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상단 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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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상단 호위 #1
“그럼 잘 다녀오세요. 이번 의뢰도 정식 퀘스트로 등록해뒀으니 최선을 다해주시고요. 도란 씨는 F랭크라 한동안 의뢰를 수주하지 않으면 모험가 자격이 박탈당한다는 점 꼭 유념해 주세요.”
“걱정 마세요. 제가 애도 아니고...”
“차라리 그쪽이 낫죠. 도란 씨는 정말... 가는 곳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니까요. 같은 모험가라 하더라도 돈 앞에선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절대 방심하지 마세요. 특히 도란 씨는 더더욱.”
“뭐... 말톤도 있고 하니깐 어떻게든 되겠죠. 쟤 저래 봬도 대인전 하나만큼은 든든하잖아요.”
“...도란 씨를 잘 부탁드려요 말톤 님. 아, 그리고 방금 종합해 봤는데 그동안 공적이 꽤 쌓여서 앞으로 퀘스트 한두 개만 더 성공하면 E랭크로 승급하실 수 있을 거예요.”
“....!!”
무사히 돌아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카렌과 작별한 뒤 길드를 나섰다.
이른 아침 햇살에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며 말톤을 뒤따르던 도중, 커다란 봇짐을 등에 짊어진 채 어디론가 바삐 떠나는 모험가들을 시선으로 쫓으며 입을 열었다.
“야, 말톤. 근데 나 던전에 들어가는 건 처음인데 뭐 챙겨가야 해? 이것저것 있을 거 아냐. 식량이라던가...”
“듣자 하니 내부 규모가 상당하다더군. 다양한 생물군이 출몰하는 모양이니 그때그때 사냥한 짐승으로 끼니를 때우면 되네. 그래도 비상시에 배를 채울 수 있는 건량은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그 외에는 방수포나 끈 같은 노숙 용품이 필요하다네. 그건 내 걸 빌려줄 테니 나눠 쓰도록 하고... 의약품은 있겠지?”
“그래.”
다행히도 예전에 쓰다 남은 게 있다. 값비싼 약초와 소량의 성수를 배합해 만든 연고가. 재료가 재료인지라 평소 내 벌이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의 고가품이지만 아리엘이 다치지 말라며 챙겨줬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는데...
“무슨 일인가 도란? 출발 예정 시간에 맞춰 물품들을 구비하려면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네.”
“...그래, 서두르자.”
녀석과 함께 가도를 거닐었다. 부단하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유독 인구가 밀집된 구역이 나왔다. 오랜 비바람에 색이 바랜 표지판 너머로는 좁다란 통행로를 따라 해묵은 재래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 초입 부근에 다다르자 왁자한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들려온다.
“자자! 어서 옵쇼 모험가님!! 따끈따끈한 새 물건이 한창입니다!! 화끈한 사냥을 원하십니까? 여기 칼른베니아 제국에서 직접 공수한 나가의 심장이 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몬스터들이 냄새를 맡고 끝도 없이 몰려들죠! 몬스터 몰이 사냥엔 이만한 게 없습니다. 하나 어떠신가요?”
“오,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원래는 상당히 값진 물건이지만.. 이번만! 특별히! 단돈 20실링에 처분하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이 가격에 못 산다고요?”
“.....”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이 상품은 어떠신가요?! 이건 지코린의 발톱이라는 건데 몸에 소지하고 다니면 착용자에게 행운을 불러다 준다고들 합니다! 매일 몬스터를 사냥하느라 수고하시는 모험가님께 특별히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모시겠습니다!!”
“...얼만데요?”
“단돈 10실링입니다!!”
“.....”
매몰차게 돌아섰다.
아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시는 상인을 뒤로하고 걷자 여기저기에서 호객꾼들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심지어 아직 젖니도 채 빠지지 않은 꼬마들까지 여럿 섞여 있다. 이곳에 근로기준법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까.
여러모로 각박한 세계다.
품 안에 넣어둔 동전 지갑이 잘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부지런히 시장길을 나아갔다. 비상시 둔기로 활용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딱딱한 보리빵을 몇 덩이 챙긴 뒤 낡은 중고 천가방까지 짊어지자 비로소 제법 모험가다운 면모가 풍겼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성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각.
성문 밖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자 한 무리의 모험가들이 보였다. 오필리아 상단을 상징하는 초록 문양이 그려진 짐마차가 두 대 있었고, 모험가는 나와 말톤까지 포함해 열댓 명이 조금 넘는 듯했다.
습관적으로 그들의 무장을 유심히 살피고 있자니 사내 중 일부가 이쪽으로 다가와 거들먹거렸다.
“뭐야... 마지막 두 명이 누군가 했더니 너희들이었냐?”
“야!! 다들 저기 봐! 말톤이야!!”
“으하하하하!!! 몽둥이는 잘 간수하고 있나 말톤? 또 함부로 놀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흐흐...”
모험가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이 웃음벨 새끼.
허나 녀석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그야 물론일세. 걱정해 줘서 고맙군. 헌데 요즘은 도통 사냥할 기회가 없어서 헛헛하던 참이라네.”
“야 말톤! 그러면 내가 좋은 정보 하나 가르쳐줄까? 저번에 북쪽 지역으로 원정을 나갔다가 엄청나게 큰 슬라임을 봤는데...”
“오, 그건 좀 흥미가 동하는군.”
말톤이 턱을 짚으며 뻔뻔하게 모험가들 사이로 걸어나갔다. 이래 봬도 사교성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녀석이니까.
녀석은 곧잘 웃음거리로 언급되곤 하지만, 나처럼 평판이 나쁜 건 또 아니다. 특유의 여유 넘치는 태도와 듣는 이를 편안하게 만드는 화술 덕에 누구든지 말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공짜 술을 얻어먹을 정도로 친해졌으니까.
더욱이 엘프들이 으레 그렇듯 반반한 외모도 한몫해 어디서든 쉽게 호감을 끌어내곤 했다. 놈과 같이 파티를 짜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로.
나와는 완전히 정반대다.
“...야 저기 좀 봐. 저 투구 쓴 놈.. 맞지...?”
“....그래, 무장이 바뀌어서 못 알아봤네.”
“쟤가 누군데 그래? 강한 녀석이야?”
“아니 그 왜 있잖아 성깔 더러운 놈. 소문의 그 검은...”
“.....”
묵묵히 칼을 손질하고 있자니 내가 걸터앉은 바위 곁으로 한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는 걸로 보아 모험가는 아닌 듯했고, 머리에는 다소 푹신해 보이는 초록 모자를 뒤집어썼다.
남자가 오필리아 상단의 문양이 새겨진 케이프 안쪽에서 양피지를 꺼내 내 인상착의를 두루 적어넣으며 읊조렸다.
“흠... 자네도 호위 임무로 온 건가? 의뢰 패는 가지고 왔겠지?”
“여기 있습니다.”
품속에서 퀘스트 수주를 나타내는 작은 목찰과 모험가 패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는 내 모험가 패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F등급... 뭐 괜찮겠지. D등급도 있겠다, 수만 맞추면 되니까.”
“D등급이 있습니까?”
“두 명 있다네. 저 사람들이지.”
남자가 턱짓한 방향에는 제법 다부진 남성과 수상쩍은 로브를 푹 눌러쓴 거한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개중 거한 쪽은 압도적인 체구의 소유자였는데, 이 세계에서 장신으로 치부되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컸을뿐더러 땅에 끌릴 정도로 거대한 대검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저런 모험가가 우리 길드에 있었나..?
턱에 손을 짚고 면밀하게 행색을 살피고 있자니 중년 남성이 툭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군. 불침번 때문에 미리 조를 짜두었는데 자네가 저자와 같은 조가 될 거라네. 그 외에도 방금 도착한 엘프와... 아, 때맞춰 잘 왔군.”
그가 고개를 들어 전방을 쳐다보았다. 너른 들판 위에는 어느새 대화를 마치고 온 말톤과 붉은 머리칼의 키 작은 소년, 거구의 남성이 차례차례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이 붙임성 좋게 고개 숙이며 인사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F등급 모험가 지마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만나서 반갑군. E등급 말톤이라고 한다네.”
“....D랭크 카일.”
“.....”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F랭크 모험가인 도란입니다.”
좋은 예감이 든다.
*
들판에 난 마찻길을 따라 막힘없이 나아갔다.
맑게 갠 하늘에선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고, 끝없이 펼쳐진 잔디 위를 산들바람이 스칠 때마다 청량한 풀내음이 풍겨왔다.
부드럽게 옷소매를 간질이는 감촉에 눈을 가늘게 뜨며 행렬 꽁무니를 뒤쫓던 중, 따스한 햇살을 의식해 입을 열었다.
“...날씨가 선선해서 다행이네. 걷기 딱 좋은 날씨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쪄 죽는 줄 알았는데...”
“그 말대로일세. 자네는 한층 더 곤혹스러웠겠군. 한여름에 투구를 머리에 이고 뙤약볕 아래를 거니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래, 무슨 고문이라도 받는 줄 알았다니까? 머리는 점점 뜨거워지고 땀은 줄줄 흐르는데 닦을 수도 없고... 물도 마음대로 못 마셔서 답답해 죽겠는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고...”
“천옷에 투구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으니 더욱 수상쩍게 느껴졌을 걸세. 상당히 불균형한 차림이니 말이야.”
“그래, 그래서 불시에 검문도 많이 당했지. 그러다 보니 기사들만 보였다 하면 무의식중에 피하게 되더라. 이번에 산 투구는 입이 뚫려 있으니 망정이지... 적어도 밥 먹을 때도 눈치를 볼 필요는 없으니까.”
발치의 돌멩이를 차올리며 한탄했다. 이런 하소연을 털어 놓을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던전이 발견된 마을까지 도달하려면 나흘은 꼬박 걸어야 할 터, 말톤의 존재에 위안 삼고 있자니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야, 너 근데 거긴 어떻게 안 거냐?”
“거기라니, 어딜 말하는 겐가?”
“네가 알려줬던 그 대장간 말이야. 가게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진짜 외진 곳에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은 찾아가는 것만 해도 벅차겠더라고. ...장사는 되나?”
“아, 론디니움 말인가? 별거 아니라네. 나도 이전 모험가들에게 전해 들은 게 전부지.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얘기가 들려오니까.”
“하긴... 너는 베라스틴에 정착한 지 꽤 됐다고 했지... 괜히 엘프가 아니네. 숨은 맛집이랑 명소도 많이 알고 있고. ...너 진짜 나이는 몇 살이냐?”
“흐흐... 엘프 중에선 나름 젊은 편이라네. 자네랑 별 차이도 안 날 게야.”
“뻥 치네, 너 내가 카렌한테 물어보니까 전전대 길드장하고도 아는 사이였다고 하던데. 그 정도면 최소 백 살은 먹은 거 아냐? 내 배의 배는 족히 먹은 놈이. 차라리 네가 사실은 이성애자라는 게 더 신빙성 있겠다.”
“허허...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일세.”
“모르긴 개뿔이.”
콧방귀를 뀌어 무시하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그락거리는 마차의 소음을 배경 삼아 느긋하게 걷고 있자니 문뜩 그가 날 위아래로 살피며 물어왔다.
“흠... 그런데 론디니움 대장간에서 맞춘 장비는 그게 다인가? 코볼트 킹을 처치했으니 한 11실링 정도 벌었을 텐데 말이야. 투구랑 레더아머를 합쳐도 그에 한참 못 미치는군.”
“...너 가끔 소름 돋는다. 장비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액수까지 정확히 맞췄냐?”
“흐흐... 그래서 어떤가?”
“뭐, 네 말대로 단검 하나 장만했지. 언제까지 너한테 빌려서 쓸 수는 없으니까. 내가 잡은 코볼트 킹 소재로 만들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보여줄게.”
슬그머니 오른쪽 발목을 눈짓하며 말했다. 보통은 허리춤에다 고정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미 수통에 더불어 장검까지 매달아 둔 터라 하는 수 없이 종아리에 묶어두었다.
도로 바지 밑단을 덮으며 뿌듯하게 고개를 들려던 찰나
“정지!!!”
“다들 전투에 대비하라!!”
돌연 전방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