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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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 라디 #1
“오 마침 때맞춰 잘 왔구먼.”
말톤이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키며 읊조렸다.
저 녀석이?
눈매를 가늘게 뜨고 행색을 살폈다. 역광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녀석은 아무리 봐도 중학생 또래의 작은 소년이었다.
잘 숙성된 와인색 로브 너머 실루엣은 선이 가늘어 툭 떠밀면 넘어질 듯 연약해 보였고, 푹 눌러쓴 후드 안쪽으로 살짝살짝 엿비치는 얼굴은 아직 수염도 나지 않았을 듯 앳되었다.
“..꼬맹이잖아...?”
이 세계에서는 열다섯 살만 되어도 성년으로 친다지만 내 기준으론 너무 어리다.
그리고 이는 내가 편협한 사고를 지닌 탓이 아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성장한다.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수많은 문제를 직면하고 그에 대처하는 유연한 사고방식과 정신력, 그리고 그를 지탱할 수 있는 육체를 갖추게 된다.
역사 속 존재해왔던 무수한 부족에서 해당 집단의 장로가 대표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겠지.
하물며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뛰쳐나올지 모르는 던전이다. 씻을 물도,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는 장소. 생명이 경시되고 정신이 탄압받는 그곳에서 우리는 적어도 일 주, 많으면 한 달을 넘는 기간을 버텨야만 한다.
어설픈 사람은 짐만 될 뿐. 나는 강한 사람을 원한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반면 이 꼬맹이는 아무리 봐도 그 가혹한 환경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이지.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벌꿀주로 시선을 돌렸다.
“말톤. 우린 던전에 들어가는 거야. 좀 더 믿음직한 사람을 고르는 게 낫지 않겠어? 이를테면 듬직한 전사라던가...”
“흐흐...”
조곤조곤 따져봐도 녀석은 그저 조용히 웃을 뿐, 묵묵히 새로운 잔을 주문했다.
살짝 언성을 높였다.
“말톤, 내가 너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하게...”
“제 어디가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거죠?”
어느새 로브를 뒤집어쓴 소년이 다가와 말했다.
아이고 이놈 이거 아직 변성기도 안 왔네.
“쯧쯧... 아이는 어른들 얘기하는데 끼어드는 거 아니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넌 가서 흙장난이나 더 하다 와라 꼬맹아.”
“뭐라고요? 꼬맹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 씨발 지금 말 다 했어요?”
어린 주제에 입이 험하다.
“야, 그럼 그런 몸으로 던전에 들어갈 수나 있겠냐? 입구에서 키 제한으로 걸러지는 거 아냐? 거긴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장소라고. 장난치러 가는 곳이 아니야.”
“아니, 웃기고 있네. 전 성인이라고요. 그쪽 애송이 씨야말로 코볼트 한 마리조차 못 이길 것 같은데요?”
“뭐, 애송이? 시발, 이 꼬맹이가 기어코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처음엔 그냥 좋게좋게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이 녀석이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교육이 좀 필요할 듯하다. 안 그래도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짜증나 죽겠는데...
이는 전적으로 이 녀석 잘못이다.
완전히 몸을 돌려 말을 이어나갔다.
“야, 니가 성인이라고? 퍽이나 그러겠다. 아예 이십 대라고 해보시지?”
“그쪽이야말로 키만 컸지 알맹이는 완전히 애새끼네요. 적어도 귀찮은 일은 없어서 좋겠어요. 머리에 든 게 없으니 세상 살기 참 쉽죠?”
“너야말로 속 편하고 좋겠다 야. 모험가가 만만하지? 넘어져서 무릎 까지면 부모님이 달려와서 호 불어주고. 너는 가서 엄마한테 응석이나 더 부리다 와라.”
“하! 듣자듣자하니깐...! 그쪽이야말로 나이 처먹고도 뒤처리 하나 제대로 못 하게 생겼는데요? 부모님 얼굴이 보고 싶네요. 대체 교육을 어떻게 받았으면 이 모양 이 꼴일까요.”
“뭐? 이젠 부모까지 들먹이겠다? 넌 실수로 쐐기풀에 용두질하다 껍질 다 까져라.”
“뭐, 용두질? 진짜 환장하겠네...! 제발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숱 다 빠져있어라! 탈모는 성수로도 못 고치는 거 알죠?”
“무지개반사다 이 씹탱아.”
“씨발... 어디서 멀대같이 키만 큰 새끼가 튀어나와가지고...”
“이 새끼가 진짜 입에 걸레를 물었나...”
어째 점점 유치해져가는 것 같은데...
가끔은 말로 하는 것보다 몹소 실천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는 법.
팔을 뻗어 놈의 멱살을 붙잡으려는 순간
촤악!!
무언가가 내 얼굴에 분사되었다.
후추와 캡사이신 원액을 들이붙는 듯한...!
“끄에에엑!!! 씨, 씨발!!! 너, 너무 따가!! 무, 물!!!”
눈과 코, 피부와 심지어 목구멍까지 얼굴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 폭죽을 쑤셔 넣고 일시에 터트리는 것만 같다.
극심한 통증!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켁, 켁...! 마, 말톤...!! 물!! 지금 당장 물!!!”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네. 급한 대로 이거라도 쓰게.”
말톤이 내 목덜미를 붙들고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미지근한 액체를 흘려보냈다. 물보다 살짝 짙은 농도. 게다가 이 향은...
벌꿀주인가.
“끄어어어... 주, 죽을 것 같아.. 더, 좀 더 없어...?”
“방금 게 마지막이라네. 만약 더 필요하거든 또 주문해야 할 걸세.”
“...7페니입니다. 도란 님.”
“무, 무슨 벌꿀주가 7페니나 해...?!”
“...요즘 물가가 올라서 부득이하게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깨끗한 물은 8실링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 앗 따거!!! 아, 알았어 이따가 낼 테니까...!!”
“.....”
홍 콩이 벌꿀주가 가득 찬 나무잔을 건넸다.
간신히 실눈을 떠 주워들고 얼굴에 들이붓자 한결 고통이 가시기 시작한다.
“어후 씨...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네. 뭐가 이리 매워...?”
투구가 대부분 막아주어서 망정이지 만약 맨얼굴에 뒤집어썼더라면 위험할 뻔했다.
잔류한 고통에 잔뜩 인상을 써가며 눈을 껌뻑이고 있자니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모키 모스의 분말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하다니... 보통은 사흘 내내 눈도 못 뜨는 게 정상인데....”
아니 시발.
“야!!! 넌 그런 걸 사람 얼굴에 뿌리고 앉았냐?!! 씨발, 이거 완전 순 또라이 새끼 아니야?!”
“다짜고짜 멱살을 붙잡으려 한 건 괜찮고요? 정당방위라고요.”
“와 뻔뻔한 것 좀 봐. 이젠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피차 마찬가지거든요?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절 어린애로 보는 모양인데 참나...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주제에.”
“뭐라고? 너 나이가 몇인데.”
“스물하나요.”
“.....”
그간 직접 세어본 바에 따르면 이 세계와 지구의 공전 주기는 얼추 비슷하다.
즉 눈앞의 소년은 대학생 뻘이라는 건데...
“그쪽은 몇 살인데요.”
“...스물다섯.”
“별 차이도 안 나네요. 시발, 난 무슨 장수종이라 이백 살이라도 처먹은 줄 알았네.”
“.....”
말톤 같은 엘프는 눈 뜨고 숨만 쉬어도 백 살은 거뜬하고, 인간이라도 보유 마력량이 많으면 수백 년을 사는 세상이다. 네 살 차이면 과장 좀 보태서 동갑내기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 실제로 몇몇 장수종들은 십 년 단위로 나이를 세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게다가 이 세계에선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혈육이나 마나에 따라 성인을 능가하는 힘을 발휘하는 게 가능한 만큼 나이에 연연하는 게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른다.
당장 옆에서 실실 쪼개고 있는 말톤한테는 나도 애나 다름없을 테니까.
“...피곤한가.”
아무래도 꼬박 하루 기절해 있다가 막 깨어난 탓에 예민해진 모양이지.
게다가 이 녀석은 말톤이 섭외한 놈이니 조금 이상할지언정 적어도 쓸모없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한 놈이니까.
무엇보다 이대로 가면 대화에 전전이 없다. 이야기를 나눠야 파티를 맺든 헤어져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든 할 텐데.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조금 무례하게 굴었네. 최근 여러 일을 겪어서 날카로워져 있었나 보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 던전 안은 위험... 왜...?”
녀석이 얼탱이가 없다는 듯 입을 헤 벌리며 말했다.
“아니,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못 들어주겠네... 그쪽 무슨 등급이에요?”
“...뭐?”
“모험가 등급이요.”
“...아카이아 길드.. F등급.”
“하! 지금까지 고작 F등급 주제에 큰소리친 거였어요? 난 뭐 하이랭커라도 되는 줄 알았네! 게다가 어디선가 비릿한 쇠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 동 플레이트 당신 거 맞죠?”
“...응.”
녀석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난폭하게 내던졌다. 투구에 적중해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튕겨나간 무언가를 주섬주섬 주워들자 은색으로 빛나는 크누트 길드증이 보였다.
놈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씨발... 방금 만든 크누트 동 길드증에 모험가 랭크도 F등급... 대체 뭘 믿고 나이가 어리다느니 견딜 수 있겠냐느니 그런 소릴 지껄인 거예요? 말톤 님만 아니었으면 그쪽은 저한테 말도 못 걸었어요.”
“.....”
“게다가 보아하니 장비라곤 낡아빠진 레더아머에 철검, 발목에 숨겨둔 마물 소재 단검이 끝. 그 요상한 투구는 또 뭔데요? 누가 봐도 햇병아리 초심자인데, 씨발? 제 모험가 경력도 벌써 5년이 넘어가는데 고작 F등급 따위한테 무시당해야겠어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내가 랭크에 비해 훨씬 강한 편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액면상으론 밑바닥 중의 밑바닥 모험가다.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지표가 있는 것도 아니니 타인에 눈에는 그저 평범한 신출내기 모험가로 보이겠지.
...헌데 발목 부근에 단검을 숨겨둔 건 어떻게 꿰뚫어본 거지...?
슬쩍 바지 밑단을 덮으며 눈치를 살피자 녀석이 내 손에서 길드증을 낚아채더니 말톤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저기요, 말톤님. 괜찮은 일거리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멀리서 찾아왔는데 이러기에요?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런 취급을 당하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조금 화나는데요. 금 랭크나 되시는 분이 이러셔도 되는 건가요? 길드 규정엔 분명히...”
“.....”
멈칫했다.
말톤은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온 만큼 잃을 것도 많을 터. 지금까지 녀석 때문에 일을 망쳐본 적은 많았지만 나 때문에 놈이 피해를 입는 상황은 한 번도 상정해보지 못했다.
내가 그 안하무인한 모험가들과 동류도 아니고 여기선 똑바로 사과하는 게 맞겠지.
“정말 미안하다. 이번 일은...”
“사과는 됐고, 미안하면 돈으로 주세요.”
“...돈? 갑자기 돈은 왜...”
“예로부터 성의는 뭐니 뭐니 해도 금전으로 표현하는 거라고 했어요. 말만 번지르르 늘여놓는 게 아니라.”
“그래, 그럼 벌꿀주라도 쏠 테...”
“돈으로 주세요.”
“.....”
악착스러운 녀석이다.
하는 수 없이 동전지갑에서 2페니를 꺼내 건넸지만, 어째선지 녀석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씨발 지금 장난해요?”
“네...?”
“2페니? 씨발 2페니? 제가 그렇게도 만만해 보였어요?”
“아니... 이 정도면 밥 한 끼...”
“밥 한 끼고 나발이고, 제가 받은 정신적 피해 보상에 폭행 미수, 모욕에 명예훼손까지.. 지금 당장 나열할 수 있는 것들만 하더라도 네 가지가 넘어가는데 고작 2페니로 퉁치려고요? 진심이세요?”
“...얼마를 원하는데.”
“얼마면 될 것 같아요?”
“...20페니. 더 이상은 안 돼.”
“1실링. 못해도 1실링은 받아야겠어요.”
1실링...?!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말톤님을 길드 규정 위반으로 고발할 수밖에.”
“야 시발 갑자기 그러면...!”
“시발?”
“너, 너무하잖아... 솔직히 그렇게까진...”
“그럼 먼저 시비를 걸지 말았어야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거예요?”
“......”
“...게다가 그쪽, 마을에 들어올 때 암시장에서 표를 구매했죠? 어디 그것까지 위병한테 꼰질러 볼까요? 간수들한테 이쁨 한번 받아보고 싶어요?”
“드, 드리겠습니다.”
이 새끼 공갈하는 솜씨가 한두 번 해본 실력이 아니다. 모험가가 아니라 날강도라 해도 믿겠는데.
“2실링.”
“.....”
“싫음 말고.”
“....”
씨발!
울며 겨자 먹기로 은화 두 닢을 꺼내 건네자 말톤이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핫!!! 내 이럴 줄 알았지! 우리 도란이 호적수 한번 제대로 만났군 그래!! 흐흐흐...”
“...야, 상식적으로 너는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거 아니냐...?”
설마 이놈도 내가 2실링 뜯어간 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말톤은 꼬맹이가 제 이름을 들먹였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박장대소하더니 벌꿀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켜며 화제를 돌렸다.
“흐흐... 자, 그럼 얼추 정리된 것 같으니 이제 일 얘기를 해볼까?”
“...이 꼬맹이랑?”
“이 애송이랑 말이에요?”
“그래, 다들 그것 때문에 이곳에 모인 게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찌어찌 소동이 일단락되긴 했으나 이 녀석과 파티를 맺은 미래를 상상해보니 파멸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방금은 불의의 일격에 당하고 말았다지만, 결국 전투력 측면에서 못 미더운 건 사실이니.
게다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놈과 함께했다간 얼마 안 가 노이로제로 화병에 걸리고 말 테니깐...!!
등 뒤에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있자니 말톤이 잔을 내려놓으며 읊조렸다.
“도란, 라디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재일세. 자네와 내게 모자란 부분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테지. 게다가 자네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어디 쉬운 줄 아나? 더욱이 한 번 호되게 당한 사람의 말을 듣기엔 영 설득력이 없군. 받아들이게.”
“......”
“말톤 님, 전 아직 한다고 말...”
“30실링.”
“.....!!”
“던전에 같이 들어가는 조건으로 30실링 내지. 물론 선불이고 추후에 얻는 소득은 전부 균등하게 분배하도록 하겠네. 이 조건이면 어떤가, 라디? 이 녀석이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인 건 맞지만 실력은 내가 보장하네.”
“.....”
소년이 입가를 가리며 고심하더니 이내 미심쩍은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도대체 이 애송이가 누구길래 말톤님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흐흐... 그건 자네도 곧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네.”
“....”
“흠...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도란?”
“...나도.”
“음...?”
“나, 나도 30실링!! 아, 아니 29실링이라도 괜찮으니까...!!”
““.......””
말톤과 꼬맹이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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