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마왕의 끝.
* * *
눈을 뜬 여인은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분명 방금….’
흐릿한 기억과 함께 여인의 머릿속에 뿌연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기억 속에서 여인은 마왕이라고 불렸으며, 세상을 정복하기도 했고, 실패하기도 했다.
정반대의 상황이었지만, 둘의 결말은 같았다.
‘…또 시작인가.’
뿌옇고 흐릿한 기억들은 여인에게 지독한 권태를 다시 안겨줬다.
방금 태어난 여인이었지만, 이미 셀 수 없는 세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끝은 온다.’
모두가 두려워했던 무력을 지닌 여인조차 그를 바꾸지 못했다.
대륙의 다른 생명체를 다 죽이고 그 빈자리를 악마로 뒤덮어도 끝은 일치했다.
자신은 그저 끝의 장기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안녕.”
미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여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의 마른 여인이 앞에 서 있었다.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한없이 높은 격과 부서진 영혼의 향기에 흐릿한 기억이 선명해지며, 느껴지는 기시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갈 거야.”
‘…너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갈 거야.’
검은 여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도 동시에 울렸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군.’
토악질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검은 여인을 응시했다.
“…그 길고 긴 세월에 너는 녹슬겠지만.”
‘…그 길고 긴 세월에 너는 녹슬겠지만.’
기억 속의 검은 여인이 떠오르며 둘의 모습이 겹쳐졌다. 두 모습은 머리 한 올조차 다르지 않았다.
“어둠의 기다림을 버티면 금과 피로써, 네가 그토록 원하던 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어둠의 기다림을 버티면 금과 피로써, 네가 그토록 원하던 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검은 여인은 미련 없이 뒤돌았고, 그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검은 여인은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찾지 못했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며 생각을 곱씹었다.
자신은 격이 아득히 높은 여인의 말을 믿고 긴 세월을 기다리기도 했고, 금과 피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나가기도 했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우습군. …고작 한번 만난 이의 말을 믿고 수천 년을 기다린 것이.’
여인은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검은 흙을 제외하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땅.
몇 번이나 봐서 그런지, 여인에게는 고향과도 느껴지는 곳.
‘…이번에는 어떤 양식으로 지어볼까.’
여인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천천히 흙을 손으로 뭉쳤다.
인간의 공포를 먹고 자라는 그녀의 아이들은 태어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므로.
***
‘…재밌군.’
그 후 얼마의 세월이 지났을까, 여인은 다시 마왕이라고 불렸으며 명예에 눈먼 인간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이번 애들도 재밌었어.”
방금까지 생명을 뿜어내던 용사들 사이를 거닐며 여인이 작게 흥얼거렸다.
마왕성에서 나가지 않는 그녀에게 찾아온 손님들의 기억을 뒤지는 것만큼 흥미로운 게 없었다.
용사라고 불리는 것들은 늘 흥미로운 기억을 가지고 왔으니까.
‘용사 파티인지, 교미 파티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인간의 번식 본능은 생각 외로 투철한지, 마왕인 자신을 잡으러 오는 길에도 교미를 참지 않았다.
대부분의 용사 파티는 서로의 기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무너졌다. 무너지지 않아도 마왕의 상대는 아니었지만.
‘이번 파티는 짐꾼이 문제였지?’
여인이 유난히 큰 물건이 뎅겅 잘린 채 쓰러진 놈을 슬쩍 발로 밀었다.
기억을 보여주니, 짐꾼은 용사 모르게 파티의 여인들을 죄다 겁간한 상태였다.
‘저 아무 능력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한지 모르겠지만, 꽤 흥미로웠어.’
기억을 보여줬음에도 용사는 굴하지 않고 마왕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깨어진 파티로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점도 흥미로웠지만, 더욱 여인의 구미를 당긴 건 이 용사 파티는 여인의 기억에 없다는 점이었다.
‘…미묘하지만,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
마왕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붉은 피투성이 사이에서 용사 파티의 짐들을 확인했다.
‘포션… 화장품… 화장품… 뭔 용사 파티에 화장품이 이렇게 많아?’
짐을 뒤지던 여인은 이내, 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했다.
“그와 그녀의 용서할 수 없는 만남?”
책이었지만, 지식이 적힌 책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도 처음 보는 종류였는데, 읽어보니 어느 연인의 사랑 이야기였다.
평생 다른 이의 증오와 절망만을 먹고 살아온 마왕에게 애정이 적힌 책은 신세계였다.
“호오….”
여인은 피 웅덩이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다.
마침내 책의 끝부분에서 여자가 남자를 위해 죽었을 때, 마왕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아이들아!!”
흐르던 눈물을 지우고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여인은 악마들을 불러모았다.
자신의 앞에 모인 각양각색의 악마들을 보며 여인은 방금 읽은 책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와 같은 것들을 구해 오거라. 되도록 많이.”
악마들은 늘 그렇듯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했다.
그렇게 대량의 악마들이 마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인간들의 세상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의 요청에 마왕도 어쩔 수 없이 밖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신마대전이 발생했다.
신들의 사도와 성녀가 세상에 나타나, 인간들을 도왔지만, 이미 몇 번의 세월을 겪은 마왕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수없이 많은 생명이 죽고, 악마들이 지옥으로 돌아갔지만, 어차피 의미 없는 것들이었으므로 마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륙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마왕은 뭔가를 잔뜩 챙겨 다시 마왕성으로 돌아갔다.
이에 마왕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대륙에 새겨졌다.
***
마왕은 가져온 수많은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녀는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많은 밤을 지새웠다.
신마대전 이후로 마왕은 마왕성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크게 당한 대륙은 공포를 잊지 못하고 마왕에게 계속해서 용사들을 보냈다.
하지만 수많은 용사 중에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유난히 큰 기대를 받았던 용사 파티도 돌아오지 못하자, 인간들은 생각을 달리했다.
공포를 지워낼 수 없으니, 잊는 방법을 택한 대륙은 마왕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그렇게 세월은 다시 흘렀다.
***
‘…용사라기에는 조금 부족한데? 맛있게 생기긴 했지만.’
눈 끝이 위로 찢어진 사내를 보며 마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혼자 왔네?’
홀로 자신을 대적하러 온 사내의 자신감에 마왕이 고민하고 있을 때, 사내의 입이 열렸다.
“미…미인이시네요! 와! 눈부셔서… 눈이 멀 것만 같아요!”
공포에 잔뜩 떨리는 볼품없는 목소리였지만, 마왕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 대사는 마왕이 처음 읽은 책의 첫 대사였기 때문에.
마왕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는 쉴 새 없이 마왕의 미모를 칭찬했다.
평생 증오와 절망만을 먹고 살아온 마왕에게 사내가 속삭이는 달콤한 말은 치명적이었다.
‘어찌 책에 나오는 대사만 골라서 저리 말하는가….’
마왕은 헤실거리는 입꼬리를 참으며 발을 내밀었고, 그는 기꺼이 무릎 꿇고 자신의 더러운 발을 핥았다.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말과 사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마왕은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사내의 목소리에는 거짓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마왕은 거짓으로 꾸며진 따뜻함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다리를 벌리고 올라탄 사내의 눈빛에 담긴 두려움을 보며 마왕은 쓰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그쪽이었어?!!’
마왕은 오랜 시간 자신이 구멍을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아래가 더 합리적인 위치거늘…?!’
마왕은 처음 느껴보는 쾌락에 무너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았다. 사내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직였으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됐다.
사내는 달콤한 말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새로이 등장한 인간들을 모아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렀다.
‘어찌 내가 원했던 것만…, 이렇게 정확히!’
로맨스 소설에 푹 빠진 한심한 마왕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표정 관리를 했지만, 자꾸만 헤실거리는 입꼬리는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그리고 로맨스 소설의 끝인 결혼반지가 자신의 손에 끼워졌을 때.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사내의 눈이 피처럼 붉은색과 태양처럼 밝은 금색인 것을 확인했을 때.
‘어둠의 기다림을 버티면 금과 피로써, 네가 그토록 원하던 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비로소 찾은 의미에 마왕으로 태어난 여인은 더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이후에 나타난 괴상한 갈색 여인이 자신에게 총을 쐈고, 그런 여인을 지키기 위해 사내가 움직였을 때, 여인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기분이 뭔지 처음 느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전 남자로 알고 있는 벨에게 전투 신청을 했을 때, 그 모습이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전형적인 장면과 일치하여 자꾸만 새어 나오는 환호성을 억지로 참았다.
둘의 대결 앞에 여인은 그저 자신의 남자가 이기길 바라는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묘하게 비슷한 둘의 검이 교차했을 때, 새로운 용사들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그의 검이 벨을 반 토막 냈다.
꽤 오랜 시간 데리고 있었던 벨이지만, 마왕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다만, 벨의 검이 그의 복부에 박히는 것을 봤을 때, 인간의 연약함을 떠올린 마왕은 다급히 움직였다.
마왕은 복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그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마왕은 품에 안은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는 것을 보았고, 그의 몸속에 있는 신성력이 끌어올려 지는 것도 느꼈다.
‘아아… 그는 사도였구나.’
이내, 그가 손에 쥔 검에 자신을 태울 정도의 신성력이 감도는 것을 보면서 마왕은 작게 신음했다.
그는 충분히 속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격을 아득히 넘은 마왕에게 그는 피하고 그의 목을 뽑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왕은 그 길게 늘어진 시간에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검을 보았다.
‘…끝은 다가올 것이고, 그럼 나는 다시 시작하겠지. 그렇지만, 그는?’
새로 시작할 때마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가 다음에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있다고 하여도… 그건 지금의 나와 사랑을 나눈 그가 아니다.’
마왕은 지금의 그를 사랑했다.
비록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거짓으로 점칠 된 그의 말들이었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마침내 의미를 얻었다.
마왕은 그가 끝을 이겨내기를 바랐다.
비록 그곳에 자신이 없더라도.
생각을 마친 마왕은 다가오는 검을 피하는 대신 그를 더욱 세게 품에 안았다.
수많은 로맨스 소설을 읽은 마왕은 알고 있었다.
‘…슬픈 결말도 결말이니까.’
그런 마왕에 놀란 그가 검을 마왕의 몸에 쑤셔 넣었고, 참으로 오랜만에 느낀 고통에 마왕은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아프네… 이건.’
심장 부근을 찔렀는지, 깨어질 것처럼 아픈 가슴에 마왕은 쓰게 웃으며 그를 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마왕은 비로소 그녀가 말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를 만나 그가 끝을 이겨내도록….
아마 사도인 그는 억겁의 세월을 군림한 자신을 먹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녀가 말했던 것이 그라면 끝을 이겨낼 수도 있었다.
자신은 그를 위해 고통을 참고 잠시만 더 가면을 써야만 했다.
“하핫! 애미 터진 새끼! 속았지!”
웃으며 자신의 배에서 검을 뽑아내는 그의 얼굴은 사랑스러우면서도 가시 돋친 나무를 맨손으로 잡는 것처럼 아팠다.
“이…이런 나를 속이다니!!”
마왕은 조각난 속을 애써 감추고 방에서 소설을 읽으며 혼자 연습했던 연기력을 뽐내었다.
“…히익!”
그에 화들짝 놀란 그가 새로이 나타난 여인들 쪽으로 뛰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방정맞은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으며, 감춰왔던 모든 기운을 꺼내었다.
새로이 나타난 용사들의 수준은 제법 쓸만했고, 자신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으니, 좋은 그림이 그려지리라.
좋은 그림을 그릴수록 그에게 더 도움이 될 터이니.
‘…아무쪼록 이겨내길.’
금발의 여인 뒤에 숨은 그의 모습에 결국, 마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애미 터진 마왕의 배때기에 칼을 박았다!! 내가 박았어!!”
“사…사제! 일단 옷 좀 입고… 다 보고 있는데 그렇게 벗고 다니면….”
“사저! 봤어요?! 제가 마왕의 배에 칼 박는 거?!”
“으응… 봤어… 봤으니까 옷 좀….”
얼굴이 잔뜩 붉어진 금발의 여인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여인을 대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담긴 거짓 없는 따뜻함에 마왕은 생전 처음 부러움을 느꼈다.
‘…그가 끝을 이겨낸다면. 이것이 정말 마지막.’
세상의 끝이 아니라, 자신의 끝이 다가왔음을 느낀 마왕은 후련했다. 아니, 오히려 다시 눈을 뜨게 된다면 그를 만나기 전까지 공허함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내가 왜 악마의 왕인지 보여주마.”
마왕은 조금이라도 더 그를 눈에 담기 위해 애쓰면서 손을 저었다.
마왕의 손에서 마치 한 폭의 작품처럼 절망과 고통이 꽃으로 피어나서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저저… 애미 터진 마왕이 곧 뒤질 거면서 센 척한다!! 다들 합리적인 작전에 따라 다수가 되어서 하나를 공격합시다!! 돌겨어어억!!”
영웅의 고함에 마왕을 향해 인간들이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그의 목소리에 마왕은 마지막까지 미소 지었다.
‘어둠의 기다림을 버티면 금과 피로써….’
마왕의 뇌리에 깊게 박힌 문장과 그의 색이 다른 두 눈이 겹쳤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암시를….’
투명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던 검은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거짓 위에 지어진 성도 결국 성이니까.
***
‘뭐…뭐가 저렇게 강해?! 애미 시발!’
에이든은 배에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인간들을 도륙 내는 마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내 비범한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 아니었으면, 실패했겠구먼… 쯧.’
에이든은 시체 벨과 검을 교차하는 순간, 나머지 인원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에 에이든은 일부러 배를 벨의 검에 가져다 댔다. 마왕의 눈길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다만,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마왕은 압도적인 격을 뽐내었다.
“꺄하하하하!! 강하다! 강해!! 마음에 들어!!”
“비키! 진정하세요. 상대는 마왕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비키는 마왕의 공격을 몸으로 직접 막으면서 끊임없이 달려들었고, 비키가 만든 빈틈에 키아나가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뒤에서 빛을 뿜어내는 안드레아는 인간들을 다독이며 마왕의 기세를 눌렀다.
선두에서 마왕을 둘러싼 셋이 아니었으면, 이미 궤멸당했을 것이다.
[…부탁하겠네.]
네가 나설 필요 없다니까. 이미 저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거 안 보여? 여기서 아픈 척하다가, 마지막에 들어가서 검 박으면 된다니까.
[…내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도와주게.]
병신 새끼. 생에도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으면서.
[하하… 어쩔 수 없네. 배운 게 그것밖에 없는 걸 어떻게 하나?]
너 시발.
[부탁하네.]
이미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의식이 멀어졌다.
이후에 찾아올 공허함과 적막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오랜만이군.”
그는 멀리서 인간과 교전하는 마왕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검의 목소리에 그는 쓰게 웃으며 천천히 기운을 움직였다.
“…그게 내 전문 아니겠는가.”
그랬었지. 그대의 미련함에 경의를.
자신이 미처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걷는 그의 검에 담긴 신념은.
‘책임감’ 이었다.
그 무게는 차마 혼자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지만,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불평 한번 하지 않고 검을 고쳐 잡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