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크누트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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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크누트 길드 #1
날이 밝았다.
여명이 들판을 환하게 밝히자 잔혹한 참상 또한 그 전모를 내비쳤다.
우리는 도적과 모험가의 주검을 수습한 뒤 다시 행군길에 올랐다.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한가로이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자니 상인이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당신들이 아니었더라면 저희는 지금쯤 두손 두발이 묶여서 노예로 팔려나가고 있었을 겁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갚을 거면 돈으로...”
“정말.... 모험가님의 인덕에는 또 한 번 감탄하게 되는군요. 이렇게 큰일을 해내고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다니....”
“아니 돈으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도적들의 습격으로 모험가 반절이 죽었다. 이번 일이 대외에 알려지면 길드의 조사를 받는 건 불가피할 테지만, 상인들이 알아서 잘 말해줄 테니 큰 걱정은 들지 않는다. 애초에 이번 건 상대가 도적이란 걸 알아보지 못하고 퀘스트를 내준 길드에게도 책임이 있으니까.
사망한 모험가의 주검은 관습에 따라 장비를 벗긴 뒤 화장했다. 그들의 유품은 길드를 통해 유족에게 전달될 터, 만약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경매를 통해 현금으로 환산한 뒤 나머지 모험가들이랑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상인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날 쳐다보던 와중,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자 불안하게 뒤쪽을 돌아보며 읊조렸다.
“저... 모험가님.. 저거 정말 저렇게 놔둬도 되겠습니까...? 저, 저기 핏물 떨어지는 것 좀 보세요...! 혹시 몬스터들이 꼬이지는...”
“뭐... 어쩔 수 없죠.”
“으...”
“...걱정 말게나. 이제 마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강한 마물은 안 나올 게야. 게다가 지금까지는 워낙 특별한 상황이었잖은가? 나가의 심장도 처리했으니 그때처럼 몬스터가 무리 지어 습격할 일은 없네.”
“그, 그렇겠죠...? 엘프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덜컹!!
“......”
단단한 무언가가 마차 바큇살에 끼자 다시 한번 큰 진동이 일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내다보니 짐마차 뒤편에 주렁주렁 매달린 도적들의 머리통이 보인다.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포도알처럼 머리채가 묶여 있는 모습은 연쇄살인마의 자택 지하실에서나 발견될 법한 오브제처럼 기괴했지만, 이는 다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해둔 거다.
그야 놈들의 수급이 있어야지 신원을 대조해서 현상금을 받을 테니까.
한돈이란 녀석은 혼자서 모험가 몇몇을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강했고, 지마는 이미 수차례 약탈 경험이 있다고 스스로 증언했다. 심지어 스무 명이 넘어가는 대규모 도적단에 값비싼 나가의 심장까지 준비한 놈들이니 한두 명쯤 현상금이 붙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더욱이 도적 떼에 대한 증거품으로 제시할 수도 있을 테고.
유독 처참하게 망가진 적발 사내의 머리통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 뒤로 제각기 쓰러뜨린 도적의 수급을 질질 끌며 따라오는 모험가들이 보였다. 그들의 면면에서는 동료를 잃은 데에 대한 슬픔, 자책과 무력감, 안도 따위가 부표처럼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어떤 도적이 자기가 해치운 놈인지를 두고 작은 다툼이 벌어졌지만, 말톤이 중재해준 덕분에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부지런히 앞길을 나아가던 중, 맞은편에 앉은 상인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나저나 당신 같은 사람이 F급이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요. 혹시 비밀 업무를 수행 중인 왕실 특수부대 같은 겁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이런...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나이를 먹으니 주책이 늘어서... 방금 질문은 잊어주십시오. 비밀 엄수는 꼭 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이젠 정정하기도 귀찮다.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대자 말톤이 쓱 어깨에 손을 얹어왔다.
“흐흐... 드디어 다른 사람들도 자네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하는군. 그 망나니 같았던 도란이 인정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이거 원 내가 다 감격스럽구먼...”
“...너까지 왜 그러냐.”
“..말톤 님에게도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봐왔던 모험가 중에 단연코 최고의 활 솜씨였습니다. 엘프들이 활을 잘 쏜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흐흐... 과찬일세. 감사 인사를 할 거면 여기 앉은 도란에게 하게. 그가 시간을 끌어준 덕에 충분한 화살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그렇군요...! 포로로 붙잡혀 있는 와중에도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니... 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
말톤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수통을 들이켰지만, 나는 알고 있다. 방금 녀석이 물 흐르듯 화제를 바꾸었다는 걸.
녀석은 활뿐만 아니라 온갖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막상 본인은 두개골을 부술 때의 손맛을 잊을 수가 없다며 메이스만을 애용하지만, 글쎄...
인간을 사냥할 때의 말톤은 한없이 치밀하고 잔혹하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은 덤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놓는다. 스스로 자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범인들이 넘볼 수 없는 전문성이 묻어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나조차도 진심으로 녀석과 맞붙는다면 순식간에 목이 떨어지겠지.
새삼스럽게 녀석의 과거에 대해 추측하고 있자니 마부석에 나가 있던 상인이 드높게 외쳤다.
“마을이다!! 메다올리눔 마을이 보입니다 아무르 님!!!”
“정말인가?!”
대화를 나누던 상인이 헐레벌떡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나와 말톤 또한 창가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저 멀리 지평선 끝에 거뭇거뭇한 무언가가 보였다.
“...아무래도 거의 다 온 모양이군.”
“드디어...”
작은 티클 크기에 불과했던 점들이 뚜렷한 형체를 갖출 정도로 다가가자 그것들이 전부 천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개중에는 사람 한 명이 운신하는 게 고작일 정도로 자그마한 것도 있었지만, 유람단이 곡예를 펼칠 때 쓰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것도 드문드문 존재했다.
바람을 타고 온 맛있는 냄새에 군침 흘리던 찰나, 한 가지 위화감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는 성벽이 없네? 하다못해 목책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근처에 마물이 없지는 않을 거 아냐.”
“흠... 이곳은 마을이 아니라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조금 남았지.”
“그래? 그럼 왜 다들 여기서 죽치고 있는 건데?”
“마을 안에는 저만한 수의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으니까 그런 걸세. 그러니 다들 여기서 야영하는 게지, 게다가 그 안은 물가도 비쌀 테니 말이야.”
“아... 하긴...”
...잠깐.
“그럼 이 사람들이 전부 던전 하나 때문에 몰려든 거라고...? 발견된 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그 정도로 규모가 큰 모양이라네. 근거는 없지만 고대 유물이 발견됐다는 소문도 있고.”
“미친! 고대 유물?! 최소 몇 골드씩이나 한다는 그거!?!”
잔뜩 흥분해 소리치자 말톤이 두 팔을 뻗어 진정시켰다.
“조금 진정하게 도란, 어디까지나 풍문일세. ...그래도 이 정도 인파가 몰려든 걸 보니 아예 허왕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군.”
“시발 말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고대 유적을 찾는다!! 방해하는 놈들이 있으면 싹 다 죽여서라도 유물 하나씩 손에 쥐고 돌아가는 거야!”
“흐흐... 좋은 마음가짐일세. 과연 악마나 떠올릴 법한 발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시끄러 인마. 너는 돈이 많으니까 여유가 넘치는 거지 나처럼 일주일 굶고 살아봐. 진짜 눈 돌아갈걸?”
고대 유물이라고 하면 보통 대전쟁 이전 문명에서 나온 산물을 지칭한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월등히 진보한 마술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이따금씩 현대의 능력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물품이 출토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고대 유물이 경매장에 나왔다 하면 마법사와 귀족들이 앞다투어 경쟁을 벌이는 것도 당연하지.
만약 그 안에 담긴 기술을 해석하는 데 성공한다면 평생 다 쓰지도 못할 부를 얻을 게 분명하다. 마법사라면 과거에 유실된 대마법을 이용해 왕국의 골칫덩어리를 해결하거나 넘보지 못할 몬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고, 검사라면 옛 영웅이 쓰던 무구를 찾아낼 수도 있다.
정말 드문 일이지만, 고대의 신전이나 도시 전체가 땅에 묻혔다가 발굴되는 경우도 존재하는 만큼 어떤 던전에서는 고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진다고 한다.
그냥 꿈만 같은 이야기다.
“..희망에 젖는 것도 좋지만 이제 슬슬 마차에서 내릴 채비를 하게. 다들 작별하려는 모양이니.”
“그렇네... 오래도 걸렸다. 그 빌어먹을 도적 새끼들... 세금도 안 내는 주제에 성가시게 굴긴.”
쓰라린 상처를 매만지며 하차하자 모험가들은 이미 떠나갈 준비를 마친 뒤였다. 처음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열댓을 웃돌았던 모험가들은 그 수가 확연히 줄어있었고,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썩 표정이 좋지 못했다.
상인이 그들에게 은화가 든 주머니를 건네며 추모했다.
“...고맙네, 자네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네. 무수한 마물과 도적들에 맞서던 그 헌신, 내 눈을 감는 날까지 절대 잊지 않도록 하겠네. 순직한 전사들의 넋은 각자의 신에게 올라가 영원히 영웅으로서 기억되겠지... 내 예정된 보수보다 조금 더 넣었으니 한번 확인해보시게.”
““......””
모험가들이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며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개중엔 무표정하게 발길을 옮기는 사내도 있었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자도 있었으며, 그런 동료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는 이도 있었다.
몇몇이 나와 말톤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표한 뒤 뿔뿔이 흩어지자 상인이 몸을 돌려 말했다.
“그럼... 두 분과도 이제 작별이군요.. 지울 수 없는 큰 빚을 졌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저희가 길드에 상세히 보고하겠습니다. ”
“.....”
그들이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저 도적의 수급들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길드에 자초지종을 설명할 때 현상금 수속도 같이 밟아놓겠습니다. 각자 앞으로 달아 놓을 테니 나중에 길드에서 받아가시면 됩니다.”
“.....”
당연하지만, 이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빤히 응시하며 가늠하고 있자니 중년이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저희를 바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고 맡겨주셨으면 좋겠군요. 아무리 상인들이 돈을 밝힌다고 한들 눈앞의 금전에 혹해 생명의 은인을 저버릴 정도로 배은망덕하지는 않습니다. 오필리아 상단의 이름을 걸고 떼어먹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오필리아 상단이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이 세계에서도 상인은 신용으로 먹고 사는 존재들이니까. 고작 몇 푼 떼어먹겠다고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약소 규모의 상단도 아닐뿐더러 길드에 의뢰한 내역도 남아있을 테니 뭣하면 추후에 청구하면 된다.
만약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끝까지 쫓아가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의 보수는 여기 있습니다.”
상인이 깍듯하게 고개 숙이며 동전 주머니를 건넸다. 내심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담담하게 받아들었지만,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감에 놀라 재빨리 안을 확인했다.
“둘.. 넷.. 여섯... 열다섯 닢이나...? 어째서 이렇게나 많이... 분명 보수는 2실링이었을 텐데...”
“소정의 감사와 노획한 장비에 대한 대금입니다. 도적들이 쓰던 무기라 관리 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녹여서 주괴로 만들면 재활용할 수 있겠더군요. 특히 저 언월도에 높은 가격이 책정됐습니다. ...사실은 더 챙겨드리고 싶었지만 저희도 여윳돈이 별로 없어서...”
“...이만큼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금전은 유용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무한한 신뢰가 싹트기 시작했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성의는 머니로 표현하는 게 제일이다.
환한 미소로 상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헤어지고 난 후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역시 착하게 살면 복이 굴러들어온다니까 클클... 도적도 잡고 돈도 벌고 완전 일석이조 아냐? 이거 던전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짐이 좋은걸?”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잔뜩 인상 쓰고 있지 않았나? 초장부터 이런 일을 겪다니 운수가 없다면서...”
“그거야 때에 따라 다른 거지. 갑자기 이런 거액을 벌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코볼트 킹을 잡았을 때보다 짭잘한데... 야, 이렇게 된 거 기왕 나도 현상금 사냥꾼 한번 해볼까?”
“그럼 고대 유적은 어떡할 건가?”
“아 그러네... 뭐 그건 그거대로. 그보다 이제 어떡할 거야? 난 이곳 지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너는 이 마을에 들린 적이 있다고 했지?”
돈주머니를 품 안에 갈무리하며 묻자 말톤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추억에 잠긴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네,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이곳은 여전하군. 날 따라오게.”
“...어디 가게? 난 네가 뭐만 하자고 하면 불안하더라.”
“그거야...”
불현듯 녀석이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에 의아하게 쳐다보자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흐흐... 던전 마을에 도착했으니 이제 새 파티원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신용할 수 있는 자로 말이야...”
기행을 벌이기 전이면 으레 보여주었던 불길한 미소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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