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5화 (5/375)

〈 5화 〉 지하수로

* * *

[005] 지하수로 #3

살점이 흩날렸다.

뿜어나온 핏줄기가 투구를 적셨고, 또 흘러내렸다.

깨져나간 두개골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코볼트 킹은 조명이 미치지 않는 구석에서 우릴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튀어나와 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 거대한 그림자가 덮친 자리에는 스산한 핏자국과 주인 잃은 횃불만이 뒹굴었다.

이윽고 횃불이 발치에 멈추자 놈이 그에 매달린 오른팔을 떼내어 손에 쥐고 터트렸다.

한 박자 늦은 비명이 울려퍼진다.

“으아아아아악!!!!”

“어, 어떻게... 여기까지...”

­.....

­씨익.

란스가 검을 떨어뜨리며 주저앉음과 동시에 코볼트 킹이 기괴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돌바닥에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퍼졌고, 그보다 높은 포효가 공동을 뒤덮었다.

이윽고 칼날의 떨림이 채 멎기도 전에 놈이 우리가 막 빠져나온 통로를 들이받자 돌무더기가 무너져내렸다.

그걸로 끝.

더 이상 퇴로는 없다.

란스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고, 토드는 기대도 안 했다.

나 또한 피로에 젖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춥고 비좁은 지하통로를 몇 시간씩 헤집어왔으며 살기 위해 곤죽이 된 사람 사체를 뒤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제 출구가 코앞이다.

하지만 놈은 나타났다. 우리가 이 장소로 올 걸 예상하고.

마치 처음부터 손바닥 위에 있었는 듯, 완전히 농락당했다.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모루 위 시뻘겋게 달아오른 격노를 단조했다.

그래, 어차피 무력하게 당할 바엔­

“야.”

­쿠오?

도약했다.

압축했던 두 다리의 힘을 일순간에 폭발시켰다. 쏜살같이 돌바닥을 박차고 질주한다.

­쿠오오!!!

내가 먼저 덤벼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두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놈이 곧바로 발톱을 들어올려 대비했지만 나는 이미 지척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울긋불긋한 근육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다가간 순간­

­푸확!!!

굵직한 종아리에 일섬을 박아넣었다.

즉각 놈이 괴성을 지르며 발톱을 휘둘렀기에 뒤로 뛰어 회피했다.

힘줄을 끊어 놓을 예정이었던 목표와는 달리 가죽을 살짝 베는 데 그쳤으나 내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해볼 만해.”

도저히 못 이길 상대는 아니다.

속도라면 내가 미세하게 우세하다.

다만, 주의해야 할 건 놈의 지능. 우리의 경로를 예측해서 미리 대기할 정도의 지성을 갖춘 놈이다.

짧은 찰나에 분석을 마치고 질주했다.

“하아압!!!”

­쿠오오오!!!!

우하단. 놈의 거구 아래로 치밀었다. 곧바로 상단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쇄도해왔으나 더욱 가속해 들러붙었다. 녀석이 발등을 차올려 측면으로 회피했고, 잠시 경직된 사이 인대에 칼날을 박아넣었다.

­퍼석!!!!

­쿠아아아아악!!!!

재도약. 휘몰아치는 궤적을 전진해 넘겨냈다. 지면을 굴러온 돌멩이는 침착하게 검면을 내세워 빗겨냈다. 툭 불거진 타일 조각을 박차고 튀어올랐고, 조잡한 철검으로 옆구리를 베었다.

녀석이 머리를 들이받아 떨쳐내 보지만­

“.....”

역습.

가죽 샌들로 미간을 밟고 후방으로 뛰어넘었다.

매끄럽게 허공을 가르며 칼자루를 내리긋자 묵직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놈이 등허리를 부여잡고 몸부림친다.

­쿠오오오오오....!!

“아프냐?”

칼날에 묻은 피를 떨쳐내자 코볼트 킹의 안구에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협소한 지하수로에서만 일생을 보내온 놈이 강적을 만나봤을 리 만무하다. 상처다운 상처를 입어 본 적도 드물 터.

하지만 곧 내가 유효타를 먹일 수단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쇼트 소드를 예의주시했다.

놈이 앞다리를 휘저으며 덤벼든다.

­쿠르르륵...!!!

첨예한 발톱이 난폭하게 공동을 가로지르자 살벌한 파공성이 귓전을 스쳤다.

냉철하게 그 광경을 시야에 담으며 검을 추켜올린다.

은빛 호선이 몰아쳤기에 고개를 숙였다. 큼지막한 이빨이 덮쳐들었기에 더욱 자세를 낮췄다. 횃불에 비친 그림자가 불안하게 흔들렸고, 바닥을 스치며 치솟아온 뒷다리를 어거지로 틀어막았다.

이윽고 내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놈이 덮쳐왔지만,

허리를 비틀어 흘려내고 놈의 옆구리에 칼날을 쑤셔박았다.

­푸확!!!

­쿠오오오오오오!!!!!!!!

“.....”

할 수 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놈의 전신을 시야에 담으며 도약했다. 코볼트 킹 또한 포효를 지르며 돌격해왔다. 그의 공격 하나하나엔 짙은 살의가 끼어 있었지만, 극도로 민감해진 감각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가능케 했다.

찰나, 조급해진 놈이 앞발을 휘둘러 크게 내려찍자 즉각 지면을 굴러 피하고 뛰어올랐다. 바닥을 박차고 쇼트 소드를 횡으로 휘두르니 튼실한 허벅지에 실선이 그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쿠오오오오오오!!!!!!!!

“.....”

돌연 코볼트 킹이 물러서서 몸을 웅크렸다. 검붉은 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오른다. 한계에 다다른 활시위처럼 그 거체에 긴장이 축적되었다.

벌써 몇 번이나 봐왔던 자세. 이미 숱하게 겪었던 공격.

무릎을 구부렸다. 두 다리에 체중을 실었다. 언제든지 반응할 수 있도록 대비했고,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교차한 순간 극한으로 수축한 근육을 터트리며 비약했다.

“하아아아압!!!!!”

­쿠오오오오오오!!!!!!

두 형체가 격돌하자 포화처럼 거대한 굉음이 수로에 작렬했다.

“큭...!”

바닥에 엎어진 채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검을 짚어 흔들리는 두 다리를 지탱했다. 환부를 틀어쥐자 손가락 사이로 꿀럭거리는 핏물이 새어나온다.

방금 일격으로 다소 피해를 입긴 했지만 상관없다.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자 쇠창살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는 거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은 겨드랑이 아래에 생긴 절상에서 무시 못 할 정도의 선혈을 내뿜으며 비틀거렸다.

제대로 먹혔다.

­쿠아아아아아아!!!!!

놈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마구잡이로 발톱을 휘둘러왔다. 나는 냉철하게 거리를 벌리며 회피하는 데 집중했다. 동맥을 끊었으니 녀석은 점차 둔해질 터, 출혈은 생명을 갉아먹고 손발을 차게 만든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놈의 발톱이 점점 예리함을 잃어갔다.

애먼 돌무더기를 내려찍는 코볼트 킹을 관망하며 미소지었다.

이대로,

이대로만 가면...

“....!!”

돌연 공기가 뒤바뀌었다.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금까지 분노로 들끓던 새빨간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고, 무차별로 날뛰던 그의 시선에 이지가 내려앉았다.

경종이 울렸다.

뭔가 일어나려고 한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극한으로 가속된 사고가 맹렬히 요동쳤다.

놈은 큰 상처를 입었고, 무언가를 준비 중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공격과는 다르다.

대체 무슨 수를 남겨둔 거지?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들이찬 느낌. 허나 생각을 멈추는 순간 진다.

어떠한 공격에도 대비할 수 있게끔 검을 중단으로 내세운 순간­

­콰과과과과과과과!!!!!!!

놈이 돌진했다.

내 후방으로.

“뭐...?!”

놈이 향한 방향에는 란스랑 토드가 있었고,

“씨발!!!!!”

그 앞길을 막아서자 성대하게 벽에 처박혔다.

­쿨럭.

각혈했다. 목구멍 너머로 치미는 핏물을 왈칵 게워냈다. 머리가 깨질 듯하고, 숨을 쉴 수가 없다. 전신의 세포가 불타오른다.

고통스럽다.

벽에 파묻혔던 몸이 허물어지자 피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그나마 투구 덕에 즉사는 면했지만, 이젠 그 또한 시간 문제다.

놈이 서서히 다가온다.

칼집을 버팀목 삼아 간신이 기어올랐다.

“이 씹새...”

­콰아아아앙!!

말을 마칠 새도 없었다. 놈이 앞발을 휘두르자 대기가 파열했다. 구르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일격. 등 뒤 돌벽에 아로새겨진 거대한 상흔을 보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전황이 바뀌었다.

­쿠오오오오!!!!

놈이 맹렬하게 몰아붙였다. 비대한 앞다리를 무자비하게 휘둘러온다. 팔다리를 전력으로 쥐어짜 회피하지만,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내 검이 놈을 포착하는 빈도수는 줄어만 간다.

­쿠득...!!

“시.. 발...”

쇼트 소드를 내질렀으나 지방과 피로 점철되어 무뎌진 칼날은 가죽을 뚫지 못했다. 놈은 그런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넝마가 된 누더기 아래로 깊은 상처들이 늘어갔고, 한 발자국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턱.

등 뒤로 차가운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흉악하게 불거진 주둥이가 뒤틀리며 내게 작별을 고한다.

놈의 송곳니가 내 머리통을 물어뜯고자 다가온 순간­

­슈확!!!

비장의 한 수.

그 안면을 향해 전심전력을 다해 검을 던졌다.

손아귀를 벗어난 검은 경이로운 속도로 놈의 미간을 향해 육박했고,

핏발선 안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꾸르르르륵...! 꾸륵...!!

은빛 궤적을 남기며 날아간 철검은 녀석의 볼을 스치고 작은 핏방울을 흩뿌리는 데 그쳤다.

그렇게 마지막 수단은 사라졌다. 노골적인 비웃음이 머리 위에서 흘러나온다.

검을 잃은 검사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

그래,

정말로 내가 검을 잃어버렸다면.

­......!!!

놈의 가슴팍에 칼날이 꽂혔다.

“이 좆같은 새끼.”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씹새야.”

결정타를 먹일 이 순간을.

­푸화아아악!!!

칼자루를 비틀자 시뻘건 핏줄기가 뿜어나왔다. 코볼트 킹의 심장이 위치한 자리에는 다소 익숙한 날붙이가 박혀있었다. 놈을 란스의 장검이 떨어진 장소까지 유도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부그르르륵.

녀석이 주둥이에서 피거품을 뿜어대며 쓰러지자 그 머리채를 붙잡고 목을 베어냈다. 타일 틈새를 타고 지그재그로 흘러간 핏줄기가 수로를 포도주색으로 물들인다. 움푹 찌그러진 투구에서는 비릿한 혈향이 피어올라 코끝을 맴돌았고, 은빛 도신은 피로 점철된 강철 특유의 흉흉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날뛰던 놈이 지금은 내 발밑에 누워 있다. 오싹할 정도의 희열이, 전율이 등골을 타고 오른다.

“한 건 했네... 다들 무사해?”

고개를 돌리자 수로 구석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란스와 토드가 보였다. 다 큰 남정네들이 연인처럼 얼싸안는 모습에 절로 실소가 자아진다.

토드가 벌벌 떨며 물었다.

“그, 그... 그 코볼트 킹을 해치운거요..? 형씨 혼자서...?”

“뭐래 처음부터 다 봤으면서. 빨리 챙길 거 챙기고 가자.”

전신이 고통을 호소했다. 전투의 긴장이 가시자 억눌렸던 통증이 한 번에 몰아닥쳤다. 상당히 위태위태한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란스가 주춤주춤 일어서며 코볼트 킹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건 어떡하지?”

“그러게.. 곤란하네...”

평소 같았으면 들개처럼 달려들어 소재를 갈무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도저히 자신이 없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환부를 지혈하며 고민하고 있자니 토드가 내 근처까지 다가와 읊조렸다.

“그러면 토벌 증거로 일단 그 머리통만 가져가는 게 어떻겠나? 나머지는 날이 밝자마자 사람을 불러 꼭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네.”

“뭐, 그러면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그를 오롯이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는 전부 짊어지고 나갈 수 없다. 게다가 코볼트는 상당히 흔한 마물인지라 나같이 생계가 급한 사람들 말고는 해체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물론 녀석은 특수 개체인 만큼 일반 코볼트보단 값이 나갈 테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마어마하게 비쌀 것 같지는 않다.

“아, 그 전에 잠깐...”

한 부위만 빼고.

놈의 발톱을 떼어내기 위해 시체로 향했다. 나를 몇 번이나 궁지로 몰고 간 부위. 이건 분명 돈이 될 것이다.

전리품을 얻어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떴지만,

“...염병.”

애석하게도, 코볼트 킹의 발톱은 대부분 오랜 교전 중에 위용을 잃고 한낱 부속물로 전락해 있었다. 표면에 잔뜩 금이 간 발톱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분명 조금 전에는 내 검격을 수십 번이나 받아내고도 멀쩡했었는데....

아쉬움에 고개를 드니 저만치서 토드와 란스가 모험가 시체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아예 곤죽이 되어버렸군... 안됐네...”

“모험가 패만 가져가죠. 나머지 뒷수습은 나중에 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합세. 그나저나 통로를 틀어막은 저 돌무더기를 좀 치워야겠는데... 아, 자네는 쉬고 있게. 이건 우리가 알아서 하겠네.”

“...감사합니다.”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간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