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카야
* * *
[009] 카야 #3
무력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사흘이란 시간이 흘러갈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쥐 죽은 듯 허름한 여인숙에 틀어박혀 시간을 죽였다.
나흘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이른 새벽, 망가진 투구를 부여잡고 하늘 아래 쫓기듯이 론디니움 대장간으로 향했다.
딸랑.
“.....”
이번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벽에 내걸린 등불이 어렴풋한 빛을 발하자 실내에는 말라비틀어진 채 방치된 육포와 무수한 병장기 등 며칠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개중 가게 구석 상자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투구 중 하나를 재빨리 뒤집어썼다.
“후우...”
머리를 가린 뒤에야 비로소 안도가 된다.
지금까지 머리칼을 삭발해 흑발을 감추려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으나, 결국 헛수고에 그쳤다. 지구의 면도날처럼 날카롭지 않은 내 쇼트 소드로는 깔끔하게 두발을 잘라낼 수 없었고, 말톤의 단검을 빌려 이발을 해도 스님처럼 두피 아래 파묻힌 모발의 색을 감추는 건 불가능했다.
팔다리의 체모는 긴 옷으로 덮어 어찌어찌 가렸다고는 하지만.
틀어막혔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빠져나갔던 색채가 되돌아왔다. 귓전을 맴돌던 웅성거림이 가라앉았고, 지난 며칠간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손떨림이 잦아들었다.
한결 여유가 깃든 시선으로 벽에 내걸린 무구들을 둘러보던 차 카운터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드워프 영감이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훔치며 뒤뚱뒤뚱 걸어나왔다.
“...이런 꼭두새벽에 대체 어떤 놈이... 아, 자네 왔는가?”
“...다시 봐서 반갑습니다. 마침 투구를 좀 둘러보던 참인데 이게 마음에 드는군요. 입이 드러나 있어서 벗지 않고도 음식물을 먹을 수 있고... 얼마인가요?”
“그거? 내 기준으론 실패작이긴 하지만 뭐... 자네가 쓰기에는 적당할 테지. 가격은 3실링이라네.”
“3실링...? 단검 주문제작이 5실링이었는데 어떻게...”
“그건 자네가 소재를 들고 왔으니 그런 게지. 이래 봬도 그 투구는 나름 구하기 어려운 금속으로 제작한 걸세. 나로선 다시 녹여서 제련하면 되니까 자네가 안 산다고 해도 손해 볼 것도 없고.”
“.....”
망설였다.
투구에 3실링이나 지출해버리면 이후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방어구를 마련하는 건 물론이고 곧 다가올 겨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할 터, 이렇게 얇은 옷 한 벌만 가지고는 어느 날 자다가 불시에 얼어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래도 투구만은 꼭 튼튼한 놈으로 하고 싶은데...
“...제가 가진 게 별로 없어서 그러는데 조금만 더 깎아주실 순 없으신가요..? 대신 다른 장비도 여기서 맞추겠습니다. 수중에 남은 돈이 5실링 정도밖에 없어서... 꼭 부탁드립니다.”
“흐음... 어차피 5실링이면 괜찮은 방어구를 사기도 어려울텐데... 알았네, 단검 일도 있고 하니 잠시 기다리게.”
드워프가 턱을 매만지며 내 행색을 훑어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가게 안쪽에서 가죽 케이스에 담긴 단검과 케케묵은 레더아머 한 벌을 들고 나타났다.
“자, 이게 자네가 주문했던 단검일세. 강철을 첨가해 특수 처리를 했으니 썩 쓸만할 게야. 그리고 이 레더아머는... 지인이 버리려던 걸 받아온 건데, 조금 오래됐긴 하지만 지금 자네한텐 충분하겠지. 그 투구까지 해서 5실링으로 해줄 테니 가져가시게.”
“...감사합니다.”
“그래, 내가 웬만해서는 이렇게까지 안 하는데 자네 싹수가 좋아 보여서 나름 선심 쓴 거야. 어디 한번 가기 전에 확인해 봐.”
“네, 그럼...”
조심스럽게 단검을 들어올렸다. 가죽으로 마감된 손잡이를 움켜쥐고 덮개를 벗기자 은백색으로 빛나는 칼날이 드러난다. 약 한 뼘 반 정도 되는 도신은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 첨예했으며, 내 손에 맞춘 칼자루는 마치 오래전부터 써온 양 위화감 없이 감겨들었다.
드워프 영감에게 양해를 구한 후 허공을 향해 휘두르자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었다.
그 무시무시한 완성도에 감탄하고 있자니 드워프 영감이 호탕하게 내뱉었다.
“어때, 끝내주지? 널리고 널린 단검들하고는 비교가 불가할 거야. 내 특별히 손 좀 썼지. 대충대충 하는 건 성미에 안 맞거든. 두 번까지는 공짜로 수리해 줄 테니 날이 심하게 상하거나 하면 가져오게.”
“...감사합니다.”
그간 복잡했던 심경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듯하다. 이 정도 품질이라면 5실링이란 거금을 들인 게 아깝지 않다. 아마 다른 대장간에 맡겼더라면 이런 물건이 나오지 않았겠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레더아머와 은화 다섯 닢을 맞교환하고 뒤돌아서려던 차, 그가 내 등에 대고 외쳤다.
“다음번에 오면 건틀릿이나 각반부터 맞추게!! 자네한테 꼭 필요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존함을 안 여쭈어봤는데...”
“론디니움일세. 밖에 간판에도 쓰여 있지 않은가? 그럼 잘 가게나. 다음번에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무운을 비네.”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문을 젖혔다.
대장간을 나선 뒤에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 한산한 서쪽 가도를 거닐었다. 저 멀리 성곽 위로 터오른 여명이 도시에 내리깔린 땅거미를 걷어내자 거리에도 점차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분주하게 차양막을 펼치며 개점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지나 신전들이 몰려 있는 도시 중앙으로 향했다.
선선한 공기를 맞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치유의 신 아가사 신전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도 한눈에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는 지나가는 행인들로 하여금 절로 경외감이 들게 만든다.
정문을 지키는 성기사들에게 가볍게 묵례한 뒤 신전 옆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부속 건물로 들어서자 치유소란 글귀가 적혀진 안내판이 나왔다. 이미 질릴 대로 봐서 안면을 튼 경비원에게 인사하고 대리석 깔린 실내를 거닐고 있자니 별안간 등 뒤에서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다.
와락!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아리엘 님.”
”으음...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닌데요?“
”바닥에 다 비쳐 보였으니까요.“
”에이 이번에도 실패했네... 깜짝 놀래켜주려 했는데...“
아리엘이 손을 놓으며 탄식했다.
천천히 뒤돌아 그녀를 마주하자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투명한 머리칼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무심코 반해버릴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그 아래 열대의 물을 담은 듯한 청명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죄책감이 샘솟았다.
고개를 숙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아리엘 님.”
“네, 네?! 왜 갑지기 사과를... 호, 혹시 어디 다쳤어요? 지금 당장 치료해줄 테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조금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요. ...미안해요.”
의뢰를 받아 간 지 나흘이나 흘렀다. 혹여나 내가 늦게 온 탓에 곤란한 일이 생겼더라면 도저히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착잡한 심정에 허리를 숙이고 있자니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봐왔다.
“...괜찮아요, 딱 필요할 때 맞춰오셨으니까. 그러니 이런 일로 고개 숙이지 마요. ...다친 데는 없는 거죠?”
“...네, 부탁하셨던 약초는 여기 있어요.”
매듭을 풀어 허리춤에 매달아두었던 망태기를 건네주었다.
아리엘은 두 손으로 약초 주머니를 받아들고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온화하게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완벽하네요. 잔뿌리가 하나도 상하지 않았어요. 보통 다른 모험가들에게 의뢰하면 줄기가 중간에 꺾여 있거나 흠집이 나 있는 경우가 태반인데... 게다가 흙까지 말끔하게 털어서 주셨네요!”
“...별거 아니에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껏 내가 그녀에게 받아온 은덕에 비하면.
담담하게 시선을 피하자 아리엘은 그런 내 얼굴을 지긋이 들여다보더니 불현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도란님 투구 바꾸셨네요? 입원 중일 때나 식사를 할 때나 한사코 안 벗으려 하길래 굉장히 애착이 깊은 줄만 알았는데... 저도 한 번만 써보면 안 될까요?”
“.....”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알면서 왜 그래요. 이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제 얼굴을 궁금해하는 건 알겠는데, 보여줄 수 없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제대로 말해주신 적 없잖아요. 맨날 말 돌리기 바쁘고. ...저한테도 비밀로 할 만큼 중요한 거예요?”
“.....”
거칠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미리 생각해두었던 변명을 입에 담았다.
“...사실은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서 그래요. 어릴 적 화상을 입었거든요. 남들에게는 보여주기 싫은...”
“뭐야, 겨우 그거였어요? 그럼 지금 바로 벗어주세요!”
“네...?”
아리엘이 두 팔을 쭉 뻗으며 맑은 웃음꽃을 피웠다.
무심결에 뒤로 물러서며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방금 제가 한 말 듣긴 한 거예요...? 보여줄 수 없...!”
“도란님이야말로 제가 누군지 잊으신 건 아니죠? 저 신성력 쓸 수 있는 거 아시잖아요! 어디 한 번 진찰해 보고 고칠 수 있는 흉터면 치료해드릴게요! 아, 이거 원래 엄청 비싼 건데... 어디 가서 말하지 마세요...?”
“아, 안 돼요...!”
“괜찮다니까요. 그동안 환자들은 질릴 대로 봐와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흉터를 보고 도란님을 꺼리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잖아요, 더한 모습도 봐왔고... 저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시죠?”
“윽...!”
그때의 일은 암묵적 동의하에 서로 함구하기로 했을 텐데.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보폭에 맞추어 뒷걸음질치던 찰나
“아리엘!!! 너 또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어디 갔어!! 당장 튀어나와!!!”
“...헛!! 아쉽지만 이제 가봐야겠어요! 여기 퀘스트 보수에요! 다음번에 만나면 느긋하게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해요. 그 칙칙한 투구도 좀 벗고!!”
아리엘이 장난기 다분한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 앞에서 이 투구를 벗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11페니가 아니잖아.”
손바닥 안에 담긴 은화를 내려다보았다.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새어들어온 죄악감이 내 가슴팍을 얼룩졌다.
*
털레털레 길을 걷던 도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모험가 길드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언제나처럼 스윙도어를 밀고 들어서자 다소 한적한 테이블에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는 접수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개중 익숙한 주홍 머리의 여인이 내 존재를 눈치채고 손을 흔들었다.
“아, 도란 씨!”
“...안녕하세요. 카렌님.”
“나흘만이네요! 몸은 좀 괜찮아... 투구 바꾸셨네요? 장비도 좀 변했고...”
“네, 이번에 정산받은 금액으로 구매했어요. 괜찮은 대장간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그나저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나흘만에 본 카렌은 제법 활기차 보였다. 표정이 한층 밝아진 데다가 머리카락에선 희미한 감귤 향이 풍기기까지 한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도란 씨가 코볼트 킹을 쓰러뜨렸잖아요! 도시 안에 출몰한 몬스터를 조기에 식별하고 격퇴한 게 공으로 인정받아 저한테도 성과금이 들어왔어요.”
“좋은 소식이네요. 카렌 님이 기쁘시다니 저도 기뻐요.”
선선히 입꼬리를 올렸다. 은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싫을 리 없다.
허나 어째선지 카렌은 내 미소를 목격하자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목덜미를 매만지며 겸연쩍게 읊조렸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도란 씨는 웃음이 너무 헤퍼요.”
“아, 죄송해요. 혹시 기분 나빴어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녀가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뒷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내 답답한 듯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 것보다 왜 오늘이 되어서야 나타난 거예요? 아무리 제가 한동안 쉬엄쉬엄 하라고는 했어도 나흘 동안 코빼기도 내비치지 말라는 건 아니었는데. 설마 코볼트 킹을 잡았다고 해서 기고만장해지신 건 아니죠? 쌓인 의뢰가 넘쳐난다고요. 도란 씨에게 주려고 일부러 괜찮은 퀘스트들을 선별해 놓기까지 했는데...”
“아 그게... 일이 좀 있었거든요. 그거랑 관련해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카렌님 혹시 지금 시간 있어요?”
“아 네, 잠깐 정도라면... 이제 모험가들이 대부분 던전으로 출발해서 꽤 한산해졌거든요. 응접실로 가서 얘기할까요?”
“아니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숲속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는데 혹시 카렌 님이 알고 계실까 해서...”
베라스틴에서 모험가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반년. 같은 길드의 모험가들은 물론이고 다른 길드라고 하더라도 웬만한 강자들의 면면은 파악하고 있다. 그래야 유사시에 대처하기 용의할 테니까. 사방에 적이 많은 내 입장으로선 당연한 처사다.
하물며 여러모로 눈에 띄는 그 소녀의 경우 한 번이라도 얼굴을 봤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게나 강한 사람에 대한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도 이상하고.
허나 그 소녀의 인상착의를 털어놓기 시작하자 카렌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날 빤히 올려다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서, 설마... 그 사람은...”
“...누군지 알겠어요? 아마 하이랭커 중 한명인 것 같은데... 이 근방에선 도통 들어본 적이 없어서...”
“자, 잠깐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그녀가 다급하게 손목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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