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회귀자의 승리.
* * *
익숙한 무게감에 잠에서 깼다.
아래를 내려보니 오랜만에 배 위에 루나가 엎어져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나?”
“응응응 에이든. 나 다하고 왔어. 에이든이 시킨 것들… 나는 뭐든 다 할 수 있어.”
루나가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씰룩대며 내게 비비며 말했다. 슬쩍 내 중요 부위에 비비는 게 뭔가를 원하는 듯했다.
“그래? 잘했네. 이제 내 말도 잘 듣고 기특해. 나는 내 말 잘 듣는 루나가 좋아.”
“응응응. 말 안 듣던 루나는 이제 없어! 걔…걔는 죽었어! 지금 루나는 완전 말 잘 듣는 루나야!”
나는 최대한 아이한테 말하는 것처럼 쉽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루나가 잔뜩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얼마나 거세게 끄덕였는지 얇은 루나의 목이 똑하고 부러질까 걱정될 정도였다.
루나는 확실히 케어해 둘 필요가 있었다. 언제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은 성격에 그 지닌 압도적인 무력은 그 사고의 크기를 한껏 키울 정도니까.
“응. 나는 말 잘 듣는 루나만 좋아하는 거 알지? 말 안 듣는 루나는 얼굴도 보기 싫어. 완전 싫어.”
“…으응. 지금 루나는 말 잘 들어!”
약간 머뭇거린 대답이 불안했지만, 애써 넘겼다. 그러다 문득 연회가 생각났다. 루나는 누가 봐도 아싸니까 데리고 가면 좋아할 게 분명했다.
“아 맞다. 루나 연회 열린다는 소식 들었어?”
“…연회? 응응응. 들었어.”
“나랑 같이 가자.”
내 질문에 루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루나의 반응이 내 예상과는 달랐다. 그 얼굴은 아픈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찡그렸다가 풀리고는 이내 다시 일그러졌다.
“루나? 왜 그래?”
혹시 얘 연회 가서 왕따 당한 기억이 있나? 하지만 어느 미친놈이 저 마법 소녀를 따돌리지.
“…응응응? 아니야 아니야. 그 에이든…?”
잠시 고민하던 루나가 이내 얼굴을 피고는 나를 슬쩍 불렀다.
“응?”
“에이든이 아는 연회라는 건 역시 다 같이 즐겁게 먹고 노는 거지?”
“응. 그렇지? 다 같이 가면 더 재밌을 테니까.”
내 대답에 루나의 입꼬리가 삐쭉하고 올라갔다. 루나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승리감이었다.
“…응응응! 그럼 나는 에이든이랑 같이 있다가 가면 되겠다. 그치? 그치? 그치?”
“응 그러면 되지. 그 전에 서아 씨도 물어봐야 하는데….”
“응응응. 좋아. 나는 에이든이랑 같이 하는 거면 다 좋아. 그렇지?”
그거를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서아가 있을 만한 위치를 생각했다.
‘나는 회귀자야. 이 멍청이들. 쓰레기들.’
루나는 저번 회차에서의 패배를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회귀한 자신에게는 정보의 우위가 있었으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저번 회차에서 전쟁에서의 자그마한 연회를 생각하며 루나는 각오를 다졌다.
이번에는 회귀한 자신이 승리하리라.
“그럼 서아 씨를 찾아가 볼까?”
“응응응.”
루나가 에이든의 배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대답했다. 그에 에이든은 비키라고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달고 다니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나는 정말 깃털처럼 가벼웠다.
***
“에…에이든 님? 그건 무슨?”
“응? 아, 이거요? 루나예요. 루나 인사해야지.”
“…안녕.”
루나가 내 배에서 얼굴을 떼지 않고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예…. 안녕하세요. 그… 에이든 님? 아무리 제국이 공화국보다 개방적이라고는 하지만 배에 여자를 달고 다니는 것은….”
서아가 내 배에 매달린 루나를 보고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국에서 유행이에요. 나중에 공화국에도 들어올걸요? 제 등 쪽에 자리 비었는데 서아 님도 타실래요?”
“예에?!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두 발로 서 있는 게 좋아요. 그…그래도 제안 해주셔서 감사해요.”
역시 놀리는 건 서아가 반응이 제일 좋았다.
“서아 씨도 연회에 대해 들었죠?”
“연회요? 예. 제가 조금이지만, 관리를 맡고 있기도 해서요.”
“아. 그래요? 그럼 서아 씨는 연회 참여 못 해요?”
“…참여할 수는 있는데, 잠깐밖에 못 있을 거 같아요. 왜 그러세요?”
“저랑 같이 연회 가자고 하려 했죠.”
“에엣?! 저랑 같이요?! 저는 좋지만… 에이든 님은 괜찮아요? 다른 아름다운 분들도 많은데… 저는 좋지만….”
“응? 다 같이 가면 되잖아요. 아름다운 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서아 씨도 아름다운데요. 명품 엉덩이!”
“아악!! 그… 일단 감사해요! 감사한 데! 이렇게 밖에서는 조금 자제를…! 그리고 다같이라니…. 설마 에이든 님 주변 분들을 다 데리고 가실 생각이에요?”
“예. 당연하죠. 많을수록 재밌잖아요. 인간이란 자고로 패거리가 많고 든든해야 어디를 가도 기가 죽지 않는 법이니까요.”
“에?! 모두 다 데리고 간다니… 에이든 님 상상 이상으로 쓰… 읍?”
서아는 돌연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열심히 입을 움직였지만, 계속해서 뻐끔거리기만 할 뿐 말은 목에 걸려서 막혔다.
“푸하하하! 서아 씨 뭐 하는 거예요? 물고기 같아요. 하하하!”
에이든은 그런 서아의 속도 모르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서아를 보며 웃었다.
자신을 보며 큰소리로 웃는 에이든의 모습에 서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짓으로 말하려고 할 때, 돌연 서아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닥쳐. 쓸데없는 말 하면 공화국을 짓뭉개 버릴 테니까.’
서아는 에이든의 품에 안겨있던 여자가 빼꼼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시선과 마주치자 서아는 한없이 가라앉아 마치 땅속으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온 세상이 어두워졌고 그곳에는 여자와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조용히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입꼬리를 삐쭉 올렸다.
‘에이든 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다 이상한 거야!’
서아는 황급히 고개를 필사적으로 끄덕였고, 그제야 원래 세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답! 고개 끄덕이는 벙어리! 정답이죠?”
에이든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서아를 가리키며 크게 웃었다.
“아…아니에요. 그럼 저는 할 일이 생겨서 이만 가볼게요. 연회는 음….”
서아의 눈에 에이든의 품에 있는 여자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진 게 보였다.
“조금밖에 못 있더라도 꼭 참여할게요! 연회장에서 봬요!”
서아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말하고는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사라졌다.
“진짜 바쁜가 보네. 그럼 이제 끝난 건가?”
나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방으로 향했다.
아직 연회가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남았으니까 낮잠이라도 더 자는 게 나을 듯했다.
[크하하하하하!!]
[크흠….]
***
안드레아는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전신 거울 앞에 나체로 섰다. 배에 떡하니 쓰여있는 에이든 세 글자를 소중히 쓰다듬으며 자신의 몸을 관찰했다.
오늘은 에이든 님이 드디어 자신을 인정하는 날이었으니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피부는 우유처럼 하얗고 부드러웠다. 몸에 있는 털이란 털은 신성력으로 일으킨 불을 이용해 다 태웠다. 남자들은 털이 없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다만, 중요 부위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 입술을 질끈 깨문 안드레아가 눈을 감고 자신이 가진 모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손은 중요 부위에 가져다 댄 상태로 절실한 마음을 담아.
‘할 수 있어. 에이든 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저저 미친…. 죽기 직전의 사람도 살리는 최상위 치료 마법을 자기 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깨우치네. 아니야! 잘했어! 안드레아! 나는 응원해! 모로 가도 오르기만 하면 되니까! 안드레아 최고다!]
이윽고 중요 부위가 시간을 거스른 것처럼 여물지 않을 정도로 탱탱해졌고, 그제야 안드레아는 밝게 웃었다.
오늘 밤을 위한 준비는 이제 끝났다.
안드레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배에 적힌 글자를 소중히 쓰다듬으며 에이든의 반응을 상상했다.
‘좋아하셨으면 좋겠어.’
안드레아는 글자가 적힌 부분이 붉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
‘이상한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키아나는 처음으로 입어보는 드레스에 몸이 쭈뼛서는 느낌이었다. 드레스는 마치 키아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몸을 쪼였다. 그 불편함에 키아나는 당장이라도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오늘 밤의 연회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사제와 내가 연회를 같이 간다니….’
키아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사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이미 입술을 나눈 사이 아닌가 우리는.’
남녀관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키아나에게 입술을 주었다는 것은 전부를 주었다는 것과 같았다. 그 이후의 단계에 대해서는 키아나는 알지 못했다.
한참을 끙끙 앓다가 이내 드레스의 불편함으로 다시 주제가 돌아왔고,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참으로 불편한 옷이야.’
키아나는 불평하면서도 거울 안에 보이는 자신의 이질적인 모습에 감탄했다. 키아나는 자신이 드레스를 입을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우습게도 쓸데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드레스는 처음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곧잘 어울렸다.
‘그…근데 가슴이 너무 파인 것 아닌가? 점원이 분명 이게 유행이라고 했는데….’
키아나는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곳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사저 가슴! 쫀득 가슴!’이라고 외치는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에 키아나는 슬쩍 가슴을 조금 더 모아봤다. 나쁘지 않은 크기였지만, 이지수에 비하면 모자랐다. 갑자기 이지수가 가슴이 작다고 놀리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작지 않아…! 나는 작은 게 아니야!’
키아나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가슴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드레스가 찢어질 것 같아 포기했다.
***
“조슈아! 어때?! 이쁘지!!”
“예… 황녀님 아름답습니다.”
“이게 더 이쁜가?! 둘 다 이쁜데 어떻게 하지?”
“예… 그것도 아름다워요.”
“조슈아! 이 멍청이가! 좀 더 진심을 담아서 평가하란 말이야! 중요한 날이라니까!”
조슈아는 자꾸만 자신을 꾸짖는 케이트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벌써 몇 시간째 갈아입으면서 물어보는지….
케이트는 하나하나가 집 한 채 가격인 드레스를 침대에 가득 쌓아두고 번갈아 가며 갈아입고 있었다.
“아씨! 시간 없는데! 화장도 받아야 하는데! 그래도 이게 더 이쁜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갈아입어야겠어!”
결국, 한참이나 드레스와 씨름하던 케이트는 제일 처음에 골랐던 것을 선택했고 옆에서 안색이 보랏빛이 된 하녀들이 재빨리 옷을 갈아입혔다.
드레스를 갈아입은 케이트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문을 열고 여덟 명의 여자가 조용히 들어와서 케이트의 주변에 다양한 화장품들을 늘여놓았다.
“제대로 해! 어어엄청 중요한 날이니까! 알았어?!”
케이트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면서 주변에 있는 여자들을 윽박질렀다. 그에 여자들이 웃으면서 화장품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황녀가 말은 저렇게 거칠게 해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녀들에게 손찌검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녀님은 워낙 아름다우셔서 저희가 조금만 화장해도 충분할 거예요.”
“충분한 거로 안 돼! 연회에서 내가 최고여야 한다니까! 알았어?”
“네!”
하녀들이 윽박지르는 케이트를 보며 작게 웃었다.
***
많은 사람의 우려 속에서도 공화국의 연회는 결국 열렸다. 방금까지 서로 죽고 죽였는데 무슨 연회냐 하는 반발이 많았지만, 현재 수령의 첫 명령이 연회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열렸다.
수령이 된 김두환은 공화당의 곳간에 있던 음식들을 아낌없이 풀었다. 마치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그제야 공화 국민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체감했고 죽어있던 수도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런 국민의 반응에 연회를 반대했던 이들의 말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새로운 수령의 혜안에 감탄하며 칭송했다.
연회는 기존의 귀족들만 참여하던 연회 방식과는 다르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내성을 통째로 사용해서 열었다. 그래도 일반 시민들은 주저하다가 몇 명이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가자 그때야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내성의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이 있었다.
이지수는 쭈뼛거리며 자신의 드레스의 가슴 부근을 좀 더 끌어 내렸다. 그러자 이제 거의 꼭지가 보일 지경까지 드레스가 내려갔다.
‘너무 천박한가?’
잠깐 생각하다가도 옆에 있는 여자들의 면모에 금세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가슴이라도 부각하지 않으면 옆에 있는 여자들의 외모에 가려져서 이지수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흰색 드레스를 입고 하늘색 머리를 귀 뒤로 넘긴 안드레아는 누가 봐도 전설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성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키아나는 사람의 모습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안드레아조차도 키아나의 옆에 있으니 그 빛이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근데 왜 드레스에 검을 차고 온 거지?’
입술을 질끈 깨문 키아나는 자꾸만 말아 올라가는 드레스의 치마를 끌어 내리며 한 손으로는 검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이지수를 힐끔 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가슴을 삐쭉 내밀었다.
이지수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 이지수가 우려했던 것처럼 에이든은 연회가 뭔지 모른 듯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여자에게 연회에 같이 가자고 한 것이 분명했다.
마치 같이 밥 먹자고 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질 수는 없습네다! 땅이 무너져도 하늘이 있는 법!’
이지수는 속으로 다짐하며 자신이 살길을 모색했다. 자신의 외모도 어디 가서 빠진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여기 사이에 껴 있으니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주변에서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지만,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기묘한 상황이 지속됐다.
그런 미묘한 불편함 속에서 연회장의 앞에 큼지막하고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화려한 장식을 한 케이트가 거만한 표정으로 내렸다.
이지수는 그 모습을 보며 방금까지 내성에 있던 케이트가 왜 굳이 밖으로 나가 마차를 타고 왔는지 의문을 품었다.
얼마나 높은 구두를 신었는지 자그맣던 케이트가 이지수와 눈 위치가 비슷한 지경까지 올랐다. 물론 풍성한 드레스로 하반신을 가려 구두가 보이지는 않았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온 케이트가 세 명을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잠시 눈썹을 씰룩대다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오호호호홋! 멍청이들!”
마침내 세 명 앞에 선 케이트가 턱을 쳐들며 웃었다. 기이한 케이트의 웃음소리에 세 명 다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키아나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케이트에게 물었다.
“너희가 그렇게 쫙 빼입고 여기 서서 있다고 에이든이 불쌍해서 데리고 갈 것 같아? 에이든은 이미 나와 같이 가기로 했거든. 너희는 패배자라 이거야! 내가 정실이다!!”
턱을 거만하게 쳐든 케이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쪽 손은 앞쪽으로 쭉 내밀고 있었다.
케이트의 말에 안드레아와 키아나의 안색이 굳었고, 이지수는 자기의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어. 다들 와 있었네.”
그런 케이트의 뒤로 태평한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렸고.
“야! 어떻게 황녀인 나보다 늦게 올 수가 있어?! 여기서 멍청하게 기다리는 이 우매한 것들에게… 에?”
비웃음을 얼굴에 잔뜩 머금은 케이트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반갑게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는 맞춘 것처럼 검은색 정장과 원피스를 입은 에이든과 루나가 있었다. 루나는 에이든의 한쪽 팔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케이트가 연습했던 거만한 표정이 들어서 있었다.
“아 미안. 루나가 옷 좀 맞추자고 해서.”
에이든이 케이트에게 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케이트는 그런 둘의 모습에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키아나와 안드레아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드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배 부근을 쓰다듬었고, 키아나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자꾸만 검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따금 검날이 살짝 나오는 것을 보면 그다지 에이든에게 이로운 생각은 아닌 듯했다.
패닉에 빠진 여자들의 모습을 보며 루나는 에이든의 팔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 길게 혀를 내밀었다. 이건 저번 회차에서 웬 꼬맹이에게 루나가 당한 것이었는데, 그 당시 기분은 나라 하나를 날려 먹을 만큼 좋지 않았다.
물론 그 꼬맹이는 루나가 회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처리했다.
“자! 다들 들어가서 재밌게 놀아볼까요?”
에이든이 해맑게 웃으며 잔뜩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내 살길이다.’
빠르게 판단 내린 이지수는 냉큼 달려가서 에이든의 반대 팔을 끌어안았다. 루나와는 다르게 이지수가 끌어안자 에이든의 팔은 가슴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영웅호색이라고 들었습네다!! 에이든 동무는 영웅이 분명합네다!! 저는 좋습네다! 갑시다! 거기 동무들은 싫으면 가십쇼! 붙잡지 않습네다!”
이지수는 자신을 노려보는 루나의 시선을 외면하며 기운차게 외쳤다.
까드득.
이지수의 발 빠른 반응에 잠시 침묵이 돌았고.
“이…이… 이익!! 이 개 미친 병신 새끼야!!!”
찢어지는 듯한 케이트의 욕지기가 우렁차게 울렸다.
이번에는 안드레아와 키아나가 케이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키아나의 검날은 이미 반쯤 뽑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