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F급 모험가 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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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F급 모험가 도란 #2
눈을 뜨자마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신에 엄습해왔다.
황급히 주둥이를 더듬었지만 다행히도 입이 돌아가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젠장.”
애써 추위를 무시하고 잠든 게 실수였다. 슬슬 가을에 접어들기 시작한 날씨를 너무 얕봤다. 어찌나 추웠으면 그렇게나 득실거리던 쥐들이 얼씬조차 하지 않았을까.
성문 밖이었으면 잔가지들을 긁어모아 불이라도 지폈을 테지만 도시 내부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행위는 불법이다. 앞으로 노숙할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성벽 근처에서 야영하고 말지.
얼어 죽거나 몬스터한테 뒤지거나 피차일반이다.
“오늘은 일이 있어야만 할 텐데...”
쩔그럭.
재산이라곤 호주머니에 들은 구리 동전 두 개가 고작.
이틀 내내 쫄쫄 굶은 까닭에 당장 발밑의 흙이라도 퍼먹고 싶었으나 참아야 한다. 이번에는 단순한 식중독으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떻게 진흙 쿠키를 먹고도 멀쩡한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불길한 생각을 곱씹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모험가 길드 앞까지 도달했다.
하얀색 석재로 지어진 길드 건물은 아침 햇살을 반사해 눈부시게 빛났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편리하지만, 때때로는 비참한 내 모습과 대비되어 얄궂게 느껴지기도 한다. 출입구 상단에는 방패 위에 칼이 교차되어 있는 문양과 함께 ‘아카이아 모험가 길드’라는 목제 간판이 떡하니 걸려 있다.
잠시 들어가기를 망설이자 두런거리는 모험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보자... 코볼트 다섯 마리 토벌...”
“빨리 끝내고 주점에나 가자.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가씨가...”
“동쪽 숲에서 코쿤 버섯 같이 채집할 사람 찾아요!!!”
“너 잘 만났다..!! 그저께 보수 가로챘던 새끼 맞지?!!!”
“아, 아닌데요...!”
“....”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길드 정문은 왕래하는 모험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세계에 백열등 따위가 있을 리도 만무, 사람들은 항상 크리스마스 선물을 앞둔 아이들처럼 부지런했다.
끼익.
불편한 심정으로 스윙도어를 밀고 들어서자 테이블을 옮기고 있던 밝은 주홍빛 머리의 담당 접수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살이 급속도로 찌푸려진다.
“저... 안녕하세요?”
“도란 씨... 그 몰골은 뭐죠?”
“....”
하기야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하나뿐이던 천옷은 넝마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싸구려 잡철 투구는 잔뜩 찌그러들었고, 얇은 가죽끈에 간신히 매달린 면갑은 곧 떨어져 나갈 듯 덜렁거렸다.
이러니 길가의 부랑자들조차 거들떠보지 않았지.
난처하게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답했다.
“그게... 킬러 호넷 무리를 만나서...”
“킬러 호넷이요? ...용케 살아 돌아오셨네요.”
그녀의 냉담한 눈초리가 내 처지를 비관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 도시 ‘베라스틴’에서 모험가 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되어 가지만 변변찮은 실적 하나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 사지 멀쩡한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석 달 정도 만에 도달한다는 E급 모험가도 지금 내게는 먼 이야기.
고유한 체질 탓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차별을 당해왔다. 실력은 D급 모험가를 웃돈다고 자부하지만, 파티를 맺지 못한 탓에 전투 의뢰를 받지 못했고 허구한 날 등쳐 먹히기 일쑤였다.
F급 모험가는 보호 차원에서 최소 세 명 이상 파티를 맺지 못하면 전투 의뢰를 받을 수 없을뿐더러 몬스터를 사냥해도 실적에 반영되지 않는다. 심지어 도시 인근은 영주성에서 정기적으로 토벌을 나서기 때문에 멀리까지 나가는 게 아닌 이상 마물 사냥만으로는 밥 벌어 먹고살기도 힘들다.
항상 몬스터를 조우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아무튼, 이 개 같은 규칙 탓에 나는 아직도 F급에 머물러 있다.
필사적으로 뒷말을 고르고 있자니 그녀가 내 옷깃을 움켜쥐며 쏘아붙였다.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죠! 지금은 한창 킬러 호넷이 속출하는 시기니 주의하라고요!! 퀘스트 기간이 어제까지였는데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약초채집 의뢰조차 실패하는 모험가는 도란 씨가 유일할 거예요. 혹여나 크게 다쳤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고마워요, 카렌 씨. 그렇게나 저를 걱정하셨다니...”
“아뇨, 누누이 말하지만 담당 모험가가 죽으면 제 실적이 떨어지니깐요.”
카렌이 무덤덤하게 읊조렸다.
꽤나 신랄한 태도지만 이래 봬도 그녀에겐 많은 신세를 졌다. 아무도 내 담당 접수원을 맡지 않으려고 하는 가운데 선뜻 나서준 사람은 카렌이 유일했으니까.
초조하게 칼자루를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저 전투 하나는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승급하고 파티를 구할 수 있게 되면 진짜 몬스터고 뭐고 다 때려잡고 호강시켜 드릴게요!”
“하...! 호강이 아니라 호구겠죠!! 이상하게 실력 있는 건 알겠는데, 가장 기초적인 약초채집 퀘스트마저도 실패하면서 도대체 언제 진급하고 파티를 만들어서 사냥을 나서겠다는 말이에요?”
이게 다 말톤 때문이다. 제길, 이번 퀘스트를 그놈과 같이하는 게 아니었는데.
“여기엔 다 깊은 사정이...”
“보나 마나 말톤 씨 핑계를 대겠죠. 킬러 호넷도 다 그분이 일을 저질러서 그런 걸 테고. 어디 제 말이 틀렸나요?”
“네...? 그걸 어떻게...”
“뻔하죠, 제가 도란 씨를 봐온 지도 벌써 반년이나 흘렀는데. 반년이면 늦봄에 뿌린 벼 이삭을 수확하고도 남는 시간이에요! 어디 변명해 보시죠? 반년 내내 F급 모험가인 도란 씨.”
“윽...!”
말톤의 기행은 이미 모험가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심지어 옆 길드에서도 녀석의 이름만 나왔다 하면 폭소를 터트릴 정도.
목 언저리까지 치밀어오르는 수치심에 주먹을 움켜쥐자 흉흉한 시선이 꽂혀들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곁눈질하니 저 멀리 험상궂은 모험가들이 에일을 들이키며 노려보는 중이었다. 나와 카렌의 관계를 질투하는 거겠지.
그녀는 상당한 미인인 만큼 모험가들의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는 경우가 잦으니까.
짐짓 헛기침하며 황급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저기 카렌님?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저희의 창창한 미래를 위해 내려주실 수 있는 의뢰가 있을까요...?”
카렌이 발끝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도란 씨. 제가 벌써 몇 번이나 이번에도 실패하면 당분간 퀘스트 접수를 금지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젠 양심마저 팔아먹으셨나요?”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카렌님!! 벌써 며칠째 한 끼도 못 먹었단 말이에요... 오늘도 굶으면 저 진짜 죽어요!!”
“제 알 바 아니에요. 이번 의뢰도 실패하셔서 제가 길드장님께 얼마나 혼났는지 아세요?”
“이, 이번엔 꼭 성공할 테니까 부디...”
“안 돼요.”
두 손 모아쥐고 사정해도 단단히 삐진 카렌은 도통 들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최후의 수단.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그녀의 치맛자락을 틀어쥐었다.
“으허허허헝!! 아이고 나 죽네!!! 내가 죽으면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들은 이제 뭘 먹고 사나! 아이고!!”
“...도란 씨 저 말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 거짓말을 하실 거면 좀 더 그럴싸하게 하시죠?”
“...카렌님, 제가 이것까진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엔 또 뭔데요?”
“사실은... 제가 의뢰를 받지 않으면 죽지 않는 병에 걸려서...”
“그럼 이대로 죽으면 되겠네요. 시체 처리하기 귀찮으니까 되도록 길드 밖에서 죽어주세요. ...도란 씨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으흑...!”
포기할 수 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 산속에 틀어박혀서 나무뿌리로 연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매일 밤 마물들의 틈바구니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건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으니까.
매몰찬 거절에도 불구하고 끈덕지게 매달리자 점점 사람들의 이목이 몰려들었다. 카렌이 주변을 의식하며 날 때어놓고자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집요하게 들러붙으며 애원했다.
“도란 씨...? 저기 이러시면 곤란... 치, 치마가...!”
“...카렌님, 제가 죽으면 뒷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뒤, 뒷감당...? 그거야 저랑 상관없는...”
“죽기 직전, 길드 담벼락에 카렌 님의 험담을 잔뜩 써 놓을 겁니다...!”
“.....”
“....아카이아 길드의 카렌 씨는 사실 음란한 취미를 잔뜩...”
“퀘스트 내줄 테니 당장 그 입 닥쳐요.”
해냈다.
만면에 승리의 미소를 가득 지으며 일어서자 그녀가 게슴츠레 쏘아봤다.
“...이 저질,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흐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언젠가...”
“..담당 접수원을 맡겠다고 나선 내가 잘못했지...”
욕먹어도 마땅한 짓거리였으나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을 터다. 카렌은 내 형편을 누구보다도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니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그녀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도란 씨 때문에 제가 늘 얼마나 난처한지 아세요?”
“카렌님은 진짜 축복받으실 거예요..! 제가 지금은 F랭크지만 곧 있으면...”
“한 마디만 더 뻥끗하면 정말로 길드에서 제명할 거예요.”
“.....”
“하아... 사실은 도란님이 해주실만한 의뢰가 남아있기는 한데... 다른 모험가분들이 기피하는 일거리여도 괜찮으시겠어요? 보수는 5페니에요.”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5페니면 나쁘지 않다. 딱딱한 호밀 빵 두 덩이를 사고도 싸구려 여인숙에서 1박을 할 수 있는 금액. 지금 내 전 재산인 2페니의 두 배를 웃도는 액수다.
무엇보다 찬밥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인지라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었다.
* * *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각.
의뢰서에 적힌 약도를 보고 걸었다. 빈민가가 위치한 남쪽 가도를 쭉 나아가다 보니 낙후된 흔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악기 하나 늘여놓고 뻔질거리던 음유시인들은 종적을 감췄으며 메마른 분수대와 철 지난 건물 양식, 헐벗은 빈민촌 부랑아들과 할 일 없이 모여 작당하는 청년들이 곳곳에서 희멀건 눈동자를 빛냈다.
태양에 뜨겁게 달궈진 투구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전전하다 보니 어느덧 지정한 장소에 도착했다. 무너져내린 건물의 잔해가 온존한 낡은 공터에는 이미 네다섯 남짓한 모험가들이 모여있었다.
“젠장...”
문제는 다들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는 점.
얼굴에 검버섯이 잔뜩 돋아난 여성이 신경질적으로 돌부리를 걷어찼다. 한 남성은 너무 늙은 나머지 달리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 그와 말을 섞고 있는 모험가는 알코올 냄새를 지독히 풍겨댔으며 한시도 쉬지 않고 독한 대마 연무를 내뿜었다.
허리춤에 제법 그럴싸한 장검을 찬 금발 청년이 한 명 있긴 했지만, 그의 오른쪽 팔꿈치 밑으로는 있어야 할 팔 대신 애꿎은 소맷자락만 바람에 흩날렸다.
“...이번 의뢰도 꽝이네..”
다섯 명이 모이면 반드시 짐덩어리가 있다지만, 꼭 한 명만 있으란 법은 없다.
이 세계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한 광경에 살짝 침울해졌다. 오늘도 웃으며 작업하기는 글렀다. 뼈마디가 작살나도록 일해야 간신히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갈 수 있겠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다가가자 독한 연기에 코가 시큰거렸다. 구하기도 어려운 대마를 어디서 얻은 걸까? 쓸데없는 상념을 뇌까리고 있자니 서먹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품속에서 모험가 패를 꺼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카이아 길드 소속 F급 모험가 도란입니다. 다들 퀘스트를 받고 나오신 분들이 맞으신가요?”
“안녕하세요! 발텐 길드 소속 D랭크 모험가 란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란 씨.”
“...안녕하슈”
“....”
내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동자들을 감내하며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한 중년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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