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지하수로
* * *
[004] 지하수로 #2
고막이 찢겨나가는 듯하다.
모두가 귀를 틀어막고 몸서리쳤다.
“윽..!! 도대체...”
“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겐가?!!”
“도란.. 이 소리는...”
“.....”
육중한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주변에 널린 돌멩이들이 들썩거렸다. 수로를 틀어막은 쓰레기들이 거친 물보라를 피워올렸고, 천장에서 작은 부스러기가 떨어져내렸다.
이윽고 통로를 무너뜨리며 등장한 건 그 울음소리만큼이나 거대한 마물이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
“허윽...! 저, 저건 뭔가!!!”
“무, 무슨 저렇게 무지막지한 몬스터가...!”
“키, 키... 킹 코볼트...”
“저게 바로 그...”
킹 코볼트.
발치를 굴러다니는 일반 코볼트들과는 다르게도 놈은 몸길이만 무려 성인 덩치를 웃돌았다. 울긋불긋한 근육질 몸매에는 검붉은 핏줄이 잔뜩 돋아있었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흉흉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존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릴 주시하자 핏발선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뚝뚝 흘러넘쳤다.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씨발!!! 다들 통로로 뛰어!!!”
“사, 사람살려!!!”
할아범이 다급하게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나 또한 서둘러 도망치려는 찰나 한 형체가 눈에 밟혔다.
“란스!!!”
“히, 히이익...!!”
조금 전, 안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란스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었고, 잘려나간 오른팔을 부여잡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이내 킹 코볼트가 거구를 웅크리며 성난 황소처럼 발을 굴렀다.
“젠장...!!”
이대로 가면 녀석은 틀림없이 죽는다. 사람 목숨 한둘쯤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희생자가 한 명이라도 더 발생할수록 길드에서 제명당할 가능성 또한 올라간다.
짧은 생각을 마칠 새도 없이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고, 코볼트 킹의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드는 것과 동시에 그를 붙들고 사선에서 벗어났다.
콰과과과과과과광!!!!!!!!!
“크윽...!”
코볼트의 사체를 딛고 황급히 일어서자 한쪽 벽을 들이받고 멈춘 거체가 보인다.
“야 씨발!! 정신 차려!!!”
“흐그으윽...!”
“염병!!!!”
뺨따귀를 후려갈겼지만 란스는 제정신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겨드랑이를 붙잡고 난폭하게 잡아끌었으나 피로 젖은 바닥 탓에 쉽지 않았다. 다급하게 고개를 드니 코볼트 킹이 서서히 거구를 일으키고 있었고, 이내 충혈된 눈동자가 시뻘건 궤적을 그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쿠오오오오...!!
“젠장!!!!”
놈의 거체가 경로의 모든 물체를 집어삼키며 쇄도해왔다.
팔이 부러지는 것도 불사할 각오로 란스를 잡아끌었다.
곧, 우리가 출구에 도달한 것과 동시에
투콰아아앙!!!!!!
코볼트 킹의 육중한 몸체가 통로를 산산조각냈다.
“큭...!!!”
골통이 뒤흔들리고 이가 맞부딪혔다.
일 초, 아니 그 반의 반이라도 늦었더라면 반드시 죽었다.
살아남았음에 안도하려는 찰나,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무너진 바위들을 비집고 거대한 손아귀가 다가왔기에.
그것이 나를 붙잡으려는 순간
“좆까!!!!”
푸확!!!
오른손에 쥔 검을 놈의 굳은살투성이 손바닥에 쑤셔박았다.
“지금이야!! 다들 뛰어!!!!!!”
욱신거리는 가슴. 묵직한 두 다리. 흔들리는 시야.
고개를 돌려 통로 너머를 쳐다보자 그곳에 코볼트 킹이 있었다.
녀석의 시뻘건 눈동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쫓고 있었다.
*
“.....”
차박... 차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통로를 손으로 더듬어 나아갔다.
하수도에 들어설 때 들고 왔던 등유 랜턴은 이제 없다. 횃불은 심지가 물에 흠뻑 젖어버렸다. 심지어 누구 하나 그 흔한 불씨조차 없다.
간신히 다음 수로에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지상까지 도달하려면 한참을 더 전진해야 한다.
토드가 애써 입을 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일 아침쯤이면 협회에서 탐색대를 파견해 올 거라네.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당장 오 분 뒤조차 살아있을지 장담 못 하는데, 어떻게 내일 해가 뜰 때까지 버틴단 말이요? 가당찮은 소리나 하고 말이야.”
“.....”
노년의 모험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안 그래도 절망스러운 상황 속 사기를 낮추는 말이었으나, 우리 중 그 누구도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백 길 너머 물속처럼 컴컴한 시야.
한 걸음 한 걸음씩 간신히 내디디고는 있지만 이대로 가다간 꼬박 날을 새도 탈출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사방에 뚫린 통로들로부터 으스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통로 천장의 갈라진 틈새에서는 차가운 물줄기가 떨어져 쇄골을 적셨고, 심장이 요동칠 때마다 혈류가 솟구쳐 요란하게 귓전을 희롱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코볼트에게 포위된다면 그대로 끝장이다.
더욱이 저체온증의 초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오늘 안에 탈출하지 못한다면.
모두 죽는다.
추위에 몸을 떨어가며 전진하기를 한참, 턱 아래까지 펄떡거리는 심장 탓에 시간 감각은 이미 망가졌다.
돌연 앞서 걷던 토드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으헉...!”
“코, 코볼트인가?!!”
“코볼트?!! 하익...!”
란스가 엉덩방아를 찧더니 내 허리춤을 붙들고 버둥거렸다.
곧 전방에서 안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괘, 괜찮네... 그냥 넘어진 걸세. 여기 뭔가 걸리적거리는 게 있어서 말이야...”
“.....”
찰팍.
발바닥에 와닿는 차가운 감촉.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미끈한 액체가 통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토드가 벽을 짚고 일어서며 읊조렸다.
“이건... 뭐지? 물은 아닌 것 같네만...”
“그냥 물웅덩이 아닌가?”
“고, 고형물 같은 게 잡히는데요...? 미끌미끌하고...”
“.....”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왔던 길에는 이런 게 없었어. 토드, 혹시 엉뚱한 길로 온 거 아냐?”
“그, 그럴 리가... 이 길이 틀림없을 걸세...!”
“혹여나 길을 잘못 든 거면 큰일인데...”
더듬더듬 만져보니 단단한 물체가 잡혔다. 기다란 막대기가 안쪽으로 말려 있는 모양새. 동일한 방향으로 휘어진 수많은 조각... 이건...
갈비뼈다.
“으아악!! 시, 시... 시체...!!”
나이 든 모험가가 주저앉으며 질겁했다. 이내 살점 덩어리를 떨리는 두 손으로 부여잡고 오열한다. 그 역시 이 물체의 정체가 뭔지 깨달은 모양.
“아, 아이고!! 서, 설마 자네인가...?!! 어쩌다 이런... 으흐흑....”
일전에 통로로 뛰어들었던 모험가는 코볼트에게 사지가 뜯겨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차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 천장에서도 뚝뚝 핏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아하니 산 채로 저항하다 잡아먹혔겠지.
모험가의 주검을 끌어안은 채 비탄에 빠진 노인과 애석하게 시선을 돌리는 두 사내를 보니 참담해졌다. 불과 몇 시간 전 공터에 모여 인사를 주고받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잠깐.
...인사를 주고받을 때?
불현듯 번뜩이는 섬광이 뇌리를 스쳤다.
“시체! 다들 시체를 뒤져봐!!”
“시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이걸...?”
돌연 소리를 지르자 당황한 란스가 물어왔다.
바닥을 더듬으며 대꾸했다.
“이 사람 흡연자였지?”
지하수로에 들어오기 전, 남자가 잎담배를 피워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독한 대마 냄새에 코가 시큰거렸던 것도. 기분 탓이겠지만 지금 이 통로 어디선가도 그 메케한 연기가 스멀스멀 풍겨오는 듯하다.
“그, 그런데 그게 왜...”
“그럼 소지품 속에 부싯돌이든 성냥갑이든 뭐라도 가지고 있겠지! 다들 흩어져서 찾아. 발견하면 곧바로 얘기하고.”
“아, 알겠네...!!”
곳곳에 산재한 뼈 무더기를 파헤치자 자그마한 살점 조각들이 손톱 사이로 파고들었다. 낭자한 혈흔이 흥건하게 옷을 적셨고, 자각하기 시작한 혈향에 코가 비뚤어질 지경이다.
통로를 헤메어 온 실바람에 몸이 식을 무렵, 필사적으로 사체를 뒤지던 란스가 외쳤다.
“차, 찾았다...! 이, 이거 부싯돌 맞지 도란?”
“어디 한 번 줘봐.”
그가 피범벅이 된 가죽 주머니를 건네왔다. 천옷에 문질러 손을 닦은 뒤 그 안에 집어넣자 작은 알갱이 두 개가 잡혔다.
그 두 물체를 맞부딪히니 작은 불똥이 일었고, 어두컴컴한 통로가 찰나 화해졌다.
파스슥..!
미약한 불꽃이 피어오를 때마다 사내들의 입가에 희망이 서렸다.
*
어렴풋한 불똥에 의지해 지하를 헤쳐나가던 도중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잠시 시선을 맞추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나갔다.
두 번째 수로에 다다르자마자 예비 횃불을 사람 수만큼 떼어내 점화했다.
부싯돌을 몇 번 부딪히자 성공적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화르르르!
“좋아! 어떻게든 나갈 수 있겠구먼...!!”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살았어!! 이제 우린 살았다고 도란!!!”
“그래, 일단 이것 좀 놓고 얘기해.”
부싯돌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천으로 된 주머니 안에 있었더라면 피에 젖어 제구실을 못 했겠지.
횃불을 수로 내부에 드리우자 익숙한 정경이 드러난다. 가로막힌 철창과 큼지막한 물길, 조금 전까지 내가 썼던 작대기와 깨져나간 타일 등.
작은 불길에 얼어붙은 손발을 녹이고 있자니 토드가 앞길을 재촉했다.
“자 어서 나아가세, 몇 번 사용했던 횃불이라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네.”
“뭐라고? 그걸 왜 이제 말하는가! 이러고 있을 시간에 빨리 나갈 생각이나 할 것이지...!”
“가자, 도란.”
각자 횃불을 움켜쥐고 통로를 나아갔다. 추위와 어둠으로부터 해방되니 발걸음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코볼트가 나올 기미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출구와 가까워질수록 타오르듯 했던 불안도 사그라들었다.
란스가 여유롭게 허리를 펴며 물었다.
“이제 마지막 수로도 얼마 남지 않았네... 도란, 넌 나가서 보수 받으면 뭐부터 할 거야?”
“나? 일단 뭐라도 좀 사 먹은 다음... 옷이라도 하나 장만해야지.”
어디까지나 제대로 급여를 받는다면 말이지만.
모험가 두 명이 죽었다. 원래대로라면 보수는커녕 징계를 면치 못했을 테지만, 상대가 코볼트 킹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녀석이 지하수로를 빠져나와 활개를 치고 다녔다면 더 큰 인명피해가 나왔을 테니까.
어쩌면 조기에 놈을 식별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여금을 지급해 줄지도 모른다.
곧 통로 너머에서 물소리가 들려오자 할아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아까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고맙네 도란.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지금쯤 코볼트 배 속에 있었을 테지. 돌아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의 활약을 길드에 전하도록 하겠네. 아카이아 길드라고 했던가?”
“네, 감사합니다 토드 씨.”
“그나저나 자네 정말 F랭크가 맞는가? 아무리 봐도 F급으로는 안 보인다만...”
“그냥... 사정이 좀 있습니다.”
“알겠네... 내 더 묻지 않도록 하지.”
그는 내 목소리에서 불온한 낌새를 짐작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마지막 수로로 발을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자, 거의 다 도착했네. 이제 저기로 나가기만 하면 출구일세.”
토드가 물길 너머를 가리켰다. 벽돌을 쌓아 아치 형태를 이룬 통로는 내 눈에도 낯이 익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하수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막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어...? 토드 씨 여기 막혀있는데요?”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럴 리가... 어...?”
“.....”
통로 안쪽이 잔해더미로 봉쇄되어 있었다.
분명 오늘 아침에 지나왔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더군다나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저, 저기도..!”
우리가 방금 빠져나온 경로를 제외한 모든 통로가 막혀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모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황하던 찰나
푸확!!!!!!
등 뒤 할아범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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