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상단 호위
* * *
[015] 상단 호위 #5
머릿속의 모든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끈덕지게 발목을 붙잡던 위화감이 차갑게, 차갑게 식어 제 자리를 찾아간다.
고장 난 괘종시계에 태엽을 끼우듯.
형태를 갖추었다.
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으로.
“...너였구나.”
많은 것이 함축된 물음. 그 물음에ㅡ
“맞아요, 도란 씨.”
지마가 해맑게 웃어보였다.
*
화르르르!
식었던 모닥불이 다시금 열기를 되찾았다. 음산한 불길이 야영지에 기울자 패인 자국, 피로 젖은 풀잎과 그늘진 얼굴을 비추었다. 습격에서 살아남은 모험가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만신창이였고, 망종(??)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두 손발이 묶인 채 꿇어 앉혀졌다.
전형적인 도적의 상을 한 남성이 그들의 머리채를 붙잡고 턱 아래 단도를 들이밀었다.
“새끼들... 거세당한 수퇘지처럼 얌전해져가지곤, 어디 한 번 아까처럼 날뛰어 보시지?”
“....”
“이렇게 된 거 맛보기로 손가락 한두 개만...”
“그쯤 해 둬 인마. 괜히 일 벌리지 말고.”
“야 시발, 이 새끼들이 우리 식구 죽이는 거 못 봤냐? 지금도 저기서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냥 놔두자고? 난 도저히 그 꼴 못 보겠다. 어떻게든 배로 되갚아 주지 않으면...”
“아직 대장이 가만히 있잖아. 너도 같이 눕기 싫으면 잠자코 있어. 복수는 조금 이따가 해도 충분하니까.”
“...씨발.”
사내가 거칠게 돌부리를 걷어찼다. 튕겨나간 돌멩이가 불붙은 장작을 바스러트리자 큰 불똥이 튀어 마부석에 걸터앉은 한 남자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동백나무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적발에서는 더 이상 앳된 면모를 찾을 수 없었고, 세상만사 흥미를 잃은 듯 나른한 얼굴에서는 나흘 내내 봐왔던 발랄함 따위 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 한대 뒤섞여 구르는 시체들이 내비쳤다.
모두가 숨죽이며 운명을 기다리는 가운데, 마차 문짝이 거칠게 떨어져나가며 세 남성이 이끌려 나왔다.
“으아악!!”
“이, 이거 놓으시오!”
“우리가 누군 줄 알... 히이익...!”
“그래, 저 송장처럼 대가리에 구멍 뚫리기 싫으면 얌전히 입 다물고 있어. 싱싱한 놈부터 꼬챙이에 끼워줄 테니까. 저거 보이지? 이젠 너흴 지켜줄 모험가도 없다고.”
“...다, 당신들은 대체...”
“응?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도적 처음 봐?”
“으흐흑...”
중년이 저항을 그만두었다. 이내 거친 숨을 씨근덕거리며 오열하기 시작한다. 도적은 상인의 영원한 천적과도 같은 바, 그 악명에 대해서는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어봤을 테니까.
놈들에게 한 번 붙잡힌 이상 미래는 없다.
기껏해야 목숨을 부지한 채 노예로 팔려가는 게 최선이겠지.
혹여나 표적이 될까 봐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자니, 마침내 지마라고 불리었던 남성이 마부석에서 내려오며 정적을 깼다.
“...콩드, 몇 명 죽었는지 파악해.”
“넵!!”
“제프, 무기랑 돈이 될 만한 것들을 한군데로 몰아.”
“본부대로.”
“라일, 넌 은닉한 무장은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들었지? 좋은 말로 할 때 이실직고하는 게 나을 거다. 만약 숨기고 있다가 나오면... 좋은 꼴은 못 볼 거야.”
사내가 톱날 단검을 혀로 핥으며 지껄였다. 이내 저 혼자 미친 듯이 웃어젖히더니 언제라도 숨통을 끊을 듯 위협하며 모험가들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새끼들... 바짝 쫄아가지고. 야, 이건 뭐냐?”
“그, 그건... 베그디아 교에서 직접 구한 성수...”
“시발!! 이렇게 좋은 게 있었으면 미리 말했어야지!!! ...왜 조용히 있었냐?”
“.....”
“...귀여운 새끼. 그래 그래, 넌 안 죽일 테니까 그렇게 겁먹지... 아니, 생각해보면 볼수록 괘씸하네, 좀 맞자.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각박한 세상에 이 좋은 걸 지 혼자만 쓰려고 했단 말이야? ....넌 뭘 꼬라봐?”
사내가 뺨따귀를 세차게 후려갈기던 도중 다른 모험가에게 화살을 돌렸다.
표적이 된 모험가가 경견하게 입을 열었다.
“...홀몸으로 편찮은 노부를 모신 지도 어연 스무 해. 가진 건 이 몸뚱아리밖에...”
“그럼 씨발 처맞든가. 뭘 당당하게 쳐다보고 지랄이야. 눈 안 깔아?”
“.....”
“새끼 한 대 맞았다고 질질 짜기는... 잠깐, 너 얼굴이 낯이 익은데... 아까 나랑 싸웠던 놈 아니야? 너 활은 어따가 팔아먹었냐?”
“없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씨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앙?”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믿음 따위 창관에나 가서 찾고 너는 일단 손가락부터 자르고 시작하자. 왜 사람한테 손가락이 다섯 개나 있는 줄 알아? 그래야 한두 개 없어져도 티가 안 나거든. 너도 곧 적응하게 될 거야.”
사내가 모험가 앞에서 듬성듬성한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내 처절하게 저항하는 모험가의 손등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단도로 내려찍으려는 찰나, 지마가 무심하게 다가와 읊조렸다.
“...너희들이 어떤 무장을 소지했는지는 나흘 내내 질리도록 봐 왔어.. 속일 생각 하지 마.. 그래도 굳이 수작을 부리겠다면...”
“커헉!!!!”
“이렇게 되는 거야.”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한 모험가의 멱이 찢겨나갔다. 실로 깔끔한 솜씨. 한두 번 해본 실력이 아니다.
지마가 무덤덤하게 뺨에 튄 피를 닦아내자 모험가들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이내 너나 할 것 없이 품속에 숨긴 무기를 실토하고 있자니 한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와 그에게 아뢰었다.
“...대장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말해.”
“...시체들을 다 모아 봤는데 대장님이 말씀하셨던 숫자보다 한 놈이 모자랍니다.”
“비켜.”
지마가 거칠게 부하를 밀쳐냈다. 이내 주검들이 쌓여있는 야영지 한구석으로 다가가 시체의 면면을 살피더니 우리를 돌아보며 실소했다.
“...아, 그놈인가.. 걱정할 거 없다. 래서 래빗 한 마리조차 못 잡는 병신이야. 어디 가서 마물 밥이나 되겠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기나 하는 떨거지 새끼.”
“푸하하하하!!! 래서 래빗도 못 잡는 병신이 있다고?!! 그놈 면상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크흐흐흐... 그런 머저리 새끼가 있단 말이야?”
“...도, 도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요...?”
“부탁하오... 다섯 살 난 딸아이가 있소...”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가학적인 웃음에 지레 겁먹은 상인들이 호소했지만, 지마는 가볍게 콧방귀를 껴 무시하고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이어 단검에 눌어붙은 혈흔을 긁어내며 읊조렸다.
“...너희는 전부 노예로 팔려가게 될 거야. 하지만 딱 한번 선택할 기회를 줄게. 하나는 마석 광산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제국에 검투사로 팔려 가는 거야. 어느 쪽이나 고통스럽지만 전자는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겠지. ...어떡할래?”
“크윽...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은 겐가!!”
한 상인이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트리자 지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군. 우리에겐 이게 본업이야. 너희가 시장에 물건을 팔고 기사들이 시민을 보호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람을 사냥하지. 지극히 당연한 이치야. 원망하려거든 너희를 저버린 신을 탓해.”
“크윽...! 모험가가 도적이랑 결탁하고도 무사할 줄 아시오?! 우리가 죽으면 길드에서 조사가 들어올 거요!! 당신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을 터, 지금 놓아주면 없던 일로 해 줄 테니...”
“...당연히 위장 신분이겠지. 지마란 이름도 본명이 아닐 테고.”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잔뜩 흥분한 상인을 이대로 떠벌거리게 놔둬봤자 지마의 성질을 돋우는 꼴밖에 안 된다. 지금은 그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허나 녀석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돌연 표정을 바꾸어 무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흘 내내 보아왔던 그 얼굴.
“네, 당신 말이 맞아요 도란 씨. 제 모험가 패도 다른 사람 걸 빼앗은 거고요. 열다섯 살짜리 꼬마였는데... 엄청 속이기 쉬웠죠. 인상착의가 닮아서 의심받을 일도 없었고요. 그래도 이번엔 상단을 건드렸으니 더는 못쓰겠네요.”
녀석이 품에서 모험가 패를 꺼내들어 흔들고는 미련 없이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화르르륵...!!
“지, 진짜로 버리다니...!”
상인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이걸로 놈은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다시금 민간인들 틈에 섞여 살아가겠지. 이 세계에서는 모험가의 신원을 증명할 수단이 많지 않으니까. 그나마 방법이라고 할 만한 건 담당 길드 접수원이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도시를 옮기면 무용지물이다.
애초에 모험가 의뢰를 수주할 생각이 아니라면 길드 패가 꼭 필요하지도 않고.
놈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럴 심산이었군. ...그럼 카일을 죽인 것도 너냐?”
“네, 물론이죠.”
“어째서...”
“그야 당연히 계획에 방해돼서죠. 그 사람의 무력은 조금 경계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첫째 날 밤 동료와 접선을 하려다가 들킨 뒤부터 계속 절 의심하더라고요.”
“첫째 날 밤? 설마...”
“맞아요. 저희 숲 속에서 마주쳤을 때 기억나죠? 참나... 끝까지 따라와서 얼마나 곤혹스러웠던지... 그땐 정말 큰일 났다 싶었는데 마침 도란 씨가 나타나 줘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래서 불침번 때 사실대로 실토하겠다는 걸 구실로 제 텐트에 불러냈는데.. 단번에 목을 찌르니까 찍소리도 못하고 죽는 거 있죠?”
지마가 능청스럽게 손바닥을 벌리며 웃어보였다. 그 새끼손가락에는 카일의 이름이 적힌 피 묻은 모험가 패가 대롱대롱 걸려 있다. 그 섬뜩한 광경을 목도하고 있자니 이제껏 녀석이 보여준 모든 모습이 전부 연기였다는 게 다시금 실감 났다.
허나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다.
“...몬스터들이 몰려온 것도 네가 한 짓이야?”
“네, 그럼요.”
지마가 능숙하게 손짓하자 부하 한 명이 낯익은 배낭을 가지고 왔다. 나흘 내내 녀석이 짊어졌던 바로 그 배낭.
놈이 배낭 깊숙이 손을 집어넣더니 두꺼운 붕대로 감싼 무언가를 꺼내 휙 내던졌다. 그 물체가 잔디 위를 굴러 내 앞에서 멈추자 천이 벗겨지며 안에 있던 시뻘건 덩어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모험가와 상인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몸부림쳤다.
“히이이익...!!”
“저, 저건...!”
“시발!!! 저런 걸 계속 들고 다녔단 말이야?!!”
“..도란 씨도 그게 뭔지 아시나요?”
“....나가의 심장.”
어떻게 모를까.
베라스틴을 떠나오기 전, 말톤과 들렀던 시장에서 20실링에 팔고 있었던 물건이다. 특유의 냄새로 마물을 불러들인다고 했던가. 허나 어린아이 손바닥 크기에 불과했던 그때와는 달리 눈앞의 심장은 온전했으며, 생명을 잃은 지 한참이 지났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맥동하며 불길한 기운을 흩뿌렸다.
나직하게 내뱉었다.
“...이걸로 몬스터들을 유인한 건가.”
“네, 돈깨나 들였다고요? 온전한 상태를 구하려고 발품 좀 팔았죠. 사실 마물들로 모험가 수를 좀 줄여놓을려고 했는데... 어떤 F등급 씨가 너무 잘 싸워서 실패했어요. 뭐, 그래도 덕분에 전력을 파악할 수 있었느니 본전은 뽑은 셈 칠까요?”
녀석이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쳐다봐왔다.
하지만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멋쩍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돌연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자, 이 정도 어울려 줬으니 시간 끌기는 그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도란, 혹시 나랑 같이 일해볼 생각 없어?”
“...뭐라고?”
“네가 싸우는 모습을 봤는데 솔직히 이대로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 검술 실력도 수준급이고 무엇보다 한돈이를 쓰러뜨린 사람은 네가 처음이거든. 우리에겐 강한 사람이 필요해. 만약 함께하겠다고 하면 내 바로 아랫자리까지 내줄 의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녀석이 힐끗 구석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고통에 신음하며 가쁜 호흡을 몰아내쉬는 거한이 누워있었다. 그렇게까지 몰아붙였는데도 숨이 끊기지 않은 모양.
그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떼며 물었다.
“...거절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뭐 굳이 그러겠다면... 다른 모험가들처럼 탄광에 가게 되겠지. 아니다, 너는 검투사가 더 체질에 맞겠군. 안타깝게도 우리에 대해 떠벌거리고 다니면 곤란하니 혀를 잘라야겠지만. ...그러니까 순순히 합류해 도란.”
“.....”
놈들과 같이 약탈을 하며 살아간다라...
어쩌면 나쁘지 않은 제안일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도적이 되면 아무런 가책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까. 지금껏 날 멸시해왔던 모험가들을 찾아내 잔인하게 복수하거나 오늘 놈들이 한 것처럼 상단을 급습해 떼돈을 벌 수도 있겠지.
...물론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손 씻었으니 딴 사람 찾아봐.”
“....정말로 같이할 생각 없어? 나흘간 함께한 정을 봐서라도 한 번 물릴 기회를 줄게. 이번에도 거절하면 너에게 위해를 가할 수밖에 없어.”
“입 아프게 하지 마. 동료를 찾거든 기사단에나 한번 가보던가. 거긴 너 좋다고 따라올 사람 꽤 많을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래,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어. 협상 결렬이다. 한돈, 이자의 혀를 잘라.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안 되니까 너무 난폭하게 하지는 말고.”
“바아아아압...”
거구가 기다렸다는 듯 피철갑이 된 몸을 이끌고 다가왔다. 난도질당해 덜렁거리는 살점을 보아하니 며칠 안 가 감염으로 죽을 게 분명했지만, 눈동자에 맺힌 귀기 서린 분노와 거침없는 발걸음은 갈 땐 가더라도 나 한 명쯤 데리고 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전해져왔다.
시선으로 염소를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거겠지.
지마가 등을 돌리며 읊조렸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어?”
“남길 말?”
“그래, 이제 더 이상 못 하게 될 테니까.”
“.....”
그런가.
그래, 이 정도면 됐겠지.
“..두 가지.”
“....?”
“너희들이 간과한 게 두 가지 있어.”
“간과하다니 대체...”
“하나는 나부터 몸수색을 하지 않은 거고...”
“.....”
네놈들이 저지른 두 가지 실수.
첫 번째는 나부터 몸수색을 하지 않은 것.
두 번째는ㅡ
“말톤 그 새끼 고추가 조금 헐긴 했어도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아.”
“크허헉!!!!!”
느닷없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 단말마를 기점으로 무수한 화살이 쇄도해 도적의 목숨을 앗아갔다.
놈들이 우왕좌왕하며 외쳤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스, 습격이다!! 누군가가 우리한테 화살을 퍼붓고 있어!!!”
“젠장...!! 다들 당황하지 말... 끄아아악!!!”
“흩어져라!!! 모두 산개해서 궁사를 찾.... 크헉!!!”
“어디냐!! 어디...!”
“불!! 모닥불을 지펴라!!!”
어떠한 감정조차 실리지 않은 화살. 그저 죽인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쏘아진 살수(?手).
하지만 그렇기에 그 누구도 그 궤적을 읽을 수 없었다.
“대, 대장!!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나도 알아!!! 다들 바위 뒤로 엄폐해!!! 절대 여지를 주지 마!!!”
“그,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 꺼허으윽!!”
“제, 제기랄...!!”
“.....”
광소했다.
달빛조차 외면한 어둠 속. 일렁이는 그림자들 사이. 초연한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 그 소름 끼치는 존재의 차가운 날숨 하나가 닿을 때마다 한 생명이 시들어 고개를 떨군다.
지금 이곳은 그의 영역. 그가 지배하는 이 공간에서 허락받지 않은 생명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보다 죽음에 근접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
그걸 사신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어딘가에서 소름 끼치게 웃고 있을 동료를 생각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으아아악!!!!”
“흐... 흩어져... 커허헉!!!!”
“바, 바아아압...!”
한돈이 언월도를 짊어지고 달려들었지만, 내가 한발 빨랐다.
어느새 자유로워진 손발로 지면을 박차 놈의 상체를 들이받았다.
묶인 줄만 알았던 내 손에는 은백색으로 번뜩이는 코볼트 킹의 발톱이 쥐여져 있었고
“으랴아아압!!!!”
“바아아아아아압!!!!”
놈의 펄떡거리는 심장에 칼날을 박아넣어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다.
육중한 살덩어리에서 거칠게 단검을 뽑아내자 지마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뒷걸음질쳤다.
“아, 아니 대체 어떻게...!”
“어떻게긴, 혹시나 해서 지금까지 줄곧 숨겨왔지. 네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거 모를 줄 알았냐? 덕분에 소재 갈무리할 때도 장검으로 하느라 애먹었다.”
“크윽...! 이 교활한 새끼...!!”
“교활하긴 개뿔이. 처음 보는 모험가를 어떻게 믿어? 당연한 거다 애송아.”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비기(??).
그 말대로,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녀석 앞에서 단검을 내보이지 않았다. 놈이 변절자일 걸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불과 며칠 전에 알게 된 사람을 신뢰할 정도로 내가 살아온 환경은 순탄치 못했다.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겨 허겁지겁 달아나는 지마를 뒤쫓자 양옆에서 기회를 노리던 도적이 덤벼들었다.
허나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었다.
“죽어라!!! ...꺼흐흑!!”
“코, 콩드...!! 너 잘도 내 전우를...!! 죽... 끄아아아악!!!”
바람을 가르고 쇄도해온 화살이 그들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으니까.
메이스를 버리고 활을 든 말톤은 전장의 화신 그 자체였다.
그 잔혹한 광경에 전율하며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지고만 있을 수는 없지.”
질주했다.
전장을 활보했다. 눈앞의 움직이는 것들을 쓸어담았다. 뒤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놈들은 내 지척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싱싱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흩어졌으니.
한 놈의 모가지를 붙들고 뱃가죽을 가르자 창자가 쏟아졌다. 단검으로 목을 베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나온다. 지면을 낮게 굴러 육박하는 날붙이를 회피했고, 자세를 바로잡음과 동시에 아킬레스건을 깊게 베었다.
일방적인 유린(??).
학살(??).
무아지경으로 적을 도륙해나가던 중, 처절한 비명이 멎어감에 따라 고개를 드니 어느새 도적들은 싸늘하게 식어 바닥을 구르는 중이었다.
딱 한 놈만 빼고.
망연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지마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불현듯 발자국 소리가 겹쳐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익숙한 녀석이 밤하늘의 그림자에서 나와 내 곁에 나란히 섰다.
지마의 입술이 벌어지며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떻게...”
불합리하다.
대체 어떻게 래서 래빗 따위에도 쩔쩔매던 사내가 이런 무위를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 물음에 답해주었다.
“...이 새끼 취향이 조금 독특해서 그렇지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거든. 아마 나보다도 쌜걸? 대인전은 말할 것도 없고.”
“으윽....!!”
지마가 최우의 발악이라도 하듯 단검을 거머쥐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육박해왔다. 하지만 나는 자세를 풀고 그저 방관할 뿐.
지금 내 곁에는 녀석이 있으니까.
푸화아아악!!!!
“...크흐. 역시 난 조잡한 활 따위보다는 직접 때려 부수는 게 성미에 맞네.”
말톤이 산산조각 난 머리통에서 메이스를 뽑아들며 읊조렸다.
언제나처럼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미소지어 화답하자 어느새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