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골든 와이브스 신입.
* * *
혜진은 앞에 놓인 보고서를 다시금 검토했다. 낮에는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는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잘 시간도 부족했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애초에 용사 아카데미에서도 피나는 노력만으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던 혜진이었다. 이 정도는 힘든 축에도 끼지 못했다.
이번 보고서에는 혜진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혜진은 제일 위에 놓인 것부터 다시 검토했다.
‘에이든 님 성벽 보고서.’
살면서 제일 공을 들인 보고서였다. 지금까지 골든 와이브스 멤버들은 그저 에이든에게 매달리기만 했지 그를 깊이 있게 조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자인 이상 남자의 성벽을 조사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혜진은 그녀들과 달랐다.
혜진의 타고난 학구열은 성적인 쪽에서도 발동했다.
종이 가득히 적힌 글자를 읽으며 혜진은 안경을 고쳐 썼다.
‘아쉬운 것은 내가 임신을 하지 않아 모유에 대한 반응을 보지 못한 것이다.’
처녀에게서도 모유가 나오게 하는 마법을 조사했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정보 길드에 따르면 황실 서고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처녀교’ 서적 중 해당 마법서가 존재한다고 들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황녀님한테 여쭈어보면 될 터….’
혜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서를 다시금 읽었다.
어느새 높게 떴던 달도 저물고 해가 뜨고 있었지만, 혜진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삼일 밤낮을 자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 정도쯤은 내일 주인님… 아니 에이든에게 조금 박히면 괜찮아질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떠올렸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마침내 약속 시간이 됐고 혜진은 밤새 검토한 보고서를 마법 가방 안에 챙겼다.
‘결전의 시간이다. 잘해야 해.’
혜진은 화장실로 가서 찬물에 얼굴을 씻어 정신을 차린 다음 펜을 들어 자신의 새하얀 몸에 천천히 글을 적었다.
‘에이든 님이 해주시면 편하겠는데, 도통 적으려 하시지 않으니…. 차라리 문신할까? 매번 지우는 것도 귀찮고.’
무감정한 얼굴로 천천히 자신의 새하얀 몸을 천박한 검정으로 채워갔다.
앞면을 다 채우고 뒤로 돌아 거울을 보며 엉덩이 주변에 화살표를 그려 넣고 글자도 적었다.
‘아! 그것도 추가해야겠다.’
혜진은 펜으로 엉덩이 위쪽에 ‘에이든 님의 것 – 절대 천박하고 비루한 루크는 보지 말 것.’이라고 적은 다음 중의적 표현에 만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 적은 다음 마를 동안 오늘 사용할 도구들을 챙겼다. 웬만한 도구들은 다 사용해본 터라 그중 반응이 좋았던 것들만 추려 가방에 담았다.
‘나는 오늘 출셋길에 오른다.’
혜진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입었다.
***
안내를 받아 도착한 혜진은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저번과 장소는 또 바뀌어 있었지만, 안내해주는 사람은 그대로였다.
‘매번 장소를 바꾸는 치밀함까지…. 역시 대륙 제일 여자들의 모임.’
혜진은 살짝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혀를 살짝 물었다. 찌릿한 고통에 정신이 조금이지만 돌아왔다.
‘…큰일이야. 요즘 자극이 너무 많아서 이 정도로는 기별도 안 가.’
“들어가시죠.”
혜진의 상념을 안내자가 깨웠다.
“예. 감사합니다.”
혜진은 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번 회의 장소는 전보다 더 화려했다. 실내임에도 방의 중앙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위에 있는 넓은 정자에 다들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혜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신입 성노예! 장!혜!진! 인사드립니다!!”
“그래 들어와.”
황녀의 가벼운 손짓에 혜진은 빠르면서도 여유 있게 걸어서 정자로 올라갔다.
“이 생선은 맛이 없습네다! 다음에는 고기 많은 곳에서 먹는 게 어떻습네까?”
“고기만 편식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가끔은 생선도 먹어줘야 영양의 균형이 맞습니다.”
“그렇게 영양의 균형을 맞춘 사람이 가슴 크기는 왜 그 모양입네까?!”
“…저는 작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사제도 제 가슴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거야 절벽녀 앞이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네까? 절벽녀 앞에서 가슴 절벽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네까.”
“그…그럴 리가….”
한쪽에서는 가슴이 무지막지한 여자가 제국 제일검은 손가락질하며 놀리고 있었고.
“이것 좀 드셔보세요.”
“웩.”
“아이구…. 이쪽 좀 보시겠어요?”
“웩.”
“묻어 버렸네. 괜찮아요. 닦으면 되니까.”
엉덩이가 유독 큰 여인이 자그마한 여자 옆에 붙어서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고 있었다.
‘서아…라고 했었나? 진실을 간파할 수 있다고 했었지,’
그 능력에 혜진은 괜히 긴장됐다.
“흐아암… 더 센 마법 없어?”
“더 센 거 하면 너 죽어.”
“나 마법 안 통한다니까?”
“안 통하는 건 없어. 역치가 높은 거지. 나는 대장이라 너를 죽이면 안 돼. 물론 죽이고 싶지만.”
“싫으면 말고 애가 재미가 없어졌네. 아 에이든은 뭐하려나? 배부르니까 교미하고 싶네. 아! 교미하고 싶다!”
“…쓰레기.”
“야야! 다 조용히 해! 우리 신입이 보고할 게 있다니까!”
황녀의 호통에 금세 조용해졌다. 그중 남들보다 유난히 가슴이 큰 붉은 여자가 하품하며 드러누웠지만, 다들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자신에게 모인 시선에 잠깐 긴장했지만, 혜진은 익숙하게 그를 숨겼다.
“신입 성노예 장혜진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보고서가 완성되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보고서요? 어떤?”
“아! 성녀님은 저번에 없으셨죠. 에이든 님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혜진의 말이 끝나자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혜진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저보다 오래 에이든 님과 함께하신 분들이라 더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에 제가 올릴 보고서는 성벽에 관한 것입니다.”
“…성벽?”
“흐음.”
“저요! 저요! 에이든 동무는 개처럼 뒤에서 박는 것을 좋아합네다!”
“네. 저런 것처럼 에이든 님의 성벽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취합했습니다. 아시는 내용이 많으시겠지만, 다양한 정보를 모았으니 일단 들어보시겠습니까?”
혜진의 말이 끝나자 그녀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관심을 표하는 이도 있었고 자신감을 표출하며 필요 없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소란 사이에서 정중앙에 앉은 황녀에게 시선이 모였다.
모임이 계속 진행되어 가면서 모든 자금을 지원하고 적절한 타협점을 끌어내는 황녀 케이트는 어느새 구심점이 되어 있었다.
“…흥! 나도 그런 놈 성벽에 관심은 없지만! 일단! 들어도 나쁠 건 없잖아? 그리고 신입이 조사한 거라니까. 일단 듣자.”
케이트의 말에 나머지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가 혜진에게 손짓했고 혜진은 목을 풀며 챙겨온 보고서들을 꺼냈다.
수에 맞춰서 넉넉히 복사한 보고서를 각자의 앞에 세팅했다.
“이… 이렇게 두껍다고?”
“오오 이런 취향이… 이건 좀 색다릅네다.”
“크흠. 그냥 나는 신입이 잘했나! 검토하는 거야! 검토!”
“…사제의 이런 사적인 걸 우리가 교환하면 안 됩니다.”
“아… 에이든 님.”
이내 굳은 얼굴의 제국 제일검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보고서를 읽었다.
“그럼 첫 장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에이든 님이 가장 좋아하는 성교 자세는 이지수 님의 말처럼 후배위가 맞습니다. 이는 빨리 끝낼 수도 있고 다른 자세보다 더욱 천박함이 느껴져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이는 저에게만 해당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시선이 모인 것을 확인한 혜진은 작게 헛기침을 해 목을 풀고 다시 말을 이었다.
“가령 제국 제일검 님 같은 경우는 대륙 제일미로 칭해질 정도로 아름다우시니 에이든 님이 정상위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예? 저 말입니까? 무슨 그런 질문을….”
“대답해! 이 제국 제일 암캐야! 이제 와서 무슨 점잔이야!”
“그…그 칭호는 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답이나 하라고!”
“이거는 지나치게 사적인 것으로….”
“아오! 답답해 진짜! 네가 야자수 숲에서 개처럼 박히면서 네 발로 돌아다닌 거 우리는 다 알고 있다니까?!”
“안…안 돼….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는 에이든 님이 정상위로 하는 걸 좋아하십니다.”
황녀와 제국 제일검의 다툼은 성녀가 손을 들고 말하며 끝났다.
“예. 성녀님처럼 에이든 님이 좋아하시는 성교 자세는 상대마다 달라지니 이는 따로 알아보시는 게 좋습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에이든 님의 이상 성벽입니다.”
자신의 말에 집중하며 종이를 넘기는 모습에 혜진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처음으로 시도했던 플레이는 방뇨 플레이입니다. 이는 자신의 여자에게 소변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일컫는데, 에이든 님의 성벽은 아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마셔도 봤는데,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미…미친 마셨다고?! 왜 그런 짓을 해?! 더러워!”
“아아…. 아흐.”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는 황녀와 조용히 신음하며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는 성녀를 보며 혜진은 말을 이었다.
“일단 다양하게 시도해보는 게 좋으니까요. 그다음은… 몸에 천박한 단어들을 새겨 놓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에이든 님 전용 개보지’, ‘에이든 님 전용 육변기’같은 것들을요.”
“이거 뭐 하는 새끼지…?”
“잠…잠깐! 조금 더 들어보시죠.”
슬쩍 주먹을 드는 황녀를 얼굴이 잔뜩 붉어진 성녀가 말렸다. 그에 인상을 찌푸린 황녀가 주먹을 내렸다.
“크흠. 이는 제법 반응이 있었습니다. 특히 자위 도구와 같이 사용하면 효과가 배는 늘어납니다. 이는….”
혜진의 말이 길어지자 슬금슬금 눈치 보던 몇이 펜을 꺼내 보고서에 받아적기 시작했다. 그를 코웃음 치던 케이트도 혜진의 생생한 증언에 슬그머니 가슴 사이에서 펜을 꺼냈다.
“그리고 다음은 모유 플레이입니다. 이는 제가 임신 상태가 아니라 모유가 나오지 않아 실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마법을 구하고 있지만, 황실 비고에 있는 것밖에는….”
“뭐뭐?! 왜 날 보는 거야?! 지금 나보고 황실 비고에서 모유 마법서를 가져오라고? 미쳤어?!”
황녀의 반발에 잠깐 당황했지만, 예상 범위 내였다. 침착하게 다시금 말을 하려는 순간, 구석진 곳에 앉아 있었던 여자가 손을 작게 흔들었다.
그러자 가슴속에 뭔가가 차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내 앞섬을 가득 적셨다.
“…일단 한 달은 갈 거야.”
“아… 그… 감사합니다. 그…그럼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질질 흐릅니다! 질질!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닙네까?! 이걸로 카페를 차려도 되겠습네다!”
“…조금 줄였어. 귀찮은 쓰레기들.”
“감…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NTL에 관련된 성벽 조사입니다. 거기에는 제가 예전에 알았던 남학생을 이용하여 조사했는데, 남학생이 나를 지켜보며 절규할 때 조금이지만, 정액 양이 많았습니다. 조금 더 단단하기도 했고. 다만, 이에 대해서 조금만 삐끗해도 처녀성에 대한 의심을….”
혜진은 그 후에도 자꾸만 앞섬을 적시며 흐르는 모유를 애써 무시하며 보고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에이든 님의 성벽에 대해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무사히 보고를 마쳤다는 것에 안도하며 혜진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 긴 보고를 쉬지도 않고 말하는 바람에 목이 다 나갔지만, 혜진은 티 내지 않았다.
“흐음 너희들은 어때?”
“쓸만한 것 같습네다! 역시! 성노예! 근본부터 다릅네다! 저런 천박함이라니! 본받아야 합네다!”
“…저도 저것 좀 해주시겠어요?”
“너는 성녀잖아. 성녀는 자체적으로 마법을 파훼해서 불가. 오 분도 지속 안 돼.”
“사적인 내용이 많았지만, 노력이 돋보이는 보고였습니다.”
“하암 끝났어? 이제 가도 되나?”
“전부 진실이라니… 그러면 여기 적힌 모든 것을 에이든 님과…?!”
“다들 좋다네. 그래 잘했다 신입. 너는 이제부터 정식으로 ‘골든 와이브스’의 멤버야. 이쪽으로 오도록.”
케이트의 손짓에 혜진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야! 성녀! 얘한테 그것 좀 해줘.”
“모유… 임신을… 아! 이쪽으로 오세요. 윗옷은 벗으시고요.”
케이트의 부름에 혼자 중얼거리던 성녀가 단아하게 웃으며 혜진을 앞에 앉혔다.
“조금 따끔할 수도 있어요. 참아요.”
성녀가 말하면서 부드러운 손을 혜진의 쇄골에 올렸다.
“따끔.”
그리고 조금이 아니라 매우 따가운 통증이 혜진을 엄습했다. 생살을 불로 지지는 듯했지만, 혜진은 이를 세게 깨물어 참아냈다.
“…으으윽.”
그리고 성녀가 손을 떼자 자신의 쇄골에는 금색 마크가 박혀 있었다.
“자! 그럼 정식으로 신입을 받았으니 건배하자고! 건배! 다들 잔 들어! 첩들! 잔 들라고!”
케이트의 고함에 각자 떠들던 여자들이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세상을!”
““에이든의 것으로!!””
“에이든을!”
““우리 것으로!!””
자신의 잔에 가득 채워진 달콤한 향이 나는 술을 보며 혜진은 환하게 웃었다.
‘첫 단추를 잘 끼웠다.’
도수가 높은 술 같았지만, 전혀 쓰지 않았다. 오히려 사탕을 녹인 것처럼 달콤했다.
***
모든 게 순조로웠다.
노예 하나가 제 발로 찾아와 이제 더는 야근을 하지 않았다.
비록 노예가 남아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젠장 …빌어먹을.”
간혹 노예가 거슬리는 말을 뱉었지만, 넓은 아량으로 넘어갔다.
“근데 혜진은 어디 갔지?”
“…아까 무슨 중요한 일 있다고 나갔…습니다.”
“옷은 입고 나갔지?”
“…으예.”
묘하게 거슬리는 루크의 대답에 잠깐 주먹을 쳐다봤지만, 어제 일찍 퇴근해 기분이 좋았으므로 봐줬다.
‘별일이네 근무시간은 꼭 지키더니.’
이제 바로 내일이 개강이었다.
드디어 이 고된 업무가 끝나고 결실인 학생들을 쥐어패는 시간이 다가왔다.
‘어떤 띠거운 놈들이 있을까. 소설에서 보면 막 대들고 그러던데. 제발 그래 줬으면…. 제발….’
에이든은 손에 들린 차를 마셨다. 맛대가리 없는 차였지만, 용을 잡은 영웅이니까 무게를 잡기 위해 마셔야 했다.
‘어찌 됐든 여자 문제도 다 해결됐으니까.’
뭔가 말이 많고 탈도 많았지만, 함부로 좆을 놀린 것치고 원만하게 해결됐다.
비록 매일같이 종마처럼 착즙 되고 있었지만, 상대가 하나같이 뛰어나고 다양한 매력을 지닌 미인이라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아주 가끔 도망가고 싶기는 했지만.
‘근데 여자… 다 채운 거 맞지? …뭔가 부족한 거 같은데? 뭐지?’
골똘히 고민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에이 설마 지금도 이렇게 많은데 더 있겠어? 여기서 하나만 추가돼도…. 에이 설마.’
“제기이일!! 이놈들은 이걸 왜 전날!!”
머리를 쥐어뜯는 루크의 모습을 뒤로하고 에이든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봤다.
푸르던 나무도 잎을 떨구고 있었고 길었던 낮도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따뜻하며 더웠던 계절이 끝나고 날이 점점 시원해지며 낙엽 냄새가 잔뜩 풍겼다.
‘용사 아카데미 유급생이었던 내가 조교라니. 애미 터진 새끼들 다 뒤졌다.’
에이든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남은 차를 다 털어 넣었다.
열어둔 창으로 들어온 시원한 바람에 책상 위의 책이 다음 장으로 천천히 넘어갔다.
***
“휘유…. 인간 세상은 언제나 복잡하다니까! 뭘 그렇게 챙겨야 할 게 많은지. 이 아이는 또 어디 간 거야?”
혼잡한 시장 속에서 유난히 얼굴이 널찍한 사내가 투덜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많은 사람 속에서 사내는 큰 덩치임에도 불구하고 신기루처럼 사람들 사이를 부딪치지 않고 여유롭게 지나갔다.
“그래도 백세주를 구하다니… 운이 좋아! 끌끌끌.”
품에 소중히 안은 술을 쓰다듬은 사내가 코를 킁킁거렸다.
“이쪽이군.”
말을 마친 사내가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주변에 지나다니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사내가 다시 나타난 곳은 이쁘게 꾸며진 카페 앞이었다.
“나오자마자 찾는 게 케이크라니… 쯧.”
품에 술을 소중히 안은 사내가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내의 덩치는 나무문에 낄 만큼 컸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부딪히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자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직원에게 손을 저어주고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향했다.
카페의 제일 구석진 곳.
테이블 위에 딸기 케이크를 한가득 쌓아놓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눈처럼 새하얗고 눈동자는 피처럼 붉었다. 그 이질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에 카페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홀린 듯 보고 있었다. 그 매력은 남자, 여자 가리지 않았다.
‘시선을 끌지 말라 했거늘… 쯧. 그럴 수밖에 없는 외모지만.’
죽어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 사내는 한숨을 쉬며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작았지만, 사내에게 충분하기도 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의 얼굴에 훔쳐 보고 있던 사람들은 가슴이 찢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오자마자 온 곳이 카페라니 쯧. 세상 즐거움을 모르는구나. 그런데 왜 울상이냐?”
“…맛이 없어서요. 원래 맛있었는데, 왜 이러지?”
“원래 입맛이라는 건 변하는 법이지. 대충 그쯤 먹고 움직이자. 갈 길이 바쁘니까 말이야.”
“진짜 맛있었는데….”
사내는 중얼거리는 아이의 말을 무시하고 천천히 도술을 외웠다. 다음 목표는 북쪽 끝에 있는 이상 균열을 확인하러….
“역시 막내가 줘서 그랬나 봐. 제국으로 가야겠어요.”
“뭐멋?! 우리의 목적지는 북쪽 끝의 균열을… 두꺼어어어업!!”
손쉽게 자신의 도술에 파고들어 좌표를 바꾸는 아이의 신묘한 기술에 사내는 비명을 질렀다.
‘이 아이 도술이 어느새 이 정도까지?!’
급하게 바꾼 좌표라 어딘지 가늠조차 안 됐다. 다만, 제국의 어딘가라는 것만 대충 알았다.
“막내는 약속 기억하고 있을까? 나 열심히 가꿨는데.”
장난기가 가득 담긴 여우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테이블에는 한 입만 먹은 딸기 케이크가 잔뜩 쌓여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