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56화 (156/233)

〈 156화 〉 검귀.

* * *

옆에 있는 사다리에서 또 다른 병사가 성벽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녀석은 내 칼에 묻은 피를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랐다.

"할 말 있어?"

"저..저는 고블린 같은 아들과 오크 같은 마누라가 있습네다!!"

내 질문에 녀석이 황급히 언성을 높이며 대답했다.

고블린 같은 아들이나 오크 같은 마누라나 둘 다 좆같은데.

"그래?"

"예! 제가 죽으면 제 아들은... 애비 없는 놈이 돼버립네다!"

"괜찮아. 이 세상에 애비 애미 없는 게 한둘도 아니고. 걱정하지마 잘 클 거야."

"아아니!!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내려가겠습네다!! 비켜 이 새끼들아!"

"자! 날 봐봐. 애미 애비 없지만 얼마나 잘 컸어?"

"...안돼 내 아들이 저렇게 클 수 없어!! 비키라고!!"

내가 다가가자 녀석이 자신의 아래 있는 녀석들과 투덕거리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럼 네가 먼저 올라가서 뒤지든가!!... 으아아악!! 이 개새끼야!!"

물론 내게는 그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사다리의 위쪽을 베어내고 힘주어 밀자 사다리에 있는 녀석들이 아래에 있는 병사들과 금세 뒤섞였다.

아마 저들도 자신의 동료에게 되돌아간 것이니 기쁠 것이다.

시선을 돌리자 옆에 사다리로 올라오는 녀석들이 보였다.

전쟁터는 정말 바쁘네.

나는 성벽 위를 타고 달리면서 사다리로 올라오는 녀석들을 베어 넘겼다.

"막아라! 막아!!!"

그새를 못 참고 성벽 위에 올라와 깽판 치는 녀석들이 보였다.

녀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방패로 주변을 밀어내며 아래에서 올라올 공간을 만들었다.

나는 성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그들 사이로 달려들었다.

"이익! 중간에 이상한 녀석이 들어왔어!"

"2열은 중간에 있는 새끼를 처리해라!"

녀석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내게 검을 밀어 넣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내게 휘두르는 검을 통째로 베어 넘기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두꺼운 갑옷과 방패도 루나검 앞에서 소용이 없었다.

뭔가 검이 더 예리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 아니 소년의 생각이 맞다. 오랜만에 사람의 피를 듬뿍 마시니 왕년의 기운이 돌아오는군. 하하하! 회춘하고 있다네.

피를 마시고 예리해지다니. 전설의 검이 아니라 마검 아니야?

­ 그게 중요한가?

아니 상관없지. 강해질 수만 있다면야.

­ 그렇지.

"으아아악!!!"

마지막 남은 놈의 목을 투구와 동시에 베어내고 몸통을 발로 밀었다.

주변의 혁명단원들이 쓰러진 시체를 냉큼 성벽 밖으로 던졌다.

그사이에 또 다른 사다리에서 병사들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끊임없이 올라오네. 얼마나 많은 거야 시발.

나는 다시금 성벽 쪽으로 달려가 올라오는 녀석을 처리했다.

죽은 놈 아래에 있던 놈과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화들짝 놀라 다시 아래로 내려갔고 이내 아랫놈과 뒤엉켜 병사들 사이로 떨어졌다.

참으로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비어버린 사다리를 밀어서 아래 병사들 사이로 던졌다.

사다리가 엎어지며 또다시 병사들이 짓눌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이 악마 같은 놈!!!"

그 사이 옆에서 올라온 놈이 욕지기를 뱉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입 닫고 덤볐어야지 병신아."

녀석도 반으로 갈라졌고 혁명단원들이 달라붙어 아래로 집어 던졌다.

나를 보는 혁명단원들의 눈에는 짙은 공포가 자리 잡아 있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공포보다는 경외가­.

끄아아아아악!!

으아아악! 살려줘! 살려달라고!

주변에서 들리는 고통에 찬 신음들이 내게 움직이기를 종용했다.

한껏 피를 머금은 루나검은 이제 기운을 두르지 않아도 두꺼운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마치 종잇장처럼 베어 넘겼다.

애초에 병사들 사이에 내 한 수를 막을 놈이 없었지만, 이제는 막아도 검이나 방패와 같이 썰렸다.

전쟁터 의외로 괜찮네.

­ 그런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하하! 마치 쥬스 가게에 온 듯해!

쥬스를 마셔본 적도 없는 게.

­ 말이 그렇다는 거지.

쿠구구구궁­

뭔가 묵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첨탑이 성벽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첨탑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녀석들이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이 간나 새끼!! 네 놈은 곧 뒤졌어!!"

"감히 문수를 죽이다니!! "

문수가 누군데.

녀석들이 욕지기를 뱉으며 손에 쥔 무기를 꼬나쥐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성벽과 첨탑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10m 정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었다.

나는 성벽 위로 올라가 무릎을 굽히며 기운을 돌렸다.

땅에 닿은 스프링처럼 몸이 굽혀졌고­

내 옆에서 첨탑을 보며 활시위를 거는 혁명단원과 눈이 마주쳤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놈을 쏴."

내 말에 혁명단원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기운을 터뜨리며 첨탑을 향해 뛰었다.

순식간에 첨탑에 도착해 녀석들의 앞에 자세를 잡았다.

꽤 기운을 사용해서인지 다리가 얼얼했다.

그때 혁명단원이 활시위를 놓았고­

뒤쪽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저저!! 개새끼가 지 발로 오는구만!!"

"다들 정신차려! 고작 하나다!"

"감히 문수를 죽이다니!!"

문수가 누구냐니까.

나는 상체를 숙인 상태로 녀석들을 확인했다.

좁은 공간에 30명 정도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좁은데 잘 꾸겨 넣었네.

대부분의 무기는 창이었고, 나는 녀석들의 창이 내게 쏘아지는 시간을 가늠했다.

기운을 돌리며 집중하자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가장 왼쪽에 있는 놈이 제일 빠르겠네.

나를 향해 찔러오는 창을 흘려내며 녀석에게 뛰어들었다.

그에 녀석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손목에 있는 방패를 들었지만, 루나검을 막기에는 너무 조잡했다. 물론 조잡하지 않아도 못 막겠지만.

나는 다리에 힘을 주며 기운을 실어 검을 크게 휘둘렀다.

녀석과 녀석의 옆에 있던 2명까지 사이좋게 반 토막나며 뜨거운 피를 뿜어냈다.

공간이 부족해 차마 피할 수 없던 나는 그 피를 흠뻑 뒤집어썼다.

시원하군.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며 다시금 힘이 차올랐다.

그제야 다른 녀석들이 소리 지르며 창의 방향을 꺾었다.

물론 그것도 내게 닿기에는 너무 느렸지만.

찌르는 창 사이의 공간으로 다시금 파고들면서 검을 찌르고 베어냈다.

그들의 피가 자꾸만 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깨우며 계속해서 검을 움직였다.

좁은 공간이라 창을 쓰는 녀석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내 뒤로 와라!! 나만 믿으라구! 으아아악!"

이번에는 큰 방패를 든 녀석이 고함을 치며 내 앞을 막았지만, 다른 녀석들과 별반 차이 없었다.

­ 더 많은 피를 !! 그럼 더 많은 힘을 주지!

베어 넘길수록 몸이 점점 가벼워지고 검도 가벼워졌다.

방패 녀석 뒤에 숨어있던 녀석들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나는 방패 녀석을 밀어 넣으며 달려들었다.

녀석들이 방패 녀석의 덩치에 밀리며 우왕좌왕했다.

참으로 한심한 모습이었다.

"찔러! 아니면 베든지!! 뭐라도 해!!"

녀석 중 유난히 큰 베레모를 쓰고 있는 녀석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에 다른 녀석들이 덜덜 떨면서 내 앞을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내 검에 녀석들이 갈라지며 쓰러졌다.

"괴..괴물!!"

"그럴지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다른 녀석들과 별반 차이 없었다.

녀석은 수직으로 갈라져 흉한 내부를 보이고 쓰러졌다.

나는 루나검을 작게 흔들어 남은 피를 흩어냈다.

"죽어라­!!"

그때 내 오른쪽에 있던 마지막 녀석이 내게 달려들었고­

피이이잉! 퍽!

성벽의 혁명단원이 쏜 화살이 녀석의 머리를 뚫었다.

고개를 돌리자 귀신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혁명단원이 보였다.

나는 대충 녀석에게 엄지를 흔들어줬다.

첨탑의 끝자락에 서서 주변을 확인했다.

성벽 위에서는 처절한 싸움이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올라온 녀석들이 많지 않아 혁명단이 밀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시선을 돌려 아래를 확인했다.

첨탑 아래는 어떻게든 성벽을 올라가려는 녀석들과 첨탑으로 들어오는 녀석들이 보였다.

정말 벌레처럼 많네.

­ 아직 피가 부족하네. 더 많은 피가 필요해!

조금은 흥분한 루나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아직 좀 더 움직이고 싶으니까.

나는 기운을 실은 루나검을 첨탑의 벽에 박아 넣었다.

루나검은 첨탑을 마치 두부처럼 손쉽게 파고들었고 나는 루나검을 잡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루나검이 첨탑을 소리 없이 손쉽게 갈랐고 첨탑이 무너져 내렸다.

첨탑이 무너지며 그 안에서 꽤 큰 비명이 들렸지만, 이미 여기서 비명은 피만큼 흔했다.

땅에 도착하기 전 가볍게 검을 휘둘러 아래에 있는 대여섯 명을 베어내 자리를 만들었다.

"뭐..뭐야!!!"

옆에 있는 녀석들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했다.

녀석의 멍한 얼굴을 갈라 그 안에 있는 피를 마시고 싶었다. 아니 저 병사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주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버렸다.

오늘따라 유독 생각이 많았다.

"그러게. 나는 무엇일까."

나를 보며 겁에 질린 병사에게 웃어주며 다시금 검을 움직였다.

비명이 끊임없이 귀를 어지럽혔고 나는 검을 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몇 명을 베어냈는지 세지도 않았다. 아니 셀 수 없었다.

죄책감을 들지 않는가? 생명이라면 죽는 게 당연한 것을.

병사들은 무슨 수를 써도 내 검을 막을 수 없었고 그들의 느린 검은 내게 닿지 않았다.

마치 개미 떼 사이에 뛰어든 기분이 들 정도로 쉬웠다.

병사를 베어낼수록 나는 더욱더 빨라졌고 내 검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그때 옆에서 찌른 창이 내 복부를 스쳐 지나가며 흐릿한 정신을 깨웠다.

"이 애미 터진! 명예로운! 야만인! 같은 놈이!"

반사적으로 내지른 검에 녀석이 반 토막 났다.

녀석의 뜨거운 피가 내 몸을 다시금 적셨다.

저 피를 마시면 갈증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저 병사에게도 명예와 가족이...

어지러운 정신을 고개 흔들어 다시금 밀어냈다.

"검..검귀다!! 검귀야!!"

"밀지마! 시발 밀지 말라고! 네가 가던지! 으아악!"

"제발 살려주십쇼!!"

"검귀라고! 젠장! 우리 최상급 전사는 어디 있어!!"

병사들은 이제 내게서 어떻게든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쳤다.

물론 꽉꽉 눌러 담은 빼곡한 공간에서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병사들은 그저 공포에 질려 내게 무기를 휘두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심한 놈들. 기꺼이 전장에 나선 명예로운 자들.

자꾸만 생각이 두 번씩 드는 것 같은데?

­ 문제 있나?

뭐 상관없겠지. 생각이 두 배가 된 만큼 내 사고가 깊어졌다는 거니까. 나는 문무를 겸비한 거지.

­ 크흡. 그렇군! 그럼 더 많은 피를! 그럼 자네는 더욱 강해질 것이네!

"애미 터진 자네들의 머리를 뽑아 그 피를 마셔 검을 잡은 자에 어울리는 명예로운 죽음을 주지."

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그들 사이로 다시금 뛰어들었다.

응?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 문제 있나?

아니 전혀.

병사들의 목숨을 취해 피를 뒤집어쓸 수록 내 입꼬리는 올라가고 머리는 어지러워졌다.

몸이 점점 더 가뿐해졌고 이내 내 몸이 깃털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병사들의 창끝에 올라설 수 있었다.

검은 한없이 가벼워져 이제는 손이 길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일검에 다섯 명은 거뜬히 베어낼 수 있었다.

또 다른 병사의 목을 갈르며 나는 기침이 터지듯 크게 웃었다.

다른 병사의 몸을 찔러 넣었을 때 나는 그들의 명예로운 죽음에 작게 묵념했다.

눈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고 주변의 시간이 점점 느려졌다.

이거 시발 눈에 불난 거 아니야?

뜨거운 눈을 손으로 비볐지만, 진정되지 않아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 크하하하! 이 맛이지 이 맛이야! 이 맛에 검으로 산다니까! 꺼어억! 잘 먹고 갑니다!! 꺼억!

어느새 내 손에 들린 루나검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잔뜩 붉어져 있었다.

흉하게 검 면에 잔뜩 새겨져 있던 글자들도 점점 사라졌다.

이제는 루나검이라고 못 부르겠어.

다행이야. 들고 다니기 쪽팔렸는데.

나는 웃으며 다시금 검을 움직였다.

아직도 내 앞에 마실 것들이 넘쳐났으니까.

마시기는 뭘 마셔 시발 퉤퉤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선 그들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지랄하네. 다 좆밥일 뿐이야.

나는 웃으며 내게 겁먹어 뒷걸음질 치는 녀석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아 잠깐 슬프기도 하네?

­ 그 둘이 차이가 있나?

없을 수도.

­ 그럼 됐네.

자꾸만 터지는 웃음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

검호로 불리는 김 아무개는 살면서 지금이 제일 두려웠다.

검을 잡은 이후로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검호였지만, 지금은 검을 들고 싶지 않았다.

'검귀'

병사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를 검귀라고 불렀다.

저기서 병사들을 도륙내는 그에게 참으로 걸맞은 명칭이었다.

검귀는 자꾸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병사들을 일 검에 베어 넘겼다.

검귀의 붉은 검은 무엇으로 막든 단칼에 베어냈다.

어느 순간부터 병사들은 검귀가 두려워 도망치기 바빴다. 하지만 병사가 가득 들어찬 이곳에서 도망갈 공간은 없었고 이내 검귀에게 잡혀 반 토막 났다.

앞에 생길 상처가 뒤에 생겼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검귀의 무위와 잔혹함에 공화당 쪽의 기세가 끊겼다.

어찌 보면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기세가 꺾인 공화당 측은 더 이상 성벽에 다가갈 수 없었다.

전장의 모든 이들이 검귀의 학살에 경악하며 집중했다.

"검호님..."

옆에 있던 간부가 뭔가를 원하는 눈빛으로 검호를 쳐다봤다.

검호는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현재 전장의 유일한 최상급 전사인 자신한테 저 검귀를 막아달라는 거겠지.

자신이 막을 수 있을까?

검호는 대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고민했다.

검귀의 움직임은 빠르고 신출귀몰하고 그 안에 담긴 힘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자신보다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아마 상대도 최상급인 것 같았지만, 그 수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만약 검귀와 전투를 한다면 자신이 이길 확률이 높아 보였다.

다만, 그 소름 끼치는 기세가 검호의 마음에 걸렸다.

병사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피를 뿌리고 죽음을 내리는 검귀의 모습은 검호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전투를 하면 할수록 그 속도가 빨리졌다.

자신이 그처럼 할 수 있을까? 검호는 장담할 수 없었다.

병사들을 도륙 내고 낄낄대며 웃다가 대뜸 언성을 높이며 명예를 운운하는 검귀의 모습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말 피하고 싶은 상대였지만, 검호에게는 의무가 있었다.

"알았다. 병사를 물리도록."

검호가 대검의 손잡이를 굳세게 쥐며 말했다.

"아..! 알겠습네다!"

간부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간부의 깃발에 따라서 병사들이 움직이며 작은 공터를 만들어냈다.

병사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보듯 검호를 봤다.

자신이 이들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을까.

검호는 일단 고민을 접어 뒤로 넘겼다.

전투에서 잠깐의 망설임은 치명적이니까.

그저 전사는 상대를 어떻게 죽일지만 생각하면 된다.

"멈추거라!!!"

검호가 사람보다 큰 대검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에 머리통을 여러 개 들고 낄낄대고 있던 검귀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검귀와 눈이 마주친 검호는 내심 놀랐다.

검귀의 왼쪽 눈은 피처럼 붉은색이었고 오른쪽 눈은 햇빛처럼 따듯한 금색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양쪽의 눈 색이 다를 수가 있나. 저건 인외가 분명하다.'

검호는 그 시선에서 서늘함을 느끼며 몸을 잘게 떨었다.

후­

늘 검호와 함께했던 대검의 손잡이가 검호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꺼림직하고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놈이지만, 자신보다 약하다.

검호는 계속 되뇌며 머릿속을 비워내고 공포를 물렀다.

"왜 그런가?"

검귀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검호를 응시하며 물었다.

입꼬리가 흉하게 올라간 것이 장난치는 것 같았다.

"무엇을 말인가."

검호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천천히 검귀에게 다가갔다.

상대는 빠르다. 자신은 느리지만, 굳건하고.

검호는 끊임없이 전투의 가짓수를 생각했다.

"지금 휘청이고 있지 않나."

말을 마친 검귀가 낄낄대며 웃었다.

검호는 휘말리지 않기 위해 검귀의 말을 무시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좆밥인 듯하니. 자네에게 선공을 양보해주지. 자네의 최선을 내게 보여주게나."

낄낄대던 검귀가 돌연 자세를 고쳐 잡으며 금빛 눈을 빛냈다.

그 금빛 눈은 마치 전설 속의 기사와 같은 청렴한 기백이 담겨있었다.

검호는 검귀의 금빛 눈에 그의 말이 진실임을 느꼈다.

검귀는 정말 자신에게 선공을 양보할 생각이었다.

"부끄럽지만, 달게 받겠네. 그럼."

목숨 앞에 자존심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검호는 잘 알고 있었다.

검귀의 말에 검호는 자신의 미완성된 기술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약속한 드래곤 사냥을 위해 만든 기술.

준비 과정이 길고 그사이에 무방비가 되어 실전에 사용하지 못해 미완성으로 남겨두었지만, 만약 완성만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기술.

지금까지는 술 내기나 뽐내기 위해서 사용한 기술이었지만.

상대가 저렇게 여유를 준다면 자신의 필살기와도 다름없었다.

검호는 몸 안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양발을 넓게 벌렸다.

검호의 굵은 발이 대지를 단단히 지탱했다.

대지에서 묵직한 기운이 타고 들어왔다.

대검을 앞쪽으로 찌르듯이 세우며 기운을 경로에 맞춰서 움직였다.

폭발 직전 화산처럼 들끓는 기운이 다리부터 끌어 올려졌다.

이윽고 검호의 주변 땅이 울리며 자그마한 돌들이 떠올랐다.

마침내 아래에서부터 들끓는 기운이 점점 빨리 돌며 허리춤까지 올라왔다.

검호는 억지로 모은 기운에 진탕이 나는 속을 애써 참으며 계속해서 기운을 움직였다.

'대지 가르기.'

친우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완성되기 전에 막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했던 기술.

검호는 과연 검귀가 완성된 대지 가르기를 막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몸이 덜덜 떨리며 힘줄이 터져 나올 때­

검호는 문득 검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라진 검귀는 검호 바로 앞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검귀의 피처럼 붉은 눈이 빛을 뿜어내며 호선으로 휘었다.

이..이게 무슨.

검호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대지 가르기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자신의 내부는 터져나간다. 지금은 계속 기운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구라지 병신아. 내가 상대한테 기회를 주는 머저리인 줄 알았어?"

검귀가 낄낄 웃으며 검호의 머리를 가볍게 날렸다.

바닥에 굴러가는 검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검호였지만, 그 최후는 일반 병사와 다를 것 없었다.

"자! 그럼 다음 쥬스­ 아니지 명예는 어디에 있나!"

검귀가 낄낄 웃으며 다시금 자세를 숙였다.

"후퇴!! 후퇴한다!!!"

공화당 측은 검호가 단 일 검에 패배한 것을 목도하자마자 후퇴를 명했다.

최상급 전사가 쓰러진 지금 상태에서 더 이상 승산은 없었다.

심지어 아직 성문조차 뚫지 못했다.

"어디가!! 가지 마! 아직 목마르다고!"

검귀는 낄낄대며 그들을 쫓아가서 검을 휘둘렀다.

"막아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 저 괴물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란 말이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빴다.

그날 검귀는 공화당의 악몽으로 각인됐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