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72화 (172/233)

〈 172화 〉 정신 없는 연회장.

* * *

“죽어! 뒤지라고 그냥!! 뭐?! 다들 들어가서 재밌게 놀아볼까요? 아주 그냥 머릿속까지 썩었어! 너는!”

“아니 왜 지랄이야. 뭐가 문제인데 도대체.”

나는 거친 케이트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케이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뜨거운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나를 마구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뭐? 뭐가 문제?! 허! 허허…. 허허허.”

잔뜩 화를 내던 케이트가 내 반응에 실성했는지, 허탈한 듯 짧게 웃으며 혼잣말했다.

“사저? 검은 왜 뽑는 거예요?”

“…사제는 연회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슬금슬금 뽑는 키아나를 황급히 말렸다. 도대체 드레스에 검을 왜 들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며 검을 뽑는 모습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즐겁게 다 같이 모여서 먹고 마시는 거 아니에요?! 사저? 왜 자꾸 검이 밖으로….”

“그렇구나. 사제는 연회가 그런 줄로 알았구나. 그래서 나한테 같이 가자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드레스를….”

“이 멍청아! 연회라는 건 파트너랑 같이 참석하는 거야! 다 같이 떼로 몰려가서 먹고 마시면 그게 급식실이지! 연회겠냐?! 이 멍청한 등신 새끼!”

잔뜩 화가 난 케이트가 괴성을 지르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애가 그동안 뭔 짓을 했는지 그 속도가 상급에 준할 정도로 빨랐다. 다만, 그 흉흉한 기세와 상관없이 공중에 멈춰서 발버둥 쳤지만.

“이…이건 또 뭐야! 너! 너지?! 이거 안 놔?!”

“패배자의 발악. 곤란.”

케이트가 벌겋게 뜬 눈으로 루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지만, 루나는 사뿐히 미소 지으면서 검지를 까닥까닥할 뿐 풀어주지 않았다.

“후… 일단 진정하시죠. 에이든 님이 모르셔서 발생한 문제니까요.”

길게 숨을 내뱉은 안드레아가 억지로 웃는 얼굴로 케이트를 말렸다.

“그래! 진정 좀 해!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황녀가….”

“이익! 진정?! 진정?! 진정! 지이이인정?! 보는 사람도 많은데?! 아아아악!”

잠시 조용했던 케이트가 내 말에 공중에서 몸을 마구 비틀면서 주먹을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거리가 제법 있어서 전혀 닫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케이트의 눈이 반쯤 돌아가 있는 모습이 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에이든 님, 지금은 입을 닫고 계시는 게.”

“안드레아까지 저한테 이러기에요?! 몰랐다니까요! 몰랐어요! 모르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연회를 모를 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죠. 그럴 수 있어요.”

“안드레아? 손에 왜 성물을 들고 있는….”

“황실 기사!! 황실 기사단 어디 갔어!! 저 난봉꾼 새끼 잡아서 효수시켜! 효수시키라고!!”

“어허 전쟁 영웅인 검귀한테 효수라니.”

“아아아악!! 화가 나! 화가 너무 난다! 죽을 것처럼 화가 난다!”

케이트의 발작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슬쩍 물러났다. 그 사이로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실 기사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케이트의 명을 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도무지 케이트가 저렇게 화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그리고 실수는 내 정체성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인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니.

“진정 좀 해. 아니 잘못 알았다니까. 미안해! 미안하다! 됐냐?”

“됐냐?! 됐냐?! 됐냐고?! 저저… 말하는 꼬라지 봐! 야! 검녀! 저거 놔둘거야?!”

“저는 검녀가 아닙니다. 사제 그래도 이번에는 사제가 잘못했어. 아무리 오해였다고 해도….”

“저는 됐습네다! 동무! 사실 상관 없습네다! 보지 마사지만 제때 해주시면….”

“보…보지 마사지? 무슨 마사지야 그건 또!!”

“나도 해줘 에이든. 나도 저거 해줘. 나는 왜 안 해줘? 나 잘 참았잖아.”

“늘 저희의 발판이 되는 대지시여….”

“잠깐! 잠깐만! 다들 멈춰봐요! 안드레아도 이상한 주문 외우지 말고! 일단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안에 들어가서….”

“들어가?! 지금 연회장에 성녀, 황녀, 검녀에다가 이상한 꼬맹이 두 명까지 끼고 들어가겠다는 거야? 미쳤어? 네가 무슨 전설의 용사야?!”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검녀가 아니라….”

“아니 지금 보는 눈이 많으니까…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오해를 풀….”

“오해? 오해애애애?!! 무슨 오해야!! 그냥 너는 오예! 겠지! 이 난봉꾼아!”

“나는 왜 보지 마사지 안 해줘…?”

“나중에! 나중에 꼭 해줄게.”

삐쭉 입을 내민 루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며 손을 달달 떨었다. 점점 손가락이 기이하게 꺾여서 이지수 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나는 황급히 루나를 달랬다.

“…일단은 진정하죠.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평소와는 다르게 눈빛이 좀 서늘한 안드레아가 차갑게 말했다.

“너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게 싫으면 가십쇼! 아무도 안 잡습네다! 신전이 싫으면 수녀가 떠나는 겁네다! 이미 수녀는 충분히 있으니…!”

“뭐?! 이게 말 다 했어?!”

“무…무섭습네다. 에이든 동무.”

케이트의 서슬 퍼런 눈빛에 이지수가 황급히 내 뒤로 숨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루나가 까드득 소리를 내며 내 팔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루나에게 잡힌 팔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들어갑세다! 오기 싫으신 분들은 여기 남으십쇼!”

내 등 뒤에 숨은 이지수가 소리치면서 내 등을 슬쩍 밀었다. 나는 그에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연회장으로 걸어갔다. 연회장의 큼지막한 문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그들 사이를 지나서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향했다.

“검귀님 확인되셨습니다. 혹시… 파트너는….”

연회장 앞을 지키는 병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돌아보지 않아도 등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혹시 파트너는 꼭 한 명이여야 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번 연회는 모두에게 열린 연회라 입장은 자유입니다. 다만, 귀빈들에 한해서 특별석을 배치해 드리는 데 그건 2인 기준이라….”

병사가 자꾸만 내 뒤를 훔쳐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 시선에 내 뒤에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을지 두려웠다.

“그럼 파트너는….”

나는 말을 끌면서 생각을 빠르게 돌렸다. 그래도 저들 중에서는 루나가 제일 위험하니까.

“루나입니다. 얘에요.”

“루나! 흐­.”

얼굴에 잔뜩 미소를 띤 루나가 손을 번쩍 들면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는 크게 코웃음 쳤다. 다행히 병사는 다른 이들에게는 파트너를 물어보지 않고 귀빈석을 내주었다.

연회장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오자 시끄러운 분위가 단번에 조용해졌다.

“눈깔아!!”

“여기는 제국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쏠리는 시선에 케이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옆에 있던 조슈아가 황급히 말렸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연회장을 지나 귀빈석으로 향했다. 연회장에는 사람 수와 비교하면 의자나 테이블이 부족했었지만, 귀빈석에는 그나마 자리가 좀 많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다가오자 다들 자리에서 슬금슬금 일어나 대부분의 귀빈석이 비었다.

“자! 봐봐요! 이렇게! 붙여 앉으면 되잖아요.”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노려보는 여자들의 시선에 나는 황급히 테이블을 옮겨서 길게 늘여 붙였다. 그러자 10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자리를 만들었음에도 그녀들은 자리에 앉지 않고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그 시선이 억울했다.

연회가 파트너 한 명과 가는 건 줄 몰랐지 시발. 알았으면 이렇게 다…. 별 차이 없었으려나?

나는 그녀들의 눈빛에 황급히 할 말을 생각했다.

역시 이럴 때는 불쌍한 척하는 게 최고지.

“크흠. 죄송해요. 다들. 제가 아카데미 시절에 친구가 별로 없어서…. 연회에 가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연회가 이런 건 줄 모르고. 그냥 소중한 사람들이랑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맛있는 거 먹는 건 줄 알았어요.”

나는 최대한 불쌍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 내게 울면서 매달렸던 루나의 얼굴을 흉내 내면서.

“괜찮아요. 모를 수도 있죠. 어차피 앞으로 이런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연회에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요.”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안드레아가 단아하게 웃으며 자리에 제일 먼저 앉았다.

“그럴 수도 있지. 소중하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사제.”

그다음은 검을 집어넣은 키아나가 앉았다.

내 양옆에 붙어있는 이지수와 루나를 제외하고 이제 케이트만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괜찮다고?! 미친 거 아니야?”

“싫으면 가시는 게….”

“닥쳐! 야! 너 비켜!”

대뜸 언성을 높이던 케이트가 안드레아의 말을 자르고는 내 옆에 있는 이지수를 걷어차고 그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서 밀린 이지수는 우물쭈물하다가 그 옆자리에 앉았다. 슬그머니 주먹을 든 것을 보니 케이트와 자신을 슬쩍 잰 듯했다.

“진짜 너는 머저리야. 멍청이고.”

“에이든한테 그만 고백해. 쓰레기 주제에.”

“뭐…뭐라는 거야? 이 꼬맹이는?!”

“그만해 둘 다. 미안해 케이트 몰랐다니까 진짜로. 내가 언제 이런 데를 와봤겠어.”

“…진짜 찌질이. 찐따. 친구 없는 놈.”

케이트가 나를 흘겨보면서 욕지기를 마구 뱉었다. 그러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손뼉을 크게 쳤다.

그러자 언젠가 아카데미에서 케이트와 식사할 때 봤었던 메이드들이 나타나서 각양각색의 음식들을 준비했다.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들은 연회장에 놓여있는 것들과 달리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누가 봐도 연회장 음식이 아니라 케이트가 따로 준비한 것 같았지만, 다들 애써 모른 척했다. 케이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었기 때문에.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배가 고팠던 나는 내 앞에 놓인 고기를 썰기 위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나이프도 분명히 검의 일종인데 고기가 썰리지 않았다.

“고기 하나도 못 썰고 멍청이.”

기운을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케이트가 조용히 말하며 내 접시를 가져갔다. 그러고는 나를 노려보면서 나이프를 고상하게 움직여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캬. 역시 케이트! 고기를 썰 때도 우아하네! 완전 황녀야 황녀!”

“멍…멍청아! 황녀 맞거든! 흥! 네가 고기 하나 못 써니까 그런 거 아니야! 답답해서 그런 거야 답답해서!”

볼이 붉어진 케이트가 툴툴대면서 고기가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고마…워.”

“이익! 나도 할 수 있어! 얍!”

돌연 루나가 내 말을 자르더니 손뼉을 길게 쳤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모든 음식이 일정한 크기로 잘렸다. 다만, 면이고 고기고 상관없이 다 작은 크기로 잘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 내 음식이! 이 거지 같은 곳에서 어떻게 공수한 음식들인데!!”

“헤헤.”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케이트의 절규를 애써 넘겼다.

“에…에이든 동무! 이건 공화국식으로 먹기에 최적화된 크기!! 혁명적입네다!!”

잔뜩 흥분한 이지수의 목소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지수의 그릇에는 흉측한 색의 수프가 담겨 있었다.

***

굳어 있던 분위기는 식사를 하면서 점차 풀렸다. 물론 음식이 모두 조각나버려서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는 점도 분위기를 푸는 데 한몫했다.

“그때는 진짜 끝난 줄 알았어. 갑자기 악마가 나타났을 때 말이야. 도대체 어쩌다 악마가 나타난 거야?”

키아나가 수프를 절도 있게 떠 마시며 물었다.

‘우리 재환이는 무슨 염병할 우리 재환이! 떨어져 온몸이 터진 스크램블 재환이라고….’

“모르겠어요. 들어가 보니까 악마로 변하고 있더라고요.”

“그래도 김익한이 악마에게 영혼을 넘길 사내는 아니었는데…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 같습네다!”

파스타를 후루룩 떠 마신 이지수가 입에 크림을 잔뜩 묻힌 상태로 말했다.

“그…그러게. 아주 못된 놈이었지.”

그 모습에 나는 습관적으로 테이블에 있는 티슈를 슬쩍 내밀어 이지수의 입가를 닦았다. 천오를 챙기다 보니 생긴 버릇 중 하나였다.

“고…고맙습네다! 헤헤!”

이지수가 얼굴을 붉히며 감사를 표했고 갑자기 테이블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숟가락을 보며 고민했다. 크림을 입가에 묻혀 에이든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과 에이든이 닦아주는 것. 둘의 가치를 속으로 비교했다.

‘조금만 묻히면 되지 않을까?’

마음의 추가 기운 안드레아가 숟가락을 움직이려는 순간­.

쾅!

“에이든에이든에이든! 헤헤­. 나 묻었어.”

냅다 접시에 얼굴을 통째로 박아버리는 루나를 보며 안드레아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하필 또 그 아래에 있던 수프가 매운 수프였는지 루나는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눈을 뜨고 에이든을 쳐다봤다.

***

큰 소란이 있었던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다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연회장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일어나!”

음악 소리가 들리자마자 아까부터 꿍해서 대화에 참여 안 하고 있던 케이트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내 팔을 당겼다.

배부른 상태에서 굳이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조금이지만 케이트에게 미안한 마음과 여기서 맞춰주지 않으면 일이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 순순히 따라 일어났다.

“이익­!”

“루나는 여기 있어. 말 잘 듣는 루나. 알았지?”

케이트를 노려보면서 따라서 일어나는 루나를 황급히 자리에 앉히고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아까 뜬금없이 접시에 얼굴을 박는 바람에 잔뜩 충혈된 눈동자로 케이트를 노려보던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 멍청이들.”

콧방귀를 낀 케이트가 나를 끌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들어올 때는 연회장의 중앙에 음식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지금은 벽 쪽으로 치워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는 남녀가 서로의 손을 잡고 이상한 동작을 하고 있었다.

“황녀인 나랑 춤을 추다니. 진짜 너는 영광인 줄 알아.”

나를 보며 표독스럽게 말한 케이트가 내 손을 잡고 그들의 안으로 향했다. 나는 케이트에게 이끌려 그 중심에 엉거주춤하게 섰다.

“흥! 잘 봐. 이렇게 움직이는 거야.”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얼굴에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케이트가 부드럽게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동작을 대충 눈대중으로 살펴서 비슷하게 흉내 냈다.

“제…제법 잘하네! 황녀 상대까지는 아니지만!”

케이트는 더욱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며 나를 천천히 이끌었다. 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나는 주변을 훔쳐보며 케이트를 따라 천천히 동작을 맞춰 나갔다.

점점 내 춤이 부드러워졌고, 케이트도 어느 순간부터 불평하지 않았다.

춤이 무르익을수록 점점 풀리는 케이트의 얼굴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가 단순해서 정말 다행이야.’

빠른 박자의 음악이 어느새 천천히 늘여졌고 이내 끈적한 음악으로 변했다.

순간 눈을 빛낸 케이트가 내 손을 자신의 허리춤에 가져다 대더니 거리를 좁혀 붙었다.

“원…원래 이런 거니까! 오해하지마!”

나는 그런 케이트의 반응에 작게 웃으며 케이트의 가는 허리를 슬쩍 간지럽혔다.

“으헤헤헤­ 야! 간지럽히지 마!”

“아 미안. 허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뭐뭐래! 나는 원래 다 부드럽거든!”

이내 화가 풀린 듯한 케이트의 모습에 안도하며 느린 박자의 음악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춤이란 게 춰보니 의외로 재밌었다. 무엇보다 여자의 몸을 합법적으로 만져도 된다는 것이….

“야! 미쳤어?! 이렇게 사람들 많은 곳에서! 어디를 주무르는 거야!”

“아 안되는 거구나.”

“멍청이 진짜! 호색한! 밖에서는….”

얼굴을 잔뜩 붉힌 케이트가 내 가슴을 꼬집으면서 속삭였다.

아­ 엉덩이까지는 안 되는구나.

깨달음을 얻은 나는 다시 손을 올려 허리를 슬쩍 주물렀다. 그럴 때마다 케이트가 움찔거리며 큰 눈망울로 노려봤지만, 따로 말리지 않았다.

그러다 음악이 끝났고, 케이트와 살짝 떨어졌다.

“…영광인 줄 알아. 황녀랑 춤을 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 줄 알아?”

케이트가 입꼬리를 삐쭉 올리면서 슬그머니 턱을 쳐들었다.

“그러게 황녀랑 같이 춤을 추다니 정말 가문의 영광이야.”

“흥, 고마운 줄 알아.”

춤을 마친 케이트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연회장을 떠났다.

‘정실은 때론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

이라는 이해 못 할 말을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자꾸 움찔거리는 게 뭔가 미련이 남은 듯했다.

자리로 돌아가기 전 연회장을 둘러보는데 익숙한 엉덩이가 벽 앞에서 씰룩대고 있는 게 보였다.

“서아 씨?”

“읍읍… 에이든 님.”

서아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갈색 음료가 당긴 병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서아는 그 병들을 양손에 들고 열심히 마시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요?”

“아… 생각보다 이 초코 우유가 인기가 없어서요. 제가 좋아하는 거라 발주를 많이 넣었는데… 남을 것 같아서 열심히 마시고 있었어요. 우유는 빨리 상해서….”

벌써 몇 병이나 마신 상태였는지, 서아의 옆에는 빈 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도 좀 도와드릴까요?”

“그…그래 주실래요? 처음에는 다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시다 보니 생각보다 힘드네요.”

나는 눈을 빛내는 서아의 옆에 서서 병을 양손에 들고 열심히 마셨다. 초코 우유는 달콤해서 맛있었지만, 두 병을 넘어가니 슬슬 질렸다.

잠깐 쉬고 있던 서아도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양손에 병을 들고 필사적으로 마셨다. 초코 우유를 좋아한다는 게 사실이었던 듯, 서아는 그 후로도 열 병 가까이 혼자 마셨다. 하지만 둘이 노력해도 애초에 쌓인 초코 우유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했다.

“고마워요. 끄읍­ 아악! 저 트림한 거 아니에요!!”

“뭘요. 트림할 수도 있죠. 서아 씨가 아름다워도 인간이잖아요.”

“그…그렇긴 한데, 방금은 진짜 아니에요! 그…그리고 칭찬은 감사해요….”

“그래요. 그렇다고 해요.”

“진짜 아닌데….”

고개를 숙이고 구시렁구시렁하는 서아의 말에 고개를 돌리다 서아의 큼지막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근데 그럼 지금 서아 씨의 가슴에서는 초코맛 우유가 나올까요?”

“예…? 예에에에?!! 에… 에이든 님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젖은 임신한 여자에게서만 나와요! 그리고 초코 우유를 마셨다고 해서….”

“진짜요? 그럼 확실히 안 나오는 거예요?”

“…왜 실망한 표정을 짓는 거예요! 당연한 거잖아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서아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자신에게서 초코 우유가 왜 안 나오는 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진짜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짜볼까요?”

“예에에?! 분명 방금까지 제가 설명을… 그리고 짠다고요…?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 제가 좀 바빠서요! 다음에 이야기해요!!”

내 농담에 서아는 황급히 자신의 가슴을 양팔로 가리면서 도망쳤다.

***

나는 그 후로 키아나와 안드레아 그리고 이지수 마지막에는 루나까지 몇 번이나 똑같은 춤을 똑같은 음악에 맞춰 춰야 했다. 그것은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상대가 바뀌어 다른 맛이 있었지만, 그것도 몇 번 반복하니 그저 돌아가서 자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에 자꾸만 내 허벅지에 자신의 사타구니를 비비는 루나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마지막 루나와의 춤까지 끝내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에 돌아와 대충 씻고 누웠다.

전쟁보다 연회가 더 힘들었다.

‘내가 왜 다섯 명이나 데리고 갔지.’

다섯 명이나 데리고 가니 뭘 해도 다섯 번씩 반복해야 했다. 그래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래도 오늘 하루가 이렇게 끝…

날 리가 없지.

익숙한 무게감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루나가 나체인 상태로 내 위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나?”

“나도 보지 마사지! 보지 마사지! 보….”

동네 아이가 놀이에서 진 것처럼 얼굴에 잔뜩 울분이 가득 찬 루나의 입을 황급히 막고 손을 움직였다.

한참이나 손을 움직이고 나서야 루나가 작은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고, 나는 비를 맞은 것처럼 축축한 침대 위에서 억지로 잠을 잤다.

***

쾅!

“천오 동무가 일어났다고 합네다!! 에이든 동무! 근데 일어나자마자 발작을 일으켰다고 합네다!! 엇 보지 마사지 중이셨습네까?!”

고개를 돌리니 내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에 넣은 루나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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