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목줄 풀린 개.
* * *
멀리까지 쫓아갔던 검귀가 낄낄 웃고는 안수성으로 다가왔다.
성에 다가오는 검귀를 보며 안수성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흘렀다.
분명 검귀는 혁명단원이었지만, 보여준 모습이 워낙에 흉흉해 절로 두려웠다.
검귀는 검을 질질 끌면서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로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 태평하게 걸었다.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와 검이 땅을 긁으며 내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내 검귀가 굳게 닫힌 성문 앞까지 다가왔다.
검귀가 인상을 쓰며 성문을 똑똑 두드렸다.
하지만 누구도 성문을 열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저 괴물을 지금 성안으로 들이는 게 옳은 일일까?
혁명단원들은 서로의 굳은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당장 성문을 열지 않고 뭐합네까!! 여십쇼! 지금 에이든 동무가 앞에 서 있는 거 안 보입네까?!"
이지수가 길길이 날뛰면서 성문 주변에 있는 혁명단원들을 손가락질했다.
그에 난감해진 혁명단원들은 멀리서 내려오는 김지훈을 쳐다봤다.
"...열게. 그도 혁명단원이니."
그렇게 말하는 김지훈의 얼굴도 다른 혁명단원들처럼 굳어 있었다.
"참으로 답답한 놈들입네다!! 비키십쇼 제가 열 테니!!"
이지수가 성문에 굳게 걸린 걸쇠를 혼자서 낑낑대며 들려고 했다.
하지만 성인 남성 다섯 명은 모여야 들 수 있는 걸쇠를 혼자 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익!! 혁명적인 무게입네다! 그냥 날려버릴..."
이지수가 잔뜩 인상 쓰면서 가슴 사이를 뒤질 때, 서윤이 걸쇠를 붙잡았다.
꽤 많은 일이 있었는지 서윤도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끼기긱
서윤이 걸쇠를 가볍게 밀어 넘겼다.
그제야 눈치를 보던 혁명단원들이 도르래를 돌렸다.
걸쇠가 풀린 굵은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그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검귀가 보였다.
다만, 원래 갈색이던 눈동자가 전과 달리 반은 피처럼 붉은색 반은 태양처럼 밝은 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귀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든 동무! 고생 많았습네다!! 혁명적인 모습 정말 잘 봤습네다!! 어?! 근데 왜 눈깔 병신이 되신 겁네까?!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습네다! 매혹적입네다! 매혹적! 특히 고추장처럼 붉은 눈동자가!"
이지수가 냉큼 달려가 피투성이인 검귀를 안았다.
그에 검귀가 잠깐 검을 잡은 손을 움찔거리다 검집에 집어넣었다.
성안으로 들어온 검귀가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검귀의 붉은 눈과 마주친 자들은 악마와 마주친 듯한 공포에 고개를 돌렸고, 금빛 눈과 마주친 자들은 자신의 추악함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이지수랑 서윤, 내 방으로 와라."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리자 검귀가 작게 웃으며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검귀의 말에 작은 소란이 일었지만, 검귀는 신경 쓰지 않고 내성으로 들어갔다.
잠시 멈춰서 심호흡하던 이지수가 그 뒤를 냉큼 따라갔다.
"그..그게 무슨! 어디 가느냐!"
김지훈이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서윤을 붙잡았다.
"오라고 하잖아요."
서윤이 인상을 쓰며 자신을 잡은 김지훈의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지금 가면 놈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안 된다! 놈은 지금 전과 다른 놈이야! 그 불길한 눈을 못 봤느냐!"
김지훈이 다시금 손을 뻗었지만, 서윤은 가볍게 피했다.
"그가 괴물이건 인간쓰레기건. 지금 그는 우리의 가장 큰 무기예요. 그가 무엇을 원하든 우리는 해줘야 합니다."
서윤이 움찔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처음도 아니고...
"그 개자식이 감히 내 딸을!! 내 딸을!!!"
작게 들린 서윤의 목소리에 김지훈이 뒷목을 잡으면서 쓰러졌다.
이지수는 먼저 가는 에이든의 등을 보며 야속함을 느꼈다.
자꾸만 아래가 근질거리고 움찔거려 걸음을 옮기기 힘든데 에이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래도 자신은 처음인데 다른 여자랑 겸상해야 된다니.
하지만 자신의 방으로 오라는 에이든의 목소리가 너무 혁명적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괜찮아. 내가 이길 수 있어. 그 여자는 특히 싸 보였잖아. 헐렁헐렁할 게 분명해.'
이지수는 멈춰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를 위해 평소에도 하체 운동을 열심히 해뒀다.
자신은 분명히 혁명적으로 쫀득쫀득할 것이다.
그렇게 되새기며 자신감을 쌓는 이지수 옆으로 서윤이 지나갔다.
그에 지지 않기 위해 이지수는 빠른 속도로 걸었다.
둘은 애써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척하면서 앞다투어 에이든의 방으로 향했다.
에이든 방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피투성이의 에이든이 나체로 앉아 있었다.
마치 왕처럼 당당하게 앉아 있는 에이든의 모습에 이지수는 숨을 삼켰다.
"흥."
잔뜩 긴장한 이지수를 보며 콧방귀를 뀐 서윤이 먼저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 벗고 기어서 오도록."
그런 서윤을 에이든이 왼쪽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그..그.."
모멸적인 에이든의 요구에 서윤이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지금이 기회야.'
이지수는 승부를 걸어야 할 때임을 직감하고 냉큼 옷을 벗어 던졌다.
피가 엉겨 붙어 옷이 자꾸 들러붙었지만, 억지로 뜯어냈다.
옷을 다 벗어 던진 이지수는 마치 종처럼 땅에 엎드렸다.
큼지막한 가슴이 바닥에 닿아 쓸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윤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 서윤의 모습이 이지수에게 작은 승리감을 안겨줬다.
"저는 다할 수 있습네다."
이지수는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마치 신하가 왕에게 아뢰듯 공손하게 읊조렸다.
"흥."
잠깐 이를 깨물던 서윤도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땅에 납작 엎드려 천천히 기어 왔다.
생각보다 빠른 서윤의 속도에 당황한 이지수가 열심히 움직였지만, 자꾸만 가슴이 바닥에 쓸려 속도가 제대로 안 나왔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속도를 겨루며 에이든 앞까지 기어 왔다.
미세하게 서윤이 더 빠르게 도착했다.
서윤이 이지수에게만 보이게 입가를 비틀었다.
그 모습에 이지수는 지독한 패배감을 느꼈다.
엎드린 상태에서 둘은 고개만 들어 에이든을 올려다봤다.
에이든의 말도 안 될 정도의 크기의 물건이 이지수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저게 내 몸속에...?'
이지수는 슬쩍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길이와 비교해봤다.
'입으로 나오는 거 아냐?!'
걱정스러운 생각이 든 이지수는 열심히 입을 풀었다.
혹시라도 입으로 나올 때 조금이라도 덜 아프도록.
"뭐해?"
에이든이 자신의 아래에 노예처럼 엎드린 두 여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에이든의 목소리에 두 여자의 아름다운 눈이 동그래졌다.
"빨아."
지금의 에이든은 상남자 그 자체였다.
붉은 눈과 금빛 눈, 둘 다 번들거리면서 빛났다.
***
아흐으으으윽!
안수성 내성에는 어제부터 신음이 그치지 않고 울려 퍼졌다.
그 들뜬 신음은 둘 중 누구의 것인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원초적이었다.
성안의 사람들은 애써 모른 척 하면서도 뒤에서 그 신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기했다.
과연 저 신음이 얼마나 갈지에 대한 내기였는데, 제일 길게 잡은 사람도 8시간이었기 때문에 승자는 없었다.
"뭐하나. 보고 계속하도록."
김지훈이 잔뜩 인상을 쓰고 회의장 안을 둘러봤다.
어제부터 끊임없이 울리는 신음 중 하나가 자신의 딸이라니. 심지어 얼마나 목청이 좋은지 내성 안에 있으면 어디서든 신음이 들렸다.
김지훈은 당장이라도 총을 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예..옛! 제국군 측이 아마 오늘 내로 안수성에 도착할 것으로 보입네다. 그에 대한 원인으로는 공화당 측에서 안수성 공략에 큰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했음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듯합니다. 만일 이대로 제국군 측과 합류하게 되면 승률이 7할까지 올라갑네다. 혹시 모를 변수로는 왕국 연합이 다시금 구성되고 있다는 것과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김익한이 악마와 손잡았을 경우가 있습네다."
사내가 자꾸만 옆을 힐끗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국군 측 피해는."
"신교 측이 같이 움직여서 큰 피해는 없다고 합네다. 제국군과의 첫 전투에서의 대패가 공화당 측이 안수성으로 전선을 돌린 것에 영향을 준 듯합네다."
아아아앙!
김지훈은 애써 신음을 무시하며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신음에 고개를 돌린 녀석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혁명이 잘 풀리고 있었다.
이번에 공화당이 화력을 집중한 안수성을 지켜낸 것이 제일 컸다.
공화국에 얼마 없는 최상급 인원을 안수성에 배치한 것만 해도 공화당이 안수성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안수성이 함락되고 혁명단의 중심이 흩어졌으면 이번 전쟁이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크긴 했다.
하지만 혁명단은 버텨냈고 이제 칼자루는 이쪽으로 넘어왔다.
"왕국 연합은.. 합류한다던가?"
"일단 스티루마는 확정인 듯하고 나머지 왕국들은 명확하지 않습네다. 아마 전과 다르게 제국군 쪽에 명분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발목을 잡은 듯합네다."
스티루마라...
참으로 껄끄러운 왕국이었다.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희한한 무기를 씀으로 인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들.
그래도 우리에게는 제국이 있었다.
이후에 거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게 되겠지만...
끝맛이 씁쓸했다.
쾅!!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혁명단원이 뛰어 들어왔다.
"제국군 측이 도착했습네다!!!"
하아아아!
저 신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김지훈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뒤 가벼운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홀로 들어왔고 홀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제일 앞에 있는 제국의 제 1 황녀 프라타가 익숙하게 홀의 중앙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뒤로 아름다운 수녀들이 들어왔고 서아와 제 3 황녀도 따라 들어왔다.
그 옆을 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서서 서슬 퍼런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들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날카로운 기세에 혁명단원들은 침을 삼켰다.
'역시 제국은 제국이라는 건가.'
악마에게 수도가 파괴될 정도의 큰 피해를 입었다 해서 약간은 약해지지 않았을까 했던 김지훈의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의 기세는 뛰어났다.
"김두환은 어디 있나."
프라타는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물었다.
"쉬고 있습니다. 최근에 습격을 당한 적 있어서 몸을 조심하고 있습니다."
김지훈은 침음성을 삼키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직 김두환을 보이기에 불안한 점이 많았다.
다만, 황녀가 불편해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흐응.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걔는 죽지만 않으면 되니까. 좋은 판단이야."
프라타가 고운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에이든은! 에이든은 어딨어?!"
그때 뒤에 있던 금발의 아름다운 미녀가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그게..."
김지훈은 갑자기 검귀를 찾는 삼 황녀의 질문에 말끝을 흐렸다.
아아아아아앙!!!
다시금 숨넘어갈 듯한 신음이 들렸고.
김지훈은 자신을 보는 삼 황녀의 눈빛을 피했다.
그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삼 황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저.. 저 발정 난 개새끼가!!!"
삼황녀가 욕지기를 뱉으며 홀을 뛰어나갔고 그 뒤를 수녀들이 황급히 따라 나갔다.
잠시 회의장을 둘러보던 서아도 인상을 굳히고 그 뒤를 따랐다.
"제법 기술이 좋은 모양인데. 궁금한걸?"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습니다."
"알았어. 그래도 나중에 한 번 내게 데리고 와 봐. 동생이 좋다는데 언니 된 입장으로서 한 번 확인해야겠지?"
프라타가 금빛 눈을 빛내며 옆의 덩치 큰 기사에게 속삭였다.
"자 그럼 우리 혁명 친구들. 공화당인가 뭔가는 빨리빨리 끝내자고. 이런 사소한 것 말고도 제국은 신경 쓸게 많으니까 말이야."
짝하고 박수를 친 프라타가 서늘하게 웃었다.
회의장에 잔뜩 낑겨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혁명단원들이 프라타에게는 순진한 양들로 보였다.
제국을 대신해 피를 흘려 제국의 심장이 뛰게 해줄 어리석은 놈들.
***
케이트는 머리끝까지 올라온 화 때문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지금 자신은 그 멍청이 때문에 무슨 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감히 다른 여자를 품고 있어?
심지어 회의장에 들릴 정도로 신음을 내게 하면서?
저런 멍청이를 위해 몇천 명이나 죽었다니.
자신의 행동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케이트는 걸음을 옮기며 주먹을 풀었다.
그동안 자신이 너무 풀어줬지 목줄을.
그러니까 발정 난 개마냥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거겠지.
아흑! 아아아앙!
걸음을 옮길수록 신음은 점점 커졌다.
그에 에이든과의 일이 생각나며 머리가 어지러워졌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깨웠다.
목줄을 묶어둬야 해. 저 개새끼는.
하아앙!
마침내 케이트는 신음이 나오는 큰문 앞에 도착했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풀고는 거칠게 문을 걷어찼다.
그 안에 보이는 꼴은 정말 가관이었다.
거의 죽을 것처럼 숨을 내뱉는 여자 위에 올라탄 에이든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발정 난 놈은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옆에 여자 하나가 더 널브러져 있었다.
잘 보니 널브러져 있는 여자는 아카데미에서 같이 다니던 무식하게 가슴만 큰 년이었고 아래에 깔리고 있는 여자는 서아와 닮은 외모의 여자였다.
에이든은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케이트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입꼬리를 올릴 뿐,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케이트는 그 뻔뻔한 태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거 화내야 될 상황 아닌가? 쟤가 미안해해야 되는 거 아니야?
케이트는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욕을 골라냈다.
그러다 에이든 밑에 깔린 서아와 닮은 년과 눈이 마주쳤다.
서글서글한 서아와는 다르게 조금은 까칠하게 생긴 느낌이 드는 눈매.
케이트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입을 뻐끔거렸다.
케이트는 그 뜻이 궁금해 여자의 입 모양을 따라 움직였다.
'살.려.주.세.요.'
결심한 케이트는 주먹을 풀면서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음? 새것이 왔군. 헐거워지던 참인데 마침 잘 됐네."
케이트와 눈이 마주친 에이든이 손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짝하고 내려치며 말했다.
그에 여자가 부르르 떨면서 자지러졌다.
'저..저 새끼 눈깔이 왜 저래?!'
변한 에이든의 눈 색에 케이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양쪽 눈의 색이 다른 게, 마치 미지의 존재 같았다.
'그근데 좀 멋있는 거 같기도 하고...'
케이트는 떨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에이든 앞에 섰다.
"어서 옷을 벗고 벌려라."
에이든이 붉은 눈을 빛내며 웃었다.
그 모습에 케이트는 옷을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목줄을 채워야 돼. 내가 목줄을 차는 게 아니라.'
참기 위해 얼마나 입술을 질끈 깨물었는지 케이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케이트는 에이든의 목에 팔을 두르고 천천히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음.. 전희인가? 뭐 나쁘지는 않다만"
이내 케이트와 에이든의 입이 비벼졌고.
"목줄 펀치!!!"
케이트는 온 힘을 주먹에 실어 에이든의 명치에 박아넣었다.
어느새 케이트의 뒤에 생긴 희뿌연 덩치가 케이트의 주먹에 힘을 실어줬고.
"끄으으윽!"
에이든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정실 펀치!!"
케이트는 에이든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목에 건 팔에 힘을 주며 다시금 주먹을 명치에 박아넣었다.
다시금 에이든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고.
"물리 치료 펀치!!"
케이트는 다시금 주먹을 에이든의 명치에 박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이 미친년이!!"
에이든이 고통에 발버둥 치면서 예의 욕지기를 뱉어냈다.
케이트는 그런 욕지기에 반가움을 느끼는 자신이 머저리 같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걱정이 케이트의 눈가에 물기로 고여 흘렀고 반가움이 케이트의 입꼬리에 번졌다.
"어?"
그에 인상을 찌푸리던 에이든이 아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서윤은 에이든 아래에 깔려서 헐떡이고 있었다.
아흐으윽
다시금 케이트의 눈치를 보던 에이든이 슬쩍 허리를 움직였다.
"이 미친 새끼가!!! 뒤져! 그냥 뒤져!! 뒤지라고!!"
결국 참지 못한 케이트가 달려들어 에이든을 한참이나 쥐어박았다.
"미친년! 그만 때려! 시발! 항복! 항복이라고!"
에이든은 같이 주먹질하고 싶었지만, 심한 탈력감에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항복은 뒤져서 너희 어머니한테나 해라!! 황녀 펀치!!"
케이트는 욕지기를 뱉으며 이제는 발까지 열심히 움직였다.
"너!! 우리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뒤지긴 했어도 우리 엄마야! 악!! 너희 아버.."
"울 아빠 황제야!! 욕해봐! 광장에 목 걸려서 구경거리 되고 싶으면 욕해보라고!!"
"그..그럼 너희 어머..."
"우리 엄마 욕하면 진짜 뒤져!! 너! 진짜 뒤진다고!"
"이 미친년이?! 너는 욕했잖아!!!"
"어쩌라고 너랑 나랑 신분이 다르잖아! 신분이!! 이 하층민아!!"
"너..너 그거! 신분 차별이야!!"
"어쩌라고!! 제국에서는 합법이야! 그냥 뒤져!! 이 발정 난 하층민 새끼야!!"
그런 둘 옆으로 다가온 안드레아와 수녀들이 조용히 서윤과 이지수를 치료했다.
***
삐삐빅삐비빅.
익숙한 신호음에 천오는 눈을 떴다.
'충전이 다 됐네.'
천오는 멍하게 몸을 확인하며 고개를 꾸벅꾸벅 졸았다.
햇빛으로 채운 에너지는 천오의 정신을 무겁게 했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다니는 벌레가 천오의 눈에 들어왔다.
'저건 무슨 맛일까.'
천오는 잽싸게 팔을 뻗어 벌레를 잡아 입에 냅다 넣었다.
열심히 입을 움직였지만, 천오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찾아오는 거부 반응에 입에 넣은 걸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융합후에 부작용으로는 뭐가 있습니까?'
'...확인 ...부작용... 오감을 잃... 발육이... 고대의.. 받아..'
'그 힘이 탐나기는... 극심... 그리고 대부분...융합 과정에서... 터짐...'
'그렇지... 이런 연고 없... 아이... 테스트...'
'스티루마... 생각...'
'거기에... 스티... 기계공...'
천오는 언뜻 떠오르는 기억을 고개를 흔들어 지웠다.
오래전의 의미 없는 기억들이었다.
고개를 흔들던 천오의 시선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천이 잡아끌었다.
저건 무슨 맛일까.
'이런 거 주워 먹지 말라니까!'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천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을 흔들었다.
이건 먹어도 되는 걸까?
오감이 없는 천오에게는 음식과 사물의 경계가 모호했다.
잠시 인상을 쓰며 고민하던 천오는 일단 입에 집어넣었다.
웩.
못 먹는 건가 봐.
에이든은 맛있게 먹던데...
천오는 아쉬움에 고개를 돌려 다른 음식을 찾았다.
그때, 천오의 머릿속에 벼락 치듯 신호가 울려 퍼졌다.
'복귀하라.'
아마 그들이 박아놓은 이상한 침 때문이겠지.
천오는 억지로 고개를 흔들며 신호를 무시했다.
아직 에이든과 같이 다니는 게 재밌었다.
'복귀하라.'
하지만, 무시해도 신호는 더욱 강해질 뿐 사라지지 않았다.
신호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세기가 강해졌다.
그 신호에 결국 정신이 멍해지며 자신의 존재가 흐릿해졌다.
조금 더 버티면 자아가 뭉개질 수도 있었다.
천오는 아쉬움에 방안을 둘러보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에 머리가 휘날렸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복귀 장소는 공화국의 수도. 좌표는 .'
수도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럼 에이든은 이지수 때처럼 자신도 구해줄까?
천오의 입꼬리가 고장 난 듯 삐꺽거렸다.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천오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생기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