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천오 브레스.
* * *
드넓은 회의장에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베레모를 눌러 쓴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굳은 표정의 김익한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일어나 인사를 깊게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회의장을 둘러본 김익한이 손짓을 하자 옆에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경계 부근에서 이루어진 제국군과의 첫 교전에서 저희 쪽이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었습네다. 이에 대한 요인으로는 생각보다 강대한 제국군의 무력과 신교 측의 합류로 판단됩네다."
사내가 김익한의 눈치를 보며 말을 빠르게 이었다.
사내의 보고에 김익한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는 담배를 구겼다.
'도대체 신교들이 왜 전쟁에 참여 한 거지?'
그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신교들이 인간끼리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교들이 뜬금없이 김익한이 악마라고 선언하고 전쟁에 참여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그것에 대해 조사를 보냈지만, 모두 연락이 끊겼다.
제국과 신교 내부에 심어둔 첩자들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죄다 사라졌다.
아마 죽었겠지.
그들에게 들어간 돈을 생각하니 뒷맛이 씁쓸했다.
"왕국 연합은."
김익한의 목소리가 절로 까칠해졌다.
"스티루마 측은 참전을 표했습네다. 대신 상당량의 액수를 요구했는데 이는 후에 제국 측에 요구하는 쪽으로 메꿀 수 있을 것 같습네다. 그리고 알로스 마도 왕국 같은 경우에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네다. 왕국 연합이 견고해지면 참여한다는... 니나바 왕국은 갑자기 엘프들이 숲을 걸어 잠그는 탓에 연락할 수 없었습네다. 그 외에 아와크 왕국과 티셔트 왕국도 참전에 응하기는 했는데 둘이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해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네다. 마지막으로 저쪽 멀리 섬에 있는 벨리마 왕국은 연락이 되지 않았습네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인지 저희 측에서 보낸 사절도 돌아오지 않았습네다."
사내는 조금이라도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입을 움직였다.
벨리마.. 벨리마..
기억을 뒤지던 김익한은 그때 보트 운운하던 멍청한 녀석의 왕국이 벨리마 왕국이라는 걸 떠올렸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그런 곳 도움까지는 필요 없었다.
"다만... 제국 측에서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연합이 결성되기 전까지 꽤 큰 피해가 예상됩네다."
개 같은 제국 놈들.
회의장에 낮은 욕지기가 울려 퍼졌다.
제국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제국은 늘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들의 피를 가리기 위해 외부의 피를 흘렸다.
아마 이번 전쟁도 악마로 피폐해진 내부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벌인 일이겠지.
잔악무도한 놈들.
심지어 이번에는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그저 정의를 돕는 것이라는 개소리를 하며 밀어붙이고 들어왔다.
그런 놈들이 자신을 악마라고 지목한다니...
김익한은 차오르는 욕지기를 참지 않고 뱉었다.
"... 안타깝지만, 김두환 동무의 작전이 성공했다고 합네다. 그에 명분과 정통성을 잃게 된 빨갱이들의 결집력이 약화될 것으로 예상됩네다. 정보는 빨갱이들이 와해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됩네다."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마쳤다.
사내의 말에 회의장에는 침음성이 흘렀다.
김두환 이 멍청한 새끼.
그냥 자신이 일궈놓은 걸 누리며 살기만 해도 되는 것을.
자신이 내린 명령이었지만, 김익한은 가슴 한쪽이 시렸다.
벌써 자식 중 둘이나 잃었다.
셋이나 낳았으니 충분하겠다고 생각한 지난날의 자신이 우스웠다.
회의장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김익한은 심호흡하며 애써 감정을 묻었다.
간당간당하기는 하지만, 아직 서니까 다시 만들면 된다.
"그럼 일단 제국군과는 대치를 유지하며 천천히 밀리는 형식으로 하고, 안수성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구심점이 약해진 그 빨갱이 새끼들부터 치워놓으면 제국 측도 별수 없을 테니까. 만약 제국 측이 그래도 밀고 들어오면 다른 왕국들도 급해지겠지. 다음은 자신들일 테니까."
김익한의 말이 끝나자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 병신같은 행동에 김익한은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애써 참았다.
"알겠습네다!!"
보고하던 사내가 경례를 올리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직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어?'
김익한의 머릿속에 녹을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으면 죽었지 그 더러운 손 잡을 생각 없다. 이 악마야.'
김익한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우습게도 김익한에게 악마가 들렸다는 소문이 돌고 나서부터 저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자신이 악마에 들린 것일까.
그 후에 몇 번이나 사냥신교에 갔지만, 그들은 목소리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자신에 대한 소문이 흉흉해 대놓고 물어볼 수 없어서 교황과 이야기만 했지만.
'어차피 너는 악마에 씐 놈으로 알려졌어. 자 주변 시선을 봐 다 너를 두려워하고 있잖아? 그럴 바에는 내 손을 잡는 게 어때? 그럼 내가 네게 세상을 주지.'
목소리는 김익한의 간지러운 부분만 슬쩍슬쩍 긁어댔다.
김익한은 목소리의 말에 작게 웃었다.
저들은 자신이 아비를 죽이고 이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자 잘 들어봐. 내 말을 들으면 세상이 네 것이 되고, 내 눈을 바라보면...'
김익한은 목소리를 무시하며 품에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저거 시발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안수성을 가득 두르고 있는 공화국 병사들을 보니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화살이 안 닿을 거리에 빨간색 투구를 눌러 쓴 녀석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 미친놈들은 제국군 쪽을 포기했는지, 그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미 안수성은 보수를 끝내 놓았네. 전쟁에 대비해 식량도 넉넉히 준비해뒀고 말이야."
굳은 표정의 김지훈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벌써부터 도망갈 생각하지 말게. 사람이 좀 진득하게 좀 있어야지. 그리고 저렇게 다 둘러싸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갈 생각인가."
김지훈이 우리가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탄탄한 성벽 위에 서 있었지만, 워낙에 주변에 있는 수가 많으니 안심되지 않았다.
나는 슬쩍 회색빛의 성벽을 주먹으로 두드렸고 그러자 들리는 꽉 찬 소리가 못내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우리는 등에 메고 있던 짐을 슬그머니 돌렸다.
"그래도 만약 이란 걸 대비해야 한다고 들었습네다. 혁명은 작은 불씨만 있어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으니 혹시나 여기 불이 꺼지면 제가 불씨를 살리도록 하겠습네다!"
이지수가 경례를 크게 올리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대충 버틸 수 있다 이거죠?"
"...그렇네. 우리는 제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우리 쪽으로 병력을 옮겨뒀으니 제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걸세. 그렇다고 공성전을 펼치기에는 저들에게도 피해가 클 테니.. 당장 쳐들어오지도 않을걸세. 아마 꽤 긴 대치가 이어질 거야."
김지훈이 이지수의 말을 무시하고 찜찜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빨리 좀 말해주지 짐 괜히 쌌잖아.
나는 무거운 짐을 한편에 내려뒀다.
"후 가슴도 무거운데 가방까지 메고 있으니 정말 답답했습네다!"
내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이지수도 가방을 내려놨다.
멍하니 있는 천오의 가방은 내가 벗겨줬다.
천오의 가방에서 향긋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궁금해서 천오의 가방을 열어보니 음식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고기부터 과일까지.
천오의 가방 안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다른 건 하나도 없이 음식만 잔뜩 쌓여 있었다.
입에 넣기만 하면 토하는 애가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챙겼는지.
"이런 물렁한 것들은 가방에 넣으면 안 돼. 알았어?"
가방 안에 짓눌려 터진 과일을 꺼내며 말했다.
멍하니 다른 곳을 보던 천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다만, 그 눈빛에 뭔가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가방 정리를 마치고 다시 김지훈 옆으로 돌아가니 김지훈은 혁명단원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명령하고 있었다.
무슨 전열이랑 전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듣기만 해도 하품이 나와 흘려들었다.
그때 공화국 측에서 세 명의 사내가 안수성 가까이 접근했다.
그 모습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했다.
화살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잠시 멈춘 사내들이 다시금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서로의 말이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사내들이 멈추었고 양옆의 사내들이 분주히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설치하였다.
잠시 뒤 설치가 끝나고 중앙에 있는 사내가 막대기를 입에 가져갔다.
"아아 빨갱이들은 들어라!! 감히 공화당의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를 드러낸 이 안하무인 한 자식들아! 하지만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으신 김익한 주석님께서 너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으니 이제 생떼를 멈추고 성문을 열도록 하여라!! 이 부모도 몰라보는 빨갱이 놈들아!"
사내들이 설치한 물건이 음성 증폭 장치였던 듯 우렁찬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저거 그거지! 시발!
나는 들뜬 마음으로 성 끝자락에 가서 목을 가다듬었다.
사내는 다음 말을 하려고 목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내가 나오자 말을 멈췄다.
"닥쳐라! 이 애미 터진 새끼들아!!!"
나는 기운까지 동원해 목소리를 증폭 시켜 소리쳤다.
욕지기를 크게 뱉어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순식간에 안수성이 조용해졌다.
"빨빨갱이들 아니랄까 봐! 입이 참 천박하구나!"
내 욕지기에 사내가 당황하며 손가락질했다.
"자..자네! 뭐 하는 건가!"
당황한 김지훈이 다가와 나를 말렸다.
"어? 저거 욕 싸움 하자는 거 아니에요?"
"저건 전투 전에 양측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공화국의 전통일세! 물론 그 과정에서 거칠고 험한 말이 오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뜸 욕부터 하는 게 아니야!"
"에이 뭐야 그럼 욕 싸움 맞잖아요."
"욕 싸움이 아니라 아니네. 내가 말을 말지..."
김지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감히 자신의 애비에게 이를 드러낸 패륜아 김두환은 나오라!!"
사내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설마했지만, 김익한이 정말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건가. 끔찍하군."
사내의 외침에 김지훈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찌 나오지 않는가! 빨갱이들이 주장하는 정통성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패륜아 김두환은 나오라!"
우리 측이 반응하지 않자 사내는 더욱 기세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사내의 말에 안수성에 작은 소란이 발생했다.
설마 하는 의문이 금세 퍼져나갔다.
"김두환 님. 잠시 앞으로 나오시죠."
그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김지훈이 드숀을 불렀다.
"알겠네."
이제는 완벽히 김두환이 된 드숀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김지훈은 드숀의 작은 습관들까지 고쳐서 완벽한 김두환으로 만들었다.
김지훈은 완벽한 김두환 메이커임에 틀림없었다.
"나를 부르는 그대는 누구인가!"
드숀이 걸걸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아마 저 거리에서 보면 김두환 그 자체로 보일 것이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 드숀과 마주친 나도 소금이 된 털북숭이가 살아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사실을 알고 나서도 차마 고기를 소금에 찍어 먹지 못했지만.
"김..김두환 동무?! 아니 분명 김두환 동무는... 저건 거짓이다!"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드숀을 손가락질했다.
"감히 내게 거짓이라니 참으로 의리 없는 사내군."
짧게 말한 드숀이 다시금 뒤로 물러났다.
더 오래 보여주면 정체가 밝혀질지도 모르니 적당한 때였다.
나는 슬그머니 앞으로 가서 드숀이 빠진 자리에 섰다.
저 많은 병사가 당장 덤비지 못하고 내 욕지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이 자꾸 근질거렸다.
"거짓이다! 저건 거짓이야! 다시 나오도록 해라! 빨갱이들 아니랄까 봐 거짓 우두머리까지 세웠구나!"
"뭘 자꾸 오라는 거냐! 이 애미 터진 놈아!"
"무..무슨! 이거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럼 애비 터진 놈아! 이제 만족하는가!"
"이게 무슨 천박한... 이건 서로 욕만 하는 게 아니다! 너 말고 우두머리 불러와라!"
얼굴이 벌겋게 된 사내가 소리쳤다.
"그.. 아니네. 자네하고 싶은대로 하게나. 어차피 저들과 타협은 없을 테니."
김지훈이 찝찝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이든 동무! 김익한 수령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리를 꿰찬 것으로 유명합네다. 아! 그리고 최근에는 악마에게 씌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네다."
이지수가 내 옆에 붙어서 필요한 정보들을 알려줬다.
역시 욕은 진실에 기반을 두어야 더욱더 효과적이니까.
"이런 무식한 빨갱이 새끼들. 어디서 저런 천박한 놈을 골라와서 세워놨느냐!"
얼굴이 벌겋게 된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김익한이 어미랑 교미하다 걸려서 애비를 죽였다는 게 사실인가!!"
나는 다시 기운을 동원해 목소리를 키웠다.
내 욕지기에 공화국 진영와 우리 진영 모두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역시 진실인가 보군.
"무..무슨 감히 수령 동지께 그런 망발을 하느냐!!!"
사내가 발작하며 소리쳤다.
"그런 김익한이 지금은 악마와의 교미에 푹 빠져서 자기 애미와 셋이서 즐긴다는 것도 사실인가!! 참으로 노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패륜아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당당하게!!"
"아! 그렇다면 아까 애미 터졌다고 한 건 사과하겠다!! 김익한은 애미가 헐었구나!"
"애미가 헐었다! 애미가 헐었다!"
이지수가 옆에서 박수까지 치면서 내 말을 따라 했다.
이지수의 외침은 묘한 울림이 있어서 따라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애미가 헐었다!"
점점 외침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고.
이윽고 성 위에 있는 혁명단원들이 다 같이 외치고 있었다.
"김익한의 애미는 헐었고 밤마다 악마와 셋이서 즐긴다!!"
나는 큰 목소리로 단언했다.
""김익한의 애미는 헐었고 악마와 셋이서 즐긴다!""
혁명단원들의 목소리가 모여서 큰 외침을 만들었다.
"...이 빨갱이 새끼들."
사내가 욕지기를 뱉으며 노려보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와아아 승리했다! 기선 제압에 성공했어!"
"저놈 얼굴 썩는 거 봤나? 속이 다 후련하더군!"
성벽위의 혁명단원들이 웃으며 작은 승리를 자축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혁명단원의 환호성에 내가 마치 개선장군이 된 느낌이었다.
아무리 욕해도 반발이 없다니 이 얼마나 욕하기 좋은 환경인가.
우두두두
그렇게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때, 땅이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황급히 성벽 끝에 붙어서 확인하니 공화국 병사들이 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병사가 움직이니, 마치 개미 떼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투구가 붉은색이라 일반 개미도 아닌 불개미 같았다.
점점 빨간 무리가 성에 가까워졌다.
많은 수의 병사가 움직이니까 땅에서 짙은 먼지가 일었다.
"시발! 쟤네 바로 안 쳐들어온다면서요!! 이 무능한 지도자 새끼!"
나는 다급하게 김지훈에게 소리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자..자네가 한 일 아닌가! 그러게, 수령 욕은 왜 했나! 내가 분명히 욕 싸움이 아니라고 했거늘!! 빨리 전열을 정비하게! 아까 알려둔 대로 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네!"
내게서 다급히 멀어진 김지훈이 주변 인물에게 소리쳤다.
그에 간부로 보이는 몇 명이 빠르게 흩어졌고 다른 혁명단원들이 혼란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혁명단원들은 각자 무기를 꼬나쥐고 굳은 표정으로 공화국 병사들을 노려봤다.
성벽 위에 가득 차 있는 혁명단원의 모습이 내 불안을 살짝 지웠다.
"우웁..."
그 사이에 천오가 뭔가를 또 주워 먹었는지 인상을 쓰며 볼을 오물거렸다.
여기서 토하면 이따 전투 중에 실수로 밟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황급히 천오를 한 손으로 들어 성벽 바깥쪽에 가져다 댔다.
웩
내게 들려 성벽 밖에 떠 있는 천오가 아래로 뭔가를 토했다.
그 사이에 공화국 병사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천오의 등을 두드려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병사들을 응시했다.
"준비!!"
우렁찬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려 퍼졌고 혁명단원들이 각자 쥔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중에는 활도 있었고 언젠가 봤던 총도 있었다.
마침내 긴장 속에서 공화국의 병사가 사정 거리 안에 들어왔다.
"발사!!"
혁명단원들의 무기가 다양한 소리를 내며 쏘아져 나갔다.
그에 많은 수의 병사들이 쓰러졌지만, 빈자리는 금세 채워졌다.
"장전!!"
혁명단원들이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이며 다시금 무기를 들었다.
"발사!!"
다시 병사들에게 빈자리가 생겼고 또 그 빈자리는 금세 채워졌다.
"우웁... 으응"
모두가 바쁜 와중에 인상을 잔뜩 쓰고 주변을 둘러보던 천오가 다시 구역질을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게 천오의 표정이 심각해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뭘 먹은 거야. 위험하니까 빨리 토해."
나는 다시금 천오의 등을 두드렸다.
잠시 볼을 크게 부풀린 천오가 인상을 잔뜩 쓰면서 입을 벌렸다.
그리고
"웨에에에엑!!!"
천오가 입에서 빛을 길게 뿜어냈다.
빛에 닿은 성벽의 끝부분이 순식간에 바스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수도가 씹창날 때 봤던 드래곤의 모습과 비슷해 나는 화들짝 놀랐다.
미친 시발.
나는 황급히 천오의 뒤통수를 잡아 뿜어내는 빛을 공화국의 병사 쪽으로 맞췄다.
천오의 입이 작아 드래곤만큼의 위력은 안 나왔지만, 빛과 닿으면 무엇이든 순식간에 녹아내려 제법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천오의 빛은 닿는 순간 모든 것을 순식간에 녹여 나갔다.
방패를 든 병사라도 막을 수 없었다.
"오! 시발! 천오 브레스!!"
드래곤이 된 듯한 기분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천오의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빛을 병사들 사이에 골고루 뿌렸다.
일자로 쭉 그어내니 앞 열의 병사들이 넘어졌고 그 뒤에 있던 병사들이 멈추지 못해 같이 엎어졌다.
그렇게 나는 계속 달려오는 병사들의 곳곳에 일자로 구멍을 만들었고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뒤엉켜 쓰러졌다.
끄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팔이 아악!! 의무병!!
병사들이 뒤엉키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뒷줄과 앞줄이 분리돼 전보다는 해볼 만한 느낌이 들었다.
끄윽.
천오가 작은 트림을 하며 빛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금세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았다.
아마 이번 수성에 성공하면 천오가 일등 공신 아닐까.
그때 내 시선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내려가는 드숀이 보였다.
이 개새끼! 지금 다들 열심히 싸우는 데 도망갈 생각만 하다니. 쓰레기 같은 새끼가 분명했다.
그렇다고 김두환으로 알려진 드숀을 멱살잡이할 수도 없었다.
"야! 얘 데려가."
나는 내려가는 드숀에게 기절한 천오를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다치면, 난 널 죽일 거야."
아무 말 없이 천오를 받아드는 드숀에게 작게 말했다.
드숀이 작게 몸을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라."
나를 쳐다보는 드숀의 눈이 선글라스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드숀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성벽으로 향했다.
"하하핫!! 어떻습네까 혁명의 맛이!! 이건 매운 혁명! 이건 조금 더 마일드한 혁명 입네다!!"
이지수가 크게 웃으며 뭔가를 성벽 아래로 던졌다.
움직일 때마다 큼지막한 가슴이 보기 좋게 출렁였다.
콰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잠시 뒤 성벽 아래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이 미친년.
폭탄은 또 어디서 구해 온 거야.
"너 원래 검 쓰지 않았냐."
나는 루나검을 뽑으며 물었다.
며칠간 푹 쉬어서 상태는 최상이었다.
"아! 에이든 동무 왔습네까! 검보다는 이게 더 효율적이고 혁명적이라 바꿨습네다!!"
이지수가 시원하게 웃으며 가방에서 폭탄을 꺼냈다.
하긴 이런 전쟁터에서는 그렇겠네.
"혁명이다 혁명!!! 모두 혁명해라!!"
이지수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소리쳤다.
"막아라! 막아! 저 악마 같은 공화국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해!!"
"빨갱이들을 치워내자!! 공화국을 지켜내자!!"
성벽에 굵은 사다리가 걸렸고 사다리를 타고 병사들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멀리서는 첨탑 같은 것들이 돌덩이를 쏘아내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날아온 돌덩어리들이 성벽의 곳곳에 박히며 구멍과 피해를 줬다.
비명과 굉음이 섞여 머리를 자꾸만 어지럽혔다.
다가오는 첨탑을 자세히 보니 안에 굳은 표정의 병사들이 잔뜩 타고 있었다.
첨탑의 크기가 성벽과 비슷한 것을 보니 아마 저것을 타고 건너올 생각인 듯했다.
그때 내 앞에 걸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병사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양손으로 사다리를 잡고 있어서 무방비한 상태였다
"헤헤. 안녕하십네까. 안수성 좋아요우."
병사가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난 싫어 병신아."
나도 마주 웃어주며 녀석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아아 오랜만이군. 전장이라니. 정말 그리운 냄새야.]
[전장이라. 끔찍한 곳이지. 소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네.]
으아아아악
아비규환 속에서 나는 사다리를 베어내며 고민했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가 전쟁터 한복판에 있게 된 거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