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상단 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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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상단 호위 #3
나흘째 되던 날부터 문제가 터졌다.
베라스틴을 떠나온 지 이틀이 지난 시점. 여기까지만 해도 제법 무난했다. 몇몇 들짐승과 작은 마물들이 먼발치서 서성거리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덤벼오진 않았다.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발진하는 말톤을 말리는 게 더 힘들었으니.
놈의 취향은 확고해서 고블린이나 코볼트에는 일절 반응하지 않으면서도, 자이언트 래빗이나 일각 사슴 따위가 수풀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 때면 곧장 뛰어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렇게 무난하게 이틀째가 흘러갔다.
허나 그다음 날부터는 조짐이 안 좋았다.
저만치서 관망하던 마물들이 본격적으로 덤벼오기 시작한 것. 이 근방에는 강한 몬스터가 드문 만큼 큰 피해 없이 격퇴할 수는 있었지만, 모두 저마다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챘다.
시도 때도 없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 탓에 팔뚝에는 자잘한 상처가 늘어갔고, 모험가들은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서서히 지쳐갔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데 위안 삼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몬스터 대군의 습격을 받고 있다.
“젠장!! 말톤 그쪽으로 두 마리 간다!!!”
“알겠네!! 내가 처리하겠네!!”
“지마! 넌 물러서 있어!!”
“네, 네!! 아...! 카, 카일님 오른쪽!!!”
“.....”
완만한 능선, 울퉁불퉁한 암반이 산재한 바윗길. 뒤엉켜 싸우는 모험가 사이로 코볼트와 놀 무리가 빼곡하게 들이찼다.
크샤아앗!
키에에엑!!
“뒈져!!”
칼날이 바람을 찢고 파공성을 자아낼 때마다 털투성이 머리통이 공중에 떠올랐다. 날카로운 발톱이 휘둘러와 후방으로 물러나자 구슬땀을 흘리는 모험가들이 도처에서 분전하고 있었다.
“도란 씨!! 말톤 씨가...!!!”
지마의 외침에 말톤이 있던 방향을 돌아보자 자그마한 털북숭이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말톤이 보였다.
녀석은 토끼형 마물 대엿 마리에게 몸을 잘근잘근 물어뜯기고 있었지만 그 표정만큼은 누구 하나 부럽지 않게 행복해 보였다.
“이...! 이 또라이 새끼가...!!”
그대로 방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랬다간 치명상을 입을 터, 재빨리 칼을 휘둘러 놈 위에 들러붙어 있던 마물들을 떼어주며 외쳤다.
“진짜 너 죽고 싶어 환장했냐?!!”
“아니... 고맙네, 코볼트와 놀은 몰라도 저 작고 귀여운 토끼들은 좀...”
“닥쳐!!!”
놈을 거칠게 후방으로 내던진 뒤 앞으로 뛰쳐나갔다.
한달음에 툭 불거진 바위 위로 올라가 굽어보니 전방위에서 다채로운 몬스터들이 떼거리로 쏟아지는 중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그 수가 너무 많다.
“마차를 호위해!!!”
“제길...! 이렇게나 많은 몬스터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잡담할 시간 있으면 한 놈이라도 더 죽여!!!”
“흐랴아압!!!!”
키에에엑!!
모험가들은 마차 주변을 빙 둘러싸고 놈들과 엉겨붙어 난전을 펼쳤다. 처음엔 대열을 유지하며 싸웠지만, 전투가 중반 즈음으로 치닫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나마 그중 유독 돋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
콰득!!
키이이잇...!!
크샤아아앗!!!
쿠르륵...!!
카일이 대검을 휘두르자 코볼트 서너 마리가 동시에 터져나갔다. 이어 거칠게 내려찍으니 순식간에 두 갈래로 찢어진 놀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는 마물이 제 몸에 들러붙든 말든 무덤덤하게 학살해나갈 뿐이었고, 그 압도적인 모습은 감정 없는 처형인을 연상케 했다.
내심 감탄하며 신중하게 전황을 가늠하고 있던 차, 한 코볼트가 내 발목을 붙들었기에 놈의 미간을 관통했다.
“이 새끼들은 왜 또 지랄이야!!!”
크루루룩...!!
장검에 머리통이 꿰인 채 대롱대롱 매달린 코블트를 거칠게 발로 차 떨군 뒤 주위를 살피니 수많은 형체들이 내가 있는 바위 위로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그 뒤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생소한 마물이 해일처럼 추가로 몰려들고 있다.
마치 해안가의 거품 이는 암초를 떠올리게 만드는 광경.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새끼들아!!”
도약.
성난 군중 사이로 뛰쳐들었다. 발이 채 닫기도 전에 회전했다. 허공에서 난폭하게 원을 그리며 몬스터들의 머리통을 베었고, 자세를 바로잡음과 동시에 달려나가 팔꿈치로 목을 타격했다.
빠드득!
목뼈가 부서지는 둔탁한 감각이 팔뚝에 전해져온다. 그에 그치지 않고 선회해 표적에서 벗어났다. 발톱을 내지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놀 몇 마리가 어벙한 표정으로 올려다봤지만, 일일이 반응해줄 여유는 없다.
“...이빨을 꺼냈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겠지?”
돌파!
검을 좌우로 휘두르며 질주했다. 어깨로 이름 모를 마물을 들이받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튕겨 난 녀석은 뒤따라오던 코볼트들을 덮쳤고, 이내 우왕자왕하며 발이 묶인 사이 장검의 긴 리치를 이용해 급소를 베었다.
쐐애액!!
은백색 검의 궤적이 코볼트를 포착하자 놈의 한쪽 어깨가 떨어져나갔다.
이에 그치지 않고 중단으로 내찔렀다.
푸욱!!!
키르르르륵?!!!
복부를 꿰뚫자 가래가 끓는 듯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녀석이 나머지 한쪽 팔로 내 손등을 긁어댔지만 아랑곳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나는 뒤따라 오던 마물을 연달아 꿰었고,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칼자루를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검붉은 창자가 흘러내리며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나왔다.
키르으으엑!!!
카르르르룩!!
“...아프지?”
뿌리까지 박힌 검을 단박에 뽑아내자 줄줄이 꿰뚫렸던 놈들이 허물어졌다. 발톱이 뽑혀나가도록 지면을 움켜쥐는 손아귀가 그들로 하여금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여실히 전해주었다.
“그러니까 상대를 보고 덤볐...”
크샤아아악!!!
“...그래.”
반격.
놀 한 마리가 덤벼들자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하이에나처럼 생긴 면상이란 걸 제외하곤 코볼트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몬스터. 널브러진 가슴팍을 짓밟고 칼자루에 힘을 실었다.
키르르륵!!
“가만히 있어.”
놈이 두 손으로 애써 칼날을 밀어내려 해보지만 무용지물. 손바닥 째로 목을 꿰뚫자 붉은 선혈이 투구에 튀었다. 심장이 맥동할 때마다 울컥거리며 솟구치는 핏물은 고장 난 스프링클러를 보는 것만 같다.
서서히 놀 시체에서 내려오며 읊조렸다.
“...아무리 해치워도 끝이 안 보이네.”
필사적으로 분전하는 모험가들을 둘러봤지만, 전투가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싸워 본 게 얼마 만일까? 적어도 모험가가 되고 난 후에는 처음이겠지.
...과거에는 종종 있었지만.
슬슬 몸이 달아오르려던 찰나, 후방에서 애타는 비명이 들려왔다.
“도, 도란 씨...!! 살려주세요!!!”
“뭐, 뭐야 시발...?! 기다려 지금 간다!!!”
배낭을 꽉 움켜쥐고 냅다 도망치는 지마 뒤로 코볼트를 비롯한 놀, 고블린, 늑대 등 마물 수십여 마리가 집요하게 뒤따르고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녀석이 돌부리에 걸리자 몸이 붕 떠올랐다.
툭.
“으아아아앙!!!”
“허미 씹탱!!!!”
*
전투를 개시하고 한참이 흐른 시점, 해가 다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얼추 상황이 정리되었다. 지독한 악취와 쇠파리로 들끓던 바위 언덕을 도망치듯 빠져나오자 모험가들이 신음을 흘리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갑자기 몬스터들이 미쳤나.”
“야, 지금까지 마물이 이렇게나 많이 몰려온 적 있었냐?”
”아니 이런 건 처음 봐.“
“아뜨뜨뜨... 남는 약초 있는 사람?”
“싸구려 연고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써라.”
“고맙다, 시불...”
모험가들의 면면엔 고통이 가득하다. 다행히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수가 큰 부상을 입었다.
환부를 지혈하고 붕대를 감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야, 말톤.”
“듣고 있네.”
“너 코볼트랑 늑대가 협력하는 거 본 적 있냐?”
“...그럴 리가. 둘은 천적 관계 아닌가. 그 둘이 서로 힘을 합친다는 건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대체 뭐냐고...”
몬스터 간에도 상성이란 게 있다.
개구리와 뱀이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코볼트와 늑대 또한 함께할 수 없다. 이는 자연의 순리와도 같은 것. 숲에서 위기가 닥쳐올 때면 마물끼리 싸움을 붙여 상황을 모면하곤 했던 나이기에 놈들 간의 상성에 대해서는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다.
수통을 기울이며 탐탁치 않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야, 지마. 넌 뭐 짐작 가는 거 없냐?”
땀에 젖은 셔츠를 펄럭이던 지마가 난처하게 뺨을 긁으며 답했다.
“글쎄요... 저는 아예 감도 안 잡혀요. 마물하고 싸운 경험이 별로 없어서... 원래 이렇게까지 많이 몰려드는 건가요?”
“그럴 리가... 만일 그랬더라면 여기 있는 놈들 대다수는 진작에 뒤졌겠지. 그보다 넌 무슨 페로몬 향수 같은 거라도 뿌리고 다니냐? 마물들이 눈에 불을 켜고 네 꽁무니만 쫓아다니던데.”
“으... 그런 체질인가 봐요. 몬스터도 약한 사람은 알아보는 건지.. 예전부터 다른 파티원이랑 있을 때도 저만 집요하게 노려서... 읏...?!”
돌연 지마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묵묵하게 대검을 손질하던 카일이 다가와 녀석의 멱살을 붙들었기에.
신속하게 검을 뽑아 녀석의 목 아래 들이밀었다.
“...당장 그 손 내려놔.”
“....”
“안 놔?”
칼자루에 힘을 실었다. 첨예한 칼날이 피부를 옅게 찢자 핏방울이 스멀스멀 베어나왔다. 놈은 후드 아래 얇은 천 너머로 날 노려보았고, 나 또한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으르렁거렸다.
치열한 신경전 끝에 결국 그가 손아귀에서 힘을 풀자 지마가 잔디밭 위에 털썩 엎어져 가쁜 숨을 몰아내쉬었다.
“크흑... 컥... 카, 카일 님...? 왜...”
“.....”
그가 의중을 헤아릴 수 없는 시선으로 날 한번 쏘아본 후 발걸음을 돌려 마차 쪽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한동안 녀석의 등을 사납게 응시한 뒤 천천히 지마를 일으켜주었다.
“도란 씨...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헤헤...”
“...넌 무시당하고 억울하지도 않냐? 낯짝이 그게 뭐야. 왜 기분 나쁘게 쳐 웃고 있어?”
“그, 그래도... 제가 약한 건 사실이니까요. 오늘도 도란 씨의 발목을 잡아버렸고... 이번 임무에 지원한 것도 던전에서 실력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건데... 역시 안 될 사람은 안 되나 봐요.”
“...괜찮아, 싸울 수 있는데도 안 싸우는 놈보단 나으니까.”
힐끗 말톤을 눈짓하며 말했다. 물론 녀석도 충분히 제 몫을 다해주긴 했지만, 평소 놈이 선보였던 무력을 떠올려보면 어쩐지 설렁설렁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째서지?
“....아무튼 이제 슬슬 잘 준비하자.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려는 모양이니까. 오늘은 우리 조가 불침번인 거 알고 있지?”
“네... 고마워요.”
“...그래.”
녀석의 등을 토닥이고 바닥에 떨어진 배낭을 주워들었다. 이내 말톤에게 턱짓한 뒤 텐트를 칠 만한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모험가들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장소에 자리를 잡고 나무 막대를 지지대 삼아 방수천을 세우고 있자니 말톤이 넌지시 물어왔다.
“...다정하군 도란. 무슨 바람이 불었나? 평소 자네같았으면 거들떠도 안 봤을 텐데 말이야.”
“뭐... 그냥 오지랖이지. 조언 좀 한다고 해서 손해는 아니잖아?”
“호의는 아니었다는 말이군?”
“뭐... 그렇지.”
그 말대로, 내가 지마를 도와준 건 단순한 호의 때문이 아니다. 목숨을 구하는 거야 임무 중 사망자 발생으로 인한 페널티를 받지 않기 위해선 당연한 거고, 위로의 말 몇 마디 건네서 약간이라도 호감을 얻어낼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니까.
혹여나 타 모험가들과 갈등이 생겼을 때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어서 나쁠 건 없다.
말톤이 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도 참 고생하는군. 그래서 그 지마라는 청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뭐 솔직히 말하자면... 모험가로는 영 글러 먹었지. 애초에 이번 의뢰는 호위 임무니까 전투에 자신이 없었으면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고.”
꽤 매정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세계에서 약한 건 죄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쟁취해낼 수 없고, 운이 좋아 값진 무언가를 손에 얻는다고 하더라도 지켜낼 수 없다.
말뿐인 정의는 칼날 앞에 무력하다.
나는 그걸 너무 어렵게 체득했다.
“뭐... 카일의 반응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네. 누구보다 많은 적을 쓰러뜨렸으니 말일세. 그가 없었더라면 진작에 사망자가 나왔을지도 모르니.”
“헌데 그 새끼는 좀 수상하단 말이지...”
“무얼 말인가?”
“...그냥 혼잣말이야.”
첫날 야영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내가 너무 과민반응하는 건가...?
마지막 순간, 지마를 바라보던 놈의 눈동자에 서린 살기를 떠올릴수록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
부스럭.
“으...”
한밤중에 요의를 느껴서 깼다.
“...아까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불침번 도중, 잠을 깨려고 물을 너무 많이 마신 게 원인인 모양이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밤중의 야영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 야영지를 가로지르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물기를 머금은 풀잎에 종아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텐트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소변을 누기 시작하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휴우... 내일은 마물이 덜 나왔으면 좋겠는데..”
만일 순조롭게 나아갈 수만 있으면 내일 중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가능할 터, 사냥감이 아무리 많이 나온다고 한들 처리할 방도가 없는 지금으로선 곤란하기만 하다.
한숨을 내쉬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야영지로 돌아가고자 몸을 돌린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위화감.
“왜 이렇게 고요하지...?”
고요해도 너무 고요하다.
달밤의 야음이 짙게 내리깔린 야영지에서는 간간이 코 고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그 흔한 개구리와 풀벌레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불길한 조짐을 감지하고 자리를 피한 것처럼.
그제야 졸음이 싹 가시며 서늘한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둡다.
지나치게 어둡다.
내가 불침번을 마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모닥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야영지를 비추는 불빛이라곤 하늘에 뜬 그믐달이 전부. 불침번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절대로 불이 꺼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명백한 이상 상황.
피가 차갑게 식었다.
허겁지겁 텐트로 돌아가 말톤을 흔들어 깨웠다.
“야 말톤 일어나! 지금 태평하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으음... 도란, 자네인가...? 지금이 몇 시...”
“긴급 상황이야. 뭔가 이상해.”
“...알겠네.”
녀석은 자그맣게 툴툴거리며 침낭에서 기어나왔지만, 노련한 모험가답게 부츠 끈을 동여매고 고개를 들었을 땐 더 이상 피로감을 엿볼 수 없었다.
이내 날카롭게 감각을 갈무리하더니 냉철하게 사고하며 읊조렸다.
“...너무 조용하군. 불빛도 보이지 않아. ...모닥불이 꺼진 겐가?”
“그래, 불침번도 사라졌어.”
“...지금 근무를 서는 건 카일인가 아니면 지마인가?”
“....모르겠어.”
“어서 가보세.”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텐트 밖으로 나와 불 꺼진 야영지를 가로질렀다. 이상한 기류를 자각한 탓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이 한없이 음산하게만 느껴졌고,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에선 원인 모를 불길함이 풍겼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카일이란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설마 마지막 날에 사고를 칠 줄이야...”
“.....”
내 기억이 맞다면 지마의 텐트는 우리의 반대편 외각 쪽에 있었을 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칼을 뽑아들고 나아갔지만, 깊게 잠든 야영지에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마의 텐트까지 도달했다.
숨죽이며 귀를 기울여 봤으나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말톤과 눈빛으로 신호를 교환한 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내 단숨에 가림천을 젖히자 시야에 들어온 건ㅡ
싸늘하게 죽어있는 카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