이를 발로 툭툭 쳤다.
하지만 내 기대가 무색하게 털북숭이는 미동도 없었다.
진짜 저 좆같은 털이랑 선글라스.
시발 죽을 때까지 쓰고 있네.
어? 수염이랑 선글라스?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빠르게 굴리며 드숀을 훑어봤다.
드숀은 좆밥에서 탈출하려고 나름 훈련을 한 모양인지 단단한 체격이었다.
그런데 그 체격이 털북숭이와 비슷했다.
"야, 너 여기 누워봐."
"어..어?! 왜?! 싫어!"
"누우라고."
잠시 저항하던 드숀이 몇 대 쥐어박자 냉큼 털북숭이 옆에 누웠다.
드숀은 피 때문에 꺼림직한지 자꾸만 꿈틀거렸다.
미세하게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드숀과 털북숭이의 키는 비슷했다.
체형도 비슷하고, 아마 수염과 선글라스만 옮기면 거의 똑같이 보일 것이다.
애비도 몰라 볼 거야. 진짜로.
"오! 시발 이거다."
내 영특한 생각에 내가 감탄했다.
"드숀.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역시 언제나 살길이 있다니까.
"싫어.. 싫다고! 너랑 엮이는 건 뭐든 다 싫어. 제발 나를 내버려 둬.."
애절한 드숀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출세시켜줄 테니까."
혹시 모르니까 눈도 찔러야 하나?
아닌가. 어차피 선글라스 벗으면 들키니까 소용없나.
나는 고민하며 털북숭이의 수염을 붙잡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