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상단 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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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상단 호위 #4
카일이 죽어있었다.
그 큰 덩치가 아니었다면 알아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선혈이 낭자한 텐트 안, 그의 시체는 온몸이 잔혹하게 난도질당해 있었다. 벗겨진 후드 안쪽은 눈도 채 감지 못한 채 경악으로 물들었고, 잘려나간 손가락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처참하다.
도무지 같은 인간이 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자욱한 피비린내에 무심코 입가를 틀어막자 말톤이 손가락을 주워들며 읊조렸다.
“절단면이 깔끔하군... 날붙이에 당한 걸세. 상처의 깊이로 판단하건대 단검 종류를 썼겠고... 경직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숨을 거둔지 얼마 안 됐네.”
“도대체... 누가...?”
“그야 물론...”
그때였다
“끄아아아아아악!!!!!”
“누, 누구냐?!!!”
“저, 적습이다!! 다들 일어나!!!”
“불침번은 도대체 뭘... 크헉!!!”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온 건
황급히 텐트를 박차고 나오자 어렴풋한 달빛 사이로 거뭇거뭇한 인영들이 내비쳤다. 찰나, 잠에서 깨어난 모험가들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야 막 일어난 사람들이 저렇게 무장을 갖춰 입었을 리 없으니까.
모험가들은 즉시 텐트에서 뛰쳐나와 습격에 대처했지만, 모닥불이 꺼진 야영지는 어두워도 너무 어두웠다.
“이, 이놈들 덤벼라!!!”
“잡았다 이 새끼!!!”
“뭐, 뭐 하는 거야!! 난 콩드라고!!”
“미, 미안! 잠깐... 콩드...? 콩드가 누구... 커허헉!!”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탓에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었다. 지금 저 틈에 끼어들었다간 되려 위험해진다.
이를 악문 채 부서저라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자니 말톤이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도란.”
“...그래.”
배후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여럿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고받은 직후, 곧바로 뛰쳐나갔다.
파박!!
“.....!!”
어둠 너머 당황하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설마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 건가. 놈들이 신속하게 자세를 고쳐잡으며 교전에 대비했지만 질주하는 도중 나는 이미 모든 판단을 마친 뒤였다.
‘...장검과 둔기..’
찰나, 구름 사이로 비쳐온 달빛에 기다란 날붙이가 반뜩였다.
놈들의 사정거리에 맞춰 급작스레 제동하자 예리한 섬광이 턱아래를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슈확!!
“..내 차례다.”
““.....!!!””
즉각 행동에 옮겼다. 다시금 휘둘러져 오는 칼날을 장검으로 튕겨냈다. 깔끔하게 허리를 숙여 둔기를 흘려보냈고, 심장을 꿰뚫어 응수했다.
“일단 하나.”
“이, 이 새끼가...!”
“.....”
회피.
손을 놓으며 바닥을 굴렀다. 무기는 나중에 회수해도 된다. 삽시간에 시야에 사라지자 놈은 반응하지 못했고 죄 없는 풀떼기만 한 움큼 베어냈다.
즉시 옆구리로 파고들어 복부를 강타했다.
놈이 고통에 신음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어 놓친 검을 주워들고자 했지만, 그보다 빨리 달려가 대가리를 걷어찼다.
사내의 목에서 불길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거동이 멎어들었다.
“...죽었나.”
보잘것없는 실력이다.
기껏해야 E급 하위 정도겠지.
다만, 가시성이 확보되질 않다 보니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도통 구분할 수가 없다. 당장 괴한들과 맞서고 있는 모험가들만 해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게 공기 너머로 전해져왔다.
허나 상대는 이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모험가들만 찾아내 공격하고 있다.
어떻게 안 거지?
“도란, 이걸 좀 보게.”
땅에 떨어진 장검을 주워들며 궁리하고 있자니 말톤이 손짓해왔다.
의아하게 다가가자 녀석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피 묻은 천 쪼가리? 이걸 왜 나한테...”
“괴한이 팔뚝에 차고 있던 거라네. 자네가 쓰러뜨린 사내도 착용하고 있었을 텐데?”
“뭐...? 그렇다면 설마...”
재빨리 돌아가 시체를 확인했다. 풀밭에 엎어진 송장을 뒤엎자 왼팔에 묶인 하얀색 붕대가 보였다. 새하얀 천은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달빛을 반사했다.
곧바로 눈치채고 소리쳤다.
“천이다!! 상대는 팔뚝에 흰색 천을 차고 있다!!! 붕대를 감은 놈들을 노려!!!”
모험가들도 내 외침을 주워듣고 복창했다.
“흰색 천이다!!!!”
“흰색 천을 두른 놈들이 적이다!!!”
“좋았어!!! 다 뒤졌다 이 새끼들!!!”
“겁도 없이 감히 우리한테 깝쳐?!!”
“본때를 보여주지!!!”
말톤을 돌아보며 나직히 읊조렸다.
“...이제 우리도 합류하자 말톤.”
“알겠네.”
동시에 달려나갔다.
피아를 식별할 수 있게 된 이상 놈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급습에 얼이 빠졌던 모험가들도 슬슬 충격에서 헤어나와 대열을 갖췄으며, 마차를 기점으로 괴한들과 치열하게 대립했다.
달밤 아래 즐비한 불청객들을 도륙해나가며 다가가자 모험가들이 흠칫 놀랐지만, 곧 그 정체가 나와 말톤이라는 걸 깨닫고 외쳤다.
“말톤!!!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거야?!! 그리고 옆에 넌...!!”
“...진정해,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크윽...! 이, 일단 같이 싸우자...!! 우리가 이쪽을 맡을 테니까 넌 후방을 지...!!”
모험가가 거칠게 팔을 내두르며 명령했지만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도, 도와...! 커허어어억!!!”
느닷없이 마차 뒤편에서 서슬 퍼런 비명이 울려퍼졌으니까.
말톤과 시선을 교환하고 서둘러 돌아갔다. 잔뜩 흥분해 날뛰는 말을 끼고 돌자 그곳엔 한 괴한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놈은 카일에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체구였지만 전신이 근육질이었던 그와는 달리 거동할 때마다 비대한 살덩어리를 출렁거렸다.
놈이 모험가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양 손바닥을 맞부딪히자 두개골이 수박처럼 으깨졌다.
“시발...! 이건 또 뭐...”
“...밥?”
“밥? 너 지금 뭐라... 윽...?!”
찰나, 파공성을 내며 날아든 날붙이가 투구 끝을 스쳤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일격. 풍만한 살집에 가렸던 놈의 오른손에는 언월도를 닮은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둔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매우 민첩한 놈이다.
칼자루를 고쳐 쥐며 읊조렸다.
“...그래, 네가 이 떨거지들의 대장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밥...?”
“할 줄 아는 말이라곤 고작 그거밖에...”
“바아아아압!!!!”
“미친...?!”
느닷없이 그가 괴성을 지르며 덮쳐왔다. 가까스로 옆으로 뛰어들어 회피했지만, 곧바로 시퍼런 창날이 옆구리를 향해 쇄도했다.
카가가강!!!
“크윽!”
어마어마한 완력. 간신히 검면을 세워서 막아냈으나 차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필사적으로 제동을 걸어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지면이 미끄러워 불가능했다. 결국 한참을 밀려나서야 검을 땅에 박으며 일어섰고, 후속타에 대비하고자 고개를 든 순간 소름 끼치는 언월도의 공명음이 들려왔다.
이번엔 못 막는다.
“씨발!!!”
검을 놓고 바닥을 뒹굴었다. 간신히 자리를 모면하자마자 묵직한 쇠붙이가 내리꽂혔다. 즉각 일어나고자 땅을 짚었지만, 본의 아니게 휘청거리며 엎어졌다.
재빨리 어깨에 손을 짚었다 떼자 새빨간 혈흔이 묻어나왔다.
불타는 듯한 통증이 엄습해온다.
“염병!!!”
숨 돌릴 틈 따위는 없다. 놈이 창날을 회수하며 반원을 그렸다. 절박하게 바닥을 기어 물러났으나 이어 언월도가 횡으로 크게 몰아친다. 간신히 반응해 자세를 낮췄지만,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뱀이 꿈틀거리듯 창대가 궤적을 바꿔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지면에 수평으로 튕겨나갔다.
고통으로 점철된 비명을 억눌렀다. 입안 가득 비릿한 쇳덩이가 맴돌았다. 무릎에서 힘이 빠지고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든다. 언월도가 울부짖는 소리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흔들리는 시야를 간신히 바로잡으며 올려다보자 우두커니 서서 내 꼴을 비웃는 거구가 보였다.
“바아아아압...”
“시...팔...”
놈의 거만한 태도에서는 응당 있어야 할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노련한 선장과 선원이 작살 꽂힌 고래를 뒤따르듯 이 상황을 즐길 뿐. 군침을 질질 흘리며 두툼한 손바닥으로 창대를 비비는 모습은 날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다.
지금껏 마주했던 여느 마물들처럼.
“.....”
차분히 호흡을 갈무리했다.
모험가들 중 당장 전력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카일은 이미 죽었다. 말톤은 괴한으로부터 마차를 지키느라 발이 묶였다. 다른 모험가들은 제 코가 석 자라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 녀석을 막을 수 있는 건 나.
나밖에 없다.
투구 속, 새까만 눈동자에 깃든 살의를 날카롭게 갈무리했다.
차갑게 냉소하며 지껄였다.
“야, 돼지.”
“바압?”
“....공격은 겨우 이게 다냐? 대장이 이러니 부하들도 저 꼴이지. 능력도 의지도 없으니 도적질 따위로 연명하고... 부모 얼굴은 기억나나?”
“바아아아압...?”
“그래, 널 버린 쓰레기들 말이야. 어미는 사창가에서 돌아가셨지? 아비는 광산에 노예로 팔려갔고. ...혹시 널 껴안아 줄 때 몸에서 등유 냄새가 나지는 않았어?”
“바아아아압...!!!”
단순한 새끼.
도발이 먹혀들었는지 놈이 황소 같은 몸을 이끌고 돌진해왔다. 한 방 한 방에 짙은 살의가 담긴 육중한 일격. 침착하게 후방으로 물러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일순간, 분노에 찬 놈이 드높게 언월도를 치켜든 뒤 세차게 내리꽂았다.
그리고 빈틈.
창날이 빗겨난 틈을 타 거리를 좁혔다. 풀밭 위를 질주해 주먹을 찔러넣었다. 내 정권이 놈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지만 뱃살에 가로막혔다. 녀석은 콧방귀를 뀌며 묵직한 발바닥으로 내리찍었고, 나는 날렵하게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바하하하합...”
“....”
정강이를 걷어찼으나 놈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날붙이로 찢어발긴 듯 흉측한 낯짝이 다가온다. 그가 기민하게 창을 회수해 수평으로 휘둘렀고, 나는 표범이 착지하듯 지면과 맞닿기 직전까지 자세를 낮춰 흘려보냈다.
녀석에게 유효타를 먹이려면 반드시 장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바압?!!”
움켜쥐었던 흙을 흩뿌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 안구에 이물질이 들어가자 놈은 마구잡이로 언월도를 찔러온다. 허나 내가 더 빨랐다.
덥썩.
다시 찾은 장검. 칼자루를 거칠게 거머쥐었다. 놈이 분노하며 창날을 올려쳤다. 나는 그 기세에 저항하지 않고 검날을 비틀어 흘려보냈다. 창날이 뺨을 스치자 날카로운 바람이 목을 휘감았다.
반격.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놈의 팔이 미치지 않는 하단으로. 즉각 육중한 손바닥이 다가왔지만 칼자루를 짧게 쥐어 베어냈다. 황급하게 언월도를 내저어 떨쳐내 보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지금까지 당한 걸 전부 되돌려주겠다는 기세로.
동선을 최소한도로 줄이며 가속하자 거동에서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그 거체에 점차 긴장이 쌓여갔다. 자잘한 생체기에 울화가 누적된다.
조바심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시점, 지면을 박차며 뒤로 도약했다.
섣부르게 휘둘러진 창날이 밤공기를 크게 가르고 강철의 떨림이 멀어지는 찰나
“...잡았다.”
범(虎)처럼 달려나갔다.
놈은 창대를 짧게 쥐고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내가 한 수 위.
급격하게 제동하며 선회했다. 기민하게 놈의 창대를 지나쳤다. 놈의 동작에 부하를 걸었다. 경악으로 물든 시선을 마주하며 텅 빈 옆구리로. 낡은 가죽 샌들로 놈의 발등을 즈려밟았고ㅡ
일섬(一?)!!
푸화아아악!!!!!
깔끔한 호선을 그린 칼날이, 집념에 젖은 검극이, 놈의 지방 덩어리를 크게 베고 은빛 달 아래 선혈을 흩뿌렸다.
옆구리가 잘려나간 놈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무릎 꿇을 뿐.
짙은 피보라가 강철 투구에 튀었다. 양철지붕 위에 소나기가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눈구멍을 타고 흐르는 선혈. 피로 피를 씻는 감각.
익숙한 향기. 익숙한 맛.
이 느낌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뼈마디 사이로 사무치는ㅡ
전율(戰).
이어서 연격. 난폭하게 칼날을 쑤셔넣는다. 손잡이를 비틀어 잡아당겼다. 놈이 급급하게 창대로 방어하지만 한 번 거리를 내준 이상 이곳은 나의 공간. 나의 영역.
푸컥!!! 푸확!!!!
서늘한 검광이 새벽 공기를 헤집었다. 바람이 파열음을 내며 터져나갔다. 집요하게 휘둘러진 칼날이 날카로운 호선을 그릴 때마다 시뻘건 살점이 핏덩이와 함께 흩날렸다.
이어 성급하게 내질러진 창격을 감아올린다. 내찔렀다. 휘감으며 완전히 분쇄해냈다. 창대를 타고 전해지는 절박한 심정. 최후의 발악으로 휘둘러진 언월도가 내 팔뚝을 베었지만, 허벅지를 깊게 도려내 응수했다.
오로지 살기 위해 갈고닦아온 검술.
짐승의 본능과도 같은 동작.
검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아버지의 강요로 잠깐 도장에 다닌 게 전부다. 지금 내가 행하는 건 잘 갈고 닦여진 검술이 아니라 늑대가 코요테를 사냥하듯, 본능 그 자체.
이 세계로 오고 난 지 어연 2년. 검을 잡아봤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기간이지만 가슴 펴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밀도 높은 매 순간을 살아왔다고.
첫 한 해 동안은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숲속에서 홀로 생존했다. 내게 주어진 거라곤 모험가 시체에서 주워든 낡은 철검 한 자루뿐. 그 검 한 자루만을 어깨에 짊어지고 마물들의 숨결을 맡으며 살아왔다.
처음 몬스터를 목격하고 지레 겁먹어 나무 위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도 했다. 코볼트 굴에 들어가 식량에 독을 타기도 했고, 고블린들과 사냥터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몬스터의 분변에서 소화되지 않은 나무 열매를 찾아 먹었다. 먹잇감을 가로챈 짐승의 발자취를 좇아 일주일씩 산속을 헤맸다. 사슴의 창자를 날것 그대로 허겁지겁 먹어치웠고,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도 그때 알았다.
그리고 배웠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길 수 없으면 도망친다. 용감할수록 빨리 죽는다. 싸움에 미학은 없다. 용기와 만용은 다르다. 지면 잡아먹힌다.
추하디 추하게 살아남아 잡아먹는 것.
그리고 깨달았다.
약한 자는 유린당한다. 약하면 잡아먹힌다. 약한 것은 나쁜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건 당연한 것.
내가 놈들에게 쫓기고 먹히는 것 또한 당연하고 올바른 것.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가 강해진다면 놈들을 전부 잡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보잘것없는 몸뚱어리 하나. 나는 손아귀에 낡은 검 한 자루만을 거머쥐고 그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건드리면 부서질 듯 조심스럽게 낙엽 위를 밟는 스라소니의 신중함을 배웠다. 때때로는 죽은 척도 할 줄 아는 코요테의 영리함을 배웠고,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수로 극복하는 승냥이의 처세술과 이리의 포악함을 배웠다.
그들은 내 발자취. 그들은 나의 기록.
자연을 벗 삼아 스승 삼아. 내 목숨 하나 내 모든 걸 걸고.
나보다 월등히 강한 포식자들 사이에서
나는
배워왔고
또한
살아남았다.
푸화아아악!!!!!
칼날이 거구의 지방을 갈랐다. 피가 파도처럼 뿜어나왔다. 더욱 힘을 주었다. 흘러넘치도록. 뼈를 가르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았다. 애원하는 손목을 베었다. 손아귀에서 빼앗은 창을 저 멀리 내던졌다.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간청하는 놈의 뱃거죽을 찢어발겼다.
놈은 나에게 패배했다.
나에게 먹혔던 여느 마물들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초승달처럼 입고리를 찢자 주변에 몰려든 인파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마차 안에서 몰래 지켜보던 상인이 실금하며 주저앉았고, 모험가들이 칼을 떨구고 뒷걸음질쳤다.
장검을 어깨에 걸치자 피투성이 사내가 엉금엉금 기어 내 발목을 붙들었다.
이내 남은 한쪽 손으로 애원해온다.
“..사, 살려... 줘...”
“.....”
피식.
쪼그려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차가운 냉소를 자아냈다. 간절한 호소에도 동정심 따위는 들지 않는다. 상대가 악인이라서가 아니다. 나를 죽이려 들었으니 죽인다.
그저 그뿐.
녀석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건, 어떤 죄를 지었건 내 알 바 아니다.
모험가들을 습격해서 금품을 갈취하려 했건, 노예로 팔아넘기려 했든 하등 중요치 않다.
나는 더한 짓도 저질러봤으니까.
“...이제 가라.”
목덜미를 짓밟았다. 칼자루를 역수로 쥐었다. 검날을 수직으로 세웠다. 드높게 들어올린다. 지방으로 범벅된 날붙이가 달빛에 번뜩였다.
끝.
이 자는 이제 내 피와 살이 되어 과거를 장식할 것이다.
손아귀에 힘을 실어 내리찍으려던 순간
“...거기까지 해 주셔야겠어요.”
“도란 씨.”
지마가 싱긋 웃으며 내 목에 칼을 겨누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