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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75화 (175/233)

〈 175화 〉 제국 제일검.

* * *

‘이런 애미, 애비가 둘 다 없어서 그렇게 버릇이 없었구나.’

미친 노망난 노인네가 내 가족사를 들은 날 한 말이다. 나름대로 감정을 잡고 말했는데 돌아온 답변에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멍해졌다.

‘너는 재능이라는 게 정말 단 하나도 없구나. 속된 말로 정말 노답이다 노답. 그냥 맞자. 너 같은 놈에게는 그게 답이다.’

노인네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너의 몸은 철과도 같다. 두드릴수록 단단해지고 그 치료 속도 또한 빨라지는 것 같으니…. 맞자.’

‘사내새끼가 그깟 팔 좀 잘렸다고 우는 게냐? 어차피 곧 다시 자랄 텐데 쯧.’

억지로 묻어뒀던 괴로운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거 순 시발 새끼네.

그런 미친 노망난 노인네의 배때지에 칼을 박아 넣은 게 내가 아니라니….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지금 내 손에 아픈 게 낫다. 너는 재능이 없어서 지금 내게 얻어터지지 않으면, 후에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패배해서 떨어질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참고 견뎌라.’

악질 미친 노망난 노인네의 저 말을 들은 이후로 불평조차 할 수 없었다. 훈련이 진행될수록 미친 노망난 노인네의 말이 바르다는 것을 속으로 깨달았으니까.

나에게는 재능이 없었다.

재능의 벽은 내가 외면하기에 생각보다도 더 컸다. 나는 제국 제일검이라는 노인네의 반년간의 지옥 같은 훈련을 거치고 나서야 머릿속에 막연하게 있는 것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정답을 머릿속에 잔뜩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답을 찍기 위해 지옥 속에서 굴러야 했다.

‘너는 나 제국 제일검의 제자다. 그러니까 애미,애비가 없다고 해서. 아니 가문이 없다고 해서 어디 가서 웅크리고 숙이지 마라. 네 뒤에 있는 내 이름은 절대 작지 않으니.’

내가 노인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서 웅크려서 펑펑 울은 날, 노인네가 이죽거리면서 한 말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에 손이 분노에 부들부들 떨렸다. 미친 노망난 노인네는 내가…. 도대체 어떤 놈이….

“사제. 괜찮아?”

키아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흐트러진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키아나가 보였다.

키아나와 나는 둘이 작은 마차에 타고 있었다. 우리는 제국군이 복귀하는 것에 합류해서 같이 이동하고 있었다. 키아나는 검후라는 명성과 공작가라는 뒷배가 합쳐져 개인 마차를 한 대 받았고, 나는 거기에 껴서 탔다.

이지수와 나머지는 혁명단에서 할 일이 남아 거기에 남기로 했다.

이지수는 내게 들러붙어서 몇 번이나 보지 마사지를 약속받고 나서야 떨어졌다. 내가 갈 때 펑펑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던 모습은 마치 징집당한 남편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서아와 서윤은 떠나가는 나를 보며 자신들의 날씬한 배를 쓰다듬었는데 그 모습이 퍽 우스우면서도 소름 끼쳤다. 교미왕의 기운 운용법으로 임신 가능성은 막아둔 상태였지만, 괜히 불안했다.

제국군은 수도 함락 소식에 급하게 회군하는 중이었다.

“아… 예.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요.”

나는 대충 대답을 흘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사제가 걱정이 많겠지. 스승님은 괜찮으실 거야. 강한 분이시니까.”

“예 뭐. 사실 그 미…아니 스승님이 누구한테 졌다는 게 상상이 안 되네요.”

키아나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수호용이 또다시 난리를 피웠다고 하더라고. 이번에는 아예 수도 위에 올라서서 인간은 다 내쫓았다던데…. 그래서 지금 제국의 수도는 비워진 상태야. 스승님은 아마 그 수호용에게 당하지 않았을까 생각 중이야.”

키아나가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역시 그 미친 도마뱀 새끼! 또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요! 그때도 시… 아니. 그때도 눈 까뒤집고 발광하더니만…. 황실에서 그 도마뱀을 주기적으로 산책 안 시켜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직도 빨간 도마뱀이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래서 동물들은 주기적으로 산책시켜줘야 되는데… 귀찮다고 산책을 안 시키니까 애가 성을 물어뜯는 거 아니야.

“풋… 산책이라니. 수호용은 지난 몇백 년간 문제 일으킨 적 없었는데, 왜 갑자기 그러는지는 모르겠어.”

“그러니까요. 왜 하필 우리 세대에 지랄을…. 조금만 더 참았다가 하지.”

나는 마주 잡은 키아나의 손을 장난스레 긁었다.

“오고­ 크흠….”

그에 키아나의 입에서 나온 흉한 소리에 나는 황급히 손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시발 오고곡녀였지. 완벽하고 차가운 외모에 잠시 잊고 있었다.

“흠흠… 이제 상황이 매우 급하게 흘러갈 듯하니까. 내가 대충이라도 사제의 다음 단계를 알려줄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크니까.”

자신의 입에서 흉한 소리를 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잔뜩 붉어진 키아나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다만, 붉어진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아. 네. 부탁드릴게요.”

[검강의 다음 단계란 검에 신념을 싣는 거다.]

[우리가 번번이….]

물론 나는 지식적으로는 다음 단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어느 순간부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좀처럼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너는 재능이 전혀 없으니 몸으로 때워야 한다.’

또다시 떠오르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검강의 다음 단계는 검에 신념을 싣는 거야. 두루뭉술한 말이라 이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없어. 사제도 때가 되면 그를 깨달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키아나가 나와 맞잡은 반대 손으로 익숙하게 검을 뽑아 뭔가를 뿜어냈다. 무형의 기운이었지만, 뚜렷하게 뭔가가 느껴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지? 이게 내 신념이야.”

키아나가 조금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충분히 자랑스러울 만했다.

“사저의 신념은 무엇인데요?”

“으음…. 정의야.”

내 물음에 말을 흐리던 키아나가 고개를 숙이면서 작게 말했다. 키아나와 너무나도 어울리는 그 말에 나는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흡. 사저와 정말 잘 어울리네요.”

“사제 지금 웃은 거지…?”

“아니요! 그냥 스승님이 위독하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순간 우울해져서요.”

“우울해? 하긴… 스승님이 사제를 유독 이뻐하셨으니까…. 보통 그렇게까지 스승님이 오래 봐주시지 않거든.”

이뻐하기는 뭘 이뻐해 시발.

키아나의 말에 순간적으로 욕지기가 터져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그… 우울하면 안아줄까? 책에서 보면 우울할 때 안아주면 좀 괜찮아진다는데.”

머뭇거리면서 팔을 벌리는 키아나를 보면서 나는 냉큼 달려들었다.

어차피 부인도 둘 생겼으니 이제 거칠 게 없었다.

“으음… 사제. 보통 안는다고 하면은…. 아니야. 사제가 이걸로 괜찮아지면…. 으음? 가슴은 왜….”

“쫀득쫀득 가슴.”

“으응… 사제?”

키아나는 말로만 의문을 표할 뿐 딱히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에 나는 키아나의 눈치를 보며 어디까지 해도 될까 고민했다.

슬금슬금 키아나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키아나가 옅게 신음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에 하얀 키아나의 목덜미가 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냉큼 고개를 처박았다.

마침내 쫀득 가슴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돌연 마차 문이 열렸다.

“에이든아­ 점심시간이야­ 점심 먹… 이익! 미친 연놈들이 마차에서 뭐 하는 거야!! 떨어져! 떨어지라고!! 이 두 연놈이 마차 하나에 탄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

케이트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

“멍청이. 발정 난 것들.”

“그…그게 아니라 사제가 우울해해서 위로해주다 보니까….”

“위로?! 위로?! 그럼 너는 에이든이 막 울면 몸도 주겠다?! 다리도 벌리겠어?!”

“무…무슨 그런 천박한!! 사제한테 말한 거 아니야! 오해하지마! 만약 사제가 원한다….”

케이트의 거침 없는 말에 키아나가 깜짝 놀랐다가 황급히 내게 말했다.

“원한다면 뭐?! 이게 무슨 천박한 야한 소설도 아니고! 사제 지간에 뭐 하는 거야!”

“사제 지간이 뭐 어때서? 그렇죠. 사저?”

“응….”

“너! 왜 얼굴 붉히냐고! 평소에는 싸가지 없이 있더니!! 열받아! 열 받는다고!”

“야 밥 먹는데 좀 조용히 해라. 정신 사납다.”

“그러게 말입니다. 식사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납니다.”

“이런 미친 잡것들이!! 나가! 이거 내 음식이야!! 나 혼자 다 먹을 거니까 나가!!”

케이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음식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고는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그 모습에 장난기가 더 올라왔다.

“그래? 그럼 사저 가서 아까 하던 거마저 할까요? 저는 먹는 것보다 사저와….”

“먹어! 이거 먹어! 다 처먹어! 다 먹으라고!! 자! 이거 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다 처먹어!”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 입에 고기를 쑤셔 넣는 케이트를 보며 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사제도 참 짓궂은 면이 있다니까.”

키아나가 따라 웃으면서 내 입에 묻은 기름기를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케이트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네.”

“흥! 먹여주기는 뭘 먹여줘! 그냥 네가 입에서 헛소리를 뿡뿡 끼니까 막는 거뿐이야!! 이거는 인삼인데 몸에 좋데.”

칭찬에 금세 얼굴이 풀어져 헤실거리는 케이트의 모습에 나는 다시금 웃음이 터졌다.

“뭘 웃어! 왜 비웃냐고! 내가 우스워?! 나 황녀야! 황녀!”

그에 케이트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내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너네 제국 지금 좆됐다던데.”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거 몰라?! 그리고 망하기는 뭘 망해! 그냥 수도가 반파된 거지! 저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다시 세우면 되니까! 이건 새우튀김인데 맛있데.”

케이트는 소리를 지르면서도 계속해서 내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그에 옆에서 조슈아가 말렸다가 주먹을 얻어맞고 다시금 조용해졌다.

***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미친 노망난 노인네는 양팔이 뜯긴 상태였다. 뜯긴 부분에 붕대가 둘러 있었지만, 이미 피로 흥건한 붕대는 미친 노인네의 상태가 얼마나 위중한지 증명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친 노망난 노인네의 눈빛만은 전처럼 흉흉했다. 아니 전보다 더 정순하고 깊은 듯했다.

“왔느냐.”

우리를 본 노인네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인사했다. 마치 그냥 지나치다가 마주친 사람의 인사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슬그머니 노인네와 나를 가늠했다. 양팔이 뜯기고 오늘내일하는 노인네였지만, 아직도 그 수준이 가늠되지 않았다.

호랑이는 이빨을 죄다 뽑아놔도 호랑이였다.

“스승님! 이게 무슨!!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창백해진 키아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만한 일이 있었다. 놈도 만만치 않게 당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놈은 잠시 나가 있거라.”

노인네가 나를 턱짓하며 말했다.

또 키아나한테만 좋은 거 주려고.

이 시발 진짜 키아나만 편애한다니까.

진짜 끝까지 좆같은 노인네.

하긴 시발 나라도 키아나를 좋아하겠다.

좆같이도 이쁘고 말도 안 되는 재능도 가지고 있으니까. 나와 키아나의 무게추가 안 맞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만 편애하는 건 시발 좀 아니지.

그런 노인네의 편애에 내 기분이 나쁜 게 더 좆같았다. 그게 뭐라고 기분 나쁜 거야 시발. 쭈글쭈글 노인네가 누구를 더 좋아하든 말든.

나는 툴툴거리며 방을 나섰다.

닫은 문 너머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를 듣지 않기 위해 문과 떨어져서 벽에 기대어 섰다.

자꾸만 몸이 휘청였기 때문에.

‘사도야… 사도야… 괜찮느냐­. 혹여 마음이 심란하거든 기도를 올리도록 하여라.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식이 찾아오며 너의 심신을 달래줄 것이다. 사도는 사도지만 지금까지 기도 한 번을 안 올린 게 말이 되느뇨?’

시끄러운 목소리는 억지로 무시했다.

‘들리는 것 안다. 사도야. 기도를 좀 올려주겠니? 그럼 내가 너의 불안하고 복잡한 마음을 달래주겠느뇨.’

닥쳐 좀 시발.

‘에엑?! 왜?! 분명 가이드에 나와 있는 대로 말했는데…! 이거 비싼 책이란 말이야! 야! 바다신! 너 나한테 사기 쳤지!! 일로 와!’

꼭 시발 욕을 들어야 닥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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