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아카데미의 노답 유급생-233화 (233/233)

〈 233화 〉 전장.

* * *

오직 모래밖에 존재하지 않아,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등진 자들밖에 없었던 사막이.

붉게.

더욱 붉게 물들어갔다.

“젠장! 떨어지라고!!”

한 병사가 자신에게 들러붙는 사내를 검으로 베어냈다. 평생을 하급으로 살아온 그였지만, 삶의 위기에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그 검로가 제법 날카로웠다.

본인도 그것을 느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 깨달음이라면 전쟁이 끝나고 잘하면 중급 용사도 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되면 평생의 염원이던 결혼도….

크롸롸롸롸롸롸롸!!!

그 순간, 굵고 검은 브레스가 그곳을 훑었고, 브레스가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쓰레기.”

연의 목 부근을 마나로 짓눌러 자신에게 향하던 브레스를 꺾은 루나가 작게 주문을 읊조렸다.

[소용없을 텐데.]

그를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듯, 검은 드래곤이 날개를 움직이며 공중에서 오연하게 내려봤다.

루나는 회귀하고 처음으로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저 검은 드래곤은 전 회차에서도 제법 까다로웠지만, 지금처럼 자신의 모든 마법을 튕겨내지는 못했다.

결국, 자신이 완성한 마법에 의해 심장이 터져 죽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치….

빨간 쓰레기처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루나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자네의 균형추로서 같이 회귀한 내가 그동안 놀고만 있었겠나? 이번에는 나도 저것의 힘을 좀 받았지.]

검은 드래곤의 주둥이가 마치 웃는 것처럼 비스듬하게 열렸다.

“…쓰레기. 고고한 척하더니. 외신의 힘을 빌려?”

루나가 그에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여유로운 척 말했지만, 속은 달랐다. 종말을 가져오는 용이 외신의 힘까지 받았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고했으니까.

[죽음이라는 게 여럿 바꾸더군. 자네는 아직 안 죽어봤지? 이 기회에 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다시 한번 웃은 검은 드래곤의 주위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잔뜩 적힌 마법진이 떠올랐다.

“….”

루나는 그에 다시 손을 움직였다.

뭐가 됐든, 천재인 자신은 이겨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

그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그의 행복을 위해서.

아니,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꺄하하하! 거대한 게 있잖아?! 이거 내가 한다?!”

[뭐…뭐냐!]

언뜻 들리는 목소리에 루나의 인상이 찡그려졌지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

“인간들이 더럽게 많구만. 안 그런가? 작은 인간?”

망치가 거칠게 휘둘러지며, 주변에 큼지막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다만, 그 공간은 인간의 파편과 피로 범벅이 되어 쉬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익숙해.”

마치, 일터에 나온 어미와 아기처럼 엘프의 등에 업힌 천오가 손을 내밀어 떨어진 조각의 머리 부근을 쓰다듬었다. 그에 잠깐 빛이 나더니, 천오에게 흡수됐다.

“아무거나 먹으면 못 쓴다고 번번이 말하지 않았나. 작은 인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엘프는 그를 끝까지 보지 않고, 다시금 땅을 찼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엘프의 아래로 벌레처럼 모여서 뒤엉킨 인간들이 보였다.

한쪽은 악에 받쳐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고, 다른 쪽은 웃으며 오직 포옹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우리가 악당인 줄 알겠군.’

속으로 쓰게 웃은 엘프가 공중을 다시 한번 박찼다. 엘프의 발 받침을 해준 바람의 정령이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작은 인간 크게 한 번 토해보게!”

뒤에서 들린 명령에 작게 인상을 찡그리던 천오는 입에 손가락을 넣었다.

“웩­.”

천오의 입에서 뿌려진 빛줄기가 중앙에 길게 선을 내었고, 그곳을 향해 엘프가 뛰었다.

“내 그대들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네. 내 부군도 인간이니까 말이야. 이건 그저 전장에서의 일이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나중에 세계수의 가지에서 보게 되면 제대로 사과할 테니!”

말을 마친 엘프가 거칠게 망치를 휘두르면서 앞으로 뛰어들었다. 엘프의 망치가 휘둘러질 때면 밀집된 곳에 작은 구멍이 생기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천오는 얼굴에 튄 피부 조각을 혀를 내밀어 입에 넣었다.

“…오이시!”

천오의 흐리멍덩한 눈이 번쩍 뜨였다.

“하하! 작은 인간! 식성이 남달랐구먼! 같은 인간을 먹는 작은 인간이라니! 끔찍하군! 끔찍해!!”

엘프가 거칠게 웃으며 조각낸 인간 파편을 뒤로 넘겼다. 그에 천오는 마치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고.

“…이 파편이 맛있는 게 아니라, 여기에 담긴 조각이 맛있는 거야.”

“작은 인간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 보는군.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게나! 우리 엘프도 모든 것을 생으로 먹으니, 나는 그대를 편협한 시각으로 보지 않네!”

천오가 거칠게 움직이며 괴상한 소리를 늘여놓는 엘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전장이었으니까.

무언가가 속에서 차는 듯한 느낌에 천오는 다시 입을 열었고.

“웨에엑­.”

이번에는 전보다 좀 더 길게 빛이 뿜어졌다.

“하하! 맛 들였구먼! 이것도 먹게!”

마치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처럼 떨어진 손을 뒤로 내미는 엘프의 모습에 천오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받아서 천천히 입에 넣었다.

“이 전장이 작은 인간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큰 식당이겠구먼! 마음껏 먹게! 자네는 좀 더 커야 하니까!”

넉살 좋게 말한 엘프가 다시금 망치를 휘둘렀다.

정신을 놓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전장에.

천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계산이 안 맞아.”

전장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선 케이트가 손톱의 끝을 질겅질겅 씹으며 초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희의 지표는 예상보다 훨씬 좋습니다. 다만…, 그들의 수가 예상 밖입니다. 중간중간 보이는 사도라는 것들도 수가 훨씬 많고요.”

그 옆에 오른쪽 눈에 멍이 든 나이 지긋한 사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크롸롸롸롸롸!!

내가 대륙의 검이니!

마침 들려온 드래곤의 울부짖음에 케이트의 시선이 돌아갔다.

분명, 대륙 연합의 모든 지표는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는지, 빛을 뿜어내며 홀로 에이션트 드래곤 네 마리를 상대하는 키아나와 누가 봐도 대장으로 보이는 거대한 검은 드래곤을 상대하는 루나와 비키까지.

모든 지표가 예상 밖으로 너무 좋았지만, 상대 진영의 수도 예상 밖이었다.

‘이 새끼들이 힘을 숨기고 있었어….’

마치, 연합군이 전력을 다해서 절벽으로 접근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병력이 나타났다.

종말 교의 광신도는 처음보다 배 이상 늘었고, 사도나 드래곤의 힘도 전과 달랐다. 최고의 선택지는 전력을 분석하여 다시금 맞붙는 것이지만….

‘지금 후퇴하면 끝이야.’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이번 교전에서 끝내지 못하면 그 수가 벌레처럼 늘어나는 종말교와는 다르게 연합군은 힘을 잃는 것을.

“…내가 준비해라 했던 것들 가져와. 너네도 검 들 수 있는 놈들은 들고 내려가고.”

어차피 지휘부는 그 힘과 목적을 잃은바, 자신도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케이트의 명에 테이블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움직였다. 그들 모두 지금 얼마나 절실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만 편해지자고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휘황찬란한 갖가지 보석을 들고 온 시녀들이 케이트의 몸에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에 온몸이 보석으로 도배된 케이트는 마치 한 마리의 공작새처럼 보였다. 키가 작은 공작새.

“…너는 아직 안 내려가고 뭐 했어!”

준비를 마친 케이트가 자신의 뒤에 변함없이 서 있는 올가를 향해 쏘아붙였다.

“제 목적은 당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꽉 막힌 올가의 모습에 케이트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이 이 모양인데…, 아니다. 그럼 잘 지켜봐.”

억지로 장난스럽게 웃은 케이트가 온몸에 붙은 보석을 매만졌다.

“…저도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그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조슈아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선언했다.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는 거야? 내가 위험하면 뛰어들어서 대신 맞으라고! 알았어?!”

“…네.”

장난스러운 케이트의 말에 조슈아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가보자고. 저 지옥 같은 곳으로.”

당당히 걸음을 내딛는 케이트를 말리고 싶었지만, 조슈아는 그러지 못했다. 모두가 싸우고 있었으니까.

“…오거라 아이들이여.”

케이트가 오른손을 빙글 돌리며 가장 큰 보석 하나를 손에 쥐고 주문을 외우자, 보석이 그 빛을 잃었다.

이내 케이트의 앞에 공기가 모여들며 작은 공간이 생겼고, 그 틈으로 정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하하하! 인간! 또 돈 지랄이야?! 우리야 좋지만!’

‘중간계다! 중간계! 와­ 저기를 봐! 완전 많아!’

‘보석값을 하자고! 보석값!’

“시끄럽고 가서 일이나 해! 웃으면서 손을 내미는 녀석들을 없애.”

케이트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정령을 손을 저어 밀어냈다.

‘역시! 우리의 우수 고객이라니까! 가자 애들아!’

‘드가자아아아! 돈 값하러!’

‘으헤헤헤!’

떠들던 정령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으면서 아래로 쏘아졌다. 장난스러운 대화와는 다르게 그 효과는 살벌했다.

바람이 스치듯 지나간 곳에는 인간의 사지 중 한 곳이 베어지며 땅을 뒹굴었고, 한 정령이 장난스럽게 두드린 땅에 몇몇이 쓰러지며 서로 뒤엉켜서 그 숨을 조였다.

“시끄러운 것들…. 우리도 가자.”

작게 혀를 찬 케이트의 뒤로 굳은 표정의 조슈아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인 올가가 따랐다.

그 뒤를 기사들이 뒤따랐다.

***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붉은 피는 그들의 정신을 계속 고양시켜, 피로를 잊게 했고, 전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속됐다.

메마른 서쪽 절벽에 붉은색 개울이 생겨 흐르고 있었고, 모래 위에는 주인 잃은 사지들이 넓게 흩어져 있었다.

‘…끝이 없다.’

그 수많은 병사 중 하나에 속한 케일은 비명을 지르는 몸을 움직여 앞에서 달려드는 사내의 목을 쳐냈다.

“…죄송합니다.”

주인 잃은 사내의 몸이 허물어지며 케일을 덮쳤다. 그에 눌려 쓰러진 케일은 안간힘을 다해 밀어내고 겨우 다시 일어났다. 눌어붙는 열기와 뜨끈한 피가 기분을 더럽게 했다.

몇 날 며칠을 싸웠을까.

더는 해가 뜨지 않아, 시간을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기절해야 하지만….

따스한 빛이 대륙 연합을 휩쓸었고.

그에 다시 차오르는 기운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물에 젖은 듯…, 아니 피에 젖어 무거웠지만, 빛은 그가 일어나기를 강요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날이 다 무뎌진 검을 재차 쥔 케일이 고개를 돌려 빛이 뿜어지는 곳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도를 올리는 우리들의 성녀가 있었다. 그 뒤에 서서 같이 기도하는 수녀들까지….

‘미인들이 아직 싸우는 데 내가 쓰러질 수 없지.’

케일은 쓰게 웃으며 다시 한 발자국 내디뎠다.

다시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를 베어냈고, 그의 뜨거운 피가 몸을 적셨다.

그에 몸이 뜨겁다 못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땅은 이미 시체로 가득하여, 걸을 때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후으….”

전장을 휩쓰는 성녀의 빛은 육체의 피로는 회복시켜 줬지만, 정신적 피로는 도와주지 못했다.

‘나는 지옥에 가겠군. 아니 이미 지옥인가?’

이번에는 아이 형상을 한 무언가를 베어낸 케일이 쓰게 웃으며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대부분 죽은 지 오래였다. 물론 다른 동료나 자신의 손에.

케일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무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휘부의 말을 믿고 남들보다 두꺼운 갑옷이 선택해서였다.

다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몇몇이 잡아 뜯은 갑옷은 이음새가 헐렁해졌고, 수십을 도륙한 검은 이가 다 빠져서 더는 그 목적을 수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크롸롸롸롸롸롸롸!!!

내가… 대륙의 검이니…!

네 마리였던, 커다란 드래곤들은 이제 두 마리가 남아 있었다.

‘정말 괴물이 됐군.’

그를 상대하는 키아나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드래곤을 네 마리나 상대했다는 것이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다만, 이제 그녀도 끝에 다다랐는지, 검을 휘두르는 예리함이 덜해졌다. 종종 피하지 못한 드래곤의 마법에 갑옷이 부서져 온몸이 화상투성이였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백옥같던 피부는 불에 타올라 흉측한 화상으로 가득했지만, 우습게도 케일은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신이시여….

지옥 속에서 누군가가 또다시 신을 찾았고.

“젠장. 신이시여… 제발!!”

케일은 마지막 힘을 다해, 신을 부르짖었다.

그런다고 신이 대답하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다.

‘…에이든의 말을 듣고 성당에도 제법 나갔잖아!’

“으헤헤….”

실성한 듯, 웃으며 다가오는 자신의 동료였던 이를 보며 케일은 검을 들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까지군.’

결국, 끝에 다다른 순간.

세상이 환히 밝아졌다.

‘…성녀가 또 있었나?’

그에 고개를 돌린 케일은 순간 어린아이처럼 울 뻔했다.

그곳에 오래전 자신의 친우가 전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커다란 짐승을 타고 마치 신처럼 빛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색 털이 어울거리는 짐승의 머리 위에 자신의 오랜 친우가 당당하게 검을 뽑아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다른 빛과는 다르게 너무 밝아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그의 등에는 빛으로 만들어진 망토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마치….

‘그래 마치, 전설 속 영웅처럼.’

검을 잡은 케일의 손에 힘이 다시 들어갔다.

친우가 등장한 지금,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돼야 하리라.

크와아앙!

하늘색 짐승이 분노라도 한 것처럼 크게 울부짖으며 오른 다리를 휘둘렀고, 그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갈라지며, 정신 놓은 이들이 빨려 들어갔다,

전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짐승의 위에 당당히 선 그에게 향했다.

어떤 이는 드디어 등장한 영웅에 환호했고.

어떤 이는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쓰게 웃었으며.

어떤 이는 그의 등장에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모든 이의 시선을 받은 그가 검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영웅 등장이다! 애미 터진 새끼들아!!”

영웅의 부르짖음이 전장을 휩쓸었고.

전장의 흐름이 요동쳤다.

***

“…하아.”

전장의 지하에 마련된 작은 동굴에서 한 여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앞에 마련된 마법진을 응시했다.

“돌이키기에는 늦었어. 어차피 수도도 내 손으로 부쉈었잖아. 끝도 다가오고… 에잇!”

작게 고민하던 여인이 지팡이를 마법진에 올렸다.

그러자 마법진이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더니 이해 못 할 문자들이 검은빛을 뿜어냈고, 천장에서 떨어지던 피가 모여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이미 수도 때부터 단단히 찍힌 목숨이야! 악…악당이 될 거면 최고가 돼라! 이런 말도 있잖아! 히잉….”

피가 점점 모이는 마법진을 피해 구석으로 간 여인이 웅크리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수만 명이 흘린 피가 마치 자석에 끌리듯, 마법진으로 흘러들어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천장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려 오던 핏물이 이내 계곡을 이루었고, 이내 폭포를 이루었다.

피를 머금을수록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문자로 새겨진 마법진은 불길한 기운을 뿜어냈다.

“…어차피 이제 다 끝이야.”

여인은 멍하니 중얼거리고는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마지막 순간에 커피를 음미하기 위해 준비할 것이 많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