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1화 〉 F급 모험가 도란
* * *
커버보기
[001] F급 모험가 도란 #1
별빛이 쏟아지는 밤.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이정표 삼아 언덕을 올랐다.
겨울 밤하늘은 은하수가 내리깔린 바다처럼 물결쳐 흘렀지만
그 어떤 별빛도 소녀를 비추지는 않았다.
외롭게 홀로 선 별 하나
웅크리고 앉은 자그마한 등은
뱃사람의 노래처럼 타오르던 목소리를 잊었다.
지금 여기 앉아있는 건 나약하고 어린 소녀.
그녀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
낮게 깔린 바람이 밤이슬 젖은 풀 내음을 싣고 흩날린다.
잔잔한 고요 속 찌르르르 울리는 풀벌레만이 요란한 가운데
애는 듯한 아픔에 젖은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도란.”
초겨울 첫눈처럼 속절없이 녹아 버리는 목소리에─
“나는 ────.”
크게 뜨인 소녀의 눈동자에 별빛이 담겼다.
* * *
조졌다.
“이 미친 새끼야!!”
부우우우우우웅!!!!
“왜 말법집을 건드리고 지랄이야!!!”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목전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매섭게 타오른다. 한푼 두푼 모아 간신히 장만한 단벌옷이 축축하게 들러붙었고, 짓이겨진 풀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냅다 달리고 있는 우리 뒤로 성난 말벌 무리가 떼거리로 쫓아왔다.
“...빈집인 줄 알았지, 킬러 호넷이 들어차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시바아아알!!!”
불과 몇 시간 전.
나와 내 동료는 평소처럼 약초채집 퀘스트를 위해 도시 인근 숲을 찾았다. 운 좋게도 손쉽게 할당량을 채우고 돌아오는 길, 조금 뒤 받을 보수를 생각하자 안도감이 몰려들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거대한 벌집을 발견하고 바지춤을 내리기 전까지는!
차마 말릴 틈도 없이 녀석은 벌집을 붙들고 몹쓸 짓을 하기 시작했다.
“미, 미친...!”
잔뜩 흥분한 동료를 보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놈의 기행쯤이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문제는
저기 저 구멍 크기를 봐라! 치와와가 들어가 산다고 해도 믿겠다!!
부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별안간 불길한 소음이 들려오더니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말벌 무리가 나타났다.
“키, 킬러호넷이다!!!!!”
즉시 동료의 뒷모가지를 붙들고 미친 듯이 내달리며 외쳤다.
“너...! 너 그 버릇 좀 고치라 했지!!!”
“어쩔 수 없네. 무릇 취향이란 건...”
“몬스터 보고 흥분하는 게 정상이냐?!!!”
“...이 또한 자연의 섭리일세.”
제정신이 아니다.
“옘병!!!”
낮은 초목들이 잔뜩 돋아난 들판을 가로질렀다. 가시덤불이 피부를 헤집었지만 무시했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면서까지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으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날갯짓 소리는 점점 가까워질 뿐.
어느새 지척까지 들이닥쳐 온 말벌들의 꽁무니에는 코끼리도 한 방에 보내버릴 듯한 독침이 번들거렸다.
“조심하게! 저 침에 쏘이면 그대로 끝장일세!!”
우지직!!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벌 한 마리가 내 투구를 스치자 관자놀이 부근이 종잇장처럼 움푹 찌그러들었다.
“오...오오오오!! 하, 하나뿐인 내 투구가아아아!!!”
“발을 멈추지 말게! 지금 놈들에게 잡히면.... 끄허헉!!!”
통렬한 비명에 옆을 돌아보니 말벌 한 마리가 동료에게 달라붙어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본능적인 혐오감이 느껴지는 광경에 기겁하며 소싯적 동생에게서 분유 뺏어먹던 힘까지 발휘해 냅다 뛰쳐나가자 녀석이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나, 날 버리고 가지 말게 도란!!”
“네 모가지에 붙은 벌이나 떼고 말해 인마!!”
“히익... 쓰벌!!!”
놈이 죽자 살자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주, 죽어도 같이 죽는 걸세..!”
“씨발!!!”
하는 수 없이 허리춤에서 쇼트 소드를 뽑아 휘둘렀다.
서걱!
군데군데 날이 상한 한손검이 벌의 복부를 갈랐다.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무장은 아니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단칼에 외골격이 찢겨나간 말벌은 어린아이 손에 붙들린 잠자리처럼 단명했으니.
서둘러 엎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자 열에 가까운 살인 말벌 떼거리가 주변을 에워쌌다. 하나하나가 사람 머리통에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덩치.
“젠장...”
이미 도망치기는 글렀다.
칼자루를 움켜쥔 두 손에 힘을 싣자 동료도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말벌 두 마리가 정면으로 쇄도해온다.
“....!!”
중단으로 겨눈 쇼트 소드를 재빨리 올려베었다.
짧은 도신으로 두툼한 하복부를 절단했다. 허물어져가는 말벌을 지나치며 검을 비틀었다. 무딘 칼날이 빨려 들어가듯 뒤엣 놈에게 치달았고, 순식간에 두 녀석을 유린하며 시커먼 체액을 흩뿌렸다.
잔해가 털썩 내려앉은 순간 동료가 고함을 질렀다.
“뒤를 조심하게!!!”
분쇄. 그가 메이스를 힘껏 내려찍자 말벌의 머리통이 산산조각났다. 그 광경에서 시선을 돌리고 두 다리에 체중을 실었다. 목표는 지척까지 다가온 벌 세 마리. 허리춤의 탄력을 이용한다.
퍼서석!!
키이익...!
차가운 검날이 외골격을 절단하자 놈들은 외마디 단말마를 내뱉으며 절명했다.
동료와 함께 남은 벌들을 정리하고 주위를 살피니 싱그러웠던 들판은 찐득거리는 껍질과 진액으로 덮여있었다.
“십년감수했네...”
한숨을 몰아내쉬며 칼에 눌어붙은 체액을 닦아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해치웠다지만 독침에 찔렸더라면 치명상을 입었을 수도 있었다.
전투의 긴장이 풀리니 온몸에 뒤집어쓴 액체로부터 비릿한 악취가 올라와 기분이 언짢아졌다.
“흠... 운이 좋았군. 수가 적어서 다행일세.”
“그러게... 웬일이지? 이놈들은 보통 무리를 지어 다닐 텐...”
부우우우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난 말벌 떼거리가 물밀듯이 몰아닥쳤다.
저거 최소 수백이다.
*
“하악.. 하아.. 염병할...”
필사적으로 말벌들을 뿌리치며 내달리기를 한참, 두 다리는 이미 진즉 한계에 다다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정 영역을 벗어나자 놈들이 추격을 그만두고 둥지로 되돌아갔다는 것.
“죽는 줄 알았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텅 빈 수통을 내던졌다. 그간 꾸준히 단련해왔지만 이번만큼 긴 거리를 단걸음에 주파한 건 손에 꼽을 정도다. 말벌들이 조금만 더 끈질겼더라면 지금쯤 몸 한구석에 구멍이 나 있었겠지.
간신히 호흡을 고르며 상태를 확인하자 처참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하나뿐이던 투구는 탁구공처럼 찌그러들었다. 면갑을 고정하던 가죽끈은 거의 다 찢겨나가 너덜거렸다. 안 그래도 낡아빠진 단벌 천옷은 해지고 뜯어져 더 이상 옷이라고 부르기조차 부끄러웠고, 약초를 담아두었던 조악한 천 주머니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린 채 바람에 나풀거렸다.
“...퀘스트 말아먹었네.”
말아먹어도 대차게 말아먹었다.
“구에에에엑!”
풀밭에 엎드린 동료는 어제 먹은 점심을 게워내는 중이었다.
놈도 만신창이긴 마찬가지.
엘프 특유의 윤기 나던 금발은 진흙과 말벌의 체액이 뒤엉켜 볼품없었다. 제법 쓸만했던 레더아머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원형을 알아보기조차 버거웠으며 보름 전에 새로 샀다던 메이스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하아... 나도 이젠 모르겠다..”
잔디밭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저물어가는 노을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갈바람을 타고 온 초가을 쌀쌀한 날씨에 슬슬 몸이 식어 올 무렵, 마침내 동료가 입을 열었다.
“흐... 미안하네 도란, 내가 또 망쳐버렸군... 그,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 벌집의 탐스러운 구멍이 날 유혹하지만 않았어도!”
아무래도 아직 혼쭐이 덜 났나 보다.
이러니까 여전히 E등급에 머물러 있지.
실력으로만 보면 D등급, 아니 C등급까지도 충분히 노릴 수 있는 녀석이건만, 기이한 성벽 탓에 허구한 날 퀘스트를 물 말아먹었다.
욕망에 충실한 이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겪어왔는지 셀 수도 없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읊조렸다.
“...돌아가자.”
“고맙네, 도란! 역시 자네밖에 없네!!”
“....”
할 말은 많지만, 이놈을 내칠 순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험가 중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녀석 말톤 뿐이니까.
“하아....”
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벌써 며칠째 퀘스트를 연달아 실패했다. 이번에도 공치고 돌아오면 페널티를 피할 수 없다고 엄포를 늘어놓던 길드 접수원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당장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한 나에게 페널티란 굶어 죽으란 소리나 다름없다.
우울한 생각을 뇌까리며 털레털레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성문 앞에 도달했다. 하도 많이 봐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경비병을 눈인사만으로 지나치고 조금 걷자 말톤은 볼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 남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정처 없이 걷던 와중 왁자한 소음에 고개를 들자 땅거미가 져서 어둑어둑해진 모험가 길드가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석재로 이루어진 외벽은 단조로운 거리의 풍경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띈다. 길드 정문 스윙도어의 가느다란 틈새로는 크리스마스 조명처럼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와 길거리를 물들였다.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문이 젖혀지며 거나하게 취한 무리가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크으... 오늘 의뢰도 대성공이구먼...! 이게 다 이 몸 때문 아니겠나! 크하하하하하!!!!”
“그래그래, 암! 그렇고말고!! 덕분에 한턱 얻어먹었으니... 음?”
“...뭔데 그래 갑자기. 어디 이쁜 귀신이라도 봤냐? 크흐흐...”
“아니 방금 골목에 누군가가 서 있었는데... 잘못 본 건가...?”
“자네 벌써 취했나? 그러지 말고 한번 더 달리자고!! 듣자 하니 저 남서쪽 광장 선술집에 새로 들어온 아가씨가 그렇게 이쁘다던데!”
“그거 좋지!! 이번엔 내가 쏜다!!!”
“그래!! 바로 그거야!!! 크하하핫!!!”
“.....”
사내들이 물러가자 천천히 담벼락 뒤에서 걸어나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왁자한 웃음소리와 싸구려 에일 특유의 시큼한 향이 맴돌았다.
저들은 적어도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하진 않겠지.
술기운에 붉게 물들어버린 근심 없는 얼굴들과 내 처지를 비교하자 가슴이 아려왔다.
어김없이 찾아온 바늘.
오늘도 날카로운 바늘 하나를 가슴 한켠에 묻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뒤돌아서 털레털레 걷기 시작하자 후회가 막심했다. 퀘스트 기간은 오늘까지. 실패 보고를 해야 하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번엔 또 무슨 변명을 대야 한단 말인가. 구겨지는 접수원의 미간은 또 어떻고.
집집마다 새어 나오는 따스한 불빛을 지나쳤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를 무시했다. 귀를 틀어막아 꼬마 아이들의 칭얼대는 웃음을 외면했다.
전부 지나쳐 차디찬 건물 모퉁이를 돌면 익숙한 골목길이 나온다.
주린 배를 틀어쥐며 담벼락에 손을 짚었다. 협소한 골목 내부엔 온갖 더러운 것들이 즐비했다. 축축한 곰팡이와 썩은 오물, 말라붙은 토사물 자국과 지독한 물비린내 그리고...
나.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나마 덜 축축한 자리를 잡고 누워 손이 닿는 대로 널빤지 쪼가리를 덮었다.
찬 기운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좀먹는다.
내일 눈을 뜨지 못하는 건 아닐까?
좁은 골목 사이로 비쳐들어오는 별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향 생각에 서러움이 사무쳤다.
지구에서 떠나온 지 어언 두 해가 다 되어 가지만 밤하늘을 보며 잠들 때면 항상 옛날 생각에 밤잠을 설치곤 했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식탁과 익숙한 버스 정류장.. 그리운 집...
더 이상 그런 건 없겠지.
찬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몇 번이나 맹세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은 하루 벌어 하루 간신히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신세지만.
언젠가, 꼭 강해져서
내가 잃어버렸던 빌어먹을 것들을 되찾고 말겠다.
나는 이세계 F랭크 모험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