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도사란 무엇이냐.
* * *
서쪽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위.
훤칠한 흰색 머리 청년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금색 머리 사내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적막 속에서 절벽 위로 타고 흐르는 바람이 둘의 머리를 부드럽게 날렸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네.”
금색 머리 사내가 불편함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엇을.”
흰색 머리 청년이 그저 절벽 아래를 내려보며 되물었다.
“왜 우리 아이들을 버리듯 던지고 와야 했는지. 고작 인간 여자 하나에.”
금색 머리 사내가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인간 여자 하나라…. 토씨 하나 안 바뀌었군. 지루하군 지루해.”
“그게 무슨 말인가.”
사내의 물음에 흰색 청년이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눈이.’
천 년을 살아온 자신임에도 청년의 눈빛 하나 받아넘기기 힘들었다. 그에 먼저 고개를 돌린 금색 사내는 패배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냥 하라는 대로 하게.”
다시 절벽으로 시선을 돌린 흰색 청년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패배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던 금색 사내에게 개미 떼처럼 올라오는 인간들이 보였다.
“…한심한 인간 놈들. 끝이라는 사탕에 몰린 꼴이란.”
패배감을 잊기 위해서일까,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였을까, 금색 사내는 그런 인간들을 보며 비웃음 가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색 사내나 아래의 인간들이나 매한가지였지만, 비웃으며 우월감을 느끼는 모습이 참 드래곤 답다는 생각에 흰색 청년은 조소를 머금었다.
“준비는?”
“…거의 끝나가네.”
명백한 명령조에 금색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흰색 청년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는 고작 인간 여자 하나였네. 거기에 남은 우리 일족의 아이들은 고룡이 아니지만, 물경 사십에 달하고. 꽤 시간이 걸리는 듯하지만…, 우리 일족이 질 리가 없네. 아마 곧 우리 아이들이 돌아오겠지.”
다시금 같은 주제를 꺼내는 금색 사내의 말에 흰색 청년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금색 사내의 얼굴이 다시 한번 크게 구겨졌다.
“참으로 드래곤다워. 그래. 네 말처럼 그랬으면 좋겠군. 그녀를 마주하는 건 나도 조금 두려운 일이니.”
크게 웃던 흰색 청년이 돌연 웃음을 멈추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고 보게나.”
금색 사내는 상대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곧 밝혀질 일이었다.
“근데 거기 아래는 왜 내려다보고 있나? 여기 온 이후부터 계속 그러고만 있지 않나.”
드래곤답게 호기심을 참지 못한 금색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년이 보는 곳을 확인했다. 청년의 앞에는 메마르고 아득한 절벽만 있을 뿐 별다를 건 없었다.
“손님이 올 시간이라서 말이야.”
작게 중얼거린 흰색 청년이 아득히 먼 곳을 보는 듯, 동공이 작아졌다.
금색 사내는 그런 청년을 따라 지평선 끝을 응시하며 절벽을 타고 오른 바람을 맞았다.
둘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드래곤의 수명만큼 긴 인내심이 거의 끝나갈 때쯤, 지평선에 덩치 큰 사내와 흰색 머리의 미인이 나타났다. 미를 숭상하는 드래곤으로서 여인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흰색 청년이 혀를 찼다.
“…또 일그러졌군. 가서 계획을 앞당기게.”
“저것들은 신수 아닌가?”
청년의 목소리에 섞인 짜증에 금색 사내는 의문을 제기했다.
“저번에는 청룡과 두꺼비였는데 말이야. 하필 여우라니…. 귀찮게 됐어.”
청년은 사내의 말을 무시하며 어깨에 두르던 망토의 끈을 풀었다. 검은색 망토가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자네 설마… 지금 신수를 죽일 셈인가?”
마치 전투를 준비하는 청년의 모양새에 금색 사내가 경악했다.
“어떨 거 같나?”
청년의 입가에 걸린 불길한 미소에 금색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작게 무릎을 굽히던 청년이 가볍게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신수를 죽이면 평생에 불운이 따라온다네!!”
그에 화들짝 놀란 금색 사내가 낙하하는 청년에게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떨어지던 청년의 몸이 검은빛에 휩싸였고, 이내 모습이 급변했다.
숨 한번 쉴 시간이 지나고.
일반적인 드래곤의 다섯 배는 될 듯한 크기의 검은색 드래곤이 공중에 날아올랐다.
“신수를 죽이면 불운이 온대도…. 쯧.”
신수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며 금색 사내가 혀를 작게 차고는 뒤돌았다.
***
“그니까요! 막내 건 이만한데… 막 핥으면 향기롭고 달콤한 액체가 나오고… 그걸 또 삼키면 몸이 막 뜨거워지면서 아래가 가려워지고….”
“그만… 그만!! 몇 번을 이야기하는 거냐! 나는 그런 거 궁금하지 않대도!”
덩치 큰 사내의 격렬한 반응에 여인은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사내는 그런 흰 여인을 징그럽다는 듯 쳐다보고는 이내 귀에 큼지막한 종이 뭉치를 쑤셔 넣었다.
“막 또… 내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복숭아 물 같다고 막내가 입을 맞추며 게걸스럽게 먹는 것 아니겠어요? 아아…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제발 그만 이야기해! 안 궁금하다니까!”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여인의 달짝지근한 목소리에 사내는 한숨을 쉬며 종이 뭉치를 빼서 주머니에 챙겼다.
“그리고 다음에 막내가 이렇게! 얏! 허리를 움직이면 내가 아흣! 하고! 어찌나 하반신이 덜덜 떨리던지…!”
이내 사내는 여인의 말을 무시하기로 하고 앞에 있는 절벽을 올려다봤다.
‘…균열이라.’
아득히 높은 절벽을 올려다보며 맡은 임무를 되새길 때, 불길한 기운이 위쪽에서 느껴졌다.
“막 내 처녀막이 짜악! 찢어지고! 액이 흘러내리는데….”
“여우야! 적이다! 두꺼어어어업!”
다가오는 적의 격을 느낀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등에 멘 가방을 재빨리 풀었다.
사내의 가방에서 나온 건 향기로운 술과 뭐가 잔뜩 적힌 기다란 종이였다.
“…아저씨.”
“기억해라! 상대의 격은 아득히 높다. 그 늙다리 용들보다도 높아!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바 저자는 잊힌 종망을 부르는 용이 분명하다! 저자가 나왔다는 것은 끝이 다가온다는 것! 다만, 우리가 점친 시기와 다르다. 이에 문제가 발생한바! 이것을 그대로 전해라! 알았느냐?!”
사내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짝 소리를 내며 종이를 찍었고, 그러자 종이에서 기형적인 문자들이 밖으로 나와 주변을 메꾸었다.
마치 춤을 추는 글자의 모양새에 사내는 인상을 찡그리며 술병을 입에 물었다.
“…아저씨!!”
“똑바로 전해라. 우리의 사명이니.”
사내의 얼굴에는 이내 마른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두꺼비 도술! 제1장 만취!! 2장 난동 부리기! 3장 ….”
마치 목숨을 태우는 것처럼 거칠게 도력을 끌어내는 사내를 보며 여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내 여인의 등 뒤에 탐스러운 아홉 개의 꼬리가 나와서 흔들렸지만, 다가오는 흉흉한 기세에 잘게 떨렸다.
“크콰콰콰콰콰콰!!”
이내 육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검은색 드래곤이 크게 울부짖었다.
“내… 죽어도 청룡 손에 죽을 줄 알았더니만, 웬 먹물을 뒤집어쓴 도마뱀에게 죽다니. 두꺼비 생은 모른다더니 정말이군.”
이내 주변에 글자를 가득 메꾼 사내가 중얼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사내의 손에 맞춰서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 춤추듯 흩날리며 주변을 흔들었다.
“…아저씨.”
“내 말 똑똑히 기억하거라. 상대는 종말을 부르는 용이야. 오래전에 잊힌!”
사내의 호통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익살맞게 웃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검은 드래곤을 보며 사내가 굵직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사란 무엇이냐!”
다가오는 종말을 향해 사내가 두꺼운 양손을 내밀어 주먹을 크게 쥐었다.
그에 주변을 가득 채운 글자들이 화살이 쏘아지듯, 앞을 향해 날아갔고.
[귀찮은 놈들이지.]
무저갱처럼 깊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검은 드래곤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글자들을 지웠지만, 사라진 글자들이 금세 다시 자라나 드래곤의 온몸을 옥죄였다.
“…미인을 불처럼 좋아하고!”
사내의 외침에 글자들이 붉은색을 띠며 불길을 내뿜었지만, 드래곤의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했다.
“자연을 물처럼 다스리며!”
다시금 주먹을 틀어쥐는 사내의 굵은 입가로 선명한 핏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글자들이 이번에는 푸른색을 띠며 굵어졌지만, 드래곤은 귀찮다는 듯, 고갯짓 한 번에 그를 파훼했다.
사내는 작게 혀를 차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순리를… 수호하는 것!”
상대의 높은 격에 사내의 양손이 터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사내는 말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이었다.
“…그게 도사다!”
“아울.”
이제는 온전한 구미호의 형색으로 돌아간 여인이 작게 울고는 다가오는 종말을 향해 뛰어들었다.
“크헤헤헤! 드디어 해주는구나! 여우야!! 어때 입에 착 달라붙지?!”
사내는 고통을 삼키기 위해 더욱 크게 웃으며 입에 머금은 술을 뿜어냈다. 그에 드래곤을 옥죄던 글자들이 더욱 빛을 내며 커졌지만….
[정말이지 귀찮아.]
작은 중얼거림 한 번에 글자들이 유리 깨지듯 부서져 나갔다.
“아울!”
이내 집채만큼 덩치가 커진 구미호였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드래곤 앞에 서니, 그저 작은 꼬마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 놈에게 머리 빠지는 것을 막는 도술을 알려줬나?’
굵직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긁은 사내가 애써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글자를 일으켰다.
‘…저 아이와 온 게 정말 다행이군.’
공중에서 드래곤의 몸에 영롱한 불길을 내뿜는 구미호를 보며 사내는 쓰게 웃었다.
여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목숨이 아홉 개인 그녀는 이 소식을 그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내 가방을 다시 뒤져 마지막 술병을 꺼낸 사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 병이 남아있다니 정말 다행이군.”
작게 읊조린 사내는 다시금 껄껄 웃으며 종이를 죄다 꺼내서 펼쳤다.
술을 마시고 썼는지, 글자들은 죄다 삐뚤빼뚤했지만, 의미만 통하면 되니.
“…아옳옳!!”
쾅!
땅에 처박혀 고운 흰 털이 더러워진 여우를 보며 사내가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누가 저 존재에게 감히 상처를 입혔는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보라는 듯, 공중에 오연히 떠올라 내려보는 검은 드래곤의 오른팔에 새겨진 긴 자상을 보며 사내가 입술을 삐쭉 올리고는.
“…도사란 무엇이냐!!”
굵직한 목소리로 다시금 우렁차게 외쳤다.
“…아까 했잖아. 아저씨.”
물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여우가 일어나 다시금 뛰어올랐다.
여우가 공중을 디딜 때마다, 작은 불꽃이 일어나 발밑을 지탱했다.
[정말이지 귀찮은 존재야.]
“술을 불처럼 좋아하고!”
“…아까는 미인이라며.”
여우의 물기 어린 지적에 사내는 껄껄 웃으며 기꺼이 글자를 다시 꺼냈다.
글자들은 죄다 삐뚤빼뚤하고 형편없었지만, 사내의 인생이 담겨 있는바, 그 무게는 무거웠다.
독한 술에 사내의 목과 삶이 타들어갔다.
***
“그러니까 내가 마왕의 배에 칼을 딱!”
“칼을 따아악!”
“그러니 피가 주르르륵!”
“주르르륵!!”
케이트는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앞에서 합을 맞추는 에이든과 이지수를 보며 일그러지는 얼굴을 겨우 참았다.
“어머! 서방님 너무 멋져요! 역시 우리 서방님!”
“…최고다. 최고야.”
“크흠… 이 정도로 뭘 새삼스럽게.”
케이트는 한껏 우쭐해진 에이든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참았다.
“그럼 식사할까요?”
이내 점잖은 표정을 지은 에이든이 수프를 한 입 떠먹더니 다시금 입을 씰룩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마왕의 배에 칼을 딱!”
“칼을 따아아악!!”
“둘 다 닥치고 밥이나 먹어!!!”
케이트가 에이든의 계속된 자랑에 이미 식을 대로 식은 고기를 집어 던졌다.
“오 맛있어.”
그러자 냉큼 입으로 받아먹는 에이든의 모습에 케이트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고.
“…서방님 이쪽에 묻으셨어요.”
에이든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냉큼 닦아주는 서아의 모습에 케이트는 뒷목을 잡았고.
“캬아아아!! 역시 마왕을 해치운 인류의 희망! 에이든 동무입네다!!”
각 잡힌 박수를 치며 열렬히 환호하는 이지수의 모습에 케이트의 머릿속 뭔가가 끊어졌다.
***
“얼음 투성인 곳에 뭐 볼 게 있다고 시장을 가.”
“그냥 좀 와! 진짜 쥐어 터질래?!”
자신 앞에서 조그마한 주먹을 붕붕 흔드는 케이트의 모습이 가소로웠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기 전이라면 괜찮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때리면 가정 폭력이 되니 될 수 있으면 참아야 했다.
‘가화만사성이요… 내가 참으면….’
“…빨리 오라고!!”
뭐가 그리 급한지, 케이트는 내 손을 꽉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연신 살피는 것이 혹시나 다른 이가 나타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 갔지?’
내가 화장실 갈 때도 따라 들어오려고 할 만큼, 항상 내 옆을 지키던 이지수마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회색빛의 집들을 지나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도착하자 그제야 케이트의 걸음이 느려졌다.
“후후 멍청한 놈들.”
시장 입구에 도달하니, 케이트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면서 혼자 큭큭 대며 웃었다. 그 미소에는 우월감과 승리감이 담겨 있었다.
“아…! 여기 계셨군요. 서방님.”
물론,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끌려 나온 듯 잔뜩 표정이 일그러진 서윤과 그와 반대되는 밝은 미소의 서아가 나타났다.
“뭐…뭐야! 너희 왜 여기 있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둘의 등장에 케이트가 마치 먹이를 보호하는 짐승처럼 나를 뒤로 숨기며 으르렁거렸다.
“어머! 저는 그저 대장을 따라서 온 것뿐인걸요. 서방님! 여기 시장에 신기한 게 정말 많아요.”
케이트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가볍게 넘긴 서아가 내 팔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제길.”
잔뜩 분한 얼굴로 입을 벙끗거리던 케이트가 이내 작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냉큼 반대쪽 손에 붙었다.
양쪽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가슴 촉감에 나는 만족하며 천천히 시장을 구경했다.
추운 날씨에 가판에 올려진 고기는 죄다 얼었는데, 이 왕국만의 특별한 고기 굽는 방식이 있는지, 다들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이고!! 에포닌 님!!”
“아이! 떨어지라고!! 차가워! 떨어져!”
“에포닌 님이다!!”
“야!! 내가 너희 친구야?!”
분명 추운 날씨인데도 덥다고 후드를 벗은 이후부터 케이트의 주변에 사람이 잔뜩 몰렸다.
케이트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손주 보듯, 동생 보듯, 언니 보듯 따뜻한 태도로 케이트에게 들러붙었다.
“떨어져!!”
“이것 좀 잡숴봐요! 에포닌 님.”
“음… 맛있네 아니! 떨어지라고!! 야! 나 바빠!”
“이것도 에포닌 님이 좋아하던 과일이에요.”
“오 잘 익었네? 아니! 떨어져!! 데이트 중이라고! 야!!”
투덜거리다가도 주변에서 뭔가를 입에 넣어주면 금세 미소 짓는 케이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어머. 대장님이 인기가 진짜 많네요.”
“…그러게. 저런 싸가지도 자기 구역에서는 잘 나가네.”
“비켜!! 비키라고! 야! 에이든! 너네 어디 가!! 나 데이트해야 한다니까!! 음… 맛있다 이거! 아니지! 비키라고오!”
점점 모이는 인파에 더는 케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우리는 케이트를 포기했다.
시장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케이트에게 몰렸기 때문에 가판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한적하니 좋네요.”
가판에 널린 다양한 생선들을 구경하면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가자, 몇 명이 기다리고 있는 천막이 보였다.
‘다 여자네?’
묘하게 익숙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천막 옆에 적힌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보지 이쁘게 만들기
당신의 허벌 보지! 이뻐질 수 있다!
먼 타국에서 친우를 만날 생각에 얼어있던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막으로 걷는데, 돌연 서아가 우뚝 멈췄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서아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흐를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제 거…거기 못생겼어요? 흐윽….”
울기 바로 직전의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서아의 모습에 나는 웃고 말았다.
“흐으읍… 못생겼어요?! 분…분홍색이면 책에서 좋다고 그랬는데?! 흐어엉 엉덩이 쪼이기도 열심히 했는데 흐윽….”
내가 웃자, 서러움을 참지 못한 서아가 대성통곡했고, 그 큼지막한 눈에 가득 담겨 있던 투명한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뚝뚝 흘렀다.
“흐어어엉… 왜 내 거기는 못 생겨서어… 서방님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흐어엉.”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린 아이처럼 주저 앉은 서아가 내 다리를 붙잡고 목놓아 울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재밌어 따로 말리지 않고 그저 어깨를 토닥여줬다.
“왜 못생겼니! 왜 못생겼어! 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흐어어엉!! 죄송합니다아….”
어깨를 두드릴수록 서아는 더욱 서럽게 울더니, 급기야 손바닥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치기 시작했다.
“…어휴.”
서윤은 그런 서아를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