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9화 (19/375)

〈 19화 〉 크누트 길드

* * *

[019] 크누트 길드 #4

“오오... 잠자는 공주님이 깨어나셨구먼!”

“잠자는 선술집의 공주!”

술집 내 시선이 모조리 내게 쏠렸다. 개중엔 익숙한 면면들이 여럿 보인다. 내게 입단주를 처먹였던 놈들.

...저 놈들은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고.

성큼성큼 주점을 가로질러 말톤이 있는 곳까지 다가가자 녀석이 해맑게 미소지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도란! 일어났는가? 몸은 좀 어떠어어어억­!!”

참벌!

놈의 광대를 정확히 후려쳤다. 안면을 얻어맞은 녀석은 테이블을 뒤엎으며 날아가 나뒹굴 뿐.

그가 뺨을 매만지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올려다봤지만 그래서 더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자기가 처맞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한 표정이니.

“도, 도란 이게 무슨...”

“됐고, 일단 옷이나 내놔 이 새끼야.”

“옷? 자네 옷 말인가?”

“그래, 설마 발뺌하는 건...”

“자네가 잠들었던 방에 개어 놨을 텐데... 못 보고 나왔나?”

“시발.”

재빨리 반파된 문짝 안쪽으로 발을 옮기자 녀석의 말대로 바닥에 놓인 옷가지가 보였다. 아무래도 자다가 흘러내린 모양.

잠시 뒤, 옷과 장비를 갖춰 입고 나와 물었다.

“야, 내 지갑은 어디 있어?”

“여기 있네. 혹시나 싶어 챙겨뒀지. 단돈 1페니도 빠뜨리지 않고 잘 있으니 걱정 말게.”

“그건 확인해 봐야 아는 거고. 어디 보자...”

총 17실링 3페니. 녀석의 말대로 한 푼도 빠짐없이 잘 있다.

“...모자라.”

“그게 무슨 말인가? 모자라다니.. 내 분명히...”

“2실링 모자라.”

“아니... 분명...”

“모자라.”

“.....”

말톤이 말없이 주머니에서 은화 두 닢을 꺼내 건넸다. 이건 위자료인 셈 쳐야지. 50실링짜리 술도 태연하게 사는 놈이니 2실링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을 거다.

턱 아래까지 치밀었던 분노가 조금 누그러드는 듯하다.

“...야, 근데 옷은 왜 벗겨둔 거냐. 혹시 자는 사이 내 몸에 이상한 짓이라도 한 거면...”

“그럴 리가 있나, 자네 속이 안 좋아 보이길래 벗겨둔 거라네. 혹시 장비를 더럽히기라도 했다간 던전에 들어가기 전부터 곤란할 테니 말이야.”

“...홍 콩.”

“....아닙니다.”

무언의 압박을 담아 홍 콩을 쳐다보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이제 숨길 생각도 없는지 놈은 대놓고 알몸 차림에 검은색 가죽으로 된 본디지만 착용하고 있었다.

그나마 국부를 간신히 가리는 앞치마가 마지막 양심이라면 양심일까.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잠든 새 무슨 일을 당했을까 봐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동시에 왜 주점 내부의 손님 중 아무도 그의 복장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주위를 둘러보자 곧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몇몇 모험가들의 셔츠 안쪽으로 비슷한 가죽끈이 언뜻언뜻 내비쳤으니까. 아.

세상엔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도 있는 법이다.

“..환장하겠네. 이놈이나 저놈이나... 야, 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냐?”

“꼬박 하루일세. 오늘 해가 지기 전에는 마을을 떠나야 할 테지. ...슬슬 깨울까 고민하던 참이었다네.”

“미친... 하루나 잠들어 있었다고?”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어본 몸이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오지를 횡단하며 노래기나 전갈 등 온갖 잡다한 걸 먹어왔고, 하도 굶주림에 시달린 나머지 독버섯을 먹고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다.

아무리 며칠간 행군에 시달려 피곤했다고는 하나 그런 나를 꼬박 하루 동안이나 기절시켰다고?

몸서리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입단 테스트는 통과한 거지? 이러고도 실패했다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데.”

“그야 물론 아주 훌륭하게 통과했지! 홍 콩!”

“예, 여기 있습니다.”

비인간적인 이름을 가진 바텐더가 하반신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도란 님, 이 카드가 크누트 길드 단원의 증표입니다.”

“이게 바로 그...”

얇은 동판.

아카이아 길드의 모험가 패와는 판이한 생김새다. 구리 특유의 비릿한 향이 풍기는 플레이트에는 크누트의 상징인 금화를 물고 있는 불길한 해골과 함께 내 간단한 인상착의가 음각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라는 항목도.

빤히 그 글귀를 보고 있자니 말톤이 잔을 들이키며 읊조렸다.

“...자네가 잠든 사이 내가 대신 주문해두었네. 원래는 발급 수수료를 내야 하지만 뭐... 앞길을 기약하는 의미에서 내가 냈으니 비용은 걱정 말게.”

“아니, 그거 말고 이거.”

손가락으로 인상착의 항목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이거 이렇게 대놓고 쓰여 있어도 되는 거야?”

“아,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이 길드는 워낙 특이한 녀석들이 많으니까.”

“.....”

“도란 님, 제가 길드 방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 예...”

묵묵히 말톤을 노려보던 와중, 홍 콩이 닦던 컵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도란 님은 저희 크누트 길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착증?”

“....그리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저희 길드에서 제일 중시하는 건 돈과 신용입니다.”

“.....”

“그렇게 쳐다보셔도.. 흠... 말톤님 혹시 도란님께 길드증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 여기 있네.”

말톤이 품에서 황금색 플레이트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내가 받은 동 플레이트와는 사뭇 다른 모습.

...이거 진짜 순금인가?

힐끗 말톤의 눈치를 보며 깨물어 볼까 고민하던 찰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말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는군.”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마치 씹어먹기라도 할 표정이었네. 자네가 살던 마을의 풍습인가?”

“...이곳엔 금을 깨물어서 확인한다는 개념이 없어?”

“값비싼 금을 누가 그런 식으로 훼손하겠나. 더욱이 국왕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에 그런 짓을 하는 날엔 그대로 사형감일세.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군. 이제 슬슬 자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나?”

“....”

입을 다물며 침묵하자 녀석이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그게 진짜 금인지 궁금한 거겠지. 안타깝지만 진짜 금은 아닐세. 그냥 황철석을 가공한 게지. 그나저나 슬슬 설명을 들어줬으면 하는데...”

홍 콩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동 등급이지만 꾸준히 실적을 쌓고 신용도를 높이면 언젠가 도란 님도 금 랭크로 승급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지정된 업적을 달성하면 해당 과업을 상징하는 마크를 새겨 드리지요. 이게 그 리스트입니다.”

그가 내민 양피지를 건네받고 흥미롭게 읽어내려갔지만, 머잖아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 이게 말이 돼? 현상 수배범 천 명 살해, 아이스 골렘 백 마리 토벌. 샌드 웜이란 마물은 또 뭐고... 드래곤 사냥? 이걸 지금 나더러 하라고?”

“진정하게 도란, 자네가 읽은 부분은 리스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부분일세. 한번 계속 읽어 보게나.”

“...뒷면을 넘겨 보십시오, 도란 님.”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양피지를 넘기자 그제야 좀 정상적인 내용이 나왔다.

“코볼트 킹 열 마리 토벌. 고블린 로드 살해. 크누트 길드원 간 계약 횟수 백 회 달성... 리자드맨 백 마리 사냥... 뭐 이 정도라면..”

지금 당장은 무리라도 시간을 들이면 언젠가 이룰 수 있겠지.

홍 콩이 칵테일을 제조하며 덧붙혔다.

“참고로, 말톤님이 지니신 금 플레이트는 크누트 길드원으로 최소 이십 년 이상 꾸준히 활동해야 얻을 수 있는 물건입니다.”

“...이십 년.”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말톤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부분이 더 많겠지. 놈은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부터 모험가 생활을 해왔을 테니 그 기간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되려 그가 왜 지금까지 E등급 모험가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한 길드밖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 나와는 달리, 여러 길드에 몸담아두고 있는 녀석으로서는 굳이 아카이아 길드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주목한 건 따로 있었다.

“중범죄자 세 자릿수 처형...”

말톤의 플레이트에 새겨져 있던 업적이다.

그것의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며 고뇌하고 있자니 홍 콩이 정중하게 리스트를 받아가며 읊조렸다.

“...그러면 이제 크누트 길드의 조항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단체의 일원이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이 내용을 지켜주셔야만 합니다.”

“아, 그건 내가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겠네. 아무래도 그 편이 이해하기 훨씬 쉬울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말톤 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군요. ...그럼 도란 님도 현 시간부로 어엿한 크누트 길드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앞으로도 무한한 정진을 기원하겠습니다.”

홍 콩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본업으로 돌아갔다. 이제 나도 이 변태들과 한통속이 된 건가.

...전혀 기쁘지 않다.

“....그럼 이제 던전에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 일만 남은 거야?”

“흐흐... 자네가 잠든 사이 내가 다 섭외해 놨다네. 아마 곧 도착할 게야.”

“..야, 믿어도 되는 거 맞지? 결국 크누트 길드원 중 한 명이라는 거잖아.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불길한 예감밖에 안 드는데... 설마 이 새끼들 틈에 숨어 있는 건 아니겠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점 내 테이블에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쪽을 살피는 모험가들로 가득하다. 그 뜨거운 눈빛에는 단순한 호의를 넘어선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게 적나라하게 전해져왔다.

...바, 방금 저거 나한테 윙크한 건가...?

팔뚝에 돋은 소름을 매만지며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말톤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 크누트 길드원 중에 독특한 사람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정당한 이유도 없이 자네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을 없을 거네. 그런 놈들은 대개 인적 드문 골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곤 했거든. ...벌꿀주 마시겠나?”

“네가 쏜다면. ...그것도 규정에 관련된 거야?”

“그렇네. 만약 크누트 길드원 중 규칙을 어기는 자가 나오면 인근 지역의 모든 단원을 동원해서라도 해당 모험가를 추적하지. 만일 그 죄질이 나쁘다 하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네. 그래서 더욱 더 자네에게 이곳을 추천해주고자 한 걸세. 계약이 있는 한 자네는 누구보다 안전하니 말일세.”

“...대충 알겠어. 요컨대 헛짓거리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거 아냐?”

“그렇네. 역시 이해가 빠르구먼. 뭐... 자네라면 별 탈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걸세. 무엇보다 이 길드에 어울리는 인재니 말이야.”

“...야 잠깐, 그거 무슨 의미냐.”

“흐흐... 말 그대로일세.”

“...어휴, 어쩌다 이런 새끼를 친구로 만나서.”

한숨을 내쉬며 벌꿀주를 입에 머금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잔을 반쯤 비웠을 무렵­

­끼이익.

낡디 낡은 주점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선하게 불어온 가을 공기가 침체되었던 실내 공기를 걷어냈다.

호탕한 웃음과 넘실거리는 맥주 거품,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위로 흔들리는 벽난로 불길.

선술집에 가득한 부산스러움을 비집고 들어온 실낱같은 소음에­

나는 달빛을 좇는 하루살이처럼 이끌렸고,

그게 바로

“...꼬맹이?”

나와 라디의 첫 만남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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