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177화 (177/233)

〈 177화 〉 대륙을 지키는 용사! 그 이름은 에이든.

* * *

‘…내 피를 마셔라. 대신 내 의무였던 대륙을 지켜라’

자꾸만 내 머리를 뒤흔드는 스승의 마지막 말에 며칠 동안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륙을 지켜라.

‘시발 너무 거창하잖아.’

스승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입안에서 가시가 돋친 듯 맴돌았다.

대륙을 지키라니. 너무나도 막연하고 거창한 소원이었다. 애초에 내가 누굴 지킬 정도의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내가 꽤 강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주변의 무력이 자꾸만 높이 올라가서 상대적으로 좆밥이 됐다.

‘그냥 루나한테 부탁하면 지켜주지 않을까?’

루나가 대륙을 지킨다….

그 미묘하고 어색한 문장을 몇 번이나 입안에서 굴렸다.

아니, 루나는 예측할 수 없어서 너무 위험해. 루나는 보류야.

막연한 주제를 루나에게 쥐여줬다가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이번에도 문제 해결해달라고 스티루마에 보냈더니, 스티루마를 멸망시키지 않았는가.

그냥 씹창을 내놓은 정도가 아니라 스티루마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스티루마가 원래 소수민족에 다 같이 도시에 모여 산다는 특성이 있기는 해도 고도로 발달한 기술력 덕분에 대륙에서 강대국으로 손꼽히는 나라 중 하나인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나가 그냥 지워버렸다.

심지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뒤처리까지 하는 것 같은 느낌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루나가 대륙을 멸망시키면 시켰지, 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루나에 관한 생각을 지우고 대륙의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가 소년이여. 용사에게 대륙을 지키라는 건 단 하나를 뜻하지 않는가.]

그게 뭔데.

[저기 북쪽 끝에 있는 흉악하고 파렴치한 마왕을 잡는 것. 그것이 용사의 의무이자, 대륙을 지키는 것이지.]

마왕이라….

나름대로 근거 있고 근본 있는 목표이기는 했다.

‘마왕을 잡으면 좋겠지. 근데 마왕 존나 강하잖아. 너무 멀리 있기도 하고….’

그렇기에는 애가 너무 강하기도 했고, 일단은 너무 멀었다. 거기까지 가는 데만 한 세월이야.

[머…멀리 있어서 포기한다니! 소년! 마왕이 지금 저 북쪽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네! 뒤늦게 가면 손쓸 수도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 돼 있을 거라네!]

그렇다기에는 마왕은 조용히 산 지 꽤 오래됐는데? 네가 죽고 나서 지금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동안 한 번도 안 내려왔잖아.

[그…그거야 힘을 비축하고 있으니까! 명심하게! 마왕과 인간은 공존할 수 없어! 그 여자는… 으윽! 내 머리가! 내 고추는 작지 않아!!!]

시끄러 시발. 너 존나 작은 거 맞아.

[아…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으아아아!!]

[큼큼…. 자고로 대륙이란 인구의 문제가 절실하지 않나? 그러니 교미왕으로서 대륙을 지키는 것은 번식을 성실히 하는 거라고 답할 수 있지.]

마음에 드는 추론이야. 깊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

음음… 인구 문제라…. 아주 심각한 문제지 심각한 문제야. 이대로 인구가 계속 줄어든다면 밭은 누가 갈고 농사는 누가 지어.

심각하군 심각해…. 정말 심각해.

[그렇지. 심각한 문제야.]

[나는 작지 않아! 안 작다고! 너희가 큰 것뿐이다! 빌어먹을 세상! 이… 이보게 정말 내가 작… 으아악! 미안하네! 미안해!]

시끄러운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대륙을 지키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각자에겐 각자의 지키는 방식이 있는 거니까. 생각해보니까 스승이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지 않기도 했고.’

점점 흥미가 동하며 내가 아는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케이트, 안드레아, 비키, 키아나, 여우, 이지수, 서아, 서윤.

그들의 배가 볼록해져 내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일곱 명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아름답게 웃는 모습이….

‘이거… 대륙 지키는 게 생각보다 재밌을지도.’

[농담이었네. 소년? 농담…. 들리지 않는가?]

[나는 작지 않아…. 작지 않다고….]

내 마음속에 대륙을 지킨다는 것에 대한 의무감과 경건함이 크게 자리 잡았다.

‘사도! 대륙 지키기라면 역시 다른 신들의 성녀나 사도들을 다 쥐어패는 게 어때?! 기왕이면 목을 따면 더 좋고! 소문으로는 그게 악마보다 짭짤하데!! 나 신상 사야….’

아아­

이 어찌 아름다운 대륙인가.

이런 아름다운 대륙을 나 상남자 에이든은 기필코 지켜내겠노라!

내 최고 장기인 교미로!

나는 위아래로 의지를 굳게 다졌다.

­ 그냥 두면 안 되겠군. 크흡.

[나 고추 안 작다고! 안 작아! 나 전설의 용사야!!]

[추하니까 그만하게.]

***

처음 보는 외모의 늘씬한 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흰 머리는 언뜻 여우를 연상시켰지만, 그보다 더욱 아름다운 듯했다. 여자를 덮고 있는 가운은 고급스러움을 넘어서 경건함을 떠올리게 했다.

‘이상한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여자 얼굴 주변에 언뜻 뿌려져 있는 안개는 도무지 지워질 생각이 없었다.

“누구세요? 그 얼굴에 뭔가 있는데 그것 좀 치워주시면…. 가슴이 일품이시네요.”

다만, 얼굴 아래로 보이는 육감적인 몸매가 내 음심을 강하게 동요시켰다. 내 하체가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올라 바지가 터질 것 같았다.

‘꺄르르르­.’

여자가 마치 고급 악기처럼 우아하게 웃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는 우아하고 정순해서 음심과 동시에 동경의 마음도 들게 했다.

나는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천천히 몸을 점검했다. 완벽한 몸 상태였다. 교미왕인 내가 지금 저 여자를 만족 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자는 가운의 아랫부분만 들어 올렸다.

“오케이! 저 에이든! 융통성 넘치는 사내입니다.”

가운 너머로도 명품의 기운을 뽐내는 여자의 가슴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나는 너그럽게 웃으며 황급히 바지를 벗어 던졌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여자를 끌어당겨 내 위에 앉혔고­.

당장이라도 끝날 것 같은 느낌에 황급히 사정감을 참기 위해 애썼다.

‘제자야.’

“네? 응? 무슨 소리입니까? 레이디, 잠깐만 움직임을… 제가 쌀 것 같아서가 아니라 지금 그냥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서….”

‘제자야.’

불길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자꾸만 나를 불렀고, 여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걷어졌다.

안개가 걷어지고 그 안에 있는 얼굴은 내가 그토록 증오하는 쭈글쭈글한 얼굴이었다.

‘이 스승의 보지 맛이 좋더냐?’

“으아아악!! 애미 시발! 미친 노망난 노인네가 왜 여기 있어요!! 시발!!”

나는 황급히 내 위에 앉아 있던 노인네를 밀고 필사적으로 떨어졌다.

‘끌끌끌­ 대륙을 지키거라­.’

내게 밀린 노인네가 가운을 마저 벗었고.

그 명치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익숙한 칼자국을 보자 내 정신이 무언가에 의해서 끌려 올라갔다.

“으아아악!! 시발! 내가 노인네를 따먹었다!!”

나는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 역한 느낌이 자꾸만 내 속을 후벼 파서 올라오는 구토감을 계속해서 뱉어냈다. 한참이나 뱉어내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은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하아­ 애미 시발. 아니야…. 내가 그럴 리 없잖아.”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깨우고 나는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애미 시발!! 축축해!! 으아아아악!! 뒤질 거야! 나 그냥 뒤질 거라고 시발!!”

목을 베이는 것보다 더 날카로운 현실에 나는 온몸을 비틀면서 한참이나 방안에서 뒹굴었다.

하지만 아무리 뒹굴고 머리를 벽에 박아도 꿈이 잊히지 않았다.

‘대륙을 지키거라….’

“지킬게요! 시발 지킬게요!! 존나 지킬게요!! 마왕도 따먹고 다 할게요! 시발!! 으허어어엉! 장난이었다고!! 시발 새끼야!!”

에이든은 마치 순결을 강탈당한 처녀처럼 한참이나 이불을 덮고 울었다. 더는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이 마치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콸콸 쏟아져 나 왔다.

­ 크할할할할! 이렇게 웃는 게 맞나?

[각성 방식이… 용사라기에는 조금 특이하군.]

[마왕도 따먹는다니! 크하하하!]

***

케이트는 방문 앞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에이든이 방에서 나오지 않은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

그에 걱정으로 가득 찬 케이트의 마음이 자꾸만 타들어 갔지만, 본성 때문에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뭐…뭐라고 핑계를 대고 들어가지?’

제일 큰 문제는 저 방을 들어갈 구실이 없다는 거였다. 유일한 핑계는 내일 있을 키아나의 제국 제일검 즉위식이었는데, 그것을 위해 오늘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냥 들어가시는 게…. 평소에는 잘만 들어가시면서….”

“다르다고! 그때랑 지금이랑! 지금은 내가 영주 성에서 따로 나온 거잖아! 아예 다른 곳에서 에이든을 찾으러 온 게 들통나면 어떻게 해! 물론 나는 에이든을 보러 온 게 아니지만!”

조슈아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문을 보는 케이트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매일 왔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아마 오늘도 저렇게 문 앞을 왔다 갔다만 하다가 다시 영주 성으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수도 탈환 작전에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케이트는 온종일 여기에 서 있었다.

“으음…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그냥 밥 같이 먹자고 열어 버릴까? 그랬다가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면 어떻게 하지?! 에이든은 바보니까….”

조슈아는 혼자서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케이트를 보며 저린 다리를 풀었다. 아마 오늘도 퇴근이 늦어질 게 분명했다.

그때,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에이든의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히끅! 비켜! 비키라고! 멍청한 조슈아!”

“아앗…. 죄송합니다!”

복도를 막고 있는 조슈아를 케이트가 거칠게 밀었지만, 다리가 저렸던 조슈아는 제때 비킬 수 없었고 결국 밖으로 나온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아, 케이트.”

“뭐뭐! 그냥 우연히….”

“나 결심했다.”

황급히 오해를 막기 위해 변명하는 케이트의 말을 에이든이 잘랐다. 케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늘따라 유독 평화로워 보이는 에이든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이상해. 저게 에이든이 맞는 거야?!’

욕심과 음심으로 가득 차 있던 평소의 얼굴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에이든의 얼굴에 담겨 있는 건 의무감과 굳은 결심이었다.

“나 용사 에이든, 대륙을 지켜낼 것이다.”

에이든의 끝이 위로 올라간 눈꼬리가 결심으로 가득 차 사명감으로 밝게 빛났다. 검 손잡이를 들고 있는 손에는 굵은 힘줄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뭐…뭐라는 거야 저게.”

“…아마 뭘 잘못 먹은 게 분명합니다.”

조슈아와 케이트는 어울리지 않는 에이든의 모습에 팔에 오른 닭살을 손으로 마구 쓸었다.

***

키아나의 즉위식은 약소하게 치러졌다.

애초에 차기 제국 제일검이 키아나로 내정이 되어 있던 것처럼 아무런 잡음 없이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사실 나는 제국 제일검이라고 해서 강한 놈들을 다 부른 다음 싸움을 붙여서 가장 강한 놈에게 검을 쥐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내 예상과 달랐다.

가장 강하다고 손꼽히는 사람 중 황실에 몸을 담고 있는 자, 그리고 명예를 아는 자가 추천을 받아서 제국 제일검에 오른다고 했다.

나는 즉위식의 제일 앞줄에 앉아서 단상에 올라간 키아나를 응시했다. 황실 특유의 문장이 박인 빛나는 은색 갑옷을 입은 키아나는 전쟁의 여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답고 기사다웠다.

즉위식에 모인 사람들은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빛나는 키아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괜히 뿌듯함을 느끼며 가슴을 널찍하게 폈다.

언젠가 봤던 프라타 황녀가 화려한 검으로 키아나의 머리와 어깨에 검을 두드렸다. 작게 나는 쇳소리만이 즉위식에 울려 퍼졌다.

아직 수도로 들어가지 못한 지금 황제를 대신하는 것은 프라타였다. 도장을 받아온 문서가 있다던데, 거기에 적힌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바꾸면 나도 황제가 되나…?

다만, 제국 제일검이라는 자리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 스승이 죽자마자 즉위식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로써 키아나 엘리아스 랄프예 드 샤르페는 제국 제일검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프라타가 잔뜩 힘이 들어간 말투로 선포했다.

그에 사람들은 작게 손뼉을 치며 환호했고, 나는 그 작은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기운까지 사용하며 열심히 손뼉을 쳤다.

“호라라라라! 우리 키아나!! 키아나가 최고다! 제국 제일검 키아나! 우윳 빛깔 키아나!!”

“닥쳐! 멍청아!! 다 쳐다보잖아!! 우윳 빛깔은 또 뭐야!!”

“최고다! 키아나! 자랑스럽다!! 저 사람이 제 사저입니다! 여러분!! 쫀득하고 아름다운 차기 제국 제일검에게 박수를….”

키아나는 아래에서 열심히 손뼉 치며 환호하는 에이든을 보며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다만, 싫지 않은 기분에 입꼬리는 올라갔다.

그런 키아나를 보며 프라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이가 자네의 사제인가 보군. 저 아이도 꽤 쓸만해 보이던데. 다만, 좀 경박하군.”

“예. 제 사제입니다. 그는 매우 강한 사내입니다.”

“이제야 좀 웃는군. 확실히 웃으니까 더 아름다워. 괜히 검후라는 별명이 붙여진 게 아니군.”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웃으라고 한 말이니. 그나저나 참으로 시끄러운 성격이군.”

“크흡… 아! 죄송합니다.”

“흐음­ 저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웃는 게 수상하군. 자네 제국 제일검은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슬픈 표정 지을 필요 없네.”

“슬픈 표정 지은 적 없습니다.”

“지금 황제 대신인 내게 정색한 건가?”

“그…그게 아니라. 다만, 진실을….”

“하하하! 장난이네. 그러니까 가정을 꾸리지 말고 즐기기만 하라는 거야. 안에 싸지 말고 밖에. 알았지?”

프라타의 장난스럽고 경박한 손짓에 키아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많은 사람 앞에서 즉위식을 하고 있는데, 저런 천박한 손짓이라니….

그리고 안이 아니라 밖이라니?!

키아나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명심하게. 안에다가 하지 말고 밖에. 내 저 아이도 따로 불러서 명심을 시켜야….”

“아닙니다! 이해했습니다! 사제에게는 제가 말할 테니 제발….”

“아하하하! 알았네! 알았어! 이거 역사에 길이 남을 재능이라더니 속은 순박한 처녀구만. 나이에 걸맞아.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제국 제일검.”

옆의 신하에게 들고 있던 검을 넘긴 프라타가 빙그레 웃으며 키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을 받듭니다.”

키아나는 그 굳은살 하나도 박이지 않은 손을 맞잡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제 무능한 애비를 대신해서 목줄 풀린 도마뱀에게 뺏긴 집을 가지러 가볼까.”

프라타의 눈동자가 햇빛에 반짝였다.

그 안에 담긴 자신감에 키아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전설 속에서만 나오는 용이었지만, 저 여자와 함께한다면 이루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륙을 지킨다. 내게는 오직 그 생각뿐이다.”

“멍청아! 이상한 말 그만하라고! 무슨 저주에 걸린 거야?!”

“저주보다도 끔찍한…. 그 심연의….”

프라타에게서 고개를 돌린 키아나는 투덕거리는 케이트와 에이든을 보면서 검 손잡이를 다시금 고쳐 잡았다.

제국 제일검이라는 무거운 옷을 입은 키아나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

“흐응…? 분명 여기가 맞는데 말이야. 수도를 옮긴 건가?”

중요 부위만 대충 가린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눈을 가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앞에 있는 모습을 응시했다.

“왜 다 저렇게 부서진 거야. 그때 부서지고 재 공사하지 않았나?”

여자는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고민했다. 여자의 앞에는 예전에 세상의 모든 것을 막을 것처럼 굳걷하게 세워져 있었던 제국 수도의 성벽이 부실 공사의 흔적처럼 허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왜 기분 나쁠 정도로 익숙한 냄새가 나는 거지?”

여자는 자꾸만 코를 찡그리며 킁킁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여자는 뒤쪽에 짐승 가죽으로 덧대어 만들어둔 배낭에서 큼지막한 생고기를 꺼내서 씹어 먹었다.

“역시 고기는 생으로 먹어야 맛있다니까. 그럼 일단 들어가 볼까.”

생고기를 금세 먹어치운 여자는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저기에 에이든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여자는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이제는 무너진 수도로 향했다.

아련히 떠오르는 기억에 웃는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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