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크누트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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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크누트 길드 #2
“라마 버섯 팝니다!! 개당 50페니!!”
“자, 몸에 좋은 만능 영양제가 단돈 2실링!! 저명한 연금술사 라프노가 만든 회심의 역작입니다!!!”
“하급 같은 최하급 해독제 절찬리 판매중! 설마 해독제도 없이 던전에 들어가는 머저리는 없겠지? 가격은 5실링이다!!”
“당신의 생명을 지켜줄 방패가 필요할 걸세. 내 두말 안 하지. 30실링만 내게.”
“아니 미친...!”
미친 날강도들!
해독제.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하급 정도라면 대게 1실링 안쪽으로 구할 수 있다. 하물며 그것이 최하급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헌데 그뿐만이 아니다.
“...판자에 색칠 좀 한 거 가지고 방패라고 우겨 판다고? 30실링? 저 영양제라는 건 그냥 맹물에다가 색소 탄 거잖아! 진짜 양심 터진 놈들만 모아놨나...!”
애덤 스미스가 이 광경을 봤다면 무덤 속에서 육두문자를 외치며 뛰쳐나올 거다!
말톤이 여느 때처럼 태평한 어조로 말했다.
“흐흐...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더 비쌀 걸세.”
“시발... 간만에 번 돈으로 쇼핑 좀 해보나 했는데...”
마을 외각은 이미 한데 모인 사람들로 상권이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물가가 비싼 정도를 넘어 살인적인 수준이라는 게 문제.
현재 수중에 있는 돈은 17실링 남짓. 이번 의뢰 보수로 받은 15실링과 장비를 맞추고 남은 돈, 아리엘이 약초 채집 명목으로 준 은화와 도적들의 주머니를 뒤져서 나온 동전의 합계가 그쯤 된다.
평소라면 손이 떨릴 정도의 거금이지만, 이 양심을 녹즙기로 갈아 마신 듯한 물가 앞에선 한없이 조촐하게만 느껴졌다.
“이래서 어디 파티원은 구할 수 있으려나... 야, 여기 머물렀다간 일주일은커녕 이틀도 못 버티겠다. 대체 어디서 동료를 구하겠다는 건데?”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저기 보이는가?”
“뭐가 있어? 잠시만 저건...”
녀석이 눈짓한 방향을 유심히 살피자 혼잡한 인파 너머로 기다란 무언가가 끊임없이 늘어서 있었다. 베라스틴에 정착하기 전, 방랑자처럼 마을과 마을을 떠돌 때면 으레 보아왔던 풍경이기에 곧바로 눈치채고 물었다.
“목책이잖아. 저기가 마을의 경계선이라는 거지? ...왜, 설마 마을 안으로 들어갈 셈이야?”
“바로 맞혔네. 워낙 오래 전에 들린 곳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분명 저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동료를 구할 수 있을 걸세.”
“아니 솔직히 좀 불안한데... 마을 안은 여기보다 물가가 비싸다며. ....설마 입장료도 따로 받는 건 아니겠지...?”
“.....”
“....진짜야?”
“...이런 기회를 사람들이 놓칠 리 없잖은가. 마을 내 인구 포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입장료쯤은 거두겠지. 상식일세.”
“시팔... 집나오면 고생이라더니..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사실 집도 없지만.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늘어선 목책을 따라 나아갔다. 성인 남성의 두 배를 웃도는 높이의 목책 위에는 드문드문 경계병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호기심에 나무 틈새로 슬쩍 안쪽을 엿보려도 해봤지만 반대편이 비쳐 보이지 않는 거로 보아 사이사이에 황토라도 발라둔 모양이다.
“...작은 마을이라고 들어서 별거 없을 줄 알았는데.. 경계는 철저하게 하는 모양이네.”
몬스터가 살아 숨 쉬고 도적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다. 길가의 꼬맹이도 단검 하나 정도씩은 들고 다니는 게 상식인 이 세계에서 외부 방비에 공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붐비는 인파를 거슬러 나아가다 보니 마침내 경비병들이 지키고 선 마을 입구가 보였다. 다만 베라스틴의 성문 앞 풍경을 상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그곳엔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지금 누구 면전이라고 새치기를 해?!”
“뭐래, 새치기? 증거 있냐? 증거 있냐고?!”
“그래 씨발, 이 칼이 증거다. 그 배때기에 손수 물어봐 주지!!”
“오냐 마침 열불 나던 참인데 너 잘 걸렸다!”
“짭짭할 육포 팝니다!! 시원한 과실주도 있어요!!!”
“새콤한 코코 열매 팔아요! 단돈 10페니!!”
“어떤 새끼가 코코 열매를 10페니에 파냐?!!”
“새콤달콤한 코코 열매 팔아요!! 15페니!!!”
“어떤새끼냐아아아아!!!”
“.....”
막 불을 다루게 된 유인원들이 대충 이런 분위기 아니었을까?
사람이 아니라 반 사회화가 진행 중인 짐승들을 보는 듯하다. 마을 입구에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줄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고, 악을 질러가며 드잡이질을 하는 사내들과 봇짐을 등에 이고 먹거리를 판매하는 장사치, 어떻게든 한번 앞질러보겠다고 애를 쓰는 새치기꾼으로 야단법석이었다.
진지하게 다시 베라스틴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려던 찰나, 정면에 떡하니 박힌 팻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내고 내용을 확인하자 그곳엔 대충 휘갈긴 듯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매표소]
“...야.”
“듣고 있네.”
“이거 설마 마을 입장권을 사기 위한 줄이야?”
“그렇네.”
“너 이 새끼...!”
말톤의 멱살을 붙들고 외쳤다.
“제정신이야?! 너 설마 이 줄을 기다리자고 할 건 아니지?! 저기 텐트 친 거 봐! 일주일은 족히 걸리겠다!! ...난 그럴 시간 없어! 돈도 없고. 너도 내 지갑 사정 알잖아.”
17실링이라는 거금이 있지만, 이는 절대 함부로 쓰면 안 된다. 던전 내부에서 쓸 용품을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도 고려해야 할뿐더러, 이런 물가 앞에서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동나버릴 테니까.
불안하게 매표소를 쳐다보자 말톤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다 계획이 있으니. 설마 내가 이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말을 꺼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아니야?”
“물론이지, 우리가 노리는 건 바로 저거라네.”
녀석이 가리킨 방향을 주시하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은 목책 구석에 난 작은 쪽문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옷차림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지극해 평범해 보였다.
...딱히 모험가도 아닌 모양인데.
“상인들이라네. 자네 아까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는가?”
“뭐 말이야?”
“마을 안은 물가가 더 비쌀 거라고 했잖은가.”
“당연하지, 그래서 방금 전에도 물어봤잖아. 대체 저 안에서 뭐가 있길래 굳이 이렇게까지... 잠깐, 뭔가 이상한데...?”
“흐흐... 평범한 모험가가 그 물가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네. 뭣도 모르고 입장권을 구매했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걸세.”
“그렇다면...”
“그래, 우린 그놈들에게서 암표를 살 거라네.”
*
경비병의 눈을 피해 쪽문 근처에서 서성거린 지 반 시간 정도가 흘렀을 무렵, 마침내 적당한 목표를 찾아냈다. 마을 내 숙박업소가 너무 비싸다며 툴툴거리는 모험가들의 뒤를 쫓아 협상을 시도하자 손쉽게 입장권을 받아낼 수 있었다.
손안에 든 목패를 들여다보며 읊조렸다.
“...입장권 정가가 2실링인데 50페니에 산 거면.. 이득 맞나...? 야, 이거 체류 기한이 내일까지인데 괜찮은 거야? 아무래도 덤터기 맞은 것 같은데...”
“충분하네. 어차피 마을 안에서는 오래 머물 생각도 없으니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이틀 머무는데 50페니라니... 그 정도면 대체 몇 끼니를 먹을 수 있는 거야? 딱딱한 보리빵 두 덩이에 수프 한 접시가 3페니니까...”
“필요 지출이라고 생각하게. 그리고 알고 보면 그렇게 비싼 가격도 아닐세. 만일 모험가들이 아니라 상인한테 샀더라면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을 테니.. 우린 횡재한 걸세.”
“하긴... 이 정도면 어딘가에 암표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겠네. 줄 때문에라도 정가를 웃도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을 테고.”
사람들은 어디서나 돈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법이니까.
목패를 거머쥐고 정문을 향해 나아갔다. 자칫 경비병들이 암표란 걸 알아볼까 조마조마했지만, 그들은 제대로 패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내심 허탈한 심정으로 번잡한 마을 내부를 거닐고 있자니 말톤이 능숙하게 골목길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 등을 쫓아 나아간 지 십여 분 정도가 흘렀을 즈음, 녀석이 허름한 선술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외관. 유별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술집이다.
탐탁지 않게 입을 열었다.
“술집? 고작 술이나 마시자고 여기까지 왔을 리도 없고... 정보라도 모으게?”
“흠... 조금 다르네. 도란, 저기 간판 옆에 작은 표식이 보이는가?”
“표식...?”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제야 낡은 목간판 아래 희미한 문양이 눈에 띄었다. 오랜 비바람에 마모된 탓인지 색이 바래있었지만, 그 불길함만은 온전하게 전해져왔다.
“시커먼 해골이 뭘 물고 있는데... 금화인가...? 혹시 도적의 아지트 같은 건 아니겠지? 범죄 조직의 소굴에나 있을 법한 문양인데...”
“설마, 도적들이었다면 내가 진작 처리했겠지. 저건 크누트의 표식일세.”
“크누트...? 그거 신 아냐?”
어렴풋이 들어 본 적이 있다. 전모를 알 수 없는 신이었던가, 공공연하게 신들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도 크누트 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하물며 그 흔한 신전 하나 없다고 하니 말 다했지.
사람들에게 권능을 내려주지 않으니 신도가 없다. 그렇다고 세상일에 간섭하는 것도 아니며 종교마다 마땅히 전해져내려오는 규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존재했다고만 알려졌을 뿐. 일각에서는 오래 전에 죽은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니.
정체불명의 신.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다.
“크누트 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그냥 조금. 길드에서 모험가들이 떠드는 걸 얼핏 들어본 적은 있어.”
“그렇군, 크누트 신에게는 신전이 없지만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게 바로 이런 장소라네. 일종의 길드라고도 할 수 있겠군. 이곳에선 밖에선 구할 수 없는 것들을 구할 수 있네. 정보든... 사람이든.”
“그래? 그런 내용은 처음 들어봐.”
“워낙 음지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는 곳이니 그런 걸세. 지점마다 분위기가 다르긴 하지만 늘상 밝은 면면만 있는 곳은 아니니.”
“...대충 어떤 곳인지 알겠네.”
아마 과거에는 정상적으로 예배를 올리던 게 술을 팔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블랙마켓처럼 변질된 거겠지. 목욕탕하고 숙박업소가 매춘의 장으로 이용되는 것처럼.
“...만약 크누트 신이 살아있었으면 지금쯤 노발대발하고 있겠네. 아니... 그랬더라면 진작 나타나서 경고했으려나? 어쨌든 여기서 동료를 찾는다라... 돈으로 사람을 구할 셈이야?”
“바로 맞혔네. 자네도 그편이 낫지 않은가? 이곳은 철저히 신용을 중시하기 때문에 신원이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네. 만일 계약에 위반되는 행위를 저지르면 즉시 길드 차원에서 제제가 들어가니 섣부른 행동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고.”
“나야 뭐... 돈으로 사람을 고용할 수만 있다면 환영이지. 그러면 자다가 등에 칼침 맞을 확률은 줄어들 테니까.”
던전 안에서 얼마나 체류할지 모르는 일이다. 적게는 일주일, 많게는 한 달이 넘는 기간을 꼼짝없이 틀어박혀야 할 수도 있다. 그 사이에 머리가 들통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바, 차라리 깔끔하게 계약 관계를 맺는 게 안전하다.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다만 문제는...
“...그럼 비용은 얼마나 들어? 너무 비싸면 곤란한데... 배보다 배꼽이 클 수도 있잖아? 던전에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고용하는 데 돈이 더 들면...”
“걱정 말게, 소득에서 균등하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하면 되니까. 더욱이 이 세계엔 정체를 드러내기 곤란한 사람이 자네만 있는 게 아닐세. ...연락을 해 두었는데 지금쯤 와 있을지 모르겠군.”
“뭐? 혹시 아는 사람이...?”
“들어가겠네.”
끼이이이익.
말톤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젖히자 경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긴장을 머금으며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의외의 풍경에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세련된 바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너머에는 바텐더가 마른 헝겊으로 컵을 닦고 있었고, 주위에는 모험가 여럿이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어둡고 한쪽 벽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방들이 줄지어 있다는 점만 빼면 여느 선술집과 다를 바 없다.
말톤의 손에 이끌려 바 앞에 앉자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바텐더가 힐끗 쳐다보더니 묵묵히 잔을 닦는 데 열중했다.
잠시 후, 그가 선반에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말톤 님.”
“오랜만이군 콩. 스무 해 만인가? 기억해주고 있었다니 고맙네.”
“제 생명의 은인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전처럼 벌꿀주면 되겠습니까?”
“그럴세, 진하게 부탁하네. 그리고 이 녀석은... 흐흐...”
“....신입인가요?”
“...신입이지.”
“....?”
방금 말톤이랑 바텐더 사이에 묘한 눈빛이 오간 것 같은데....
불길한 기류를 느껴 슬쩍 칼자루에 손을 얹자 바텐더가 말을 이었다.
“흐음... 그렇다면 ‘그걸’ 준비해야겠군요.”
“흐흐... ‘그거’ 말이지.”
말톤이 내 쪽을 흘겨보며 불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황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주점 내 모든 눈동자가 나를 쫓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