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8화 (8/375)

〈 8화 〉 카야

* * *

[008] 카야 #2

“....!!!”

황급하게 자리를 박차며 검을 주워들었다.

정지된 시간 속, 필사적으로 사고했다.

이런 숲속에서 다른 사람과 조우하는 건 대체로 좋지 않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깊이 들어올 리 없다. 상대는 어느 정도 무력에 자신이 있는 자. 도적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모험가라고 한들 별반 다를 게 없다.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선 때때로 누구보다 악랄한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게 모험가니까.

즉, 이곳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일뿐더러 모든 상황에 대비해 감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아무리 먹을 거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고는 하더라도 누군가가 코앞까지 다가오는 기척을 내가 못 읽었을 리 없다.

즉, 상대는 나보다 월등히 강한 강자.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

첫 일격에 승부를 본다.

지면을 딛고 도약해 칼날을 내지른 순간­

“.....”

못 박힌 듯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한 소녀가 루비를 빼다 박은 듯한 눈동자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홍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시간이 정지했다.

풀잎을 간질이던 바람이 땅 아래로 숨었고,

타오르던 모닥불이 열기를 잃었다.

지저귀던 새들이 침묵했다.

몸은 혈색을 잊었다.

그만큼 어여뻤다.

“무슨...”

모험가 생활을 시작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나조차 눈앞의 인물이 범상치 않다는 것쯤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공터에 기울자 소녀의 눈동자에 황금색 모래사장이 담겼다. 공기 중에 떠돌던 꽃가루가 빛을 반사해 뺨 위를 아름답게 수놓았고, 물결치는 푸른 머리칼은 뱃머리에 튀는 물보라와 닮았다.

더없이 완벽한 그 조형 앞에선 공터 곳곳에 돋아난 야생화조차 소리와 향기를 잊었다.

머리 위, 둥글게 말린 뿔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자니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 아래 연한 입술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심.”

“..아, 네...? 지금 뭐라고...”

“..점심...”

“점심? 설마...”

그제서야 그녀의 시선이 엎어진 냄비에 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덤으로 나에게 활을 겨누고 있다는 것도.

몸에 열기가 돌기 시작한다.

“자, 잠깐...! 그러니까 이게 대체...!!”

“..도둑...”

“자, 잠깐...! 전 도둑이 아니라...!!”

“.....”

“저, 정말이에요!! 지금 당장 해명할 테니 일단 그 활 좀 내리고 얘기...!”

­뿌드득...

“젠장!!!”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으나 내 결백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증인이라고 부를 만한 건 고블린뿐이지만, 개중 한 마리는 목이 잘린 채 나무 위에 내걸려 있고 나머지는 머리가 으깨지거나 하반신만 남긴 채 수풀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도둑이란 누명을 뒤집어써도 변명할 길이 없는 상황. 평소라면 적당히 대꾸하고 자리를 모면했겠지만, 지금은 그조차 여의치 않다.

내 모든 직감이 눈앞의 이 소녀가 어마무시한 괴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등을 보이는 순간 아니, 일말의 적의라도 내보이는 순간 급소가 꿰뚫리고 말 거다.

천천히 장검을 내려놓으며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 이 탕약이 당신 거였어요...? 전 틀림없이 고블린이 만든 건 줄 알고...”

“...튜.”

“네?”

“..탕약이 아니라... 스튜...”

“.....”

아니 방금 그게 스튜였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고의는 아니었어요... 고블린들이 에워싸고 있길래 당연히 걔네들이 만든 줄 알았거든요... 좀 더 확인해보고 행동했어야 했는데...”

“....”

“저, 저...! 대가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약소하게나마 이거라도...!”

허겁지겁 허리춤을 뒤석거렸다. 순간, 활시위를 붙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다. 가죽 벨트에서 망태기를 떼어낸 다음 거칠게 매듭을 풀어내자 마른 흙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개중 새하얀 버섯을 집어올리며 외쳤다.

“이, 이건 코쿤 버섯이라 하는 건데 고기랑 같이 구워 먹으면 엄청 맛있어요...! 만약 취향에 안 맞으신다면 잡상인한테 파셔도...! 이, 이렇게나 잔뜩 있어요...!!”

이걸 건네주면 오늘 저녁으로 수프를 먹는 건 포기해야겠지만 어디 목숨만 하겠는가.

하지만 소녀는 활을 내릴 기미가 전혀 없어 보였다.

재빨리 다른 약초를 꺼내들었다.

“마, 만약 버섯이 싫으시다면... 이, 이건 어때요?!! 조금 쓰긴 하지만 물에 달여 마시면 혈액순환에 아주 좋은 악초거든요...! 어디 가서 웃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건데...”

“....”

설마 이걸로도 만족하지 않을 줄이야.

오늘은 여관도 포기하고 마구간에 몰래 숨어들어서 자야겠다.

“저 그럼 이건...! 요건 뇌삼초라는 풀인데 엄청 귀한 약초거든요...! 어지간해서는 한 번 보기도 힘들고 진짜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건데 특별히 드릴게요.. 이거까지 안된다고 하면 진짜 더 드릴 게 없어요. 제발 이걸로 봐주시면...”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 체면 따위나 챙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눈앞의 소녀가 아무리 앳된 외견이라고 하더라도 실상은 몇 살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강대한 마력은 세포의 노화를 늦추는 만큼 이 세계에서는 겉모습만으로 나이를 유추할 수 없다는 걸 이미 몹소 체험한 적이 있으니까.

입안이 비쩍비쩍 말라오는 걸 느끼며 애걸복걸했지만, 소녀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한계치까지 늘어난 활시위가 불길하게 요동친 순간­

­툭!

“....!!”

시야가 트였다.

코볼트 킹과의 전투 이후,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던 면갑의 이음매가 끊어져내리며 그 아래 감추어져 있던 얼굴이 세간에 드러났다.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도.

표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검은... 머리...?”

지금껏 무표정을 고수했던 소녀의 입술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그 반응은 여지껏 내가 겪어왔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

천천히 검을 주워들고 일어나 입을 열었다.

“...죽여.”

“네..?”

“죽일 거면 죽이라고.”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더 이상 적개심을 억누를 필요도 없다.

순식간에 돌변한 태도에 소녀는 곤혹을 감추지 못하며 반 발자국 물러났다.

심장에 겨누어진 화살촉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노려보자 돌연 그녀가 자그맣게 속삭여왔다.

“....름.”

“뭐?”

“당신.. 이...”

“뭐라는 거야. 크게 좀 말해.”

“....”

찰나­

순식간에 소녀가 종적을 감췄다.

마치 내 앞에 나타났을 때처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숲속 자그마한 공터엔 불과 얼마 전까지 팽배했던 긴장감도, 끈적하게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던 불길한 기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불타는 저녁노을을 두른 듯했던 소녀도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타다만 장작불만 눈치 없이 틱틱거릴 뿐.

“...꼭 귀신한테 홀린 것만 같네. ...그치?”

나무 끝에 걸린 고블린 머리통이 내 꼴을 비웃었다.

*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그림자에 쫓기듯이 숲을 벗어났다.

죄수처럼 고개를 숙이고 행인들을 거슬러 나아갔다.

싸구려 여인숙의 가장 싼 방을 빌렸다.

그저 널빤지를 이어붙여 놨을 뿐인 벽에 등을 기댔다.

낡아빠진 돌쩌귀가 신음하자 초등학교 입학도 못 했을 법한 꼬마아이가 작은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그 손에 1페니짜리 구리 동전 하나를 쥐여주고 돌려보냈다.

두 평 남짓 비좁은 여관방, 가구 하나 없이 삭막한 풍경은 고해소를 연상시킨다. 그나마 위안 삼을 거라곤 오래된 나무 창틀에서 새어들어오는 달빛이 유일했다.

대야 안 찰랑이는 수면에 보름달이 담기자 천천히 투구를 내려놓았다.

그 은빛 물살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며 고해했다.

검은 머리칼.

그 이면에 담긴 과거를.

[거, 검은 머리...?! 아, 악마의 환생이다. 저놈을 죽여!]

[붙잡아서 화형을 시켜야 해!]

[우리 애한테서 떨어져!!]

[으아아악!! 아, 악마!!!]

[엄마아아아!! 살려줘!!!]

[저주받을 악마여!! 우리 마을에서 썩 꺼지게!!!]

[불태워야 해!!!]

[.....]

[안녕? 잘 부탁해! 내가 이 파티의 리더야!]

[더러운 악마의 환생 주제에...! 어딜 모험가들 틈에 섞이려 하다니!!]

[너 때문에 동료가 죽었어!!! 네가 악마의 자식만 아니었어도!!!]

[꺼져!!!]

[...아저씨, 아저씨는 왜 맨날 여기 있어요? 집 없어요?]

[아저씨 어디 아파요? 아저씨는 왜 맨날 얼굴에 붕대를 두르고 있어요?]

[왜 아프지도 않은데 붕대를 두르고 다녀요? 헤헤, 아저씨 되게 특이하다.]

[아저씨 배고파요? 이거 아빠 몰래 가져온 건데, 전 배부르니 이거 아저씨 드세요!]

[악마의 자식!!!!!]

[아, 이거요? 그냥 넘어져서 다쳤어요. 저도 아저씨처럼 붕대 둘렀으니 이제 친구죠?]

[에이 그러지 말고~ 저 친구 별로 없단 말이에요.]

[음...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이상하데요. 아저씨도 제가 이상해 보여요?]

[앗... 조금 더 쓰다듬어 주세요... 헤헤... 누가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건 처음인데... 되게 기분 좋은 거였네요.]

[악마!!!!]

[이 도시에서 썩 꺼져!!!]

[으아아아아악!! 아, 악마가 나타났다!!!]

[헤헤...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계단에서 굴렀어요. 저도 참 멍청한 거 있죠?]

[오늘도 그 얘기 해주세요! 운디네가 도끼를 금하고 은으로 바꿔줬다는 얘기 말이에요!]

[음... 검은 머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어른들 말로는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던데요?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요?]

[오늘따라 아저씨 조금 이상해요... 어디 아파요...?]

[네? 선물이요? 헤헤... 선물을 받아 본 적은 처음인데... 고마워요....]

[아, 아니에요...! 잘못 말한 거예요! 저희 부모님이 생일마다 매번 선물을 사주시는걸요? 진짜예요!]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요?]

[...조금만 더 있고 싶어요.]

[제발요... 이야기해달라고 투정도 안 부릴게요.]

[아저씨...]

[.....]

[더러운 악마놈!!]

[저, 저놈이 틀림없습니다...! 저 새끼는 악마의 끄나풀이라고요!!]

[...정말로 네놈이 어젯밤 방앗간에 들어가 물건을 훔쳤느냐?]

[....악마의 말을 믿을 수는 없다. 이 자를 매우 쳐라!]

[흐흐... 그러니깐 누가 검은 머리로 태어나래? 덕분에 고마웠수다.]

[.....]

[.....]

[.....]

[.....]

[.....]

[갈색 머리의 소녀? 잘 모르겠는데.]

[누구? 그런 사람 모르니 썩 꺼지게!]

[내가 꼬맹이나 찾고 있을 정도로 한가해 보이냐? 비켜!]

[...형님 이놈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건 어때요?]

[거기 서!!! 야!! 다들 저 새끼 잡아!!]

[갈색 머리의 소녀? 음... 워낙 흔해야지... 저기 빈민가 쪽이다 뒤져보시구려.]

[...저쪽 집으로 가보게나.]

[거기 누구요. 그 건물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소.]

[흠... 그 소녀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나?]

[후우...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네, 괜찮겠나?]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는 말게. 흠흠... 사실은 그 소녀 아비가 지독할 정도로 술을 밝히는데.. 매번 도박에 돈을 탕진하고 돌아올 때마다 그 아이에게 손찌검을 한 모양이야... 얼마나 심했으면 오밤중에 동네 주민이 나서서 뜯어말릴 정도라고 하더군...]

[지, 진정하게...! 나도 나중에야 전해 들은걸세...! 그 새끼? 흠...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네. 빚에 쪼들려 어딘가로 도망간 모양이지... 아니 그건 아니고... 그 소녀는 대들보에 목을 매단 모양이야. 쯧쯧.. 어린 것이 안타깝지... 자, 자네 갑자기 어디 가는가!!]

[......]

[......]

[....왜 살려줬는지 말인가? 그럼 죽을 게 뻔히 보이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죽을 걸 알고 들어갔단 말인가? 흐흐... 자네 재밌는 소릴 하는군.]

[어디, 나와 함께해보는 건 어떤가? 내 이름은 말톤이라고 한다네.]

뜨거운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