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지하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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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지하수로 #4
“아파아아아아아아앗!!!!”
“참아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옷!! 살려주세요오오오오오옷!!!!!”
“다 큰 남자가 엄살은...! 앗! 거기 다리!! 다리 꽉 붙들고 계세요!!!”
“정신나갈것같애애애애햇!!!!!!”
지하수로를 빠져나온 지 닷새.
도시가 발칵 뒤집혔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성벽 내부에서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충격적이지만, 이번엔 단순히 그에 그치지 않고 코볼트의 상위종마저 등장했으니까.
이에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가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코볼트 킹은 토벌 난이도 C급. 그 말은 즉, 최소한 C등급 모험가가 다수 모여야 큰 피해 없이 놈을 격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허나 내 랭크가 어딘가.
F랭크 모험가가 단신으로 코볼트 킹을 격파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일파만파로 뻗어나갔지만, 당사자가 잠적해버린 탓에 무성한 추측만 붕 떠버렸다.
“...한가하네.”
얼마 만의 휴식일까.
창밖으로 행인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병상에 누워 있자니 굽 낮은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에 울려퍼졌다.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투구를 뒤집어쓰자 커튼이 젖혀지며 낯익은 사제 한 명이 백은발을 살랑이며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도란님,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요?”
“아... 네,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아리엘 님.”
“...제가 예전부터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렸죠. 어떻게 매번 그리 다치고 오시는지... 이번에는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고요.“
“흐흐....”
“웃을 일이 아니라고요 정말...”
한밤중, 란스에게 업혀 치유소의 대문을 두드렸을 때 나는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상이었다고 한다.
아리엘이 치유의 신 아가사 신전의 부속 병동에서 일해온 지도 제법 되었지만, 여태껏 봐 온 환자 중에 이렇게까지 심한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고 할 정도니 말 다 했지.
물망초처럼 투명한 벽안으로 상태를 점검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음... 이 정도면 이제 퇴원해도 되겠네요. 그래도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니까 무리는 하지 마세요.. 아, 치료비는 아카이아 길드에서 지불한다고 했으니 걱정 마시고요.”
“네, 이번에도 고마워요. ...그런데 오늘은 조금 한가해 보이시네요? 평소 이 시간대면 항상 바쁘게 뛰어다니고 계셨을 텐데.”
“아, 인근 마을에서 대규모 던전이 발견됐다던데, 혹시 모르고 계셨어요?”
“던전이요?”
“네, 그래서 지금 모험가 길드들이 서로 앞장서서 파견을 보내느라 난리도 아니에요. 덕분에 환자들도 부쩍 줄어들었고요. 다들 베라스틴 밖으로 나가 있으니...”
“...어쩐지.”
던전이라.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귀동냥으로는 많이 들어봤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로 가득한 장소라고 했던가. 만약 고대 유물이라도 발견하는 날엔 그야말로 신세 피는 거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확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옛 문명이 남겨놓은 함정과 정체도 모르는 마물이 똬리를 틀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에 코볼트들이 나왔던 지하수로도 일종의 던전이라고 부를 수 있으... 려나?
침상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
“...혹시 그 새로 발견됐다는 던전에 대해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 그게... 저도 그냥 인근 옆 마을에서 발견됐다고만 들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도란님은 이제 길드에 가실 예정이라고 하셨죠? 아마 거기서 더 자세히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아리엘 님.”
“아.. 혹시 지금 바로 길드에 가시나요?”
“네, 왜요?”
“그러시면 간단한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퀘스트를 맡기려고 하는데 지금은 자리를 비우기가 곤란해서... 대신 좀 부탁드릴게요. 여기 의뢰서예요!”
“네, 잠시 봐도 될까요?”
그녀가 내민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반듯한 글씨체로 쓰인 의뢰서에는 발주처와 기한, 퀘스트 내용 등이 상세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짚으며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어디 보자... 의료 목적으로 사용할 환각초 채집.. 환각초야 서쪽 숲에 가면 구할 수 있고.. 적정량은 열 뿌리. 보수는... 10페니...?”
고작 약초채집 의뢰가 10페니나 한다고?
“아리엘 님, 이 의뢰 그냥 제가 해도 될까요?”
“정말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지금 던전 때문에 의뢰를 수주할 모험가들이 없어져서 곤란했거든요! 도란님이 맡아주신다고 하시면 수수료도 필요 없으니 11페니로 해드릴게요.”
“뭐 이런...!!”
후광이 비쳐왔다.
안 그래도 궁핍한 나날을 보내는 내게 이 제안은 단비나 다름없다.
인근 마을에서 발견됐다는 던전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어차피 최소 파티 인원을 채우지 못하면 입장 허가조차 안 내줄 테니 내겐 그림의 떡일 뿐.
아리엘의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맡겨만 주십쇼!! 증손자부터 고조할아버지까지 약초란 약초 씨는 죄다 말려놓고 오겠습니다!!!”
“예...? 그건 곤란...”
“다녀올게요!!!”
그녀가 변심하기 전에 재빨리 치료원을 뛰쳐나왔다.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다채로운 신전과 성직자들이 즐비한 중앙 구역을 지나 동쪽으로 향했다.
“...역시 성실하게 사니깐 이런 복도 다 오는 거지.”
근 일주일 만에 나와 본 거리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가도는 이리저리 쏘다니는 행인들로 혼잡했고, 길가에 널린 노점에선 목청을 높여 흥정하는 장사꾼과 손님으로 고성이 끊이질 않았다.
팻말을 목에 걸고 호객해오는 아이들을 막 지나치려고 하던 차, 어디선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하게 돌아보니 란스가 노점 가판대 중 하나에 앉아 외팔을 흔들고 있었다.
“오, 이제야 돌아봤네! 잘 지냈어? 몸은 좀 어때 도란.”
“뭐야, 누군가 했더니... 나야 뭐 이제 완전히 회복했지. 그러는 넌 여기서 뭐 하는데? 상인 길드에서 견습으로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지금 던전 때문에 다들 난리도 아니잖아. 아는 선배가 일손이 모자란다고 해서 잠깐 노점 좀 봐주고 있었지. ...그 검은 잘 쓰고 있나 보네.”
란스가 내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을 눈짓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녀석의 물건이었지만, 내가 쓰던 쇼트 소드가 이번 일로 도신에 금이 가 회생 불가 판정을 받았기에 그가 선뜻 자신의 검을 내어주었다.
멋쩍게 칼자루를 거머쥐자 녀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잘 어울려. 그거 나름 좋은 검이라고? 왕도에 갔을 때 8실링이나 주고 산 거야. 앞으로 내 몫까지 잘 써줘.”
“고마워. 내가 이걸로 싹 다 조져줄게. ...거기 빨간 과일 몇 개 줘봐.”
“팔아준다면 나야 고맙지. 피로회복에 좋은 거야.”
란스가 말린 자두 비슷한 과일을 나뭇잎에 감싸 건네주었다. 한 입 베어 무니 시큼한 맛이 올라오는 게 썩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소금간조차 되지 않은 환자식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제대로 값을 지불하고 녀석과 작별한 뒤 말린 과일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모험가 길드 앞까지 도달했다.
살짝 설레는 심정으로 스윙도어를 젖히고 들어가자, 낑낑거리며 산더미 같은 서류 뭉치를 나르던 밝은 주홍빛 머리의 접수원과 눈이 마주쳤다.
“카렌님! 저 왔어요!”
“아...! 도란 씨! 마침 잘 와줬어요!!”
그녀가 내게 짐을 몽땅 떠넘기더니 거칠게 팔을 잡아끌었다.
“응?”
“잔말 말고 따라와요!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
잠자코 서류뭉치를 들고 지하창고를 왕복하길 세 번쯤, 카렌은 날 데리고 층계를 오르더니 건물 2층에 위치한 작은 응접실에 밀어넣었다.
영문도 모른 채 기다리고 있자니 곧 문이 열리며 그녀가 차가운 냉수를 들고 나타났다.
“후우... 고마워요 도란 씨, 이번에는 덕분에 살았어요. 혼자서는 막막하던 참이었는데...”
컵을 받아들며 물었다.
“던전 때문이에요?”
“네, 인근 지역에서 던전이 발견된 탓에 길드 전체에 비상이 내려졌어요. 무턱대고 모험가들을 보낼 수도 없으니 위험요소를 일일이 따져봐야 하는데, 매일매일 새로운 정보가 홍수처럼 몰려드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에요. ...게다가 요 며칠 사이 야근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카렌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지속되는 업무에 상당히 지쳤는지 눈가엔 옅은 그늘이 져 있다. 아마 한창 바쁘겠지.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하다며 푸념하곤 했으니까.
품속에서 말린 과일을 꺼내 건넸다.
“이거 오는 길에 노점에서 사 왔는데 카렌님 드세요. 피로회복에 좋다네요.”
“네...? 이건 코코 열매네요. ...제가 좋아하는 과일인데...”
“좋아한다니 다행이네요. 전부 드세요.”
“.....”
카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새침하게 내뱉었다.
“흐음... 도란 씨도 제법이시네요, 근데 그거 아세요? 모험가와 접수원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으면 처벌받는 거. 물건으로 환심을 사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네, 네?! 전 그럴 의도는...”
“알아요. 도란 씨가 그럴 배짱이 없다는 것쯤은. 그래도 이건 고맙게 받도록 할게요. 안 그래도 새콤한 게 땅기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웬일이에요? 도란 씨가 선물도 다 하고.”
“아... 뭐 이번에 신세 진 것도 있고 하니까요.”
사실은 단순히 오는 길에 산 과일이 입에 안 맞았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빈말은 아닌 게, 이번엔 카렌 덕을 워낙 많이 봤다.
그녀가 유능하게 뒷수습을 해준 덕에 모험가 세 명이 죽었음에도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고, 코볼트 킹의 소재 매각도 도맡아서 해주었다.
치료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날 위해 새 옷을 가져다주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하지만 내 온화한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씁쓸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아니요. 감사받을 일은 하지 않았는걸요...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해요. 접수원으로서 위험요소가 있는지 더 꼼꼼하게 확인하고 퀘스트를 드렸어야 했는데...”
”에이 제가 벌써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도시 안에서 몬스터가 출몰할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요. 결과적으로 저는 돈도 벌었고 몸도 이제 다 나았는걸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요... 그럼 이제.. 코볼트 킹의 소재에 대한 매각이 끝났어요. 여기 전표가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세요.”
“드디어...!!”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다리고 기다려 마지않은 순간. 병상에 누워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이날이 오기만을 고대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카렌이 내민 양피지를 확인하자
“어디 보자 도합이... 11실링!?! 카렌님 이거 진짜에요?!!!”
“네, 이빨하고 발톱에 꽤 높은 금액이 책정됐어요. 소소하지만 포상금도 섞여 있고요. 어제는 몇몇 모험가가 저한테 직접 와서 코볼트 킹을 쓰러뜨린 F랭크 모험가가 대체 누구냐고 묻는 일도 있었어요.”
“세상에...”
전표를 흩어보니 이빨과 발톱이 8실링, 포상금이 2실링, 그리고 나머지 잡다한 부위를 합쳐서 1실링이 조금 넘는다.
이런 거금이면 염원하던 장비를 맞출 수 있다.
칼은 란스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우선 투구를 수리한 뒤 방어구를 물색해 봐야지. 어쩌면 방풍 랜턴을 하나 장만하거나 검을 손질할 때 쓸 기름을 보충하는 것도 괜찮겠다. 적어도 이번 겨울 동안은 추위 속에서 노숙하지 않아도 될 테고.
그런 행복한 생각에 젖어있자니 속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찌르르 올라와 카렌을 끌어안았다.
“카, 카렌니이임!!!”
“떠, 떨어지세요!!”
한 대 얻어맞은 후, 얼얼한 뺨을 매만지며 냉수를 들이켜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도란 씨, 근데 그 나머지 발톱은 정말로 파실 생각 없으세요?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매각해드릴 수 있는데...”
“아, 이건 따로 쓸 데가 있어서요.”
수통과 함께 매달아 놓은 발톱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카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지만, 곧 테이블에 놓인 빈 물컵과 전표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란 씨, 그럼 저도 이제 업무로 돌아가 볼게요. 코코 열매는 고마웠어요. 오늘도 퀘스트를 받아갈 생각이신가요?”
“아, 이번에는 그냥 갈게요. 오늘은 따로 부탁받은 일이 있거든요.”
“잘됐네요. 사실 조금 걱정하던 참이었거든요.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조금 더 쉬세요.”
“...고마워요.”
나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시에서 내 처지를 알고도 도와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눈웃음을 지어 화답하고는 정산 금액을 받아들고 길드를 나섰다.
아리엘의 의뢰를 하기 전, 먼저 해야만 할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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