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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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카야 #1
모험가 길드를 나오자 이른 아침 햇살이 눈가에 내리쬐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태평하게 가도를 거닐었다.
“...날씨 한 번 좋네.”
일주일 가까이 침대에 누워만 지낸 탓에 몸이 근질근질하다.
지금 당장 아리엘의 의뢰를 하러 성벽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그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상업지구가 위치한 도시 서쪽으로 향했다.
활기 넘치는 도시 내부의 정경을 훑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대장간이 가득 늘어선 거리가 나왔다. 장식 하나 없이 투박한 굴뚝에선 쉴새 없이 시커먼 연기가 뿜어나왔고, 사방에서 철덩이를 벼리는 단조질 소리가 드높게 울려퍼졌다.
비릿한 쇠의 향기에 콧잔등을 찡그리며 계속 발걸음을 재촉하자 회반죽을 잔뜩 덧바른 건물들 사이로 비좁은 골목길이 나타났다.
천천히 그 안으로 발길을 옮기자 물기를 머금은 흙내가 물씬 풍겨온다.
“...어지간히도 오래된 구획인가 보네..”
구불구불한 통로를 홀리듯이 나아가자 어느새 목표했던 장소에 도달했다. 발 디딜 틈 없이 협소한 마당은 낡은 나무 울타리로 구분 지어져 있었으며, 그 너머 허름한 건물에는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론디니움 대장간]이란 글귀가 쓰여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그마한 놋쇠 종으로부터 맑은 음색이 흘러나왔다.
딸랑..
“...아무도 없나.”
폐업 직전의 초라한 외관과는 달리 실내는 제법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못 박힌 벽면에는 온갖 무구들이 광을 낸 채 진열되어 있었고, 용광로와 모루가 보이지 않는 걸로 미루어 금속을 제련하는 장소는 따로 있는 듯했다.
빈 카운터에 방치된 육포를 흘겨보며 외쳤다.
“거기 누구 없어요?”
.....
“...화장실에라도 갔나.”
재차 불러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무구들로 향하던 찰나
“....!!”
전율했다.
첨예하게 날 선 무구들.
벽에 진열된 병장기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내포했다. 방어구는 고사하고 싸구려 한손검만 휘둘러온 내가 보기에도 최고의 명품이란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 만약 이 중 하나가 숙련된 검사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코볼트 킹 따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었을 터.
오묘한 광채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바라보자니 유독 한 검이 눈에 띄었다. 일체의 장식 없이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새까만 그 장검은 존재만으로도 이 모든 무기들을 압도하는 듯했다.
조명이 빛을 잃고 그림자들이 속삭였다.
무심코 칼자루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
“나라면 그 검에 손대지 않을걸세.”
“.....!!”
황급히 팔을 되돌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돌아보자 카운터 뒤에서 짜리몽땅한 남성이 걸어나왔다.
저 굵직한 팔다리와 여름철 덤불처럼 덥수룩한 턱수염은 기억에 있다.
“...드워프십니까?”
“그래. 드워프는 처음 보나?”
“일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만.. 너무 오랜만이라 실례했습니다. 베라스틴에도 드워프가 살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보다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건 무슨...”
고개를 돌려 검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아까까지의 분위기가 마치 거짓말인 것마냥 얌전히 놓여 있었다. 천장 중앙에 매달린 방풍 랜턴이 깜빡이거나 그림자가 내게 말을 거는 둥 기이한 일이 벌어질 조짐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드워프 영감이 치를 떨며 말했다.
“말 그대로네. 끔찍한 저주를 받은 마검이지.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좋을걸세.”
“왜 그런 물건을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다 그런 사정이 있다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용건은 보아하니 그 발톱 때문이겠지?”
“..네 맞습니다. 이걸 베이스로 단검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장인답게 눈썰미가 상당하다. 허리춤에 매달아두었던 발톱을 건네주자 그가 무심하게 받아들더니 이리저리 둘러보며 읊조렸다.
“코볼트 킹의 발톱이로군... 크기를 보아하니 자네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 컸겠고. 흠... 나쁘지 않아, 용케도 이런 놈을 잡았어. 그 검으로 쓰러뜨린 겐가?”
그가 턱짓으로 내 검을 가리키며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숨을 끊은 건 이 검이 맞긴 한데.. 도중까지는 다른 검으로 잡았습니다. 그 칼은 금이 가서 버릴 수밖에 없었고요.”
“그랬겠지. 싸구려 철검이 이런 놈이랑 싸우고도 멀쩡했을 리 없네. 발톱은 이게 전부인가?”
“몇 개 더 있었지만 나머지는 처분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보니 죄다 부서져 있더군요. 분명 싸울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자네 마나를 쓸 줄 모르는군.”
“네? 네, 근데 그게 왜...”
“표면에 미약하게나마 마력의 흔적이 남아있네. 마나로 강도를 높인 거겠지. 놈이 죽으면 마력도 흩어질 테니 평범한 발톱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고. 이건 그중에서도 유난히 마나의 기운이 깊게 스며들어 단단해진 걸세.”
마나라...
그것만 쓸 수 있으면 지금쯤 이 고생까진 안 하고 있었을 텐데.
남몰래 옷자락을 움켜쥐자 드워프 영감이 호탕하게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다.
“뭐, 이 정도 물건이면 그럭저럭 하급 모험가가 쓸 만한 단검 하나는 만들 수 있겠군! 어디 한 번 맡겨보겠는가? 가격은 5실링이라네.”
“5실링...”
비싸다.
미친 듯이 비싸다.
11실링을 벌었지만 이 돈으로 방어구도 맞추고 숙식도 해결해야 한다. 하물며 지금은 막 가을에 접어든 시기. 길가에 낙엽이 지고 곧 소복한 첫눈이 논밭을 뒤덮을 때가 되면 의뢰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농부들이 일을 안 하니 당연히 시장이 주춤할 수밖에.
평소라면 발걸음을 돌리며 뭇내 아쉬운 마음을 달랬을 테지만, 벽에 걸린 무구들을 보고 난 터라 자꾸만 미련이 남았다.
그만큼 이 드워프는 숱한 대장장이들과 차원이 다르다.
최대한 간곡하게 물었다.
“..제가 돈이 별로 없어서 그런데... 조금만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단 1실링이어도 좋으니까...”
“안 될세.”
“제발 부탁드립니다...”
“...자네는 흥정에 영 소질이 없구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가격을 낮추어 파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질 못하거든. ...정 싫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대장간을 찾아보는 게 나을 거라네.”
“...제길.”
동전 지갑에서 피 같은 5실링을 건네주었다. 예상치 못한 지출에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 생명을 담보로 삼는 모험가들에게 무장이란 최소한의 안전줄과도 같으니까.
드워프는 잽싸게 은화를 낚아채 세어보더니 흡족하게 주먹을 움켜쥐고는 대뜸 나머지 한 손을 내밀었다.
“좋아, 돈은 확실히 받았고... 모험가 패 좀 보여주겠나?”
“모험가 패는 왜...”
“그래야 신분을 증명하든가 하지 않겠는가. 도적이나 현상 수배범한테 무기를 쥐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잘못된 사람의 손에 들어간 무구만큼 아까운 게 없지 않나.”
“...여기요.”
품 안에서 나무패로 된 신분증을 꺼내자 드워프가 돌연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뭐야 자네 F급이었나?”
“네, 혹시 무슨 문제라도...”
“흠...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F등급 모험가가 코볼트 킹을 잡다니 제법이군. 싹수가 좋은 청년이야. 그래, 이 녀석은 내가 특히 신경 써서 만들어 주도록 하지!! 보너스로 칼집까지 공짜로 만들어 주겠네! 기간은 사흘 정도 걸릴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구려.”
“.....”
설마 칼집까지 돈을 따로 받아낼 생각이었나.
모험가 패를 도로 집어넣으며 흘겨보자 그가 짐짓 헛기침하며 읊조렸다.
“크흠.. 흠... 그나저나 자네 방어구는 필요 없나? 장비가 꽤 빈약해 보이는구먼. 그 투구는 이제 도저히 못 써먹겠어.”
“이건... 다음번에 왔을 때 수리하도록 하죠.”
드워프 영감이 내 맨얼굴을 보면 낭패다.
그 뒤로는 간단하게 손 치수를 잰 뒤 대장간을 뒤로하고 나왔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거슬러 가도에 접어들자 가로수 및 그늘에는 옹기종기 모여앉아 수다를 나누는 아낙네들과 봇짐을 늘여놓은 보부상들로 북적거렸다.
개중 아무 노점을 골라잡아 약초채집용 망태기를 하나 구입하고 부단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중, 발치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에 고개를 드니 청명한 하늘 아래 드높게 솟은 서쪽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늘 날씨 하나는 좋단 말이지.”
그날그날 기후에 따라 하루 의뢰를 망쳐버릴 수도 있는 내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다.
팔을 잡아끄는 호객꾼들을 뿌리치고 성문을 나서자 광활한 농경지가 펼쳐졌다. 달구지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노새를 뒤쫓다 보니 언덕 아래로 울창한 잡목림이 도사렸다. 그 초입에 다다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기분 좋게 살랑이는 나뭇잎들 사이로 드리운 햇살이 투구 위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숲 특유의 송진 향은 언제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물론, 이 세계에서 산림은 매우 위험하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와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모르는 마경의 장소. 도시 인근은 영주성에서 파견 나온 기사들이 정기적으로 마물을 토벌한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르다.
지구에 있었을 시절부터 아버지의 미친 기행으로 온갖 오지에서 생존을 일삼아왔던 나다. 다섯 살 무렵에는 자연물을 응용해 덫을 놓는 방법을 배웠고, 남들이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기에는 본의 아니게 작은 나이프 한 자루만 가지고 정글을 헤쳐나온 적도 있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숲은, 여름방학마다 놀곤 했던 할머니의 시골집만큼이나 친숙하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로 오고 나서 약 일 년간을 숲에서 홀로 생존했던 전적도 있으나 그때 겪은 죽음의 위기를 일일이 열거하자면 선술집에서 공짜 맥주를 석 잔은 넘게 얻어먹고도 남겠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떨쳐내고 오솔길을 따라 나아가던 차, 나무 밑동 아래 희끗희끗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오, 코쿤 버섯이잖아?”
누에고치처럼 둥글게 말린 버섯. 비싸지는 않지만 잡상인에게 팔면 소소하게나마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거다. 아마 여기 자라난 것들을 모으면 2페니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누가 뺏어갈세라 재빨리 망태기 안에 집어넣고 일어서자 내심 뿌듯했다. 약소하게나마 이런 부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약초채집 의뢰의 장점이니까.
드문드문 보이는 짐승 발자국들을 따라 숲 안쪽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자 그만큼 녹음도 짙게 우거졌다. 아리엘이 부탁한 약초는 응달에서 주로 자생하는 바, 이대로 가면 손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슬슬 셔츠가 땀에 들러붙어 올 즈음
“...여깄다. 제대로 찾아왔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옹기종기 자라난 약초 군생지를 발견했다. 특유의 색상과 외견으로 판단하건대 의뢰서에 적힌 환각초가 틀림없겠지.
주변 나무에서 벗겨낸 껍질을 삽 대용으로 흙을 파냈다.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뽑아내자 인근에 자라난 다른 약초들도 눈에 들어왔다.
“오...! 이건 단삼이잖아?! 뇌삼초도 있고... 정력에 이것만 한 게 없지. 내가 비싸게 팔아주마 흐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터질 듯 부풀어오른 망태기를 보자 내 마음도 부풀어올랐다. 적어도 오늘 저녁에 먹을 보리빵에는 따뜻한 수프 한 접시 정도쯤 곁들여 먹어도 되겠지. 가끔은 사치도 필요한 법이니까.
행복감에 젖은 채 가벼운 몸을 이끌고 돌아가려는 찰나
“...잠깐, 이게 무슨 냄새지...?”
어디선가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온갖 역겨운 것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악취.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고 냄새가 풍겨오는 진원지로 살금살금 다가가자...
“저건... 고블린...?”
쿠륵...
키르르륵...!
볕이 잘 드는 공터 한복판,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와 그 주변을 에워싼 세 마리의 초록 몬스터가 보였다.
놈들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뛰쳐나갔다.
“뒤져라아아앗!!!”
키엑?
쿠르륵?!
두 팔을 휘둘렀다. 놈들의 육체를 사선에 담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고블린의 어깻죽지를 가르자 검붉은 선혈이 잔디 위를 뒤덮었다. 그대로 손목을 잡아당기며 상반신을 걷어차니 놈은 반 토막이 난 채 수풀 너머로 날아갔다.
즉사!
“고블린...! 네놈들이 기어코 여기까지...!!”
분노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자 나머지 두 고블린이 흠칫 뒷걸음질쳤다. 놈들은 그제야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지 깨닫고 멈칫하더니, 이내 달아나고자 허겁지겁 등을 보였다.
물론 내가 그 꼴을 용납할 리 없지만.
퍼석!!!
한 놈의 뒤통수를 붙들어 돌덩이에 내다꽂자 둔탁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그대로 힘을 싣자 손가락 사이로 질척한 뇌수가 스며나왔고, 바위 아래로 질척한 살점이 흘러내렸다.
투구에 튄 덩어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고개를 드니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버린 고블린이 엉거주춤하게 물러났다.
허나 애석하게도 돌멩이를 투척해 발목을 가격하자 놈은 괴성을 지르며 자빠졌다.
두려움으로 탁해진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마물이 두 가지 있는데.”
저벅.
“첫째가 고블린이고.”
저벅.
“둘째도 고블린이야.”
서걱!!
목을 절단하자 놈은 채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툭 발치로 굴러떨어진 머리통을 걷어차자 공터 주변 나뭇가지에 정확히 내걸렸다.
“셋째는 시발 고블린이고.”
검을 어깨에 짊어지고 천천히 발걸음을 되돌렸다. 바위에 기대어진 고블린 시체를 대충 밀어낸 다음 그 자리에 걸터앉았다. 바닥에 자라난 잡초를 한 움큼 뽑아 칼날에 묻은 피와 기름기를 닦아내자 시야 언저리로 잔혹한 참상이 내비쳤다.
딱히 특별한 외도를 품고 한 행동은 아니다. 그저 개인적인 원한이 있을 뿐.
“후우... 서쪽 숲에 고블린이 출몰하는 건 처음 알았네. 하여간 이 새끼들은 돈도 안 되는 주제에 여기저기 없는 데가 없다니까...”
놈들과의 질긴 악연을 회상하고 있노라니 불현듯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먹은 거라곤 말린 과일 한두 개가 전부였지.
반쯤 엎어진 놋쇠 냄비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그래도 저건 아니지.”
저걸 먹었다간 분명 탈이 날 거다.
허나 이상적인 사고와는 달리 나는 어느새 냄비 앞에 도착해 있었고, 그 안에 찐득하게 눌어붙은 검은 액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매캐한 향이 훅 끼쳐온다.
“윽... 이거 설마 위험한 건 아니겠지...? 고블린이 연금술을 할 줄 안다는 건 금시초문...”
꼬르르륵....
“.....”
하는 수 없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근 일주일간 먹은 거라곤 밍밍한 환자식과 시큼한 과일이 전부. 거부감보단 식욕이 앞섰다. 그저 속이 뒤집히지 않도록 빌 수밖에.
고블린들의 음식은 이전에도 먹어봤으니 괜찮을 거다.
입김을 불어 식힌 뒤 냄비를 통째로 움켜쥐고 면갑 틈새로 들이붓자
“쿨럭쿨럭!! 쓰벌...! 이, 이게 뭐야...?!!”
성대하게 내뿜었다.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맛. 내 짧은 어휘로는 묘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래도 굳이 꼭 비유하자면...
시장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생선의 머리통을 한데 모아 스무 시간 가량 졸이면 이런 맛이 나오지 않을까?
입가에 묻은 액체를 닦아냈다. 잠시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끼손가락을 찍어 맛보았지만 즉각 구역질이 일었다. 나름 비위가 강한 편이라 자부했지만 설마 이 정도의 음식이 존재했을 줄이야.
이러니 고블린들도 안 먹고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지.
“...그래도 버리기에는 좀 아까운데.. 독도 없는 모양이고.”
이 스튜를 포기하기엔 내가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 기구하다. 이미 더한 것도 먹어본 데다가 지금은 한푼 한푼이 소중한 상황이니까.
“에라이 씨... 모르겠다. 코 막고 먹으면 조금 낫겠지.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고도 하니까...”
눈 딱 감고 들이키자 입안 가득 역한 맛이 느껴졌다. 식도를 타고 흘러가는 걸 손가락으로 짚을 수 있을 정도로 목구멍이 따끔거렸고 위액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크헉...!! 끅! 먹지.. 말걸 그랬나...”
곧바로 후회하며 반쯤 찌그러진 냄비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던 찰나, 우연히 고개를 드니
“.....”
새빨간 두 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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