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기마술의 정점.
* * *
상대 진영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아마 이렇게 쉽게 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제야 깨닫다니.
잠시 뒤 상대 진영의 중간 부분에서 말을 탄 누군가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는 검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한 눈으로 봐도 범상치 않은 말이었다. 검은 털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러 마치 기름칠을 한 것만 같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비들을 잔뜩 장비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있는 사내는 2m는 될 것 같은 끝이 휘어진 창과 검은색 두꺼운 갑옷을 장착하고 있었다. 서슬 퍼런 날이 햇빛에 빛나는 게 범상치 않은 창이었다.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은 상대였다. 개인의 무력은 최상급에서 살짝 아래였지만, 말에 능숙한지 오히려 말 위에 있으니까 더욱 상대하기 까다롭게 느껴졌다.
이거는 좀 힘들 수도 있겠는데?
천천히 앞으로 나온 상대가 서로의 말이 들릴 거리에서 멈추고는 손에 들린 창을 붕붕 휘두르며 손을 풀었다.
“자네가 그 소문의 검귀인가.”
사내의 목소리는 마치 동굴 안에서 말하는 것처럼 굵었다.
나는 그에 응하기 위해 내 목을 풀었다.
“그렇다. 내가 그 유명한 검귀다.”
“동무? 왜 목소리를 깝네까?”
“조용히 해. 지금 사람끼리 대화하잖아.”
“이히히이이잉.”
의문을 표했던 이지수가 투레질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재밌는 모습이지만, 일기토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군. 검술 실력이 좋아 지금까지의 어중이떠중이들에게는 통했겠지만. 나에게는 힘들 걸세. 내가 자네에게 진정한 기마가 뭔지 알려주겠네.”
말을 마친 사내가 말고삐를 당겼고 그에 검은색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몸집을 부풀렸다. 검은색 말이 얼마나 큰지 사내의 모습이 말에 가려졌다. 말의 굵은 근육을 본 이지수가 몸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내의 말처럼 지금까지의 상대들과 다르게 사내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지금까지는 상대들이 죄다 좆밥들이라 그저 재미 삼아 이지수를 타고 나가 베어냈지만, 애초에 이지수의 등에 탄 상태에서는 내 최선을 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지수는 나보다 느리기도 했고 무게 중심도 맞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반응조차 나오지 않으니 이지수의 등에 타고 있는 것은 내게 꽤 큰 페널티였다.
그리고 지금 상대는 껄끄러운 느낌이 들 정도의 강자라 이지수에게 탄 상태에서는 상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붙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검은 말이 발로 땅을 긁는 모습을 보며 일단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에 이지수가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손을 둥글게 마구 돌리며 발로는 땅을 벅벅 긁었다. 검은 말과 기세 싸움을 하는 것 같았지만, 검은 말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이랴아!!”
검은 말이 콧김을 뿜어내며 거칠게 땅을 박차고 뛰었다. 진중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참을성이 부족했다.
본래 일기토란 서로 덕담을 나누고 시작하는 게 정석인데.
“일단 최대한 좌우로 움직이며 교란한다. 저 사족 보행 동물은 아무래도 좌우로 움직이기는 힘들 테니까 말이야. 겁먹지 말고.”
“이히이이잉!!”
이지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발로 땅을 박차며 옆으로 뛰었다. 그동안 훈련의 효과인지 이지수의 움직임은 제법 날렵했다.
어느새 앞까지 다가온 상대가 창을 내게 찔러넣었는데,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다르게 그 속도가 제법이었다. 나는 검을 뽑아 창과 상대까지 단번에 베어버리기 위해 휘둘렀지만, 상대가 창을 미묘하게 틀었다. 그를 따라가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지만, 이지수의 반응이 약간 느렸다.
흐트러진 무게 중심에 내 검이 허공을 갈랐고 상대의 창이 그런 내게 찔러 들어왔다. 나는 억지로 몸을 틀어 상대의 창을 피해냈지만, 완벽히 다 피하지는 못했다.
팔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지며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긁힌 것과 잘린 것 둘의 중간 정도 되는 상처가 내 팔뚝에 길게 생겼다. 물론 기운과 신성력을 돌리자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이히이이잉!!! 괜찮습네까 동무?!”
당황한 이지수가 황급히 발을 움직여 옆으로 돌았지만, 검은 말은 사족 보행 동물답지 않게 재빠르게 움직이며 우리를 추격했다. 말이 요상하게 다리를 꺾으며 고개를 돌리고 옆으로 달렸다.
“시발 무슨 말이 옆으로 달려!!”
말이 옆으로 달리는 좆같은 모습에 당황하며 검을 갈무리했다.
“우리 말은 매일 좌우로 뛰기를 훈련한다네!! 월파참!!”
사내가 희한한 기술명을 외치며 창을 붕붕 휘둘렀다. 거창한 기술명과는 다르게 그저 조금 더 세게 휘두르는 것에 불과했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그마저도 위협적이었다.
“이지수 중심!”
내 명령에 이지수가 양발을 굳건히 땅에 박으며 중심을 낮게 만들었다. 전보다 괜찮아진 중심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가오는 창을 응시했다.
시간이 느려지며 상대의 창이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상대의 창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기운을 담은 검을 휘둘렀다.
“흐으으읍!!”
그에 상대가 재빨리 창을 회수하기 위해 팔을 움직였고 나는 그를 따라가기 위해 본능적으로 상체를 숙였지만, 멈춰 있는 이지수 때문에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상대의 말이 투레질하며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렸다.
역시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는 말로 해서는 반응이 느렸다. 그렇다고 듀오 결성이 얼마 되지 않은 이지수와 내가 말하지 않고도 마음이 통할 리 없었다.
“후… 검귀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검 실력이구만. 만약 기마전이 아니라면 힘들었겠어. 하지만 말 위에서라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뭐라는 거야. 병신 말박이 새끼가.”
상대의 말에 거칠게 욕지기를 퍼붓기는 했지만, 확실히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내가 다친 게 큰 충격이었는지 이지수가 덜덜 떨고 있었다.
“걱정하지마.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하… 하지만 저 때문에 무적의 혁명 듀오가…”
덜덜 떠는 이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아무리 내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가 저렇게 야비하게 나오면 내 검이 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려서 싸우기에는 ‘젖소를 탄 검귀’ 라는 칭호가 아쉬웠다. 저렇게 멋있는 칭호를 버리기 싫은데….
고민하는 와중에 상대가 또다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내려서 싸우면 개좆밥인데, 말 타고 있다고 개깝치네 시발. 욕지기를 뱉으며 검을 고쳐 잡는데 번뜩이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그래!
내리면 되잖아.
핑계야 만들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이지수의 귀에 속삭였다.
***
“안익두입니다. 공화국에서 말을 제일 잘 타는 장수로 유명합니다. 개인의 실력은 최상급과 상급 사이지만, 말을 탔을 때는 그 창의 긴 거리와 말의 높이와 힘 때문에 최상급에도 준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실제 최상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아가 걱정스레 에이든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상대 장수와 부딪힌 에이든이 팔에서 피를 뿜어내자 주변에서 작은 비명이 들렸다.
“저저… 멍청이! 이상한 거에 꽂혀서 주야장천 타고 다닐 때부터 일낼 줄 알았다니까! 말려야 해!! 저 멍청이 다쳤잖아!! 멈추라 해!! 저 멍청이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 측 장수가 다치잖아! 다른 멍청이 내보내!!”
“황녀님! 진정하십시오! 지금의 에이든은 우리를 대표해 일기토에 나간 장수입니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큰 상처도 아닌….”
“뭐래! 피는 너희가 흘리라고! 그러라고 돈 받는 거 아니야?! 나가서 피를 흘리든지 죽든지 돈 받은 너희가 하라고! 쟤는 그냥 멍청이라니까!”
길길이 날뛰며 뛰쳐나가려고 하는 케이트를 막기 위해 기사들이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케이트의 주먹에 맞은 몇몇이 나뒹굴었다. 주먹에 실린 힘이 제법이었는지 갑옷이 군데군데 일그러졌다.
안드레아는 그들을 무시하고 땅에 흩뿌려지는 에이든의 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놓으라고!! 놔라! 명령이다!”
“하지만….”
시끄러운 주변의 분위기에 서아는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애써 무시하며 에이든에 집중했다. 에이든은 검술을 모르는 서아가 보기에도 상대에게 밀리고 있었다.
상대는 긴 창을 붕붕 휘두르며 계속해서 에이든을 압박했고 에이든은 이지수와 합이 맞지 않는지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서아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가슴을 졸이면서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정한다! 너는 강하군!! 이대로는 내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계속해서 밀리던 에이든이 돌연 멈추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그에 상대가 휘두르던 창을 멈추고 에이든을 응시했다.
“여기서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기마술의 정점을 보여주도록 하지. 감사한 마음으로 견식 하도록…”
모두가 숨 죽이며 에이든을 응시했다.
“저건 또 뭔 개 같은 소리야. 쟤가 기마술에 대해 뭘 안다고… 불안해… 저거 막아!!”
기사들에게 들려 공중에서 주먹을 휘두르던 케이트가 에이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도 케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에이든을 쳐다봤다.
“…기마술의 정점이라. 그대의 검술은 훌륭하지만, 여자를 타고 다니는 것은 기마술이 아니네. 그래도 검귀이니 생각이 있을 터… 기대되는군.”
“그런 편협한 사고에 갇혀서는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네. 자! 잘 봐라!! 정점을!”
에이든이 큰소리로 외치며 검을 하늘로 빼 들었다. 검에서 넘실대며 뿜어져 나오는 회색 검강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여자의 등에 타고 있는 모습이 좀 흉흉하기는 했지만, 검사들의 꿈의 경지인 검강을 수만 명 앞에서 당당히 피워 올리는 그 모습만은 영웅에 비견할 만했다.
“기마술의 정점!! 말과의 혼연일체!”
어느새 케이트조차 그 모습에 넋이 나가 에이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정말 저 멍청이가 기마술을 익혔다고?”
케이트가 꺼림칙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오묘한 눈빛으로 에이든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검강을 피어올리는 그 자태에 모두가 숨죽이며 에이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만 명이 모여 있음에도 작은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모이고
“자율 주행!!”
“따란!”
에이든이 당당히 소리치면서 이지수의 등에서 뛰어내렸고 상체를 숙이고 있던 이지수가 다시 곧게 세우며 양팔을 쭉 벌렸다. 그 모습이 마치 서커스단의 시작 동작 같았다.
“자… 자율 주행?”
그 당당함에 상대가 말을 더듬으며 두꺼운 투구 아래로 드러난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다! 자율 주행이란,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 서로 말을 나누지 않아도 개별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어찌 정점이 아니겠는가!”
“이히이이잉!!”
에이든이 당당하게 말하며 검을 고쳐 잡았고 말 울음소리를 낸 이지수가 냉큼 뛰어서 에이든의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결국, 에이든과 이지수가 상대를 사이에 두고 앞뒤로 있는 모습이 됐다.
“그냥 이 대 일 하겠다는 걸 당당하게 선언한 거잖아!!!”
경악하는 케이트의 목소리에 다들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건가?”
상대가 창을 고쳐 잡으며 다시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따먹다니 사내가 그딴 좆같은 단어 쓰지 말라고! 가자! 이지수!!”
“이히이이잉!!!”
발을 땅에 디디니 안정감이 찾아오며 자신감이 다시금 치솟았다.
그래 여자를 타는 게 좋기는 해도 내 발로 서는 게 훨씬 낫지.
잠시 나와 이지수를 흘겨보던 사내가 목표를 정했는지 나를 보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검은 말이 다시금 앞발을 들며 위용을 뽐냈고 이내 내게 빠른 속도로 뛰었다.
둘 중 더 위협적인 나를 먼저 치는 건 옳은 선택이었지만, 그는 이지수를 너무 쉽게 봤다.
“앞발 차기.”
어느새 권총을 빼든 이지수가 말의 뒤꽁무니를 겨누며 중얼거렸다.
상대는 그런 이지수를 무시하고 내게 창을 찔러 넣으며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그에 나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검은 말에 타고 있는 상대는 내 검이 닿기에는 너무 높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혼연일체인 나는 나의 애마 이지수를 믿으니.
탕!
이내 이지수의 권총이 불을 뿜었고.
“이히이이이잉!!”
검은 말이 궁둥이에서 피를 뿌리며 휘청였다. 상대가 억지로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고삐를 강하게 틀었지만, 궁둥이가 씹창난 검은 말이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둘은 내게 미끄러졌다. 그에 나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같이 보내 줄 테니 억울해하지 마라.”
검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범상치 않았다. 검은 마치 곧 식사를 앞둔 사람처럼 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혀를 날름거렸다. 나는 그런 모습에 웃으며 내게 쓰러지는 상대를 향해 검을 베었다.
“기마술의 정점! 말 반 토막 내기!”
그가 자랑하던 검은 말도 내 검을 멈출 수 없었고 그가 두르고 있던 두꺼운 갑옷도 내 검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내 검은 사내와 검은 말 그리고 번쩍이는 창까지 베어내고 나서야 멈췄다.
사이좋게 반으로 갈라진 사내와 말이 내 옆에 미끄러지며 철퍼덕 쓰러졌다.
“거기서는 행복하게 살아라!”
피가 잔뜩 묻은 검을 털자 검이 금세 피를 머금었다.
퉤퉤퉤! 말 피가 섞였군! 맛없어.
골고루 먹어야지. 편식하면 몸에 좋지 않아.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자그마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니 상대 진영의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굳게 올라가 있던 깃발이 천천히 내려갔다.
아마 방금 나온 인물이 그들의 마지막 수였던 듯 그들은 패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수도로 가기 전 마지막 성까지 탈취했다.
모든 일기토를 내가 나서서 처리했으니 이 정도면 전쟁 영웅 아닐까?
‘전쟁 영웅, 젖소를 탄 검귀.’
정말 누구라도 탐낼만한 호칭이다.
“에이든 동무!! 저 잘했습네까?!”
이지수가 잔뜩 신나서 내게 뛰어와서 방방 뛰었다. 그럴 때마다 연신 움직이는 큼지막한 가슴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래. 잘했다. 이로써 우리의 무패 역사는 길이길이 전해질 거야.”
진짜 말처럼 내게 머리를 비비는 이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우리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럼 오늘도 보지 팡팡 해주시는 겁네까? 헤헤!”
머리를 비비던 이지수가 슬쩍 나를 올려다보며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잔뜩 붉어지고 일그러진 우리쪽 진영이 보였다.
이겼는데 표정이 왜 저래?
***
까드득
까드득
…참아?
…더?
까드득….
어두운 방의 구석에서 루나는 계속 이를 갈았다. 그러다 손톱이 자라면 다시 손톱을 뜯었다. 노노하는 루나에게 이끌려 몇 번이나 공간 이동을 했다.
저번 공간 이동에서는 주변에 악마처럼 보이는 것들이 잔뜩 있었고 루나는 손가락 하나로 그들을 벌레 죽이듯 짓이겨 버렸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그들의 잔해를 뭉쳐서 다시 한번 짓이기는 모습은 노노하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쓰레기 청소는 제때, 쓰레기 청소는 제때, 쓰레기 청소는 제때.’
그 이후로 루나는 몇 번이나 공간 이동을 하며 사람이든 악마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치워나갔다. 그중 루나의 마법을 막은 상대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의 이동 끝에 지금 장소에 정착했다.
노노하는 주변에 지팡이를 든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는 것과 음식을 가져다주는 노인네가 큼지막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위치가 마도 왕국이 아닐까 짐작했다.
노인네는 흰 수염에 맞게 경지가 지고해 보여서 노노하는 작은 기대를 했지만, 매번 음식을 두고 귀신을 본 것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망갈 뿐이었다.
노노하는 작게 심호흡하며 음식을 루나 앞에 차렸다. 그래도 전보다 적응 된 상태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루나는 노노하에게 해코지하지 않았다. 이따금 노노하를 노려보다가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다만, 그 거대한 마나의 압박과 짓이겨진 시체들 그리고 방을 벗어나지 못하게 걸어둔 마법이 노노하를 숨 막히게 했다.
계속 루나를 돌보던 노노하는 최근 들어서 루나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다 쥐포로 만들어도 자신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이 모노하를 약하게 만들고 루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 이후로 노노하는 천천히 루나를 살피며 파악했다. 수준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의 고위 마법을 부리는 루나였지만, 그 정신 상태는 어린아이와 비슷했다. 모든 관심이 오직 에이든에 쏠린 어린아이.
무엇이 루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루나는 에이든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광적인 집착은 사랑이라고 표현하기 힘들었다.
계속해서 에이든의 이름을 반복하다가 시간이 되면 일하러 가는 것처럼 공간 이동해 주변의 것들을 짓이기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닌닌. 닌닌.”
음식을 다 차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노노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까드득 까드득
하지만 루나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닌닌 닌닌”
노노하는 다시금 입을 열어 의사를 전달했다.
“…응응응.”
루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음식 앞에 앉았다. 로브 아래로 드러난 앙상한 팔이 노노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런 약해진 마음이 순간 노노하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아니 사실 더는 갇혀 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섞여 있었다.
“닌닌.닌닌.”
“…진짜? 이제 찾아가도 될까?”
루나가 자신의 목에 걸린 목줄을 길게 빼 잡으며 고장 난 것처럼 고개를 삐걱거렸다. 잡는 부분인 목줄의 끝은 루나가 하도 핥아서 가죽이 다 벗겨진 상태였다.
“닌닌.”
세상이 밝아지도록 환하게 웃는 루나의 미소가 노노하의 마음을 가볍게 했다.
문득 노노하는 루나와 같이 나가는 것 또한 닌자 몰살이 아닌지 곰곰이 고민했다.
‘이 정도면 할만큼 한 거지.’
어차피 에이든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대충 넘기며 식사를 열심히 하는 루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