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70화 (170/233)

〈 170화 〉 아싸들을 보살피는 에이든.

* * *

“에이든 동무… 그럼 혁명은 성공한 겁네까?”

이지수가 어울리지 않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 결국, 김익한이 악마로 변해서 터져 죽었으니까. 악마로 변하다니 정말 애미 터진 놈이야.”

나는 세상을 멸망시킬 것처럼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던 악마를 박수 한 번에 짓이기던 루나의 모습이 생각나 몸을 슬쩍 떨었다.

“혁명이란 건 생각보다 허무한 것 같습네다. 성도 그대로고 사람도 그대로인데….”

“앞으로가 달라지겠지. 어찌 됐건 혁명은 성공했으니까.”

이지수의 시선을 따라 창문을 쳐다봤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근데 시발 그럼 진짜 드숀이 공화국 먹은 거야?’

문득 든 생각에 배가 슬쩍 아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수염 붙일 걸 시발.

“거기 제대로 들어!”

“으…으아악!”

“이런 염병할 새끼! 그것 하나 똑바로 못하냐?!”

시체를 가득 들고 가다가 엎어진 병사를 옆에 있는 제법 태가 나는 수염을 지닌 병사가 호통치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소설에서 다루지 않는 전쟁의 뒷이야기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명이나 죽었을까.

잠시 수를 세다가 문득 귀찮아져서 포기했다.

나는 주워온 후로아의 약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밖을 쳐다봤다.

천오와 키아나는 안드레아 쪽에 맡겨뒀고 루나는 남은 뒤처리를 도와주라고 보냈다.

마법이 이런 면에서는 효과적이니까. 유난히 순순히 내 말을 듣는 루나가 조금 두려웠지만, 다행히 루나는 아직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았다.

“아! 에이든 동무 그거 들었습네까? 연회를 연다고 들었습네다. 엄청나게 크게!”

“연회?”

평민 출신인 내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물론 용사 아카데미 시절에도 가끔 귀족들끼리 모여서 연회를 열었다고는 들었지만, 평민에 아싸인 내가 참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말을 취합한 결과 연회는 인싸들끼리 모여 맛있는 걸 먹고 하하호호 하는 것 같았다.

“예. 완전히 크게 한다고 합네다!”

이지수는 우스꽝스럽게 팔을 벌리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흔들리는 큼지막한 가슴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

아카데미 시절과 다르게 지금의 나는 전쟁 영웅에 검귀니까. 충분히 참여할 만했다.

“맛있는 게 많았으면 좋겠네.”

“…그러면 저랑 같이 연회에 가시겠습니까?”

이지수가 어울리지 않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뭐 같이 가겠지. 당연히.”

얼굴을 간지럽히는 따사로운 햇볕에 길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야쓰!!”

이지수는 에이든 옆에 있는 다른 쟁쟁한 후보들 때문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물었지만, 돌아온 긍정적인 대답에 크게 환호하다가 문득, 에이든의 대답이 묘하게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에이… 설마 연회에는 자신의 연인과 팔짱을 끼고 들어가는 건 대륙 공통의 규칙인데, 설마 모르겠습네까. 그럼 그때를 봐서 내 필살의 젖 비비기를….’

이지수는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에이든의 옆얼굴을 훔쳐보면서 자신의 복장을 확인했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연회에 입고 갈만한 이쁜 옷이 없었다.

“그…그럼 저는 잠시 밖에 좀 다녀오겠습네다! 혁명!”

이지수는 냉큼 에이든에게 경례를 올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쁜 드레스를 구하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나저나 연회라면 제국 음식도 나오려나. 공화국 음식은 질리는데 말이야.’

그런 기운 넘치는 이지수의 뒤통수를 보며 에이든은 다시금 하품을 길게 했다.

***

“아­ 에이든 님.”

환자들을 돌보고 있던 안드레아가 단아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 이건 좀 아닌가. 뭐 다들 죽지는 않았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인사를 건넸다가 주변에 가득 쓰러져 있는 환자들의 신음에 말을 고쳤다. 몇몇 환자가 나를 노려봤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풋, 두 분 보러 오신 거죠?”

내 말에 안드레아가 입을 가리며 작게 웃고는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흰 드레스 너머로 안드레아의 엉덩이가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안드레아는 흰색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네요.”

“아… 고마워요. 에이든 님도 음… 옷이 굉장히 잘 어울려요.”

별 생각 없이 한 칭찬에 안드레아가 작게 웃으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내 칭찬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내 꼴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그 반응에 나는 내 옷을 확인했다. 곳곳에 구멍이 크게 뚫리고 배 쪽은 아예 옷이 뜯겨 있었다.

“일이 좀 많았어요.”

나는 슬쩍 배 부근에 힘을 주어 근육을 만들었다. 그러자 제법 멋있는 굴곡이 배에 형성됐다.

“그…그렇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방에서 보고 계시면 제가 새 옷을 가져다드릴게요.”

홀린 듯 보고 있던 안드레아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안드레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득, 연회가 떠올랐다. 연회니까 기왕이면 많은 사람이랑 같이 참석해야 가서 따돌림 안 당하겠지?

인싸들이 모인다고 생각하니 슬그머니 용사 아카데미 PTSD가 올라왔다.

지금의 나는 검귀니까.

용사 아카데미 시절의 나는 더는 없는 거야.

나도 많은 사람이랑 가서 인싸가 되는 거야.

“아! 맞다. 안드레아­ 연회 이야기 들었어요?”

“연회요? 네. 듣기는 했지만, 공화국의 행사라….”

“그럼 안드레아도 저와 같이 갈래요?”

내 물음에 안드레아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안드레아는 마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굴이 다시금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저…저랑 에이든 님이 같이 연회를요?”

“바빠서 못 가요?”

“아니요! 가요! 무조건 가요! 갈게요! 같이 가주세요!”

처음 보는 안드레아의 격양된 반응에 오히려 물어본 내가 당황했다. 혹시, 안드레아도 아싸라서 연회에 가고 싶지만 못 가고 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안드레아가 불쌍했다. 저런 청순한 외모를 지닌 안드레아도 아싸라니…. 정말 인싸의 길은 멀구나.

“걱정하지 마요, 안드레아한테는 제가 있잖아요.”

나는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동질감을 듬뿍 담아 말했다. 나! 검귀! 안드레아를 기필코 인싸들의 무리에 낄 수 있도록 만들겠다!

“…네. 저한테는 에이든 님이 있으니까요. 여기에요.”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다시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안드레아가 단아하게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입을 벌리며 자는 천오와 팔굽혀 펴기를 하는 키아나가 있었다.

치료되자마자 운동부터 하다니. 정말 지독하네.

“아직 환자라 운동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자고로 근육이란 하루라도 쉬면 금세 줄어들어서…. 사제!”

안드레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키아나에게 쏘아붙였다. 그에 자리에서 일어난 키아나가 안드레아의 핀잔을 가볍게 웃어넘기고는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보다시피 멀쩡해요. 그럼 저는 가볼게요. 구해야 할 것들이 생겨서!”

키아나를 살짝 흘겨본 안드레아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방을 빠르게 나갔다.

“그나저나 사저, 몸은 괜찮아요?”

“응. 역시 성녀라 그런지 치료가 정말 대단하던데. 오히려 몸 상태가 전보다 좋아진 것 같아.”

“그래도 안드레아의 말처럼 바로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요.”

내 말에 키아나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이마에 난 땀을 소매로 대충 닦았다. 그냥 대충 땀을 닦는 모습이었지만, 그 사기적인 외모 때문에 보고 있는 나도 괜히 운동하고 싶어졌다.

“큼큼…. 그때 어떻게 된 거예요?”

“그때? 아 주먹왕님? 겨루시다가 그냥 가시더라고 거기서 조금만 더 했으면 아마 위험했을 거야. 아직도 너무 부족해 나는.”

키아나가 고운 눈썹을 찡그리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자신의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을 보는 그 눈에 담긴 갈망은 내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에 장난기가 올라왔다.

“그럼 결국 사저가 이긴 거네요. 그쪽이 먼저 도망갔으니까요.”

“…응? 이겼다고 보기에는… 그래도 정식 대련법 상으로 먼저 가셨으니… 이겼다고 보는 게 맞나?”

키아나가 내 말에 깊게 인상을 쓰며 고민했다.

“사저가 이겼으니 상을 줘야겠네요.”

“…상? 어떤? 아앗!! 잠깐만! 아니아니! 내가 졌어! 내가 졌었어! 내가 먼저 검을 떨어뜨렸다니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키아나의 얼굴이 갑자기 확­ 하고 붉어지더니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허우적거렸다. 그 모습이 평소의 키아나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우스웠다.

“푸하하하! 장난이에요. 장난!”

“그러니까 이긴 게 아니라… 뭐?”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터졌고 열심히 변명하던 키아나의 말이 멈췄다.

“하하하 그냥 사저가 너무 진지해 보여서 장난친 거예요.”

“장난…? 아니! 제국법상으로는 내가 이긴 거야. 사제.”

“사… 사저? 왜 그래요?”

얼굴이 잔뜩 붉어진 키아나가 과장되게 소매를 걷으며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 장난에 맞춰서 강수를 둔 듯한데, 덜덜 떨리는 손이 그를 받쳐주지 못했다.

“그래요? 그럼 벗고 만질래요?”

“…아니! 장난이야! 진짜 장난이야! 벗지마 사제!”

내가 바지 단추를 만지며 말하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키아나가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말을 더듬었다.

“저 벗어요?!”

“안돼!!!”

장난스럽게 바지춤을 내리자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난 키아나가 내 손을 잡았다. 얼마나 빨랐는지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다.

내 바로 앞에서 키아나가 얼굴을 잔뜩 벌겋게 하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장난인데요?”

키아나가 작게 인상을 찡그리더니 손으로 슬쩍 내 앞머리를 넘겼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화났어요?”

“아니 화 안 났어. 사제.”

“제 고추 못 만져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니야! 나 화 안 났어! 진짜로!”

“만지고 싶었어요?”

“그런 게 아니야!!”

똑똑.

한창 키아나를 놀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아가사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둘이 뭐 하고 있었어요? 분위기가 이상한데­.”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는 아가사에게 키아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흐응… 냄새가 나는데. 이거 입으래요! 안드레아가 갑자기 뛰쳐나가서 제가 전해주러 왔어요.”

“어 고마워. 잘 입을게.”

“옆에 애도 있는데 너무 뒹굴지 마시고요.”

“그게 아닙니다!!”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는 아가사에게 키아나가 황급히 변명했지만, 이미 아가사는 나가고 없었다.

“아 맞다. 사저 연회 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연회? 공화국에 연회를 열 여력이 있나?”

“그런가 봐요. 같이 갈래요?”

내 질문에 키아나가 마치 놀란 고양이처럼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숙였다.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내 저의를 파악하겠다는 듯 나를 열심히 훑어봤다.

내가 아싸라 내 주변에 있는 애들도 죄다 아싸인가? 연회에 가자는 말만 들으면 왜 죄다 이상한 반응이지.

“…왜 그러는 거예요?”

“내… 내가 사제랑 연회를 같이?!”

“네. 사저도 같이 가면 즐거울 것 같아서요.”

“나랑 가면 재미 없을 텐데… 내가 그런 곳을 잘 안 가기도 했고, 남들처럼 아름다운 드레스도 없으니까. 안 입기도 하고…. 또 남녀 사이는 잘 모르고….”

키아나가 자꾸만 조그맣게 꿍얼대며 손가락을 비볐다. 누가 봐도 같이 놀아준다는 것에 감동한 아싸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내가 아싸 출신이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검귀지만.

“괜찮아요. 저는 사저랑 있는 게 좋은걸요.”

“…응. 알았어. 나 서투르지만 열심히 준비해볼게.”

전투를 치르기 전보다 더욱 굳은 키아나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얼마나 외롭게 살았으면 같이 연회 가자는 말에 저렇게나 감동할까.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자꾸만 고장 난 것처럼 중얼거리는 키아나를 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 주변의 아싸들을 이번 기회에 다 같이 연회에 데리고 가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기로.

[소…소년 연회란….]

[입 닫게 한창 재밌어질 예정이니.]

***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이 새끼는!’

케이트는 오랜 시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쥐가 난 다리를 손으로 주무르며 작게 불평했다. 케이트가 에이든의 방으로 가는 복도에 대기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연회에 같이 가자고 방으로 직접 찾아가서 묻기에는 뭔가 지는 느낌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대기 중이었다.

옆에서 쫑알거리는 조슈아는 친히 주먹을 먹여 조용히 시켰다. 뭘 그렇게 품위 어쩌고 하면서 자꾸만 거슬리게 하는지. 황녀인 나는 뭘 해도 품위가 넘치는데 말이야.

케이트는 저린 다리를 풀면서 자신의 복장을 점검했다. 가슴골이 보이는 가볍지만 깔끔한 드레스 그리고 그 위에 입은 청순함의 대명사 가디건까지. 완벽한 무장이었다.

“휴­.”

긴장을 풀기 위해서 작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쪼그려 앉았다. 아직도 저린 다리를 위해 침을 코에 작게 발랐다. 조슈아가 기겁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발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어 확인해보니, 씻고 나왔는지 머리에 물기가 남은 에이든이었다. 어디서 났는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이 에이든과 꽤 잘 어울렸다.

케이트는 갑자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가슴에 주먹을 조용히 박아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나는 지나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다. 연회가 열린다던데? 흥­ 평민인 너는 못 가겠지만, 황녀인 내가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서 같이 가주마. 고맙지? 고맙지? 너무 건방진가? 그…그래도.’

속으로 되뇌면서 케이트는 자꾸만 풀리는 표정을 힘을 주어 뻔뻔한 표정으로 바꿨다. 이윽고 에이든이 가까이 다가왔고, 케이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복도에서 나왔다.

“어?! 평민?”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흥! 지나가는 길이었다! 뭐?! 불만 있어?”

“거기 옆에는 남자 샤워실밖에 없는데?”

“에엑?! 그게 무슨?!”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케이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케이트는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을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케이트의 눈에 정말 남자 샤워실이 보였다.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도 신기할 정도로 대놓고 있었다,

‘아차! 아까부터 조슈아가 뭐라고 자꾸 꿍얼거렸는데, 그게 그 말이구나.’

케이트는 충언을 무시한 군주의 말로를 체험하며 재빨리 변명을 생각했다.

“자…자고로 군주란 남녀 구분 없이 모든 것을 살피며….”

“뭔 개소리야. 아! 마침 잘 됐다. 케이트.”

“으응? 그러니까 내가 저기 있었던 건….”

케이트는 에이든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황급히 말을 잘랐지만, 에이든은 그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나랑 연회 같이 가자.”

에이든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굼벵이에다가 눈치 없는 녀석이 먼저 저렇게 말할 리가 없는데?!’

케이트는 에이든의 말에 순간적으로 이게 꿈인가 싶어서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전에도 가끔 저놈이 꿈에 나타나 케이트를 혼란스럽게 한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필수 절차였다.

“아악! 아파!”

너무 힘차게 뛰는 심장에 순간적으로 힘 조절이 안 돼서 너무 세게 꼬집었다.

“뭐…뭐 하는 거야 이 빡 대가리야!”

“됐어! 감히 평민이 제국의 황녀인 내게 연회를 같이 가자고 말한 거야?!”

‘뭐가 문제야 나는 도대체!!’

케이트는 습관적으로 건방진 말을 내뱉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매번 이러는 게 문제였다. 이 입은 자꾸만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워서 매번 자신을 방해했다.

“싫어? 싫으면 말고.”

“그렇지만! 넓은 아량과 서민과의 교류 또한 군주의 훌륭한 덕목인바! 평민인 너에게 황녀인 나와 같이 연회를 가는 것을 허한다!”

‘진짜 나는 멍청이인가 봐!’

케이트는 한껏 쳐올린 턱을 내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녔다.

“그…그래라. 고맙다 허해줘서.”

에이든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케이트를 지나쳤다. 그 순간에도 케이트는 한껏 쳐든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쾅.

이윽고 에이든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이이잇!! 이익!!”

케이트는 그제야 턱을 내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됐건 에이든은 자신에게 연회를 가자고 요청했다. 심지어 자신이 건방진 대꾸를 했는데도 평소와는 다르게 화도 내지 않고!

그것은 에이든에게 다른 년들보다 케이트가 제일 중요하다는 뜻일 터­.

케이트는 파트너가 없어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다른 년들의 실망감 어린 얼굴이 눈에 아른거려 몸이 자꾸 움찔움찔했다.

그리고 그런 년들을 에이든의 팔짱을 낀 자신이 거만하게 내려보는 모습, 그 상상에 몸이 다시 한번 부르르 떨렸다.

케이트의 몸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승리감.

그 자체였다.

“정실은 나다 이거야! 이 우둔한 년들아! 으헤헤헷! 황녀 만세!”

“황…황녀님 웃음이 너무 경박합니다! 자세는 또 그게 뭡니까! 남들이 볼까 두려우니 빨리!”

“으헤헤헷! 으헤헤헤! 꺄르르!”

***

“케이트도 했고. 그럼 다음은 루나인가? 루나는 뭐 굳이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지만.”

에이든이 머릿속으로 주변 인물 리스트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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