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수녀들의 티타임.
* * *
나는 내 앞에 있는 비키를 훑어보며 확인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지만, 비키는 여전히 패기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오연하게 내려다봤다.
근데… 저거 시발 뭐야.
“그… 머리에 뭐가 났는데요?”
“아, 이거? 그러게 언젠가부터 나더라고.”
비키가 피처럼 붉은 머리 위에 달린 손 하나 정도 크기의 뿔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대답했다.
뿔은 정수리 옆 부근에 묘하게 살짝 앞으로 굴곡져서 자랐는데 크기는 또 적당해서 한 손에 들어올 듯했다. 그 완벽한 모습을 보며 내 머릿속에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거 시발 누가 봐도 손잡이잖아.’
“왜…? 조금 이상한가? 근데 잘라도 다시 나더라고.”
“아니에요. 잘 어울려요! 자르지 말아요! 쓸데가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자신의 뿔을 양손으로 잡고 힘을 주는 비키를 황급히 말렸다.
“그래? 그나저나 여기서 만나다니 신기하네.”
“그러게요. 비키는 여기서 뭐를….”
“크롸롸롸롸롸롸!!!”
“아 맞다 저게 있었지. 이야기는 이따 하자. 지금 좀 바빠서.”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던 비키가 다시 울부짖는 용을 돌아보더니 마치 운동을 나가는 것처럼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발을 굴렀다.
캬하하하하!!
비키가 땅을 박찰 때마다 굉음이 터지며 땅이 움푹 파였다. 비키는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음….”
혼자서 용을 향해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며 덤비는 비키의 모습에 방금까지 잔뜩 기합을 넣으며 무게를 잡고 있던 황실 기사단의 꼴이 우스워졌다.
잔뜩 모여있던 기사들과 벨 늙은이가 침음성을 흘리며 광소를 터뜨리며 용에게 달려드는 비키를 쳐다봤다.
“크흠… 아는 사이인가 보군?”
“예 뭐. 같은 아카데미 출신입니다.”
“그래. 무력이 상당한 것 같던데… 덕분에 이번 용 사냥이 더 쉽겠어.”
벨 늙은이가 자꾸만 헛기침하며 내게 물었다.
“그럼 우리도 가시죠.”
멍한 표정을 짓는 기사들 사이에서 혼자 검을 뽑은 키아나가 말했다. 비키가 있던 자리를 흘겨보며 말하는 키아나의 말투가 묘하게 차가웠다.
“그래. 출전.”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 벤 늙은이가 한 손에는 제국의 문양이 그려진 방패 그리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들고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출전!””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벤 늙은이와 키아나가 동시에 용 쪽으로 뛰었고, 이내 나머지 기사들도 따라서 사라졌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지고 휑해진 공간에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시발 굳이 나도 따라가야 하나?’
만약 벤 늙은이와 키아나 둘 뿐이었다면 나도 냉큼 달려가서 도왔겠지만, 비키까지 합류한 이상 내가 낀다고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본 비키는 그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해졌으니까.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서서 구경하기도 좀 눈치 보이는데….
“에이든! 뭐해요?”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아가사가 보였다.
아 맞다 수녀 단이 있었지.
아가사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단아하게 미소 짓는 안드레아와 요염하게 입꼬리만 올린 스칼렛, 그리고 이름 모를 수녀 두 명이 더 있었다.
“그게 저기에 합류하기 좀 애매해서.”
“으음… 그렇기는 하네요. 그럼 저희 좀 도와주실래요?”
“도와달라고? 어떤 걸?”
아가사가 수녀들이 모여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햇볕이 뜨거워서 천막 같은 걸 좀 치고 싶어서요. 저희끼리 모여있으니까 잘 안되네요. 저희를 호위한다던 기사도 갑자기 저기에 합류해서 뛰어가서 따로 시킬 사람도 없고….”
“응 그러지 뭐. 할 것도 없으니까.”
“좋아요! 고마워요!”
아가사가 방긋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나는 아가사와 같이 수녀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안녕하세요! 저는 헤이즐리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옅은 금발에 귀엽게 생긴 수녀가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인사했다.
“마샤.”
그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무표정인 수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멍해 보이는 느낌이 드는 수녀가 연신 아가사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깊이 숙이는 모습을 보며 수녀들 사이에도 군기가 있다는 걸 느꼈다.
안드레아와 스칼렛과도 인사를 나누고 아가사가 건네준 간이 천막을 설치했다. 천막은 마법이 내장되어 있는지 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큼지막한 크기였다. 우습게도 천막 옆에 있는 작은 버튼을 누르니 자동으로 설치됐다.
“그냥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걸 왜 못해?”
“대충 넘어가요. 에이든은 눈치 없다는 이야기 많이 듣죠?”
아가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팔꿈치로 내 배를 꾹꾹 찔렀다. 천막은 안에 10명 정도 누울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컸다. 천막이 펴지자 나머지 수녀 둘이 달려와서 천막 안에 폭신한 천을 깔았다.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샌드위치나 쿠키들 그리고 음료를 안에 빠릿빠릿하게 준비했다.
‘이거 그냥 소풍 나온 거 같은데?’
그리고 그 위에 자그마한 쿠션들까지 놓는 것을 보며 나는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애들이 조금 느리죠?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래요.”
“시정하겠습니다!”
“….”
아가사의 중얼거림에 열심히 움직이던 수녀 둘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그런 둘을 못마땅하게 보는 아가사의 모습에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에이든 님. 아침은 드셨어요?”
“아 안드레아. 아니요. 별로 속이 안 좋더라고요.”
“그럼 헤이즐리가 만든 샌드위치 드셔보세요. 애가 맹하기는 해도 요리는 제대로니까요.”
“수녀! 헤이즐리!”
안드레아의 말에 열심히 천막 안에서 움직이고 있던 옅은 금발의 수녀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원…래 수녀들이 이랬었나?’
수녀들에게서 묘하게 군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내 안쪽 정리가 다 끝나고 우리는 천막 안에 들어가서 앉았다.
헤이즐리와 마샤는 같이 앉지 못하고 옆에 서서 양손을 공손히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남의 일이라 참견하지 않았다.
“이것 좀 먹어봐요.”
빗치 수녀 스칼렛이 내 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샌드위치를 먹여줬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비벼지는 스칼렛의 부드러운 몸이 내 기분을 좋게 했다.
“이건 에이든 님이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특별히 가져온 민트 초코 대추차에요.”
“아! 고마워요. 제가 이걸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우웩! 에이든은 왜 이런 걸 마셔요?!”
“어허. 어린이들이 모르는 어른의 맛이 있어.”
“안드레아! 안드레아도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저는 맛있기만 한걸요?”
“안드레아… 입 옆에 흐르고 있어요.”
“아….”
“푸하하하하!!”
안드레아는 황급히 하얀색 손수건을 꺼내 입 옆에 흐르는 것을 닦았다.
‘사람이 얼마나 착하면 민트 초코 대추차도 억지로 마시지? 케이트는 대뜸 주먹부터 날렸는데.’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나를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 안드레아를 보며 나는 작게 감동했다.
“이것도 드셔보세요. 아.”
“고마워요. 스칼렛.”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나는 뭔가를 잊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음… 분명 내가 뭔가를 하고 있었는데?
“에이든. 헤이즐리는 에일버드 흉내를 되게 잘 내요!”
“수녀! 헤이즐리! 맞습니다!”
“그…그래?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흉내 내보겠습니다! 삐익! 삐익!”
아가사의 말에 옅은 금발의 수녀가 자세를 낮추더니 뒤뚱뒤뚱 걸으면서 에일버드의 울음소리를 입으로 냈다. 그 소리가 루나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똑같아서 나는 작게 감탄하며 손뼉 쳤다.
“삐익! 감사합니다!”
내 박수에 헤이즐리 수녀가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하고 고개를 다시 숙였다.
“아하하하! 진짜 똑같죠?”
“그러네. 진짜 에일 보드인 줄 알았어 머리카락 색도 비슷하셔서.”
“감사합니다!”
“헤이즐리는 에일버드처럼 엉덩이도 통통해요! 헤이즐리!”
“수녀! 헤이즐리!”
“아니에요! 그런 건 안 하셔도 돼요!”
아가사의 말에 헤이즐 리가 뒤돌더니 상체를 숙이며 대뜸 엉덩이를 불쑥 내밀었다. 아가사의 말처럼 토실토실한 엉덩이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가 황급히 말렸다.
“아하하! 역시 에이든은 부끄러움이 많다니까요.”
“너는 쪼그만 게 뭘 시키는 거야!”
“예? 제가 시킨 게 아닌데요! 헤이즐리?”
“수녀! 헤이즐리! 괜찮…습니다!”
“아가사. 헤이즐리 수녀님을 그만 놀리렴.”
“수녀! 헤이즐리!”
“스칼렛은 맨날 나만 뭐라고 하고….”
“그게 아니라….”
우스꽝스럽지만 따뜻함이 묻어 나오는 수녀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민트 초코 대추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래 이게 평화지….
평화?
뭐지… 나 뭔가를 잊고 있는….
“크롸롸롸롸롸롸!!!”
“푸훕!!”
들려오는 대지를 진동시키는 소리에 나는 입에 잔뜩 머금고 있던 민트 초코 대추차를 뿜고 말았다.
그리고 내게서 뿜어져 나온 대추차는 내 앞에 있던 안드레아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안드레아! 이런! 미안해요! 갑자기 들린 소리 때문에!”
“…아.”
“안드레아? 괜찮아요?”
“그… 괜찮아요. 잠시 밖에서 닦고 올게요. 이야기들 나누고 있어요.”
얼굴이 초록색에 잔뜩 젖은 안드레아가 화가 잔뜩 났는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갔다.
“괜찮을 거예요. 아니 오히려… 아니다. 그냥 앉아있어요.”
“그게 무슨…?”
그런 안드레아를 따라 나가서 사과하려는 내 팔을 옆에 있던 아가사가 잡았다.
“괜찮아요. 에이든 님.”
“정 걱정되면 제가 한번 나가볼게요.”
스칼렛이 부드럽게 내 어깨를 누르면서 나를 말렸고 아가사가 나 대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제야 힘을 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문득, 방금 밖에서 들렸던 소리가 떠올랐다.
“…그런데 용을 잡는데 이러고 있어도 될까요?”
“음 괜찮을 거예요. 다치면 저희한테 오겠죠. 그리고 저희를 보호할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에이든 님은 저희를 보호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이것도 먹어봐요. 아.”
“아.”
스칼렛이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비틀이며 내 입에 샌드위치 조각을 넣었다. 나는 내게 바짝 붙은 스칼렛의 체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발 알아서 하겠지. 애초에 자기들이 한다고 한 건데.’
나는 애써 마음을 편히 먹고 내 입 주변을 닦아주는 스칼렛의 손길을 음미했다.
‘흐음… 근데 왜 갑자기 졸리지?’
따뜻한 스칼렛 체온 덕분인지 아니면 샌드위치를 먹어 배가 불러서인지 슬금슬금 졸리기 시작했다.
“에이든 님. 졸려요? 여기 누울래요…?”
고개가 흔들리는 나를 스칼렛이 부드럽게 끌어당기면서 자신의 무릎에 기대게 했다.
“그러면 잠시….”
포근한 스칼렛의 허벅지에 기대면서 무거운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
안드레아를 따라나선 아가사는 밖에 쭈그려 앉아 얼굴 아래에 소중히 양손을 받치고 열심히 핥아먹는 성녀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럴 것 같았지…’
얼굴에 에이든이 입에 담긴 물을 뿜었다고 대뜸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절정하고 있는 게 도무지 성녀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아가사는 그저 조용히 안드레아의 뒤에서 주변에 누가 다가오지 않는지 확인했다.
안드레아는 얼굴에서 떨어진 액체를 소중히 양손에 모아서 입으로 가져가 마시고는 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다음에는 양손을 쫙 펴서 손 주름이 없어질 정도로 핥았다.
그렇게 안드레아는 몇 번이나 몸을 떨면서 절정한 뒤에야 고개를 들고 아가사를 돌아봤다.
“아…. 에이든 님은요?”
“하아 안드레아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저번에도 그러다가 일이 귀찮아졌잖아요.”
“아 미안해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에이든 님은요?”
아가사는 안드레아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작은 한숨을 쉴 뿐.
“하아… 스칼렛이 먹이고 있어요. 그때 얻은 그거.”
“그럼 곧 효과가 나오겠네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수녀들도 교육해야 하니까. 아가사가 밖에서 혹시 환자가 오는지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 똑 부러지게 말하는 안드레아의 모습에 아가사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저번에는 정말 죽을 뻔했기 때문에 지금 참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저는 교육하러 가볼게요….”
“네.”
비틀거리면서 천막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안드레아의 얼굴이 잔뜩 흥분해 터질 것처럼 붉어진 것을 보며 아가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안드레아가 성녀라니… 역시 신은 존재하지 않아.’
아가사는 천막 앞에 서서 주변에 다가오는 이들이 없는지 확인했다.
“헤이즐리! 그 아까운 것을 흘리면 어떻게 해요!”
“수녀! 헤이즐리! 아흑! 죄송합니다! 너무 아파서!”
“찢어진 건 치료하면 되니까 참아요! 더 조여요! 안 흐르도록!”
“악! 수녀! 아흑! 헤이즐리! 시정하겠습니다!”
안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안드레아의 목소리에 아가사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크롸롸롸롸롸롸!!!”
멀리서 들려오는 용의 울음소리와 무너지는 폐허가 시간 보내기에 좋은 눈요기가 됐다.
‘용은 그렇다 치고 사람이 저렇게 강할 수가 있나?’
용의 머리 부근에 붙어있는 빨간 머리 여자와 용의 발을 베어내고 있는 금발 여자를 보며 아가사는 작게 감탄했다.
그때, 멀리서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기사 둘이 있었다. 둘 다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그중 한 명은 다리 아래가 짓뭉개져 있었다. 그나마 팔 하나만 날아간 기사가 이를 악물고 동료를 끌고 있었다.
“허억…허억… 수녀님! 제발 제 동료를….”
“아! 잠시만요.”
기사는 기어코 아가사 앞까지 걸어왔다. 동료를 살린다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걸어온 것인지 아가사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가사의 신성력도 또래 수녀들에 비해 뛰어났지만, 저 정도의 중상자들을 치료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가사가 천막 문을 두드렸다.
“으음…. 안드레아! 여기 환자 왔어요! 안드레아가 나와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알았어요. 으음… 세운 게 아까우니까 스칼렛이 잠시 하고 있어요. 이따 제가 돌아오면 바로 비켜야 해요? 알았죠?”
안에서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들린 뒤, 천막 문이 열리고 한껏 들뜬 얼굴의 안드레아가 나왔다.
“그 얼굴에 속옷은 벗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 이게 있었군요. 잊고 있었어요. 고마워요… 아가사.”
안드레아가 아가사의 말에 부드럽게 웃으며 얼굴을 덮고 있는 에이든의 속옷을 소중히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아가사는 안드레아가 걸을 때마다 성녀 복 아래에서 떨어지는 액들은 애써 못 본척했다.
“으음… 확실히 아가사가 치료하기에는 무리겠네요.”
작게 중얼거린 안드레아가 기사들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곱게 모은 다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게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며 아가사는 속으로 혀를 작게 찼다.
‘저게 진짜 성녀라니. 신은 없는 게 확실해.’
마치 물웅덩이에 앉았던 것처럼 엉덩이 부근이 흠뻑 젖어있는 안드레아의 성녀 복을 보며 아가사는 혼잣말했다.
안드레아에게서 뿜어져 나온 신성하고 밝은 빛이 기사들을 감쌌고 기사들의 끔찍한 상처들이 금세 여물었다. 마치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흉터 하나조차도 남지 않았다.
“으음… 아! 성녀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감격에 젖은 얼굴로 안드레아를 보며 감사를 표했다. 그에 성녀의 얼굴을 한 안드레아는 자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의 입장에서 안드레아는 기적과도 같았다. 방금까지 사지가 짓이겨 죽을 뻔한 자신들을 원상태 아니 오히려 더 건강하게 만들었으니까.
만약 안드레아가 아니라 일반 수녀에게 갔으면 치료받아서 살았어도 평생을 불구로 살아갔어야 했으리라. 평생 검의 길을 그들이 불구가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
“자! 치료 끝났으니까 다시 일하러 가야죠.”
놔두면 종일 감사를 표할 것 같은 기사들의 모습에 아가사가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감사… 예? 할 일이요?”
연신 땅에 머리를 박으며 감사를 표하던 기사들이 궁금증이 잔뜩 담긴 눈빛으로 아가사를 쳐다봤다.
“크롸롸롸롸롸롸!!!”
“저거 처리하셔야죠?”
아가사는 때마침 울부짖으면서 불을 내뿜는 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지만 저 용에게는 저희 기사들의 무기가….”
그 손가락에 맞춰서 용에 시선을 돌린 기사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자리했다.
“저희는 기사님들을 믿고 있답니다. 저 포악한 용에 맞서서 저희를… 그리고 대륙을 지켜주실 거라고…. 그런 믿음 덕분에 저희가 목숨 걸고 기사님들을 따라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요.”
안드레아가 그런 기사들을 보며 단아하게 웃었다.
“아…. 그렇군요.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대륙을 지키기 위해. 성녀님을 위해. 제국을 위해.”
“다시 가보자고.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니까. 아름다운 성녀님의 믿음을 깨면 안 되지.”
잠시 안드레아의 아름다운 얼굴에 넋을 빼앗겼던 기사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들에게는 성녀와 기사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처럼 이 순간이 남겠지만, 안드레아를 뒤에서 보고 있는 아가사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저 발정이 나서 당장이라도 천막 안으로 돌아가 박고 싶어서 엉덩이를 찔끔거리는 창부 같은 여자가 때아닌 방해꾼들을 서둘러 치우고 싶은 모습일 뿐.
이내 의지를 굳힌 기사들이 조각난 검을 들고 다시금 용과 전투를 펼치고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와 기개가 담겨 있었다.
기사들이 사라지자마자 안드레아는 몸을 움찔거리며 황급히 천막 안으로 돌아갔다.
“아흑!”
“스칼렛! 이제 제가 할게요. 비켜주세요. 아까 분명 약속했잖아요.”
도저히 수녀들이 모인 천막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을 들으며 아가사는 방금까지 안드레아가 무릎 꿇고 있던 곳에 웅덩이처럼 맺힌 물을 발로 비벼 흐트러뜨렸다.
‘신은 없어. 확실해.’
아가사는 자기 생각에 고개를 다시 한번 끄덕였다.
“크롸롸롸롸롸롸롸!!!”
저 멀리서 피를 뿌리며 용과 전설적인 전투를 펼치는 모습이 아가사의 눈 요깃거리가 됐고.
“아흑! 하윽! 에이든 님! 저도! 사랑해요!”
“헤이즐리! 떨어지는 액들은 다 모아두세요. 소중한 거니까.”
“수녀! 헤이즐리! 알겠습니다! 마샤. 빨리 준비해둬! 안 그러면 이따가 진짜 아플 거야! 나 아까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그래도 조금은 좋기도 했어…. 그…그게 안으로 들어오니까 진짜로….”
천막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아가사의 심심함을 채워줬다.
“모두가 열심이네. 열심이야.”
아가사는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크게 폈다.
하늘에서 길게 늘어지는 별똥별은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
“저…저거 그냥 둬도 된다고?”
“으응. 그래도… 포인트 쌓이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묻는 구름신을 보며 대지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옆에 있는 바다신과 바람신은 말을 잃은 지 오래였다.
“…많이 쌓이네. 엄청 많이.”
“그거 보면서 참아… 그러면 돼.”
대지신은 자괴감이 가득 찬 얼굴로 아래를 보며 눈을 질끈 감는 구름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딱! 한 번만! 참으면 돼… 그다음은 쉬우니까.”
대지신이 달콤한 목소리로 구름신의 귀에 속삭였다.
“지랄하네!! 이 사기꾼 새끼가!”
“아악!! 바다신! 이거 놔! 놓으라고!!”
“이거! 이거! 다 명품이잖아! 어디서 났어! 어디서 났냐고!! 내 포인트 내놔!!”
“어허! 바사장! 우리 알 거 다 아는 사이에 왜 이럴까! 아앗!! 그거 신상이란 말이야! 뜯지 마! 뜯지 말라고!”
“신이 이 꼬락서니니까 수녀가 저따위지!!”
잔뜩 명품으로 치장한 대지신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드는 바다신을 보며 구름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딱… 한 번만 감으면 된대….
아래에서 들려오는 앙앙거리는 신음을 애써 무시한 구름신의 작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