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54화 (154/233)

〈 154화 〉 소금이 된 털북숭이.

* * *

수염을 뜯기 보다는 검으로 피부를 얇게 긁어서 뜯었다.

루나검이 날카로워 무리 없이 뜯어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털이 없어진 털북숭이는 그냥 애꾸눈으로 바뀌었지만, 어차피 죽었으니까 신경 안 쓰겠지.

뜯고 나서 수염을 펼치니 마치 상점에서 파는 흉한 장난감같이 보였다.

"싫어! 싫다고! 따가울 것 같잖아!"

"이지수! 잡아."

"동무! 남자답게 다른 사람이 되는 겁네다! 이런 건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닙네다! 이익! 가만히 있으십쇼! 사내답게 운명을 받아 들이는 겁네다!"

나를 보고 배운 이지수가 발악하는 드숀을 몇 대 쥐어박으면서 진정시켰다.

무릎 꿇린 드숀의 얼굴에 수염을 가져다 대고 손바닥에 기운을 운용했다.

"따가워!따가워! 존나 따갑다고 이 평민 새끼야!!"

"어허! 같은 혁명군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닙네다."

"이지수! 너는 아까부터 왜 자꾸 주먹질이야! 너까지 왜 그래!"

뜨거운 기운이 돌자 수염이 감쪽같이 드숀의 얼굴에 붙었다.

손을 떼도 수염은 자연스럽게 유지됐다.

나는 선글라스를 드숀에게 씌우고 털북숭이가 쓰고 다니던 괴상한 투구까지 드숀에게 씌웠다.

그러자 드숀은 어디 갔는지 완전한 털북숭이가 앉아 있었다.

"와­ 이건 김두환 애비도 속겠습네다."

이지수가 작게 박수치며 감탄했다.

"따갑다고! 그리고 밤인데 선글라스는 왜 씌우는 거야!"

툴툴대는 드숀을 몇 대 쥐어박아서 조용히 시켰다.

"저거는 어떻게 합네까?"

이지수가 털북숭이의 시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 이제 털북숭이가 아니지.

이지수가 애꾸눈을 가리켰다.

"치워야지. 어디다 버려야 할까."

사람을 죽이기는 했어도 시체를 치우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대충 토막 내서 밖에다가 버리면 되지 않겠습네까?"

"경비대랑 마주치면 애매해질 것 같단 말이지."

"경비대? 드숀 동무가 경비대 아닙네까?"

"왜 나를 그딴 눈으로 보는 거야! 나보고 시체까지 치우라고? 이 악마 같은 놈들아!"

우리가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자 드숀이 발작하며 손가락질했다.

"드숀. 잘 생각해봐. 여기 있는 시체가 김두환이야 김두환. 김익한 아들이라고."

"그... 그런 사람이 왜 뒤진 거야."

"공화국 입장에서 너는 사형 직전에 탈출한 탈옥수일 뿐이야. 만약 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 너는 평생 공화국에게 쫓기게 된다니까."

"그러니까 왜 내가 쫓겨야 하냐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네가 김재환을 죽였잖아. 생각 안 나?"

"내.. 내가 언제! 나는 사람을 죽인 적 없어!"

"허허. 이 뻔뻔한 새끼 좀 보게. 벌써 형장에 눕혀져 있던 걸 잊은 거야?"

"... 그래서?"

드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지금 김두환이 죽은 게 알려지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갈 거고 그러면 너는 평생 공화국에게 쫓기게 되겠지. 그런 너를 위해서 내가 선택지를 하나 더 만들어 준 거라니까."

나는 멍청한 드숀을 위해 인내력을 발휘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선택지? 무슨 선택지? 죽은 사람 피부를 뒤집어쓰고 다니라는 선택지?! 싫어! 싫다고!"

"네가 김두환이 돼서 공화국을 먹는 거야. 어때? 완벽하지?"

에이든이 검 손잡이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드숀은 입 끝까지 나온 욕지기를 애써 참았다.

"공화국의 우두머리로 만들어 주다니. 이런 친구 어디 없다."

나는 드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자­ 그럼 목소리를 낮게 깔아봐."

"... 이렇게?"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던 드숀이 목소리를 깔았다.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낮게. 그리고 더 걸걸하게."

"그럼 이렇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드숀의 목소리에 나는 털북숭이의 목젖도 갖다 붙일까 고민에 빠졌다.

저걸 떼어다 붙여 놓으면 꽤 비슷해지지 않을까.

"잠깐잠깐! 나는 김두환이다. 김두환이야."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드숀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짙게 깔면서 말했다.

"오오! 제법 비슷합네다! 조금만 더 내리면 될 것 같습네다!"

"... 이렇게? 비슷한가­."

드숀이 이지수를 잠시 노려보고 목소리를 더 낮게 깔았다.

그러자 이제는 제법 털북숭이와 비슷한 목소리가 나왔다.

"오­ 다행이네. 목젖까지 안 붙여도 돼서 말이야. 그렇게 계속 유지하는 거야. 항상 반말을 유지하고. 막 의­리 이런 거 좀 섞어주고. 좀 술 취한 사람처럼 말해봐."

"목젖을 왜.. 크흠­. 나는 의리 있는 김두환이네! 하하하! 술이 부족한데 어디 없나­?"

내 말에 드숀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워낙 털북숭이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녀서 그런지 벌써 제법 비슷하게 들렸다.

"좋아. 더 연습하고. 이거 어디 버릴 데 없어?"

"...제길. 이게 무슨 짓인지. 시체 보관소가 따로 있으니까 따라와."

드숀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뭐해. 안 오고?"

나와 이지수가 따라가지 않고 멀뚱히 쳐다보자 드숀이 인상을 썼다.

"..시발 개자식들. 이지수 너도 그렇게 안 봤는데 개자식이야."

우리가 털북숭이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드숀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저희 부모를 욕보이지 마십쇼! 저는 어엿한 성인 남녀의 교미로 태어났습네다! 제 혁명 주먹이 참지 않을 수도 있습네다!"

이지수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대답했다.

결국 드숀이 털북숭이의 시체를 들었고 그제야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드숀은 외곽에 있는 한 큰 건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건물에 가까이 가자 무언가 끔찍한 냄새가 풍겼다.

"이걸로 코 막아. 그날 이후로 부지런히 시체를 태우고는 있지만, 워낙 시체가 많았으니까."

드숀이 우리에게 코마개를 건네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흰 천이 덮어진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우리는 말 없이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갔고 거기에는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화로가 있었다.

드숀은 익숙하게 두꺼운 화로 문을 열고 무언가를 쇠꼬챙이로 끌어냈다.

붉게 열기를 뿜어내는 철판이 나왔는데 그 위에 흰색 가루들이 뿌려져 있었다.

드숀이 철판 위에 털북숭이의 시체를 올리자 고기 굽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향긋한 냄새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원래는 가족이 한마디씩 하지만, 지금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한마디씩 해.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고."

드숀이 조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돌아봤다.

"딱히 할 말 없는데."

"저도 없습네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입네다."

만나봤자 하루 본 게 다인데 정이 들었을 리 없었다.

죽은 사람 붙잡고 말하는 게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우리는 멀뚱멀뚱 드숀을 쳐다봤다.

"...개자식들. 고생하셨습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저런 연놈들 만나지 말고 평안하게 지내세요."

작게 욕지기를 내뱉은 드숀이 털북숭이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쇠꼬챙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화로 문을 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숀의 털 끝쪽이 살짝 불에 그슬렸다.

"그럼 이제 끝?"

시체 치우는 게 생각보다 쉬웠다.

"...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아까 말했잖아. 너는 이제부터 김두환이 되는 거야. 진짜 김두환은 저기 안에서 소금이 됐으니 들킬 걱정도 없지."

"저건 소금이 아니라 뼛가루다 뼛가루. 근데 들킬 걱정이 없다니. 주변 사람들이 알아볼 게 분명하잖아."

내 말에 드숀이 발끈해서 언성을 높였다.

"아니 아마 모를걸? 혁명군은 김두환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으니까. 자 다시 목소리를 깔아봐."

우리는 그 후로 한참이나 그 더운 곳에서 김두환에 관해 이야기했다.

큼지막하던 털북숭이가 소금으로 완전히 변했을 때쯤 드숀을 주먹으로 쥐어박아도 굵은 목소리의 비명이 나왔다.

밖으로 나와서 문 옆에 있는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정말 더럽게 덥습네다 저기."

이지수가 수건으로 가슴 사이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얼마나 땀이 많이 났는지 옷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우리는 건물을 나와 내성으로 돌아갔다.

달은 이미 높게 떠서 중간에 걸려 있었다.

"긴장하지 마. 절대 안 걸리니까."

긴장한 듯 이상하게 걷는 드숀의 옆구리를 찔렀다.

"의­리! 알았네."

반사적으로 대답한 드숀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일단 홀로 먼저 갔다.

홀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드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의­리! 고생들 많구만! 허허­."

드숀이 그들에게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드숀은 의외로 내 생각보다 더 비슷했다.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다만, 김지훈만이 꺼림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수고했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김지훈이 박수를 치며 사람들은 내보냈다.

사람들은 김지훈의 말에 벌떡 일어나며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문 좀 잠그게."

사람들이 다 나가자 김지훈이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넵!"

경쾌하게 대답한 이지수가 냉큼 달려가 문의 고리를 걸었다.

"... 김두환 님은 어디 있나."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여기 있잖아요. 자! 김두환!"

"의­리! 내가 김두환이라네! 하하! 어디 남는 술 없는가?"

드숀이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손을 휘저었다.

"개 같은 장난 그만하고! 김두환 님은 어디 있냐고!"

김지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시발.

티 나나?

드숀을 확인했지만, 지금의 드숀은 털북숭이 그 자체였다.

진짜 애비도 몰라 볼 텐데.

"어디 있냐고!"

김지훈이 다시금 내 대답을 재촉했다.

"그.. 소금이 됐는데요."

"소금이 아니라 뼛가루라니까!"

내 중얼거림에 드숀이 습관적으로 말을 정정했다.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드숀이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소금이나 뼛가루나 시발.

"아이고­ 미친... 시발... 뼛가루가 되다니."

김지훈이 몸을 휘청이며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러니까 시발 저는 경호해본 적 없다고 했잖아요. 전 분명히 말했어요."

따지고 보면 경호 경력이 없는 내게 일을 맡긴 김지훈의 잘못도 있었다.

"경호 경력이 없다고 하루 만에 뼛가루를 만들어 버리나?! 정도가 있어야지 정도가!! 왜 멀쩡한 사람이 반나절 만에 뼛가루가 돼서 오느냐 이 말이야!!"

김지훈이 눈을 벌겋게 뜨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비슷한 것도 구해오고 얼마나 책임감 있어요. 다른 애들이었으면 그냥 도망갔을걸요?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책임한데... 책임감이 투철한 저라서 그나마 비슷한 거라도 구해온 거예요. 자 봐봐요­ 얼마나 비슷해요."

듣다 보니 자꾸만 내 잘못으로 모는 게 억울했다.

나는 최선을 다한 건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아이고­ 아이고.. 저런 놈한테 경호를 맡기다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사람 새끼가 아니었어­."

넋을 잃은 김지훈이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저는 김지훈 님의 판단에 실망했습니다. 보기보다 무능하십니다."

나는 분명 경고했어. 경호 경력 없다고.

으드득­

김지훈이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몸을 뒤틀었다.

나는 그 모습이 제법 우스워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그러자 김지훈이 몸부림을 멈추고 잔뜩 붉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쟤도 좆밥이라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후우­ 그래.. 일단 벌어진 일이니까. 그럼 김두환 님이 죽은 사실을 아는 이가 또 있나?"

김지훈이 숨을 깊게 내쉬며 물었다.

"아니요. 제가 철저히 비밀로 했습니다. 여기 세 명이랑 김두환을 죽인 암살자 하나가 다입니다. 암살자는 못 잡았어요. 생각보다 재빠르더라고요."

나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비밀 엄수는 제대로 했지.

이런 중한 일에는 비밀 엄수가 최우선이니까.

신나서 떠벌리고 다니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었다.

"암살자..? 암살자!! 암살자가 알면 다 아는 거잖아!! 이 미친 새끼야!!!"

김지훈이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쾅­하고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거­ 왜 욕을 하고 그럽니까. 이게 다 경호 경력이 없는 제게 일을 맡긴 김지훈 님의­..."

애초에 초보자한테 그런 중요한 역부터 맡긴 게 잘못이지.

신입이 처음부터 일을 잘하면 누가 경력자를 뽑겠어.

"미친 새끼! 개새끼! 쓰레기 새끼! 백정 새끼! 어떻게 저런 놈이 최상급에 준하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아아­ 정녕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김지훈이 내 말을 자르며 발작하듯 욕지기를 뱉어냈다.

김지훈의 욕지기에 순간적으로 화가 올라왔다.

사람이 시발 실수를 할 수도 있지.

다 그렇게 경험이 쌓이는 건데.

"뭐­ 이 시발?! 이게 서아 씨 애비라고 봐줬더니!! 일로 와! 이 좆밥 새끼야! 오늘 상견례 하자!!"

나는 소매를 걷으며 소리쳤다.

"아악! 에이든 동무! 냉철한 동무가 참으십쇼!! 여기서 저 사람까지 죽이면 답이 없습네다!!"

이지수가 온 힘을 다해서 뜯어말렸다.

그렇다고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얘는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으음. 의­리가 부족한 상황이군. 다들 술이나 한 잔씩 하면서 의­리를 쌓아 보겠나?"

돌아가는 상황에 드숀이 뒷걸음질 치며 중얼거렸다.

"저저! 머저리 같은 새끼는 도대체 누구야!!"

이제는 입에 게거품까지 문 김지훈이 드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 나는 김두환이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네! 하하! 의리!"

드숀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으악!! 내가 미쳤지 미쳤어! 저런 새끼한테 이런 중요한 역할을 맡기다니! 실력이 최상급이면 뭐해! 쓰레기 같은­.. 아악!!"

"에..에이든 동무!! 죽이지 말고 쥐어패기만 하십쇼! 죽이면 일이 번거로워 집네다!!"

김지훈의 욕지기를 참지 못한 나는 붙잡는 이지수를 밀어내고 김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악! 내가 상관이야! 상관이라고!

시끄럽던 놈을 몇 대 쥐어박으니 다시 조용해졌다.

역시 사람을 진정시키는 데는 주먹이 최고라니까.

"후우.. 후우.. 내가 너무 흥분했었군. 자네에게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

눈에 멍이 든 김지훈이 괜히 폼을 잡으며 머리를 쓸었다.

"잘 참았습네다 에이든 동무! 죽이지 않다니 훌륭한 인내심이었습네다!"

이지수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애초에 죽일 생각 없었어 미친.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오히려 잘된 걸 수도 있어. 김두환 님은 통제 불능이었으니까. 이 친구는 확실한 거지?"

김지훈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예. 얘가 그 이번에 수도에서 구출한 사형수 중에 한 명이었어요."

"하핫! 나는 김두환­... 젠장."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드숀이 습관적으로 자기소개를 하다가 멈췄다.

"후­... 그럼 김두환 님을 암살한 쪽이 알고 있을 테니 계획을 좀 더 빨리 진행해야겠군."

김지훈이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정리하며 드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리고 제법 비슷하기도 해. 작은 습관들만 손보면 괜찮을 수도 있겠어."

"그렇죠? 제가 가끔 사고를 치긴 하지만, 뒷수습은 제대로 한다니까요."

"자네는 제발 입 좀 닫아주게.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내가 제 명에 못 살 거 같아."

김지훈의 말에 나는 슬쩍 주먹을 올렸고 김지훈이 눈에 띄게 움찔하며 헛기침했다.

그 후로 김지훈은 드숀에게 김두환의 이런저런 습관들을 교육했다.

김지훈이 서랍에서 뭔가 액체와 이런저런 것들을 꺼내 드숀에게 붙어 있는 수염들도 제대로 고쳤다.

전에는 미묘하게 이상했던 수염이 이제는 완벽하게 드숀에게 붙었다.

"자네는 이제부터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김두환일세. 자네에게 공화국의 미래와 많은 생명이 걸려 있다네. 부탁하네."

김지훈이 드숀의 손을 붙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드숀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텁텁했지만, 억지로 대답했다.

옆에서 주먹을 흔들고 있는 이지수와 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에이든이 두려웠기 때문에.

***

"자­ 여기 연설문이네. 최대한 빨리 외우게. 대놓고 읽는 것은 진정성이 없으니까 말이야."

드숀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밤새 김지훈에게 붙잡혀 습관들과 이런저런 것들을 듣느라 거의 잠을 자지도 못했다.

비몽사몽인 드숀이 김지훈에게 세 장 정도의 분량인 연설문을 받았다.

'이거를 어떻게 단번에 외우라고.'

드숀은 욕지기가 나왔지만, 애써 삼키며 연설문을 읽었다.

"세 시간 뒤니까 그때까지 외워둬야 하네. 그럼 나는 나머지 처리를 하고 오겠네."

말을 마친 김지훈은 서둘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도대체 뭐가 세 시간 뒤에 시작이라는 건데.'

드숀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연설문을 읽었다.

하지만 이미 하룻밤을 새운 드숀이 단시간에 세 장 분량의 연설문을 외울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드숀은 깜박 잠이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연설대 앞이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사이의 기억이 없었다.

"그럼 잘 부탁하네. 혁명단의 개전을 알리는 연설이니까 말이야."

김지훈은 아직 멍한 눈빛의 드숀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드숀은 눈앞에 보이는 연설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고급스러운 연설대 앞에 서자 성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무장이 돼 있었다.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수염 덕분인지, 눈에 쓴 선글라스 덕분인지 드숀은 수많은 사람 앞에서도 긴장되지 않았다.

혁명단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작은 의문을 품으며 드숀은 목을 가다듬었다.

연설문의 첫 문장이 뭐였더라.

아버지의 과오 어쩌고저쩌고 였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드숀이 조용히 있자 사람들은 더욱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드숀은 그들의 눈에 담긴 열망과 열기 그리고 두려움을 읽었다.

그중에서 몇몇 사람의 얼굴이 낯익었다.

같은 경비대원 그리고 같이 형장에 올랐던 인물들.

그들을 보니 그날의 감정이 다시금 상기됐다.

아마 이들도 두려워하고 있으리라.

부족한 자신이 이들의 앞에 서 있어도 되는 인물일까.

문득 든 생각에 드숀은 회의감이 들었다.

얼굴에 붙어있는 수염이 간지러워졌고 눈에 쓴 선글라스가 무거워졌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밝히고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던 중 드숀은 양쪽에 여자를 끼고 있는 에이든을 발견했다.

어제 봤던 가슴이 큰 여자와 혁명단의 간부인 여자.

그리고 무언가를 토하고 있는 귀엽게 생긴 여자까지.

에이든은 한 명으로도 과분한 미인을 자그마치 세 명이나 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드숀은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왜 저 백정 새끼한테 저런 미인들이 붙어 있는 거야?

'네가 김두환이 돼서 공화국을 먹는 거야.'

드숀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래. 저런 백정 새끼도 양쪽에 여자들을 끼고 다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거 있나?

나도 엘프와 이대일로 교미한 사나이라고.

결심을 내린 드숀은 연설대 위에 있는 음성 증폭 장치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속으로 말을 고르고 골랐다.

형장에 섰던 경험과 사형수들의 과거 이야기들을 되새겼다.

'김두환 님은 긴장되면 턱을 쓰다듬는 버릇이 있네.'

드숀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여자 끼고 다닐 거야.

양옆에 미인 끼고 가슴 주물럭거릴 거라고.

"여러분은 오랜 시간 굶주렸습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드숀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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