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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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카야 #4
영문도 모른 채 우악스러운 손길에 붙들려 층계를 올랐다.
거의 던져지다시피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카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더니 문을 닫고 가림막을 세웠다.
묵직한 걸쇠를 걸어 잠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여기 문 잠가도 되는 거였어요...?”
지금껏 길드에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지만, 응접실 문이 잠기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곳은 1층 중앙 홀에서 훤히 올려다보이는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아마 접수원들의 신변 보호 때문이겠지. 밀폐된 공간 안에서 모험가들이 어떤 마음을 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태연한 모습을 가장하며 물었지만 카렌은 내 말에 담긴 속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되물어왔다.
“왜요? 절 덮치시기라도 하시게요?”
“아, 아뇨...! 제가 어떻게...!!”
“장난이에요. 도란 씨한테 그럴 담력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지금은 그보다 그때 봤다던 분의 인상착의를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만나게 된 경위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고요.”
“아 네...”
떨떠름한 뒷맛을 삼키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숨길만 한 내용도 아니거니와 담당 모험가의 안위를 신경 쓸 의무가 있는 그녀로서는 꼭 알아야 할 정보니까.
고블린들을 쓰러뜨린 것과 냄비 안에 담긴 스튜를 먹어치웠다는 것, 그녀가 내게 활을 겨뉘었고 종국에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까지 풀어놓자 카렌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이내 한참을 망설이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분... 아무래도 S랭크이신 카야 님 같은데요...?”
“뭐... S랭크...? 에이 농담도...”
“.....”
“...진짜예요?”
그럴 리가.
그건 말도 안 된다.
모험가 등급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한다. 막 처음 칼자루를 쥐어본 초짜가 일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검귀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이 차이는 상위 등급으로 갈수록 현저해진다.
A등급이 최고의 영역에 도달한 천재들이라면, S등급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존재. 더 이상 랭크로 자리매김하는 게 불가능한 단계다. 그 강함은 흔히들 재앙에 비견되곤 한다.
신에게 가장 근접한 자들.
왕국조차도 그들을 관리하는 걸 포기하고 최대한 각자 떨어뜨려 놓는 게 고작이라고 하니.
이 나라에 있는 S랭크를 전부 긁어모아도 열이 채 안 될 텐데.
하물며 A등급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런 변방 도시에 S랭크라니...
카렌이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믿기 힘든 건 아시겠는데... 앳된 외견에 붉은 눈동자, 푸른색 머리칼에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뿔까지... 완전히 그분의 인상착의랑 일치해요. 더욱이 활을 주 무기로 다룬다는 점까지요.”
“아니 그래도 그건... 그냥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아요...? 대뜸 S랭크라니 너무 현실감이 없는데...”
“음.. 그게... 이건 비밀리에 하달된 내용 중 하나인데요...”
그녀가 문 쪽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손으로 가림막을 새운 채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S랭크 중 한 명이 빠른 시일 내로 이 도시에 방문할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었어요. 이번에 발견된 던전 규모가 상당하다 보니 조사 차원에서 한 명쯤은 파견 올지도 모른다고... 던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저희 베라스틴이니까요.”
“그런 뒷배경이... 그래서 S랭크라고 확신한 거예요?”
“네, 근데 던전이 발견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어서 건너뛰고 간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는데... 카야 님이었다고 하니 납득이 가네요.”
카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미심쩍게 물었다.
“...아니 근데 그 카야? 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그래요? S랭크란 것까지는 알겠는데... 카렌 님...?”
“....도란 씨가 타인한테 관심이 없는 건 이해가 가지만, 적어도 S랭크에 대해서는 알아 두세요.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 중 하나니까요. 음... 근데 그렇다곤 해도 카야 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긴 해요. 워낙 베일에 싸인 분이라.”
“그래요?”
“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건지 희한하게도 카야 님은 목격담조차 거의 없어요. 그나마 공개된 정보라면 발텐 길드 소속이고, 약 20년쯤 전부터 모험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일까요? 여러 신에게 축복을 받은 걸로 추정되고... 양 수인이란 건 도란 씨도 알고 계시죠?”
“네 뭐... 뿔을 봤으니까요...”
수인을 목격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 도시에서는 상당히 드문 편이라 내심 놀랐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그때의 장면을 상기하고 있자니 카렌이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려 화제를 되돌렸다.
“...지금 회상에 잠길 때가 아니라고요. 어쨌든 문제는 그분이 도란 씨의 얼굴을 봤다는 거잖아요.”
“...네 저도 그게 좀 마음에 걸려서... 제 머리를 보고 태도가 확 바뀌었는데.. 평소라면 그대로 죽여도 이상하지 않잖아요? 게다가 S랭크라면 윤리 의식도 희박할 텐데...”
“그렇긴 하죠... 저야 어렸을 때부터 고향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말도 안 되는 미신이란 걸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 그것도 S랭크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도란 씨를 죽였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해요.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헤쳐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니까요.”
“.....”
그녀의 말이 맞다.
몇 번 의뢰를 같이해온 파티원도 내가 흑발이란 걸 깨닫자마자 돌변해 칼날을 들이밀었을 정도인데 오만하기로 유명한 하이랭커들은 오죽할까.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거다.
내 머리칼을 보고도 담당 접수원을 자처해준 눈앞의 여자에게 새삼 감사하고 있자니, 불현듯 그녀가 따끔하게 손등을 꼬집었다.
“...근데 정말 도란 씨도 제정신이 아니네요. S랭크의 식사를 훔쳐 먹을 생각을 하다니, 목숨이 열 개라도 되세요?”
“아야야...! 말했잖아요 그건 사고였다고...! 그 상황에선 당연히 고블린이 만든 건 줄 알았지 S랭크가 요리한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다 자업자득이에요. 아니, 애초에 고블린 음식을 뺏어 먹으려 한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라고요. 만약에 그분이 도란 씨를 찾아오거든 그냥 갈 때가 됐구나 하세요.”
“무슨 그런 무책임한...”
“...이번 사건 그 어디에 제가 책임질 여지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드린 의뢰를 하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아, 그리고 S랭크에게 죽은 건 천재지변으로 취급되어서 보험금도 안 나와요. ...어차피 받아가실 분도 없겠지만.”
“제길...”
주먹을 움켜쥔 채 애꿎은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꽤나 억울한 상황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사회성도 결여되어 보이는 그 여자가 내 얼굴만 알고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무리일 테니까. S랭크가 그렇게까지 한가할 리도 없고.
...아마도.
“뭐... 그건 일단 둘째 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오는 게, 왜 저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까요?”
“글쎄요... S랭크의 속내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
한숨을 내쉬었다. 제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그녀가 돌연 태도를 바꿀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라면 훌훌 털어버리고 넘겼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언젠가 다시 조우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돌아버리겠네, 어쨌든 이건 다음번에 얘기하도록 하고... 혹시 추천하는 의뢰 있어요? 장비에 돈을 거의 다 써버려서 한동안 또 부지런하게 일을 해야 하는데...”
“아, 몇 개 선별해 놓은 게 있긴 해요. 근데 그 전에... 도란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으니 그분하고 먼저 얘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거예요. 대화에 열중하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저를 찾아온 사람이요?”
누구지?
*
“여어, 반갑군. 그동안 잘 지냈나?”
“...난 또 누군가 했더니.. 너였냐?”
“흠... 별로 달갑지 않아 보이는구먼? 오랜만인데 말이지.”
“어차피 매일같이 보는데 무슨... 요 며칠 안 본 거 가지고.”
말톤이 벌꿀주가 반쯤 담긴 잔을 내려놓으며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제법 간만에 본 녀석은 꽤나 말쑥해져 있었다. 킬러 호넷에게 찢겨버렸던 레더아머는 가볍고 견고한 퀼티드 아머로 바뀌어 있었고, 등에는 새로 산 흑철색 메이스가 반짝거린다.
뭐... 녀석은 나처럼 돈이 궁하지도 않으니 어련히 잘 살았겠지.
불편한 심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내뱉었다.
“나야 뭐 그럭저럭 지냈어. 너는 뭐... 물어볼 것도 없겠네.”
“물론이고말고, 내가 자네처럼 굶고 다녔을 리 없지 않겠는가? 흐흐... 그나저나 내가 없는 사이 제법 재밌는 일을 벌인 모양이더군. F급이 코볼트 킹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자자할세. 그거 자네 맞지?”
“무슨 근거로.”
“그게 아니라면 장비를 새로 맞출 금전이 어디서 낫겠나? 보아하니 내가 일러두었던 대장간에 들린 모양이군. 론디니움 그 대장장이 실력이 썩 좋긴 하지.”
말톤이 내 투구를 바라보며 눈웃음지었다. 엘프의 유려한 외견 탓에 매우 잘 어울린다는 게 매우 열받는다. 나이도 불명일뿐더러 그 보기 어렵다는 엘프가 이런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뭐하고 있는 건지 종종 의문일 때가 있지만, 나름 소중한 인연이다.
카렌에 더불어 내 정체를 알고도 곁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 중 한 명이니까.
탐탁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혹시나 또 약초채집 의뢰를 같이 하자는 거면...”
“약초채집? 흐... 멋없는 소릴 하는군. 내가 겨우 그런 거로 자네를 불렀다고 생각하나?”
“...그럼 뭔데.”
“그야 당연히 던전이지 않겠나. 다른 모험가들도 전부 떠나는데 우리라고 안 갈 수 없는 노릇이지.”
“던전...? 너 미쳤냐?”
눈살이 팍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게, 이미 이 도시 안의 모험가들에겐 나와 녀석에 대한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진 상태다. 전투 의뢰를 받으려면 최소 3인 파티를 결성해야 하는 바, 우리와 함께할 나머지 구성원을 찾으려 하다간 날이 새도 모자랄 거다.
하지만 녀석은 벌컥벌컥 잔을 들이키고는 테이블에 놓인 견과류를 권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크흐... 그거야 이 도시 사람이 아니면 문제없지 않겠는가? 길가의 돌멩이만큼이나 흔한 게 모험가들일세. 던전에 가면 남는 인원이야 발에 챌 정도로 있겠지.”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너도 알잖아, 나 예전에 정체를 숨기고 파티를 짰다가 탄로 나서 죽을 뻔한 거.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진짜... 그 새끼들 아무 망설임 없이 나한테 칼을 휘둘렀다니까?”
말톤이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야 자네가 안 들키면 되지 않겠는가? 투구 꽉 붙들어 매고 있으라고. 뭐, 만약 들통나면 으슥한 장소로 데려가서... 흐흐... 뭐, 자네한테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텐데. 그렇게나 뛰어난 전투 실력을 썩히다니 아깝군. ...던전 수입이 짭짭하다는 얘기 내가 했던가?”
“.....”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녀석의 말대로 고민이 되는 건 사실이다. 지구에 있을 때부터 다년간 숙달해온 수렵 솜씨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겪은 모종의 사건들 덕에 전투에는 제법 자신 있다. 그에 반해 모험가가 되고 나서부터는 사냥을 나설 기회 자체가 별로 없었지만...
무엇보다 던전에서는 일확천금을 얻는 게 가능하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갈등하고 있자니 녀석이 쐐기를 박았다.
“마침 좋은 의뢰가 있네. 오필리아 상단의 호위 임무인데 상인 세 명을 이번 던전이 발견된 메디올리눔 마을까지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마침 두 자리가 비네. 자네랑 내가 가면 딱 맞겠군.”
“...보수는.”
“2실링.”
“2실링?! 그 얘기부터 했어야지!!”
“...그래, 자네라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네. 그럼 여정을 꾸리도록 하지.”
녀석이 천천히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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