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멍청한 영웅.
* * *
[부럽다 부러워…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
[빨…빨간 도마뱀을… 내 숙적을… 내게 기회를….]
‘뭐라는 거야 시발.’
자꾸만 들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잠시 뒤.
“크롸롸롸롸롸롸롸!!!!”
크게 울부짖는 용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 잠에서 깼다.
“시발!! 애미 터진 용이다!!”
“앗… 에이든 님 정신이 드세요?”
내 옆에서 한 손에 젖은 수건을 들고 나를 쳐다보는 안드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이 젖어 있는 것을 보니 나를 닦아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드레아…?
‘사랑해요! 에이든 님! 사랑해요!’
‘안드레아 보지는 생각보다 허벌이네.’
안드레아의 얼굴을 보자 순간 방금 꿨던 꿈이 생각나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저렇게 착하고 순결한 안드레아를 대상으로 그런 파렴치하고 천박한 상상을 했다니….
정말 나는 케이트의 말처럼 쓰레기인가.
“…에이든 님?”
내가 대답이 없자 안드레아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그 표정이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아 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아… 안드레아. 제가 잠이 들었었나 봐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하면서도 천박한 창녀처럼 헐떡이던 안드레아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꿈이 쓸데없이 현실감 넘쳤던 게 문제다.
“그…그러게요. 피곤하셨나 봐요. 지금은 좀 괜찮아요?”
안드레아가 말을 더듬으며 내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조금 뻐근한 거 빼고는”
자꾸만 오버랩되는 안드레아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근데 왜 기운이 부족한 거 같지?’
“…왜 고개를 돌리시죠?”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지는 안드레아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리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안드레아가 보였다.
“아 그게 그냥….”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자꾸만 대답을 재촉하는 안드레아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 그렇다고 안드레아에게 거짓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꿈에 안드레아 님이 나왔는데… 조금 부끄러워서요. 죄송하기도 하고.”
“…아! 그렇군요. 괜찮아요. 에이든 님이 꿈에서 제 어떤 모습을 보셨어도 꿈이잖아요. 그…그리고 에이든 님도 가끔 제 꿈에 나온답니다.”
“그래요? 제가 안드레아의 꿈에요? 어떤 모습으로…?”
“…비밀이에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에이든 님의 꿈에 나왔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쁜걸요?”
안드레아가 전처럼 단아하게 웃으면서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았다. 수건에서 전해지는 찬 느낌에 몽롱한 정신이 점점 돌아왔다.
부드럽게 웃으며 친절하게 내 얼굴을 닦아주는 안드레아의 모습에 자괴감이 더욱 심해졌다.
성녀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이런 순수하고 친절한 사람을 꿈에서 그렇게….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먹은 놈이지 시발.’
[정신 차렸군! 소년! 서두르게! 빨간 도마뱀을 잡으러 가자고!]
[크흠…크흠….]
오늘따라 나를 보는 안드레아의 시선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시선 속에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깊은 애정에 내 죄책감은 점점 더 켜졌다.
안드레아가 괜찮다고 했어도 지금까지 내게 계속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을 그렇게 생각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이제 그만 노닥거리고 빨간 도마뱀을!!]
아까부터 독촉하는 목소리는 애써 무시했다. 생각보다 꽤 길어지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어떻게든 해결하겠지.
[내 숙적인 빨간 도마뱀을….]
닥쳐 굳이 내가 안 가도 되니까.
[네가 아니라 내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재촉해 시발.
“수도 탈환 작전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아…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가끔 다치신 분들이 오셔서 치료하고 돌아가시지만… 아직은 괜찮은 거 같아요.”
저것 봐 괜찮다잖아. 시발.
[그…그래도….]
“크롸롸롸롸롸롸롸!!!”
그때 돌연 용이 크게 울부짖었고.
무언가가 날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안드레아를 안고 옆으로 굴렀다. 날아온 무언가는 천막을 부수고 그 뒤로 굴러갔다.
“아… 에이든 님! 사랑….”
“괜찮아요?”
내 품에 안겨 저항하지도 않고 꼼지락거리며 입을 움찔거리는 안드레아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크흡! 하아… 하아….”
날아온 것은 엉망진창이 된 키아나였다. 빛나던 은색 갑옷은 이미 흙에 엉망이 되어 그 빛을 다 잃어버렸고 내가 사준 검도 이가 군데군데 다 나가 있었다.
키아나는 굳은 얼굴로 휘청거리면서도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품에 안은 안드레아를 부드럽게 내려놓고 황급히 키아나에게 달려갔다.
“사저! 괜찮아요?”
“아… 사제. 안 보여서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야. 여기 있었구나. 나는 괜찮아.”
키아나가 힘겹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있어 봐요.”
“아 성녀님. 감사합니다.”
내 옆에 온 안드레아가 키아나의 어깨 부근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 후 안드레아에게서 뿜어져 나온 부드러운 빛이 키아나를 감쌌다.
키아나는 그 빛에 작게 감탄하면서도 손에 들고 있는 검을 고쳐 잡았다. 키아나의 얼굴에 서린 결의가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조금 무리해서 치료했으니 상태가 돌아왔을 거예요.”
“그렇군요. 확실히 기운도 회복된 느낌입니다. 전보다 더 잘 싸울 수 있겠군요. 감사합니다.”
치료가 끝나자 키아나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 방향이 향하는 곳은 아직도 입에서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설 속의 용이 있는 곳이었다.
“…사저.”
“아 사제. 사제는 여기 있어 우리끼리도 충분할 것 같으니까. 성녀님을 지켜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하고. 나는 갔다 올게.”
키아나가 피곤함이 잔뜩 담긴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고는 힘차게 땅을 박찼다. 그리고 올 때처럼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는 무심결에 키아나를 향해 뻗은 손을 애매하게 든 상태로 키아나가 방금까지 있던 곳을 응시했다.
“에이든 님?”
안드레아가 부드럽게 나를 부르며 내가 들고 있는 손을 매만졌다. 고개를 돌리는 내게 안드레아의 성녀 복 곳곳에 묻어 있는 붉은 피와 피곤함이 잔뜩 묻은 얼굴이 보였다.
붉은 피는 무언가와 엉킨 채 안드레아의 새하얀 성녀 복 곳곳을 물들인 상태였다. 아마, 찾아온 기사들을 치료하느라 생긴 얼룩일 터이다.
‘내가 엎어져 자고 있을 때 다들….’
아까와는 다른 자괴감이 내 마음을 독촉했다.
[크흠… 저 피는… 크흠….]
[소년. 저기에 내 숙적 빨간 드래곤이 있다. 부디 나를 저곳에….]
알았어. 알았다고 시발.
아까부터 독촉하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에 만약 용을 처리한다면 후에 일어날 일을 어렴풋이 예상했다.
[…고맙다 소년.]
그래 시발 머릿속이 조용해지면 나야 좋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내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면서 안드레아에게 말했다. 말을 하고 나서도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 알겠습니다.”
안드레아는 내 말에 손을 내리더니 작게 미소 지었다. 내가 말하긴 했어도 예의상 한 번은 말릴지 알았는데 말이야.
“너무 쉽게 보내주는 거 아니에요? 케이트는 개지랄하던데….”
“신에게는 신의 길이 있듯이 영웅에게는 영웅의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저는 에이든 님이 무엇을 하든 도울 뿐 막지 않을 겁니다.”
안드레아가 내 얼굴을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웅이라는 단어에 담긴 어감이 묘하게 달콤하며 씁쓸했다.
“다만, 저는 에이든 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든 할 거예요. 이런 축복이라도….”
어쩐지 여운이 담겨있는 안드레아의 말이 끝나며 안드레아의 손에서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들 사이로 단아하게 웃는 안드레아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내 입술에 부드러운 안드레아의 입술이 포개지고 안드레아의 등 뒤에서 선명한 네 쌍의 날개가 피어났다.
내게 옮겨온 안드레아의 빛에 내 몸이 점점 가벼워지며 신성력이 마치 끓는 용암처럼 내부에서부터 끌어 올라왔다.
‘오 네 쌍이야! 네 쌍! 봤지?! 이거 통한다니까! 애들아…? 듣고 있어…? 통한다고… 내가 이겼다고….’
이내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평소보다 야윈 얼굴의 안드레아가 천천히 내게서 떨어졌다.
“저는 언제나 에이든 님을 따를 테니까요.”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부드럽게 웃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안드레아의 모습이 조금 간지러워서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지만, 안드레아는 더욱 밝게 웃었다.
“그럼 갔다 올게요. 뭐 별일 있겠어요?”
“예…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괜히 강한 척하면서 검 손잡이를 잡고 천막을 나섰다. 나오면서 언뜻 본 안드레아는 다리가 풀려 땅에 주저앉고 있었다.
그런데 안드레아의 골반이 저렇게 넓었나?
“에이든! 가려고요? 애들아 일어나서 인사해야지!”
“수녀! 헤이즐리! 수고하십쇼!”
“…흥.”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막 밖에서 아가사에게 얼차려를 받는 수녀들이 일어나 내게 피곤한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스칼렛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내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시발 존나 가기 싫어.’
막상 나왔지만, 아침부터 시작해 해가 저문 지금까지 수도라고 불렸던 폐허에서 지형을 바꿀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심란해졌다.
죽기 위해 지옥으로 자기 발로 걸어가는 듯해서 나 자신이 끔찍할 정도의 병신처럼 느껴졌다.
[원래 영웅은 대대로 멍청이들이 담당했네.]
너처럼 말이지?
[하하하! 그것도 맞군! 다만, 우리 중 제일 멍청한 저 친구의 숙원이라니까.]
도마뱀 잡는 게 무슨 숙원까지야.
[…내 마지막 미련이네. 부탁하네.]
갈 테니까 안 어울리게 저 자세로 나오지 말라고.
[…고맙네.]
[나쁘지 않은 여정이었네. 친우여.]
[그렇군.]
그럴지도.
오랜만에 마시는 도마뱀의 피라…. 흐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나는 스스로 전투의 중심에 다가갔고 점점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짓밟혀 터진 시신들이 많아졌다. 아마 안드레아한테까지 가지 못하고 즉사한 놈들이겠지.
나는 혀를 차면서 그중 얼굴이 멀쩡한 놈의 눈을 감겨줬다. 녀석은 꽤 많은 미련이 남았는지 눈꺼풀이 제법 무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빨간 도마뱀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곳까지 도착했고 나는 검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빼 들었다.
“크롸롸롸롸롸!!”
“캬하하하!! 질겨! 질겨서 씹는 맛이 있다니까!”
“아래쪽 꼬리 부분의 상처가 벌어졌습니다. 그쪽 공략을 부탁합니다.”
“크흠! 늙어서 젊은것들이랑 놀려니 삭신이 쑤시는구먼!! 꼬리 쪽은 내가 가겠네. 자네는 좀 더 용의 주의를 끌어보게.”
“2조 기사 3명 추가로 이탈입니다!!”
“희생은 어쩔 수 없다! 버텨라!”
악에 받친 사람들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비키는 용의 등 쪽 부근에 들러붙어서 비닐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있었고, 키아나는 빠른 속도로 돌아다니면서 용의 몸에 흠집을 내고 있었다. 벨 늙은이는 이미 다 부서진 갑옷이 곳곳에 매달린 상태로 방패를 들어 용의 꼬리 부근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목숨 걸고 처절하게 용을 막아내고 있었다. 내 앞에 보이는 모습은 전설이나 소설 속에 나오던 멋있고 깔끔하게 단칼에 베어내는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모습은 오히려 바다에서 거대한 물고기와 씨름하는 뱃사람의 모습과 비슷했다.
아직도 팔팔하게 돌아다니며 파충류의 것처럼 생긴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용의 모습에 검을 잡은 손에 땀이 찼다.
[마침내… 마침내! 드디어 빨간 도마뱀을!]
저 빨간 도마뱀은 저번에도 만났잖아. 그때는 잠잠하다가 왜 지금 와서 지랄이야.
[그때는 자네의 격이 부족했었으니까. 지금의 자네는 달라. 성녀의 축복까지 받았고. 내가 사용하기에 충분하네.]
누가 사용하게 둔….
이 개새끼가 허락도 안 받고.
익숙한 기시감이 나를 끌어당겼다.
[…자네에겐 미안하고 고맙네. 내게 두 번째 기회가 오다니. 이 순간을 내가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후련한 듯한 목소리가 들리며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이 미천한 빨간 도마뱀이여! 내가 돌아왔다! 크하하하!! 이제야 이름 모를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겠구나!”
‘이 시발 애미 터진 새끼!!’
마지막으로 크게 발을 굴러 순식간에 용의 눈꺼풀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의식이 사라졌다.
“아! 자네 왔군. 오랜만일세.”
그리고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에 앉은 익숙한 금발의 남자가 나를 웃으며 반겼다.
“하… 저 개새끼 허락도 안 받고 시발.”
“자네가 이해하게나. 도마뱀이 저 친구의 풀지 못한 유일한 미련이니.”
“시발 무식한 새끼.”
나는 차오르는 욕지기를 뱉으며 금발 남자의 건너편에 앉았다. 금발 남자의 재수 없게 생긴 얼굴을 보니 아까 봤던 벨 늙은이의 얼굴이 연상됐다.
“근데 저기 방패 들고 있는 늙은이 너랑 좀 닮았다?”
“…그렇겠지. 벨 가문이니까.”
“벨? 그럼 저 늙은이가 네 후손이야?”
“그럴지도. 그런 칙칙한 이야기는 밀어두고 재미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재미난 이야기?”
“그래! 가령… 누구의 품이 제일 좋았나?”
금발 사내가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품…? 그게 무슨 소리야.”
“허허! 이 친구 참 눈치가 없군. 그러니까… 음… 누구의 보지가 제일 쪼여줬냐 이걸세!”
금발 사내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멋쩍게 긁으며 내게 물었다.
“미… 미친 새끼 아냐 이거?”
재수 없을 정도로 공명정대하게 잘생긴 얼굴을 한 사내가 저런 상스러운 질문을 던지니 당황스러워서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그러지만 말고… 여기서는 볼 수밖에 없으니 답답하단 말일세! 이게 실례되는 질문인가?!”
“당연히 실례지! 미친 새끼!”
“그…그런가? 크흠… 저놈과 오래 지내다 보니. 그…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나? 아니면 누가 제일 자네의 마음에 들었나 정도는….”
“으음 일단 마음은….”
계속해서 절실하게 물어보는 사내를 보며 한숨을 내쉬며 적당한 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우리 둘의 앞에 있는 반투명한 화면에서는 용을 조각내고 있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지만, 이미 우리 둘은 여자 이야기에 푹 빠져 거기에 줄 관심이 없었다.
그때보다 나이가 든 모양인지 용의 동작이 굼떴다. 전과 달리 용의 공격을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사내의 원래 몸과 달리 지금의 몸은 균형적으로 발달한 형태라 조금 더 움직이기 쉬웠다.
그리고 그 큰 덩치에 긁히더라도 자신의 기운과 신성력이 합세해 금방 상처를 복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성당이라도 나가볼 것을….’
사내는 끌끌 거리며 용의 얼굴 부근을 향해서 뛰어올랐다.
“내 꺼? 아닌데 냄새가 달라….”
“사제? 왜 여기에! 위험해!”
별 볼 것 없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미인들의 걱정을 받으며 사내는 계속해서 올랐다.
이 느낌은 오랜만이구먼.
‘그렇겠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검의 촉감에 사내는 입꼬리를 끝까지 올리며 자신의 신념을 검에 담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보는 용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나를 알아보겠나? 빨간 도마뱀.”
“크롸롸롸롸롸롸롸!!!”
마치 사내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용이 크게 울부짖었다.
“크하하하하!!”
사내는 그런 용과 마주 웃으며 검을 양손으로 잡고 용의 주둥이로 뛰었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 답답하고 어두운 검 속에서 생으로 씹어 먹히는 장면을 몇 번이나 복기했던가!’
사내의 검을 타고 거칠고 야만적인 기세가 세상을 흐트러뜨릴 것처럼 타올랐다.
사내는 거침없이 불을 내뿜는 용의 주둥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런 검에 검날이 흔들릴 정도로 가득 담긴 사내의 신념은…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욱 오랜 세월 검의 어둠 속에 있던 사내의 투쟁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익어 있었다.
용의 불길이 사내의 몸을 태우며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지만, 사내는 더욱 크게 웃었다.
고통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신성력과 기운이 뒤섞여 타오르는 몸을 금방 재생했고.
사내는 마침내 용의 주둥이 앞에 도착했다.
“너무 오래 걸렸군.”
사내는 이제 한없이 가벼워진 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그었다.
용의 지독한 권태와 그 못지않은 분노가 섞인 붉은색 눈동자가 사내를 조용히 응시했다.
사내는 용의 눈동자 주변에 깊어진 주름을 보며 쓰게 웃었다.
해가 뜨고 나서부터 질 때까지의 싸움에 대한 여파 때문일까.
아니면 사내의 검에 담긴 세월과 염원이 깊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결국 한낱 생물인 용이 오랜 세월 앞에서 닳았기 때문일까.
사내의 일 검에 용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갈라졌다.
결국, 자신의 숙원을 이뤄낸 사내는 케케묵을 정도로 오랫동안 꽁꽁 눌러뒀었던 무언가가 풀리는 걸 느꼈다.
그것은 끔찍할 정도로 우둔한 미련이었으며, 그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사내가 버틸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그것이 풀리는 것을 느낀 사내는 지금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이제 자신은 더는 이 검에 매여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사라진 뒤의 그 고리타분한 녀석이 혼자 겪을 지루함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다만, 더는 녀석과 체스를 두지 못하는 게 조금은 아쉽기는 했다.
“그러니까 가슴 크기는 비키가 제일 컸는데 그 쫄깃함은 키아나가 최고야. 물론 비키의 가슴은 만지면 녹을 것처럼 부드럽지. 보지 쪽은 음… 제일 쫄깃했던 건 케이트지. 비키는 내 것을 잡아먹을 것처럼 아예 눌러버리더라고 조금 살벌해… 루나 것은 그냥 아예 너무 작아서 잘 들어가지도 않더라고… 거의 찢으면서 들어갔었지 아마? 울면서도 좋아 죽는 그 모습이 얼마나 살벌한지….”
“오호… 그렇구만. 다들 하나씩 장점이 있구만. 크흠… 그래도 아름다운 건 키아나 그 숙녀가 아름다운데….”
“참으로 오래 걸렸어….”
사내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응시했다.
자신이 죽고 정정했던 용도 늙을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사내의 손에 들린 검은 녹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크하하하하!! 이름 모를 여자여!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사내는 조각난 용의 앞에 서서 일부러 과장해서 크게 웃었다.
지금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멍청한 두 놈에게 미련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이라도 그 녀석들이….
이제는 상관없지만.
“소년이여 자네는 영웅이 될 걸세. 소년은 충분히 멍청하니까.”
사내는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중얼거리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으음… 아무래도 키아나가 제일 아름답기는 하지. 그래도 안드레아의 청순한 외모는 키아나와는 다른 느낌이라 또 다른 맛이 있으니까… 어어… 나 왜 흐릿해져!”
“안돼! 소년! 그…그럼 지금 제일 좋아하는 여자는 누구인가!!”
“어어!! 나 올라간다!! 올라가!!”
“빨리 말해주게!!”
“어어엇!! 올라가!!”
“누가 제일 좋냐고! 소년! 젠장! 말해 달라고!”
무언가에 끌려 올라가는 내 눈에 어두운 공간 저편에 자리한 이상한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늙디 낡은 문에는 굵은 쇠들이 잔뜩 묶여서 열지 못하게 막혀 있었다.
“저…저건 뭐야! 시발 여기 왜 저런 게 있어!!”
“아… 그 나중에 알게 될 걸세! 하하하! 그럼 앞으로도 좋은 모습 많이 보여주게!!”
묘하게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는 사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전환됐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손에는 피가 잔뜩 묻은 검을 든 채로 폐허의 중간에 서 있었다.
꺼억… 역시 도마뱀 피도 나름 맛있네.
내 앞에는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내던 용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 엎어져 있었다.
“하! 병신 도마뱀 새끼 깝죽거리더니… 으음? 아아악!! 악!!!”
내 아래 놓인 고깃덩어리를 발로 차다가 문득 올라오는 이상한 느낌에 잠시 멈췄다. 그러고 온몸을 조각내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몸을 비틀면서 비명을 질렀다.
‘애미 터진 새끼! 쓰더라도 곱게 써야지! 시발!’
나는 한참이나 쪼그려 앉아서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눈물을 질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너무 아팠고.
묘하게 머릿속이 조용해졌기 때문에.
[잘 가게. 친우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