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73화 (173/233)

〈 173화 〉 끝을 끌어오는 자.

* * *

천오가 있는 방에는 서아, 키아나, 안드레아가 모여 있었다. 방의 한쪽에는 그때 봤던 쇠다리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사제 왔어?”

키아나가 검을 검집에 넣으면서 내게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니 저 옆에 쌓인 것들은 키아나의 작품인 듯했다.

“예. 근데 이게 무슨 난리….”

“에이든 님의 친구가 일어나셨는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길래 키아나 님이 제압하셨습니다.”

천오는 방 중앙에 마치 악마라도 들린 것처럼 끈으로 꽁꽁 묶여 있었다.

“얘가 왜 발작을 하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안에서 이질적인 힘이 느껴지는 데 그동안 제가 알던 힘과는 궤를 달리해서요.”

안드레아가 찜찜한 표정으로 천오를 응시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착하고 작은 애를 저렇게 꽁꽁 묶…”

“끄르르릉! 컹컹!”

“아잇! 왜 애가 개새끼가 됐어. 크흠­ 잘 묶어두셨네요.”

나는 손을 물려고 하는 천오에게서 손을 황급히 뺐다. 조금만 늦었으면 손에 아기자기한 이빨 자국이 남을 뻔했다.

“예. 이성은 거의 남지 않았고 공격성만 남은 상태입니다.”

“저도! 저 호로 새끼! 천오 동무가 물었습네다!!”

이지수가 벌겋게 부어오른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왜 애가 갑자기 저렇게 됐지? 전에도 모자라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제가 듣기로는 동물들은 중성화 수술이라는 걸 시켜야 한다고 들었습네다. 그걸 하지 않으면 저렇게 발정 나서 공격성을….”

“야! 천오가 무슨 길거리 동물이냐?”

험한 소리를 하며 눈을 빛내는 이지수를 황급히 말리고 다시 천오를 살폈다. 천오는 아직도 으르렁거리며 코를 찡긋거렸다.

“이지를 삭제시키는 마법이 걸려 있어.”

미묘한 침묵 속에서 루나가 내 팔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마법?”

“마나를 기반으로 그 위에 기술적으로 쌓아 구성한 회로인데, 기본은 마법이야. 저런 구성은 스티루마 쪽 특유의 기술이기는 한데….”

마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웬일로 루나가 정상인처럼 똑 부러지게 이야기했다. 그를 보면서 아득히 먼 옛날 아카데미의 루나가 생각났다. 천재라고 받들어지던.

“오­ 멋있어 루나.”

“…멋있어? 그… 그리고 저건 2 위계 마법을 몸에 각인시켜두고 신호를 보내서 이지를 삭제시키는 건데, 그를 위해서 아마 상대는 먼 거리에서도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설계를 바꿨을 거야. 그럼 3 위계의 증폭 마법이….”

루나가 듣기만 해도 어지러운 말을 눈을 빛내면서 끊임없이 뱉어냈다.

처음엔 집중이 되다가도 중간부터 수업 습관이 나와서 자꾸만 정신이 흐려졌다. 엎드려서 자고 싶어.

“이렇게 짝! 하면!”

루나가 돌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으르렁거리던 천오가 얌전해지더니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빛.

“천오야?”

내 부름에 천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청하지만 얼빠진 평소의 천오가 분명했다.

“오­ 루나 대단해. 한 번에 해결하다니.”

“응응응! 나는 루나니까! 근데 저거는 일시적인 거야. 다음에 또 그쪽에서 신호를 보내면 방금과 같은 일이 벌어질 거야. 그걸 막기 위해서는 신호를 차단하던가 각인이 박힌 곳을 자르던가 해야 해.”

얼굴이 잔뜩 붉어진 루나가 콧김을 내뿜으면서 빠른 속도로 말했다. 자꾸만 내게 머리를 비비는 것이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스티루마에서 신호를 보내는 놈을 죽이던가 각인이 박힌 곳을 잘라내야 한다는 거지?”

“응응응! 역시 에이든은 천재야. 에이든은 최고야.”

루나의 말을 똑같이 반복한 것에 불과하지만, 루나는 제 자리에서 살짝 뛰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혹시 천오의 몸에 이상한 문자 같은 게….”

“그거 배 쪽에 있었습네다! 이상한 숫자랑 언어가 적혀 있었는데 말입네다!”

내 물음에 이지수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럼 허리 아래로 다 잘라내면 되겠다! 그치?”

말을 마친 루나가 내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헤헤거리면서 웃으며 천오를 흘겨봤다. 그 불안한 손짓에 나는 황급히 루나를 말렸다.

“안 돼. 그러면 천오가 팔로 기어 다녀야 하잖아. 쟤 팔이 얼마나 얇은데. 불편할 게 분명해.”

“내가 그럼 마법 휠체어를 만들까? 금방 만들 수….”

“아니. 일단 잘라내는 건 기각이야. 그럼 상대의 신호를 역추적할 수 있어?”

“응응응! 할 수 있어.”

말을 마친 루나가 잠깐 눈을 감더니 금방 눈을 뜨고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스티루마 쪽 좌표야. 하지만 좀 꼬아둬서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뜻대로 안 풀려서 짜증이 났는지 루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천오야. 어디서 신호를 보내는지 알고 있어?”

천오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를 다섯 개 이상의 라우터를 통해서 꼬아서 보내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라우터를 하나하나 뜯어서 다음 신호를 찾아야 하는데….”

내 관심이 천오에게 향하자 루나가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아당기며 계속해서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길게 늘여 놓았다. 눈을 빛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칭찬을 원하는 듯했다.

그 시선과 엎어져서 꿈틀거리는 천오의 모습에 둘을 한 번에 해결할 기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그럼 루나가 천오 데리고 가서 신호 보내는 놈들 좀 막아줄래?”

‘스티루마면 여기서 거리가 제법 있으니까 사고를 치더라도 별 상관없겠지.’

루나가 내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인상을 쓰고 천오를 노려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천오는 내게 동생 같아서 나는 내가 제일 믿고 있는 루나가 해결해줬으면 좋겠어.”

“진짜?진짜?진짜?”

금세 살벌해지는 루나의 반응에 나는 황급히 루나에게 귓속말했다. 그러자 루나가 눈을 빛내면서 내게 몇 번이나 되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루나의 얼굴이 금세 활짝 피었고, 루나가 내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응응응. 금방 갔다 올게!”

그러다가 묶여 있는 천오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손을 붕붕 흔들더니 뿅하고 사라졌다.

‘괜…괜찮겠지?’

일단 폭탄 돌리기는 성공한 듯했지만, 묘하게 가슴 한편이 불안했다.

***

천오 문제가 해결되고 나자 다른 사람들은 다들 뭔가 일이 있는지 바삐 사라졌다.

심지어 이지수마저도 혁명단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해서 내게 큰 충격을 안겼다.

전쟁이 끝난 공화국 수도에서는 오직 나만이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나는 그저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그동안 자지 못한 잠을 몰아서 잤다. 이러다가 밤에 서아나 불러서….

쾅쾅쾅!

“평민!”

아, 쟤가 있었지.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나와! 나오라고!”

문을 열자 가벼운 복장을 한 케이트가 있었다.

“왜 또 지랄이야. 아침부터”

“아침? 점심이 지난 지가 한참이야!”

“그래. 그럼 왜 점심부터 지랄이야.”

“너! 황녀한테 지랄이라니! 그거 중죄야! 그러다가 목이 뎅겅 한다고! 뎅겅!”

케이트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이내 얼굴을 피며 소리쳤다.

‘진짜 지랄맞네.’

속으로 혀를 차면서 대충 케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흥! 황실 모욕죄지만! 아량이 넓은 내가 용서해줄 테니. 오늘 하루 나 좀 도와줘야겠어!”

“도와주긴 뭘 도와줘. 그리고 용서할 거면 그냥 하는 게 더 군자로서….”

“조용히 해! 오늘 쇼핑가려는데 조슈아가 휴가란 말이야! 목 뎅겅 하기 싫으면 따라와!”

타국에서 휴가를 가는 기사가 어딨어.

반발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어차피 더 난리 칠 게 분명하므로 굳이 뱉어내지 않았다.

“자! 그럼 가자!”

케이트가 환하게 웃으면서 활기차게 걸음을 옮겼다.

결국, 나는 케이트를 따라나섰다.

처음으로 간 곳은 고급스러운 공화국 식당이었다. 안에는 마치 숲처럼 꽃과 나무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우리는 제일 안쪽 방으로 안내됐다.

안내된 방은 열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컸는데, 거기에 케이트와 둘이 앉으려니 제법 허전했다.

“근데 쇼핑이라면서.”

“원…원래 쇼핑 전에는 밥을 든든히 먹어야 해! 불만있어?! 효수될래?!”

대뜸 살인 선고를 하는 케이트의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그러자 케이트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고 이내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잠시 뒤, 직원들이 큼지막한 원통형의 받침을 들고 왔다. 그 위에는 이미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잔뜩 올려진 상태였다.

생소한 음식들이 많았지만, 굉장히 맛있었다. 공화국의 음식 중에 이런 과하지 않은 음식들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그렇게 써는 게 아니라니까! 아휴 바보! 진짜 손이 많이 간다니까!”

케이트가 내 앞에 있는 고기를 굳이 가져가서 우아하게 썰었다.

애초에 한입 크기로 나온 고기를 왜 자르는 거지.

물론 밥을 사주는 사람에게 굳이 무례할 필요는 없었다. 감사 인사는 언제나 돈이 안 드니까.

“역시 황녀야. 모든 동작이 우아하다니까.”

“흥! 당연한 소리를!”

내 칭찬에 케이트가 턱을 한껏 쳐들면서 교양있게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있으니까 용사 아카데미 시절 생각나고 좋네.”

“하나도 좋지 않거든. 멍청한 조슈아가 휴가를 나가는 바람에… 멍청한 조슈아!”

눈은 웃고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는 케이트를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얼굴이 붉어진 케이트를 위해서 아까 성에서 나오는 길에 들렸던 조슈아의 목소리는 모른척했다. 그때, 분명 조슈아는 케이트를 찾고 있었다.

‘저번에 케이트가 튀김을 맛있게 먹었으니까.’

나는 크게 인심 쓴다는 생각으로 내 앞에 있는 정체 모를 튀김을 케이트에게 건네줬다.

원래도 큼지막한 눈망울이 조금 더 커지더니 케이트가 튀김을 오물거리면서 먹었다. 잠시 조용해진 케이트가 캑캑거리며 옆에 있는 물을 급하게 마셨다.

“매워!!”

아 고추 튀김이었구나.

케이트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캑캑대며 물을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찻집에 들러서 ‘민트 초코 대추차’ 도 마셨다. 공화국과 제국이 조합된 완벽한 맛의 차였다. 그 오묘하게 완벽한 맛에 감탄해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케이트에게 먹여봤다가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거기서 잠깐 쉬고 옷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양손에 한가득 옷들을 샀다. 케이트는 가격도 물어보지 않고 그저 신나게 골랐다.

문제는 산 옷들이 죄다 내 옷밖에 없다는 거지만.

굳이 사준다는데 거절하지는 않았다.

“죄다 남자 옷밖에 안 팔아? 공화국에는 멍청한 가게들밖에 없다니까.”

‘그야 네가 남자 옷 가게만 골라 들어갔으니까.’

케이트의 반응이 궁금해 놀려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 케이트의 얼굴이 터질까 봐 걱정돼서 참았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성벽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물을 시원하게 뿜어내는 큼지막한 분수대 앞에서 잠시 구경하고 있었다.

분수대에는 다양한 동상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중 부서진 동상도 몇 개 있었다. 베레모 모양의 조각이 분수대에 잠겨 있는 거로 봐서는 이번 일과 관련된 인물들인 것 같았다.

분수대의 정중앙에는 동그란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많은 동전이 담겨 있었다.

“동전을 저기에 넣으면 좋은 일이 일어난대. 멍청이들이나 믿는 거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기분 삼아서!”

케이트가 툴툴거리면서 안쪽 주머니에서 동전을 잔뜩 꺼냈다. 황녀가 왜 저렇게 많은 동전을 들고 다니는지 의문이었지만, 오늘은 얻어먹은 게 많았으니 조용히 했다.

“이익! 생각보다 어렵네?! 이 건방진 분수대! 황녀 동전 던지기!”

열심히 동전을 던지는 케이트를 구경하면서 분수대 옆에 붙어있는 이름을 읽었다.

‘끝나지 않는 사랑’

참으로 거창한 이름의 분수대였다.

“왜! 안 들어가냐고! 멍청한 분수대!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어! 이익! 황녀 발차기!”

“야야! 왜 분수대를 차려고 해!”

나는 대뜸 분수대를 발로 차려는 케이트를 황급히 말렸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저게 재수 없게 안 들어가잖아! 사기를 친 게 분명해! 너넨 뭐야! 눈깔아!”

“나한테 줘봐. 내가 넣어줄 테니까.”

분이 안 풀렸는지 내게 들려서도 발을 분수대에 휘두르는 케이트를 애써 진정시키며 동전을 받았다.

‘들어갈 것 같은데?’

나는 손에 들린 동전을 가볍게 던졌고.

날아간 동전은 중앙에 있는 원반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뭐야 개좆밥이네.”

“흥! 멍청한 분수대. 멍청이들이나…. 야! 왜 또 던져! 던지지 마! 몇 개나 던지냐고!”

나는 묘한 재미에 내 손에 들린 동전들을 모두 던져서 손쉽게 다 중앙에 넣었다.

그 모습을 잠시 황망한 시선으로 보던 케이트가 돌연 나를 돌아보더니 잔뜩 눈물 고인 얼굴로 내 가슴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아니 왜 또 지랄이야. 네가 못 넣어서 대신 넣어준 건데.”

“왜 나는 못 넣고 너는 그렇게 많이 넣냐고! 열 받잖아!! 그리고 하나만 하라니까! 왜 죄다 넣냐고!! 열 개도 넘잖아! 이 난봉꾼아! 도대체 만족이란 걸 모르는 거야?!”

말하면서 점점 감정이 올라왔는지 케이트의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주먹에 실린 힘이 점점 강해져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그에 나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에 참았다.

“왜 많이 넣냐고! 왜 나만 신경 안 써주냐고! 맨날 다른 애들은 챙기면서! 그 멍청이 같은 꼬맹이들! 내가 제일 먼저 알았는데!”

이제 진짜로 맞는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쥐어패는지 주먹에 맞을 때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안 챙긴다니…. 너 때문에 칼도 맞고….”

더 맞으면 갈비뼈가 나갈 것 같아서 황급히 케이트의 손을 붙잡았다. 맞은 부위가 진짜로 얼얼했다.

“맞잖아! 다른 애들은 다 그… 그거하고! 나는 찾지도 않고! 맨날 내가 찾아가고!”

“그게 뭔데?”

“그거! 이 멍청아! 저번에는 내가 최고라며! 근데 왜 나는 안 찾냐고!”

“내가 널 언제 안 찾아. 그리고 그게 도대체 뭐냐니까.”

내 질문에 케이트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오므렸다. 그리고 결심을 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보…보지 마사지!!”

“야! 그걸 그렇게 큰 소리로!”

“나는 왜 보지 마사지 안 해주냐고! 그 건방진 꼬맹이들만 하고! 나는 늙었다. 이거야?! 이미 질렸다 이거야?!”

“네가 늙긴 뭘…. 그리고 목소리 좀….”

“젊고 탱탱한 것들이 좋다는 거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는 황녀잖아. 내가 어떻게….”

“쓰레기 새끼! 이래서 엄마가 침대에서의 남자 말은 믿지 말라고 했는데! 내 처녀 도로 내놔! 내놓으라고!”

케이트는 막 나가기로 했는지, 자꾸만 언성을 높이며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모였고 나는 케이트의 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읍?!”

입을 맞추자 시끄럽던 케이트가 조용해졌고 내 가슴을 두드리던 손도 그저 내 옷깃을 꼬나쥐고 있었다. 케이트의 달콤한 숨결이 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발광하던 케이트가 조용해지자 맞춘 입을 뗐다.

“멍청이! 누가 입 맞춰도 된대?! 이렇게 사람들 많은 곳에서 황녀에게 입 맞추다니! 너 이제 큰일 났다!”

입맞춤이 끝나자 얼굴이 잔뜩 붉어진 케이트가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눈만 빼꼼 내밀고 말했다. 다만, 전처럼 소리 지르지 않는 걸 보니 진정된 듯했다.

“네가 안 닥치잖아. 그리고 큰일은 무슨.”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였다.

‘이거 시발 진짜 좆된 거 아니야?’

“바보! 진짜 큰일 났다! 너!”

케이트가 얄밉게 혀를 빼꼼 내밀었다.

그런 케이트의 모습에 진짜 쥐어박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돌연 케이트의 얼굴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다시 낮이 된 것처럼.

“응? 저거 뭐야.”

케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 뒤를 가리켰다.

그에 고개를 돌린 내게 저 멀리 있는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하늘 밖에서 끌려온 그것은 어두워진 세상을 밝힐 정도로 환하게 불타면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 꼬리에 달린 희뿌연 구름 같은 것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정체모를 것은 멀리 있었지만, 내게도 느껴질 정도로 막대한 마나가 담겨 있었다.

“저쪽이면 스티루마 방향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 케이트의 말에 나는 뭔가 미묘한 위기감을 느꼈고.

이내 낮에 루나를 보낸 곳이 스티루마라는 것을 떠올렸다.

“끼에에에엑!!”

“왜… 왜 그래? 에이든?! 진정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끼…끼에에에에엑!!”

내 입에서는 참을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케이트가 그런 에이든을 뜯어말렸지만, 에이든은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비명을 질렀다.

***

제국의 깊은 곳.

검은색 쇠사슬로 잔뜩 묶인 헤진 문 앞에 한 노인네가 검을 쥐고 앉아 있었다.

노인네는 따분한 듯 하품을 하면서도 문 앞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뚜벅뚜벅.

이곳에서 절대 들리지 말아야 할 발소리에 노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 앞으로 흰색 머리의 키가 큰 사내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 옆에는 검은 머리에 안대를 쓴 여자가 조심스럽게 사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 돌아가는 게 좋을걸세. 끌끌끌.”

노인의 희뿌연 눈썹이 위로 들리며 서슬 퍼런 눈빛을 뿜어져 나왔다.

노인은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어 주름이 자리 잡을 곳도 없는 손으로 검 손잡이를 천천히 매만졌다.

“크큭… 관계자라… 내가 그의 선조니까 크큭… 관계자일지도… 비켜 주겠나?”

사내가 해골 안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놈이었구만, 지금이라도 돌아가게 내 제자와 연배가 비슷해 보여서 봐주는 거니.”

노인은 사내를 훑어보며 검을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손을 갈무리했다.

“크큭… 이제 끝을 끌어와야 할 시간이라서 말이야… 그에게 자유를 주기로 약속했거든… 크큭….”

“…제가 할까요?”

“크큭… 너로서는 불가능하다. 크큭… 나한테도 귀찮은 상대니… 크큭….”

“예. 알겠습니다.”

앞에서 여유롭게 노닥거리는 둘을 보며 노인은 천천히 자신의 신념을 검에 끌어올렸다.

“미친놈이구먼. 끌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인은 앞에 있는 흰 놈의 존재감을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옆에 있는 여자도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꽤 강한 힘을 지녔지만, 자신에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흰 놈은… 노인에게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위기라는 감정을 상기시켰다.

“크큭… 저번처럼 내게 즐거움을 안겨주면 좋겠군. 제국 제일검. 크큭….”

사내는 중얼거리면서 해골 안대를 끌어 올렸고,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삼키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끄할할할할! 정말 끝을 가지고 왔구먼!”

그 안에 담겨 있는 선명한 끝에 노인은 크게 웃었다.

“내 검은 천하제일이니. 재미없을 걱정은 하지 말게.”

광오한 말과 함께 노인의 검에 보이지 않는 신념이 덧씌워졌다.

그는 검강이나 검기처럼 뚜렷하게 넘실거리지 않았지만, 그 둘과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제국 제일검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마지막에 떠올릴 가족이란 게 없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들인 모자란 놈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아직 가르칠 게 많은데 말이야.’

부족함이 유독 넘쳐서 오히려 손이 자꾸만 가는 놈을 떠올리며 노인은 낮게 웃었다.

자신이 봤던 누구보다도 재능이 없었지만, 결국은 피어오를 소년.

수없이 흘린 피와 땀 속에서 만개하는 모습을 못 볼 수도 있다는 게 이 오랜 인생의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제일 공을 들인 잡초거늘.

“이럴 줄 알았으면 다음 단계라도 보여주고 올 것을… 끌끌.”

노인은 마지막을 직감하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끝까지 검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을 떨 정도로 기뻐하면서.

“못난 제자 놈을 위해서 끝을 좀 미뤄볼까.”

노인의 검에 씌워진 신념은­

대륙 제일이라는 광오한 자신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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