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영웅의 다음 임무.
* * *
“진짜 제대로 협상한 거 맞아? 그쪽에서 받아준대?”
수정구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며 쏘아붙이는 케이트의 모습에 나는 옆에서 내게 목이 붙들려 끼잉 거리는 0.9 키아나 엘프를 보여줬다.
“응 그렇다는데. 그렇지?”
“헥헥… 네 주인님의 말이라면 다 좋아여… 끼잉…잉…끼잉….”
“미…미친! 야!! 도대체! 뭔 짓을 하는 거야!! 이 호색한아!! 엘프한테 목줄은 또 왜 채웠어!”
“아니 네가 뭔 짓을 해서라도 협상시키라며. 엘프 왕국의 여왕이 이걸 원하는데 어떻게 하라고.”
“끼잉… 주인님 그거하자 그거… 끼잉….”
“…저게 여왕이라고?”
내 옆에서 배를 까뒤집고 자꾸만 음부에서 물을 질질 흘리는 여왕의 모습에 케이트가 기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다는데? 그렇지?”
여왕의 음부에 발을 올려 비비자 상큼한 레몬 향이 물씬 풍기며 내 발을 적셨다.
“야야! 거기를 발로 왜!! 그게 얼마나 아픈… 에? 좋아하네…?”
“헥헥… 맞아여… 여왕이에여… 그렇지만 지금은 주인님의 것이에여.”
“미…친 뭐라는 거야.”
“아무튼, 해결한 것 같아. 협상만 진행하면 된다며.”
“…진짜 저게 여왕이라고?”
“맞다니까. 첫날 회의장에서 가장 높은 의자에 앉아있었다니까.”
“엘프는 예의를 중시하니까… 그러면 맞겠네. 일단 우리 쪽 사람 보낼 테니까… 이상한 모습 보이지 말고 그… 쟤 옷 좀 입으라고 해. 어떻게 만나는 애마다 저 상태야.”
“엘프들 있는 곳 가면 입더라고. 나름대로 정신은 남아 있어.”
“주인님… 끼잉… 그거… 끼잉… 하자….”
“아오! 진짜!! 무슨 엘프 여왕까지 저능아로 만들었어!!”
“네가 성사시키라며. 그리고 진짜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얘는 원래부터이랬다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알았어. 일단 잘했어! 잘했는데! 에휴… 그래 일단 성사시켰으니까…”
케이트가 연신 한숨을 쉬면서 수정구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엘프 여왕은 수정구 건너로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 흥분되는지 내 다리에 연신 엉덩이를 비비며 물을 찔끔찔끔 뿌려댔다.
그 모습은 마치 짐승이 영역 표시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 우리 쪽 사람 도착하면 다음 임무가 전달 될 거야.”
“다음 임무? 또?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야?”
“당연하지! 지금 대륙 난리 난 거 몰라? 그 멍청한 엘프 여왕이랑 거기서 천년만년 살 생각이야?! 대륙 지켜야지! 가정 지켜야지! 먹여 살릴 입이 한두 개냐고!”
“아니 왜 또 소리를 질러…. 그냥 묻는 거잖아.”
“진짜! 무슨 가는 곳마다!! 아오!”
“다 말했지? 끊는다?”
“야야! 그거 안 해?!”
“…아니 옆에 사람도 있는데.”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잖아! 저건! 빨리하라고! 해! 하란 말이야!!”
수정구에 붉어진 얼굴을 들이밀면서 계속 재촉하는 것을 보니 들어주지 않으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후우. 사랑해.”
“으헤헤.”
수정구에 가까이 대고 작게 말한 다음 황급히 연락을 끊었다.
“끼잉… 주인님… 세계수 앞에서 끼잉… 그거 하자 …그거….”
엘프 여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세계수의 유난히 굵직한 줄기에 걸린 그네가 보였다.
‘저게 말로만 듣던 교미 그네?’
나는 사족보행 하는 엘프 여왕을 끌고 신문물을 체험하기 위해 움직였다.
세계수가 거부하듯 연신 흔들렸지만, 에이든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엘프라면 누구나 한번은 어린 시절에 타서 세계수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유명한 명물 세계수 그네는 그날 레몬 향으로 가득 찼다.
***
“에이든 동무! 어디 갔다 왔습네까! 제가 그 건방진 엘프 여왕과 보지 대결에서 이긴 것 봤습네까?!”
“그래. 네가 이겼다고 하더라. 대단하던데?”
“헤헤 제가 한 보지 하지 않습네까? 제 보지가 지는 일은 없습네다!”
“야!! 아무거나 먹지 말라니까!”
뿌듯함이 잔뜩 담긴 이지수의 말을 넘기며 잎사귀를 주워 먹는 천오를 막았다.
“대륙! 에이든 님이십니까?”
엘프 왕국으로 들어서는 행렬의 제일 앞에 있는 사내가 내게 다가와 경례를 올렸다.
“맞아요.”
대답했음에도 사내는 경례를 올린 자세로 멈춰 있었다. 한숨을 쉬며 마주 경례를 올리자 사내는 그제야 동작을 풀고 싹싹한 웃음을 지었다.
“대륙 연합 3사단 2대대 대장 히루스입니다. 용을 잡은 대륙의 영웅! 에이든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내의 눈빛은 산전수전 다 겪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크흠… 저도 영광입니다. 히루스.”
사내의 격렬한 반응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괜히 기분이 좋기도 했다.
“하하! 저 같은 것이 무슨… 아무튼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자세한 것은 여기 적혀 있을 겁니다.”
대뜸 한쪽 무릎을 꿇은 히루스가 봉인된 편지를 내게 공손히 건넸다.
그 과장된 동작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일단 편지를 건네받아 뜯어 읽었다.
‘안녕! 낭군? 오늘은 날씨가 좋아~ 아침으로는 쿠키를 먹고 지금은 발 마사지를 받고….’
매일 수정구로 하는 이야기를 왜 임무 서에도 적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히루스를 슬쩍 보고 다시 읽어내려갔다.
앞의 몇 장은 그동안의 근황이라던지 케이트가 요새 들린 취미라던지 같은 쓸데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고 편지의 마지막 장에 다음 임무가 적혀 있었다.
‘…오이가 그렇게 피부에 좋데! 아 벌써 편지지를 다 썼네? 아무튼, 다음 임무는 마왕을 잡는 거야. 북부의 마왕성 쪽으로 악마들이 모이고 있데! 지금도 힘든 악마들이 하나의 지휘 체계로 똘똘 뭉치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습격할 생각이야.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던 마왕 사냥이지만, 이번은 병력의 규모가 다르니 결과도 다를 거야. 키아나와 비키 그리고 녹지 않는 왕국의 병력과 다른 유망한 인물들도 지원할 테니까. 아 참! 성녀도 당연히 참여할 거고. 그러니까 대충 빨리 끝내고 돌아와! 당신의 하나뿐인 피앙세 올림.’
‘마왕을 잡으라고…?’
너무 뜬금없는 임무였다. 그리고 지금 내 무력으로 마왕을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늘의 균열이 열리면서 악마들이 강대해졌다는 건 들었는데, 마왕성으로 모이고 있다니.’
[…악마들이 모이기 전에 마왕을 잡는 판단은 합리적이야. 균열까지 열렸으니 힘을 찾은 악마들이 모여서 군단이 되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네.]
너는 실패했잖아.
[…이번에는 성공하겠지. 소년과 내가 있으니. 나는 생전에 같은 상대에게 두 번은 지지 않았네.]
결국, 마지막에는 졌으면서.
[…그러니 이번이 두 번째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들이 모두 모이기 전에 먼저 공격하여 지휘부를 무너뜨리겠다는 발상은 합리적이니까.
[이번 구성원에는 성녀도 있지 않나.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마왕을 상대하면서 성녀의 존재는 무엇보다 크다네. 심지어 최상위의 무력을 지닌 소년이 신의 선택도 받은 상태라 상대하기 더 쉬울 것이야.]
그렇겠지. 네 녀석 소원도 풀 테고 말이야.
[…만남에는 늘 이별이 존재하는 법이네 소년.]
씁쓸한 뒷맛에 손에 담긴 편지를 구겨 멀리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뭐.
용을 잡았으니 마왕도 잡아야지. 그게 영웅이니까. 나는 대륙의 영웅 에이든이니까.
복잡한 심경에 슬그머니 검 손잡이를 잡았다. 손에 착 감기는 검의 차가운 감촉이 조금이지만, 나를 진정시켰다.
‘마…마왕!! 완전 대박 포인트일 게 분명해!! 역시 내 사도! 다른 사도와는 궤를 달리한다니까! 최고다! 우리 사도! 지금도 압도적이지만 마왕까지 잡는다?! 이거 못 막거든요! 마왕! 이 똥 같은 녀석! 우리 폭풍 사도 에이든이 간닷! 얌전히 포인트가 되거랏!’
***
“…나는 왜 거기에 가야 하지?”
“마부잖아.”
“내가 왜 네 놈의 마부…. 알겠다.”
툴툴거리던 루크가 주먹을 들자 냉큼 마부석에 올라가 앉았다.
다음 문제는 차가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볼을 부풀리고 있는 군고구마 엘프였다.
“그쪽은 왜 따라온다는 건데요?”
“자…자고로 마왕 사냥 파티에는 엘프가 있는 게 전통적이지 않은가! 어떤 용사 전기를 읽어봐도! 대대로 엘프가 있었네!”
“전통이고 나발이고 그쪽은 조금….”
“자네가 오해하고 있는데! 나는 엘프 왕국에서도 한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의 무력이다.!”
볼을 붉히며 달라진 말투로 주장하는 세르나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최상위 수준이 맞았다.
데리고 가면 무조건 도움이 될 무력이기는 했지만, 군고구마 엘프는 뭔가 껄끄러웠다.
“왜… 그런 표정을 못 믿는 것이냐! 잘 보게!! 엘프 망치 1장!”
세르나가 폭이 넓은 치마를 너울거리며 등에 멘 큼지막한 망치를 양손으로 들었다.
망치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휘둘리는데 바람이 갈라지는 살벌한 소리가 났다.
‘그니까… 지금 여리여리한 엘프가 저 살벌한 망치를 쓴다는 거야?’
그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쪽의 무력이 뛰어난 것은 알고 있어요. 근데 엘프는 원래 정령이라던지 활 같은 걸 쓰지 않아요?”
“후후… 분석과 차별화는 성공의 지름길이지. 어린 시절 본인은 양손 망치를 쓰는 엘프가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너무 심각한 차별화였지만, 세르나는 재능이 있었던 모양인지 망치를 휘두르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다.
‘어떻게 근육 하나 없는 얇은 팔로 저 큰 망치를 드는 거지?’
내 시선에 세르나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망치를 한쪽 어깨에 걸쳤다.
“그런데… 그렇게 큰 걸 들고 마차에 어떻게 타게요? 우리 마차는 작은데.”
“후후… 걱정하지 말거라. 마법 망치이니. 샤라랄라!”
거만하게 웃은 세르나가 기이한 주문을 외우니 성인 남성 두 배만 했던 망치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이내 손가락만 해진 망치를 세르나가 목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본인은 너의 성욕도 해소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대대로 엘프란 성욕 처리로….”
세르나가 눈을 내리깔면서 폭이 넓은 치마를 걷어 올리자 뻐끔거리는 옅은 초록색 음부가 환히 드러나며 군고구마 냄새가 확 풍겼다.
성욕 해소는 지금도 이지수로 충분했지만, 굳이 강자를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군고구마는 좀…. 뭐 강자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죠. 타세요.”
“인간, 지금 이 판단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후후….”
세르나가 손가락으로 내 볼을 쓰다듬더니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세르나가 옆으로 지나가자 풍기는 군고구마 냄새에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에이든 동무! 저 보지 마사지! 좀! 에엑? 에이든 동무가 아닌 초록 엘프인 겁네다!”
“꺄아아악!! 뭐…뭔가 이 천박한 것은!”
앞으로의 여정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을 듯했다.
나는 히루스인가 뭐시기에게서 건네받은 담배를 태우며 생각을 정리했다.
마왕성으로 가는 중간 녹지 않는 왕국에서 집합하기로 했으니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면 때에 맞춰서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왕을 잡기에 충분한 병력이 모이고 있었다. 흐릿한 기억 속의 마왕은 강했지만, 우리 모두를 상대할 정도는 아녔다.
생각을 마친 나는 남은 담배를 대충 흐트러뜨리고 마차에 탔다.
“군고구마! 좀 나눠 먹자 이겁네다!! 이렇게 쩨쩨하게 굴 겁네까?!”
“뭐…뭔 소린가 인간!! 내 치마 안에는 군고구마가 없어!! 이 손 놓게!!”
“거짓부렁 하지 마십쇼!! 저 이지수의 개 코는 속이지 못합네다!! 이익!! 군고구마 내놓으십쇼!!”
벌써 친해졌는지 마차 한편에서 뒤엉킨 세르나와 이지수를 무시하고 천오의 옆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나를 보는 천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차의 벽을 주먹으로 쳤다.
“군고구마! 혼자 먹으려고 숨겨두다니! 처음부터 치졸한 엘프인 겁네다!! 같이 좀 먹으십쇼!”
“군고구마 없다고! 이…인간 떨어져! 떨어지라고! 아아앗!! 손을 어디에 넣는 것이냐! 천박한 인간!!”
익숙한 소란 속에서 마차가 움직였다.
***
“균 고구마! 군고구마 물!! 달…달콤한 것입네다!”
“아흐윽!! 떨어지라고 했다! 인간!! 어디에 혀를 들이미는 거냐!! 아흑!”
루크는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이해 못 할 말들을 한 귀로 흘리며 길에 집중했다.
지금까지의 여정으로 인해 이제 웬만한 것들은 가벼이 넘길 수 있었다.
자신이 도대체 왜 이곳에서 마부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끔찍한 무력 앞에서 루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앞으로는 평민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말자.’
철저하게 실력과 신분으로 자신의 판단에 맞춰 사람을 가르던 루크였지만, 무시하던 에이든에게 끌려다니며 생각이 바뀌었다.
에이든이라는 끔찍한 선례를 만난 순간부터 모든 인물이 잠재적 강자로 보이며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에 루크는 그 누구보다도 예의 바르고 친절해졌다.
“아흑! 인간! 어디를 만지는 것이냐! 손 떼거라!! 자…자네는 계속 움직여! 지금 아주 좋아! 좋앗!”
“엘프의 풀 보지는 약한 것 같습네다! 에이든 동무 힘내는 것입네다!! 인간이 엘프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네다!!”
‘저게 마왕을 잡으러 가는 용사 파티라니… 저게 엘프라니….’
루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선입견과 꿈이 순간순간 깨어지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그냥 영지로 돌아가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자. 내 주제에 용사는 무슨 용사인가. 영지에 있는 고운 처녀 하나 골라서 세금이나 받아먹으면서 오순도순 살자. 다만, 무조건 처녀 여야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안에서 들리는 신음도 그쳤을 때쯤. 한적한 도로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달빛을 흡수한 듯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흰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루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여자는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드러난 어깨가 원피스보다도 더 하얬다.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들었고 여자의 시선이 루크에 닿았다.
여자의 눈은 보석처럼 아름다운 붉은 색이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루크는 자신의 심장이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눈처럼 하얀 피부, 거기에 피를 마신 것처럼 붉은 입술에 루크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자는 루크가 봤던 그 어느 여자보다 아름다웠고 청순하며 매혹적이었다.
저 여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모라도 죽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루크는 천천히 마차를 세웠다.
마침내 여자 앞에 마차가 섰고 루크는 아카데미에서 못 여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산중에 위험하게 왜 혼자 계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혹시 날개라도 떨어져 하늘에서 떨어지신 겁니까?”
루크는 언젠가 준비해뒀던 손수건을 꺼내어 여리여리한 여자에게 건넸다.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킁킁대던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루크는 지금까지의 고난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 악귀같은 에이든 놈에게 끌려다니며 고통받았던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이 어여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은 지금까지 고된 길을 걸었던 것이다.
어찌 이런 깊은 운명의 뜻을 몰랐는지…. 한탄하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막내 냄새… 막내!!”
여자는 루크의 기대와 달리 손수건을 무시하고 냉큼 마차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거…거기는…!”
루크는 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여자마저도 악당 에이든의 마수에 빠지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마차 문을 열고 서 있는 여자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여자는 마치 신기루처럼 닿지 않았다.
여자의 옆에 선 루크는 마차 안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마치 마약을 하며 관계를 맺은 것처럼 모두가 나체 상태로 뒤엉켜있었다. 그 중 천오라고 불렸던 소녀만 일어나 뭔가를 핥고 있었다.
마차의 바닥은 무슨 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흥건히 젖어 있었는데, 군고구마 냄새가 짙게 났다.
“뭐야? 벌써 도착했어? 천오! 그거 먹지마! 더러운 거야!”
나체로 뒤엉켜있는 여자들 사이에 쓰러져 있던 에이든이 길게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찾았다! 막내다! 막내야!!”
그런 에이든을 본 여자가 제자리에서 몸을 살짝 떨더니 원피스를 대뜸 벗어 던졌다.
달빛을 받아 옅게 빛나는 여자의 탐스러운 새하얀 나신에 루크의 혼이 빠져나갔다.
여자의 몸은 신이 정성껏 빚은 도자기처럼 아름다웠다. 그 자태에 루크는 음심보다는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약속 지키러 왔어! 막내! 내 처녀가 이거인지 확인해볼까?”
마치 천국에 있다는 전설의 과실처럼 선명한 분홍색의 도톰한 음부에 루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마차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마차 문이 닫히며 풍겨오는 바람에는 복숭아 냄새가 물씬 담겨 있었다.
복숭아 냄새는 손쉽게 군고구마 냄새를 지워내고 주변을 복숭아 농장처럼 향기로 가득 채웠다.
이윽고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과 향기에 루크는 억장이 무너져 펑펑 울었다.
‘무…무조건 처녀 여야만 한다. 처녀 여야만 해.’
루크는 피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계속해서 다짐했다.
“삶이란 늘 실패의 연속이지.”
쭈그려 앉아 우는 루크의 어깨를 언제 다가온지 모를 사내가 두툼한 손으로 두드려줬다.
사내의 입에 물린 곰방대에서 흰 연기가 한숨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인가?”
사내의 물음은 듣는 사람 없이 공중을 떠돌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