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신이 되려고 했던 멍청한 마녀.
* * *
똑똑똑.
쓰러져서 내게 음부를 활짝 보이고 허리를 튕기는 세르나를 보며 바지를 내리자,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르나는 정신이 없는 듯 노크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음부를 활짝 펼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나는 옷을 다시 올리고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아까 회의장에 있던 엘프 중 하나가 서 있었다.
“아… 인간의 영웅이시여. 반갑습니다. 저는 알그리베흐라고 합니다.”
“에이든이라고 합니다.”
“잠시 여왕님이 영웅을… 크흠 근데 무슨 군고구마 냄새가….”
엘프가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엘프가 안쪽을 보려고 하길래 나는 슬쩍 몸을 움직여 세르나 쪽을 가렸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여왕님이요?”
“예. 아까의 무례를 사과하신다고 하십니다. 영웅의 동료도 거기에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네. 근데 이 늙은이는 손님이 왔는데 얼굴도 안 비치다니… 쯧 예의 없는 건 알아준다니까.”
엘프가 안쪽을 보면서 혀를 차더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엘프를 따라 움직였다.
엘프가 안내해준 곳은 다른 곳보다 유난히 큰 오두막이었다. 엘프들은 다들 나무에 사는 것을 좋아하는지 나무 중간에 오두막이 걸려 있었다.
안내해준 엘프는 능숙하게 사다리에 올랐고 나는 그를 따라 올랐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위를 올려다봤다가 욕을 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애미 시발.’
남자 엘프도 속옷을 입지 않는지 딱 달라붙는 바지에 선명하게 불알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알레트리스 님. 모셔왔습니다.”
“후으… 들여보내세요. 수고했습니다. 알그리베흐.”
“예. 들어가시면 됩니다.”
엘프가 오두막 문을 슬쩍 밀어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문을 통해 들어갔다.
오두막 안에는 상큼한 레몬 향이 짙게 풍기고 있었다. 그에 회의장에서의 일이 떠올라 조금 찝찝했지만, 애써 표정을 풀었다. 협상은 꼭 성사시켜야 했으니까.
“…이쪽입니다.”
청량한 목소리를 따라 걷자 침실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침실의 한편에 아까 상석에 앉아있던 0.9 키아나 엘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고고하고 고아한 외모 때문에 무릎 꿇고 있는 모양새가 가련하기도 경건하기도 했지만, 큰 문제점이 있었다.
엘프는 나체로 목에 괴상한 목줄을 한 상태였다. 그 모습은 내게 아카데미에서의 혜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도 온몸에 낙서한 혜진보다는 상태가 나은 듯했다.
다만, 누구의 손을 타지 않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레몬 물을 뿌려대는 음부는 혜진보다도 천박한 듯했다.
“…그 아까의 일을 사과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나체였지만, 억지고 시선을 돌렸다.
“사과하… 사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고장 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0.9 키아나 엘프는 연신 들뜬 신음을 뱉으며 애원하듯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어쩔 수 없다고요?”
“예. 증오해 마지않는… 찢어 죽일 놈이지만… 이미 길들어 버려서… 그래도 억누르고 참으며 버티고 있었는데… 당신을 본 순간 참고 있던 모든 게 터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책임… 그래 책임을 지세요!! 제발! 저를 벌해주세요. 끼잉.”
0.9 키아나 엘프는 그 아름다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내 흙투성이 신발을 분홍색 혀로 연신 핥으며 내 눈치를 봤다.
‘끼잉이래… 애미 시발.’
정신이 혼미해지는 0,9 키아나 엘프의 말에 나는 미간을 짚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튼, 혜진이랑 비슷한 거잖아. 다만, 혜진은 분석하는 측면이 강했지만, 얘는 본성이 그것을 원하는 거고.’
0.9 키아나 엘프가 슬쩍 내 발을 들어 신발의 굽까지 혀로 청소하기 시작했다. 연신 흙을 먹으며 기침을 하면서도 악착같이 혀를 놀리는 모습은 그 이질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면 제가 얻을 게 뭐가 있죠?”
0.9 키아나의 나체는 당장이라도 옷을 벗어 던지고 올라타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얻어내야 할 게 있었다.
“원…원하시는 건 뭐든지… 저… 저를 원하시면 가져도 좋습니다. 주인님 끼잉….”
자꾸만 끼잉 거리는 모습에 정신이 어지러웠지만, 애써 참으며 발을 움직였다.
“흐읍…! 하아… 좋…좋아요….”
내 발에 밀린 엘프가 뒤로 나뒹굴다 침대에 부딪혀 멈췄다. 발에 차였음에도 엘프는 전보다 오히려 더 헐떡거렸다. 레몬 향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니까 너를 개처럼 굴려달라는 거잖아. 그러면 내가 원하는 걸 준다고?”
나는 흙투성이인 신발로 0.9 키아나의 엘프의 훤히 드러난 음부를 짓이겼다.
‘으… 시발 존나 따갑겠다.’
내가 하면서도 잔인한 행동에 혀를 내둘렀지만, 엘프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네네! 제발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다 드리겠습니다 엘프 왕국이든 저의 처녀든 주인님 원하시는 대로 그러니 제발….”
0.9 키아나 엘프는 내게 짓밟히면서도 악착같이 일어나 내 발에 얼굴을 문댔다.
‘지금까지 마조히스트라고 생각했던 애들이랑 비교도 안 되네 얘는….’
내게는 거북한 취향이었지만, 지금은 그녀에게서 얻어야 할 게 있었으니 취향을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혜진에게 했었던 것을 떠올리며 거기에 원초적인 폭력을 더했다.
“잘못했어여… 주인님 끼잉 끼잉 이 못된 암캐는 벌을 받을게여.”
엘프가 자꾸만 혀짧은 소리를 내서 주먹질이 더 쉬워졌다.
나는 원초적인 폭력으로 엘프를 거칠게 다뤘다. 중간중간 위험하겠다 싶은 순간에 멈추면 피 투성이가 된 엘프가 어김없이 매달려 더욱 강한 것을 갈구했다.
그에 차오르는 욕지기를 참지 않고 엘프에게 뱉으며 매콤 주먹을 더욱 놀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엘프를 쥐어패자 방안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레몬 향이랑 혈향으로 가득 찼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을 잃은 엘프를 두고 주먹에 묻은 피를 옆에 있는 이불에 대충 닦았다.
혹시 모르니 기감을 최대한 넓게 유지하여 접근하는 누군가 있는지 확인하며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무슨 시발 엘프가 죄다 이따위야. 분명 소설 속에서는….’
아직도 음부에서 레몬 물을 뿌려대는 엘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혜진과의 특훈 덕분에 저 진성 마조의 취향을 맞춰줄 수 있었다. 다만, 엘프의 몸에 흉이 좀 남을 듯했지만, 어차피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 곳이니 상관없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자 피와 애액이 섞인 웅덩이에서 정신을 차린 엘프가 나를 돌아봤다.
“후으… 주인님. 최고였습니다.”
0.9 키아나 엘프가 달달 떨리는 양 엄지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어울리지 않는 괴리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인 나는 이번에는 엘프를 패서 대륙을 지켜냈다.
[…크흠. 그… 상호 간의 합의가 있었으니까… 크흠….]
***
“그러니까 대륙 연합에서 제시한 조건이 이거라는 건가요? 약간 부족한 면이 있는데… 세계수는 저희에게도 민감한 부분이기도 하고….”
“흐읏… 그래도 지금 대륙 상황을 보면 저희 쪽에서 마냥 거절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니… 조건의 조율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륙의 위기 앞에 모든 종족은 하나로 뭉쳐서 맞선다… 꽤 마음에 드는 문구입니다. 그 성질 더러운 땅꼬마들도 참여했다고 하니 인간 측의 수완이 제법 뛰어난 듯하군요. 아흣.”
‘…애미 시발.’
엘프의 요구에 맞춰 엘프의 음부 쪽에 뜨거운 촛농을 떨어뜨리며 차오르는 욕지기를 애써 참았다. 뜨거운 촛농이 닿을 때마다 엘프는 절정하며 내가 건네준 서류를 검토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제안을 검토하지 않는다고 엄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엘프의 회복력이 뛰어난지 아까 내게 맞아 생겼던 멍은 사라진 상태였다.
“다 읽었습니다. 흐음…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는 하는데… 잘 읽히지 않는군요.”
엘프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내가 건네준 서류를 돌돌 말더니 내 손에 쥐여줬다. 그러고 나서는 다리를 활짝 벌리고 딴청을 부리는 모양새가 또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듯했다.
“뭔가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뭔가 가려운 부분도 있고…. 조금 꽉 채워줬으면 이해가 훨씬 잘 될 거 같은데… 뭔가 부족하단 말이야.”
딴청 부리면서 손가락으로 사타구니를 활짝 벌리는 모습은 뭘 원하는지 뚜렷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지를 내린 다음 엘프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어차피 0.9 키아나 엘프의 나체에 나도 꽤 원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하읏! 좋아요! 대륙 연합! 저는 주인님의 것! 엘프 왕국도 주인님의 것! 좋아요!”
뭔가 이상하게 진행되는 듯싶었지만, 어차피 협상만 성사시키면 된다고 했으니까.
나는 엘프를 따먹고 대륙을 한 번 더 지켰다.
‘나만큼 대륙을 자주 지키는 영웅이 있을까?’
***
“그…그럼 세계수 구경하러 가시겠습니까?”
“세계수? 그러지 뭐.”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0.9 키아나 엘프가 덜덜 떨리는 다리로 일어나더니 엉거주춤 움직이며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그런 엘프의 새하얀 사타구니에 있는 굳은 촛농과 피가 섞인 꾸덕꾸덕한 액에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저 엘프가 처녀일 수가 있지?’
극 마조와 처녀. 두 단어의 괴리감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주인님 산책가시죠. 끼잉….”
통이 큰 원피스를 입은 0.9 키아나 엘프가 자신의 목에 걸린 목줄의 끝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면서 그 목줄을 잡았다.
목줄을 잡자 0.9 키아나 엘프가 양손을 앞에 모으더니 깡깡! 거리며 세상을 밝히듯 환하게 웃었다.
다만, 진짜 키아나의 미소와 다르게 세상이 밝아지지는 않았다.
***
보이는 모든 곳에 푸르른 생명력이 깃든 선명하고 굵은 나무가 있는 곳.
요정들은 그 주위를 돌면서 매일같이 세계수의 생명력을 노래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졌음에도 전혀 시들지 않은 세계수의 생명력은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힘 중 하나였다.
온 세상이 어둠에 빠진 지금도 세계수의 주변은 다른 세상인 것처럼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알록달록한 꽃들은 바람에 몸을 살짝씩 흔들며 세계수를 찬양하고 있었다.
그런 세계수의 가장 깊은 곳.
‘얼마의 시간이 흘렀지.’
형체가 희미한 그녀는 늘 그렇듯 시간을 가늠했다.
그러다 이내 시간을 세는 것을 까먹고 다시 눈을 감고 억겁의 세월에 희미해진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기억력도 그 긴 시간 앞에 마모되어 갔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한 남자의 얼굴은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므로.
희미한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그와의 추억은 너무도 달아 아무리 꺼내 핥는다고 해도 전혀 그 달콤함이 쇠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이 2회차라면…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온다면 3회차라는 것.’
그녀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억지로 자신의 의식을 흔들었다.
그녀는 간절히 그에게 빌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나기를….
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그녀는 신에게 소원을 비는 게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그에게 소원을 빌었다.
다시 희미해지는 정신을 잡기 위해 그녀는 기억을 되짚었다. 이곳에 몸을 의탁하기 전. 회귀하기 전. 억겁의 세월에 비하면 한없이 짧았던 순간들을 꺼내어 핥았다.
다른 누구보다 똑똑했지만, 다른 누구보다 멍청했던 그녀는 어설픈 시간 마법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를 찾기 위한 시간 마법이었지만, 그녀가 개발하고 처음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계수의 미세한 오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미세하게 뒤틀린 시간 마법은 그녀를 태초의 세계로 끌고 갔다.
자신이 존재하기도 전의 시간대에 끌려간 그녀는 그가 없음에 절규하며 신을 저주하고 세상을 부쉈다.
그렇게 한참 분노를 표출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몇백 년을 외로움 속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동네 아이가 몇 번의 연애로 깨달을 감정이었지만, 미숙한 그녀에게는 그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역사상 그 누구보다 아니 신보다 똑똑했던 그녀였지만, 동네 아이보다 멍청하기도 했었던 그녀니까.
온전히 그를 가지기 원했던 그녀는 이제 그의 행복을 바랬다.
그녀는 지금 상황에 순응했지만, 또한 순응하지 않았다.
그 후로 그녀는 몇만 년 뒤에 나타날 그를 위한 안배를 준비했다.
신에게 도전했던 그녀는 그가 후에 치러야 할 시험을 위해 세상의 정수를 깎아 검을 만들었다.
그만 있으면 충분했던 그녀와 달리 온전한 세계를 원했던 그를 위해 안배를 곳곳에 배치했다.
자신이 그가 나타날 때까지 버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자신이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정신과 달리 육체의 노화는 신에 닿은 마법이라도 몇만 년을 버티게 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그녀는 몇만 년 후의 그를 위해 돌아다니며 세계를 구축했다.
멍청하게 틀린 계수로 회귀할 자신을 위해 시간 마법에 대한 마법서를 준비해 얼마 남지 않은 인과를 담았다.
이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2회차의 자신에게 전해질 것이다.
한때는 에일 버드를 좋아했던 그를 위해 번식력이 저조한 에일 버드의 특성을 바꿔 섬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그 섬에서 웃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는 오랜만에 웃었다.
이내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녀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나무로 향했다.
‘세계수에 몸을 의탁하면 몇만 년의 세월이라도 어떻게든 영체를 유지할 수 있을 터.’
세계수를 쓰다듬으며 고민을 마친 그녀는 옷을 벗고 천천히 마나를 흐트러뜨렸다.
한때는 신에 필적했던 그녀는 천천히 육체의 탈을 벗고 세계수에 흡수됐다.
혼자 세월을 보낼 세계수도 슬슬 했을까.
세계수는 따스하게 그녀를 받아들였고 기꺼이 한편의 공간을 내주었다.
그렇게 신이 되려고 했던 멍청한 마녀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수만 년의 세월을 담았다.
‘…아무리 안배를 준비했어도 2회차의 나는 불가능하다. 그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지막 3회차의 내가 필요하다.’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그녀는 천천히 사고를 움직였다.
다만, 그녀는 지금이 몇 회차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처음부터 되짚으며 자신의 안배와 계산을 검토했다.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세계수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매번 저 문이 열릴 때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게 셀 수 없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기대를 접었다.
다만, 이번은 달랐다.
“…그러니까 이게 세계수라고? 존나 크네.”
아련히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가 몇만 년의 세월에 녹아서 닳아 마모된 그녀의 정신을 일순간 깨웠다.
그녀가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를 내보내 줘. 세계수.’
‘…그러면 다시 받아줄 수 없다. 너는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을 내 안에 있었으니. 나가면 1분도 채 되지 않아 흩어질 터….’
‘알아. 고마워. 내보내 줘.’
‘알겠다. 친구여. 그대의 의지에 경의를….’
무언가에서 풀리는 느낌이 들며 그녀는 밖으로 끌려나갔다.
세계수의 입구에는 몇만 년의 세월도 그녀에게서 가져갈 수 없는 그가 있었다.
원래의 시간대보다 이른지 그의 얼굴은 젊었지만,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지난 억겁에 가까운 세월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처음 그를 만났던 때의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뭐야? …루나?”
삐딱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보는 그의 모습은 그녀가 수없이 상상했던 그였다.
그는 이름 모를 엘프의 목줄을 잡고 있었지만, 그녀는 상관치 않았다.
그녀는 사라지는 자신을 느끼며 천천히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회차가 달랐지만, 그는 여전히 그였다.
‘그가 여기 있다는 건… 이게 마지막 회차라는 것.’
그녀는 이번이 그를 보는 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수만 년간 꿈꿔왔던 그와의 재회에 할 말을 고르고 골랐다.
야속하게도 길게 말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 회귀를 결심한 순간부터 그를 보며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사랑해요.”
어색하지만, 수없이 반복했던 그 말을 입에 담으며 그녀는 활짝 웃었다.
지난 수만 년의 시간은 고통스럽고 지독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마 다시 할 수 있다면 그녀는 단번에 승낙할 것이다.
그녀는 흩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찢어진 눈의 끝부분이 위로 치솟아 있어서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였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앞으로 그가 겪을 고통에 슬퍼하면서도 그가 해낼 것이라 확신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마지막 부분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신이 되려고 했던 멍청한 마녀, 루나는 환히 웃었다.
***
“뭐야. 시발 귀신인가?”
“주인님 끼잉…끼잉… 그거 하자… 그거….”
“닥쳐봐요 좀. 방금 못 봤어요?”
“주인님 물건 보느라 못 봤어요… 끼잉…끼잉….”
에이든은 갑자기 앞에 나타난 머리가 땅에 닿고도 흐를 정도로 긴 여자를 보며 루나를 떠올렸다.
지금 루나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농익은 느낌이었지만, 확실히 루나였다.
다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헛것을 본 게 분명했다.
‘쩝… 요새 기가 허한가?’
끄응… 방금 뭐가 익숙한 게 느껴졌는데? 하아암… 요새 먹은 게 많으니 자꾸만 잠이 느는구먼.
‘아무래도 몸에 좋은 것 좀 달여 먹어야겠어.’
에이든은 옆에서 자꾸 끼잉 거리며 다리에 비비는 엘프의 음부를 발로 한번 차주고 앞에 놓인 세계수의 굵직한 나뭇가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세계수라니까 나뭇가지를 좀 달여 먹으면 기에 좋지 않을까?’
에이든의 서늘한 시선에 세계수가 몸을 잘게 떨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