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폭풍전야 결혼식.
* * *
“흐응흐응 어때? 어울려?”
케이트가 순백색에 가슴이 푹 파인 드레스를 입고 빙글 돌면서 내게 수줍게 물었다.
드레스를 입은 케이트는 보는 이의 가슴이 떨릴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지 갈아입은 드레스가 과장 조금 보태서 100개라는 것과 조금 전의 드레스와 지금 드레스의 차이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응. 존나 잘 어울려. 최고야.”
“아까랑 토씨 하나도 안 바뀌었잖아! 장난해? 정신 안 차려?!”
대뜸 내 멱살을 잡는 케이트의 모습에 나는 터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이 지랄인데, 결혼하고 나면 어떤 지랄이 날지 벌써 두려웠다.
‘이… 시발 프라타 년 나한테 짬처리 한 거 아니야?’
문득 든 생각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그년이 주인 어쩌고를 내게 제안한 게 아니었다. 밖에서도 저 지랄인데 안에서는 어땠을지….
“잘 보라고!! 내가 특별히 너랑 결혼해주는 거니까! 그렇게 대강 보지 말란 말이야!! 중요하다니까 나한테! 정실의 도장을 박는….”
“아 몰라! 시발! 모르겠다고! 차이가 뭔데 시발! 그냥 벗기기 쉬운 거로 입어! 어차피 벗길 텐데!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내 멱살을 잡고 흔드는 케이트와 한계까지 쌓인 피로에 결국 나는 차오른 화를 참지 못하고 욕지기를 뱉었다.
‘아차! 시발 내가 무슨 짓을….’
배로 돌아올 케이트의 신경질을 떠올리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흥! 뭐래! 어이없어!”
내 욕에 겁먹었는지 케이트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조용하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갈아입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에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케이트가 멱살을 잡아 헝클어진 내 옷을 정리했다.
근데 뭐지 이 불안한 느낌.
나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잔뜩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케이트가 다음으로 입고 나온 드레스는 손짓 한 번에 벗길 수 있게 만들어진 드레스였다.
***
“서윤! 그렇게 볶는 게 아니래도! 애가 참!”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일평생 검을 잡은 내가 왜 요리를 연습해야 하냐고!”
매정한 눈빛으로 팬을 잡은 자신의 손을 내려치는 서아의 모습에 서윤이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요리는 여자의 기본이잖니! 세상에 요리 못하는 부인이라니! 그것만큼 끔찍한 게 없다고 한단다! 불평하지 말고 따라 해!”
에이든과 결혼을 약속한 이후부터 서아는 줄곧 저 상태였다. 서아는 전에도 서윤의 털털한 행동을 지적하기는 했었지만, 저렇게 회초리까지 들면서 난리를 치지는 않았다.
“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니까! 너도 봤잖아! 에이든 님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을!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요리는 기본이야! 자! 다시 잘 봐봐….”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서아는 다시금 다소곳하게 팬을 잡아 돌렸다. 누가 봐도 일등 신붓감인 서아의 옆 모습을 보면서 서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고추 박으면 끝이야! 끝! 너도 끝이라고!’
예전 자신에게 패배한 뒤 악착같이 소리를 지르던 더러운 용병 놈의 말이 언뜻 떠올랐다. 그때는 우습게 여기며 넘겼던 말이지만, 최근 급변한 서아의 모습에 자꾸만 그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서아와 서윤의 외모와 몸매 때문에 불안했던 아버지의 지나친 정조 관념 교육이 어긋나게 작동하는 듯했다.
그 때문에 지금 처녀를 주고 결혼을 약속한 서아의 머릿속에는 에이든에 관한 생각밖에 없었다. 남은 부분은 다른 여자들에 대한 경쟁심이었고.
완벽하고 깔끔하게 혁명단의 일 처리를 하던 서아는 이제 없었다. 그저 다른 쟁쟁한 여자들 사이에서 잊힐까 봐 전전긍긍하는 한 여자일 뿐.
“우리는 절대 지지 않을 거야…. 서윤을 골방 늙은이로 만들 수 없어…. 첩 소리를 듣게 하지 않을 거야….”
주문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아가 계속해서 팬을 뒤집었다.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상대와의 경쟁이 서아를 자꾸만 조급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서윤은 서아의 말에 담긴 뜻이 거슬렸지만,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이라 애써 넘기며 서아를 따라 팬을 잡았다.
“아 씨…. 분명 안에 했는데… 왜 배가 안 부르지? 분명 윤희가 그렇게 하면 아기가 생긴다고 했는데…. 애가 있어야….”
“언니! 이것 봐봐! 잘 뒤집었지?”
자꾸만 목소리가 낮아지고 표정이 가라앉는 서아를 보며 서윤은 황급히 자신의 팬을 자랑했다.
“그래! 봐봐! 할 수 있잖아! 서윤! 우리는 할 수 있어!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우리는 둘이 하나잖아. 그치? 다른 여자들이 아무리 이쁘고 강하고 가문이 좋다고 해도 우리는 둘이니까! 잠…잠자리도 우리는 둘이 같이 들어갈 수 있잖아! 그렇지? 윤희가 남자는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하니까….”
서아가 억지로 웃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윤희 이 계집애가 언니한테 무슨 말을…!’
윤희는 서아와 서윤이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남자관계를 많이 가진 여자였다. 그게 무슨 자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서아가 윤희와 자주 어울리는 게 불안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터질지는 몰랐다.
“오…오랫동안 연락이 없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 그렇겠지? 우리를 잊으신 게 아닐 거야…. 그렇게 굳게 약속하셨는데 잊으실 리가 없잖아.”
“언니! 정신 차려! 왜 그러는 거야! 고작 남자 하나 가지고!”
서윤은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서아를 황급히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고작 남자라니! 하늘 같은 서방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서윤! 저번에도 그렇고! 또 서방님한테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 하기만 해 봐!”
서아가 금세 도끼눈을 뜨며 서윤을 타박했다. 그에 서윤은 차오르는 욕지기를 애써 삼켰다.
“앗! 탔다! ”
옆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서아가 화들짝 놀라며 팬을 옮겼다.
“잊으신 게 아닐 거야….”
팬에 물을 부으면서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서윤의 축 저진 어깨가 서윤은 거슬렸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때마침 들리는 노크 소리에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온 서아가 대답했다.
그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묘한 분위기에 잠시 둘을 번갈아 보며 침묵했다.
“뭐야? 빨리 말하고 꺼져.”
결국, 참지 못한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윤! 그렇게 말하지 말래도! 그런 말버릇은 에이든 님의 명성에 누가 돼요!”
“그… 그게 서아 님이 명령하신 내조 프로젝트 진행 중이었는데… 긴급한 소식이 들어와서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묘하게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내의 말투에 둘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고. 왜 자꾸 뜸 들여.”
“서윤! 에이든 님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머뭇거리지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후우…그게 제국의 수도에서 결혼식이 열린답니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사내가 깊은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결혼식이요? 그런데 그걸 왜 저희에게….”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서윤은 반문하는 서아의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 양손을 꽉 쥐었다.
“…그게 용을 잡은 영웅 에이든 님과 제국의 제 3 황녀 에포닌의 결혼식이라고….”
말을 끝마친 사내는 싸늘해지는 분위기와 기분 나쁜 침묵에 침을 삼키며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언니? 괜찮아?”
“….”
“언니? 그….”
남자의 말에 담긴 충격적인 내용에 서윤은 황급히 서아를 확인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황녀를 제치고 먼저 결혼을 약속받았다고 침대에서 방방 뛰며 좋아하던 서아였다.
‘첩! 당신은 첩이야!’
혼자서 벽에 대고 대사를 연습했던 서아였다.
지금 서아가 받았을 충격을 서윤은 짐작할 수 없었다.
‘이… 미친 개새끼가.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서윤은 속으로 에이든을 몇 번이나 찢어 죽이며 서윤의 굳은 몸을 주물렀다.
잠시 무거웠던 침묵이 지나가고 서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가 요청한 드레스는 준비가 된 상태인가요?”
서아의 표정은 혁명 전의 지부를 이끌던 때의 얼굴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예.”
“그럼 드레스 준비 해주세요. 저희는 바로 제국으로 갑니다.”
“언니…? 그게 무슨?”
서윤은 서아가 너무 흥분해 사리 분별 못 한다는 생각에 황급히 붙잡았다.
“…시작부터 지고 들어갈 수 없어. 우리가 먼저 약속했잖아.”
서아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서윤의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을 굳세게 마주 잡았다.
“언니…?”
“서윤. 나는 서윤과 나란히 아이 열 명 정도 낳고 같이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싶어. 우리가 빼앗겼던 행복한 가정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 거야. 더욱 풍성하고 더욱 행복하게.”
계속해서 말을 잇는 서아의 표정은 너무 단호해서 서윤은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가자. 우리의 싸움을 하러.”
“…알았어.”
서윤은 서아가 참으로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자신을 향한 따뜻한 마음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은 상태로 드레스를 가방에 챙겨서 길을 나섰다.
‘열 명이라니 무슨….’
고개 숙이고 있던 남자는 둘의 말에 의문을 표하다가 아기가 한 번에 나올 것 같은 탐스럽고 큼지막한 엉덩이를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지도….’
***
“흥흥흥… 에이든 말대로 다 없애버렸으니까 칭찬해주겠지? 이뻐해 주겠지? 그렇겠지?”
잔뜩 신이 나서 중얼거리는 루나의 말에 그 옆에 있는 천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오는 지금 자신의 가슴 부분에 들어간 물건을 신경 쓰느라 바빴다. 연구원은 천오의 요구에 가슴을 키우기 전에 먼저 ‘뽕’이라는 것을 넣어줬다. 이 상태로 먼저 지내보고 괜찮으면 추가로 넣어주겠다는 게 연구원의 제안이었다.
제일 처음 공화국으로 돌아갔던 그들은 에이든이 제국의 수도로 향했다는 말에 제국의 수도로 이동했다.
천오는 루나의 제한 없는 공간 마법에 감탄했다. 매우 미세하지만, 고대 신의 조각을 담은 천오는 해당 마법에 담겨있는 기적을 느낄 수 있었다.
“에이든에이든에이든 에이든이 얼마나 좋아할까? 완전 좋아하겠지?”
천오는 이 여자가 자신의 대답을 구하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그저 고개를 까닥이며 비위를 맞췄다. 자꾸만 흔들리는 ‘뽕’이라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제국의 수도는 다시 태를 갖추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대거 투입됐는지, 물건들이 날아다니며 빠른 속도로 모습을 회복하고 있었다.
“흥흥흥… 그럼 또 보지 마사지를 해줄지도 몰라…!”
천오는 저 여자가 몇 번이나 말한 ‘보지 마사지’라는 게 궁금했다. 도대체 얼마나 좋았으면 저렇게 자꾸만 매달리는지…. 천오는 다음에 자신도 에이든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에이든의 좌표는….”
루나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음이 맞지 않는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내일모레가 결혼식이지?”
“아… 그 용을 처치한 영웅 에이든과 제 3 황녀 에포닌 님과의 결혼식 말인가?”
“그래! 엄청 성대하게 열린다고 지금도 난리가….”
그때 옆에서 들려온 대화에 루나의 걸음이 갑작스레 고장 난 것처럼 멈췄다.
까드득.
루나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방금까지 웃고 있던 두 눈은 굳었고 눈동자는 순식간에 붉어져 눈물이 줄줄 흘렀다.
“…쓰레기 새끼가 감히.”
천오는 급변하는 루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천오는 그런 루나에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에이든은 참으로 업보가 많은 남자였다.
“…내 에이든을.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천오는 늘 그렇듯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한 루나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무너진 자신의 ‘뽕’을 정리했다.
쳐져 있던 가슴이 다시 위로 올라가자 천오의 입꼬리가 살짝 이지만, 비틀어졌다.
가슴을 정리하고 고개를 돌리니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천오는 다시 고개를 흔들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판대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둘이 먹다가 셋이 되도 모르는… 으응?”
습관적으로 인사했던 상인이 천오의 생김새를 보면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천오는 만족한 표정으로 가슴에 힘을 주어 더욱 부풀리며 가판 위에 있는 무언가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아…아이야 부모님은 어디에… 아이가 아닌가? 기묘하군. 그래도 값은 먼저 치르고 드셔야죠!”
“웩.”
평생을 사탕에 대한 장인 정신으로 살아왔던 김덕순은 자신의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토악질을 시작하는 소녀와 숙녀 사이의 기묘하게 위치한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에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토악질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옆에 있는 것을 집었다.
‘그…그렇지! 사과 맛은 다를 거야! 대추 맛은 호불호가 심했으니까!’
“웩.”
여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종류의 사탕을 입에 넣었고 그 개수에 맞춰서 토악질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모습에 김덕순의 가슴과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그날 이후 사탕 장인 김덕순은 장사를 접고 공사판으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제국 수도 재건축이 한창이라 김덕순은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