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라디
* * *
[021] 라디 #2
“자, 전부 작성했으니 한번 읽어들 보시게.”
말톤이 양피지를 들이밀었다. 우리가 위치한 단칸방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등 계약을 맺기 위한 설비가 마련되어 있었고, 반파된 문짝 너머로 선술집의 풍경이 내다보였다.
...난 또 입단 신고식을 마치고 떡실신된 사람을 던져놓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꼬맹이가 문 쪽을 흘겨보며 내뱉었다.
“...그보다 저건 왜 저렇게 너덜거리는 거예요?”
“.....”
짐짓 헛기침해 화제를 되돌리고 눈앞의 계약서에 집중했다.
“어디 보자... 상기인 갑과 을은 아래와 같이 동업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 내용은...”
천천히 글귀를 눈으로 읽어나갔다. 말톤을 신용하긴 하지만 어디서나 계약을 맺을 땐 신중해져야 하는 법이다. 다행히 양피지에 적힌 조항들은 활자에 익숙하지 않은 나조차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간소화되어 있었고, 예상했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요컨데 한 달간 파티를 맺고 기간 내 벌어들인 수익은 모두 균등하게 배분한다는 내용이 중점이었다.
덤으로 상대의 신체적 특징이나 기타 사유를 빌미로 계약을 중도 파기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도.
“.....”
슬쩍 옆을 내려다봤다.
이 대목에서 꼬맹이가 의문을 제기할 줄 알고 쳐다봤지만, 녀석은 묵묵히 계약서에 지장을 찍을 뿐이었다.
“....왜요.”
“...아무것도 아냐.”
감 좋은 새끼.
녀석이 담담하다는 점에 내심 놀라며 시선을 되돌렸다. 내가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는 꽤 수상해 보이는 편이니까. 실제로 베라스틴을 거닐다 보면 순찰을 돌던 위병들이 종종 멈춰 세우곤 했다.
가벼운 천옷 차림에 반해 묵직한 투구를 장비한 내 모습은 어딜 가나 눈에 띄기 마련이었고, 스스로 하여금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되뇌이도록 했다.
헌데 이 꼬맹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발목에 숨겨둔 단검을 곧바로 알아챘을 정도로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선술집 내부에서조차 투구를 벗으려 하지 않았고, 매캐한 분말을 안면에 뒤집어썼을 때조차 마찬가지였던 날 보고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 대체 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걸까?
단순한 계약금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 던전에서 마주하게 될 위험은 단순 30실링으로 감수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물며 5년 차 모험가라고 하면 어지간해서는 당장 돈이 급하지도 않을 거다.
그렇다면 금 랭크인 말톤이 안전을 보장한 놈이라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녀석한테도 무언가가 있는 걸까. 나하고 파티를 맺어야만 했던 이유가.
미간을 구기며 고심하고 있던 찰나, 지척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요.”
“응?”
“뭐해요. 어서 지장 안 찍고. 이제 그쪽만 동의하면 끝나요. 할 거면 빨리 찍고 생각 없으면 얼른 파투내요. ....다른 파티 찾을 테니까.”
“....그래.”
뭐...
괜찮겠지.
목랍과 송진에 염료를 첨가해 만든 인주에 엄지손가락을 문질렀다. 이후 내 이름이 적힌 공간 아래에 지장을 찍어넣자 말톤이 동일한 내용이 적힌 계약서 사본을 내밀었다.
이내 사본에도 같은 과정을 반복한 뒤 홍 콩이 공증을 서주는 것으로 완전히 계약이 마무리됐다. 그에게 계약서 중 하나를 맡기고 홀가분한 심정으로 주점을 나서려던 차, 억센 손길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
“...도란 님, 아직 벌꿀주 값을 못 받았습니다.”
“아 젠장... 7페니라고 했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꼬맹이를 쏘아본 후 지갑에서 구리 동전을 꺼내자 홍 콩이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총 27페니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뭐, 뭐...?! 갑자기 27페니나?! 이번엔 또 뭔데...! 날 등쳐먹을 속셈이면... 아.”
그의 시선을 쫒아 뒤돌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반파된 문짝이 내 처지를 비웃듯 삐걱거렸으니까.
*
“아으, 눈부셔.”
다소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치고 나오자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근 하루만에 보는 태양에 위화감을 느끼며 기지개를 켜자 뼈마디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역시 사람은 해를 보고 살아야 해. ...그럼 이제 바로 던전에 들어가는 건가?”
“그 전에 이것저것 구비해야 할 게 많아요. 오늘 던전에 입장하는 건 무리고 아무리 빨라도 내일이 되어서나 가능하겠죠. ..누가 F급 모험가 아니랄까 봐 초심자 티내기는...”
“나도 그냥 해본 소리야 인마.”
“어차피 이곳 지리 조사도 안 하고 왔죠? 따라오세요.”
꼬맹이가 주점 입구에 놓아두었던 제 덩치만 한 배낭을 짊어지더니 성큼성큼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북적거리는 인파를 가로질러야 한다는 사실에 낙담했지만, 녀석은 신묘하게도 한적한 골목길만 골라 막힘 없이 나아갔다. 마치 담벼락 위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광경.
...재주도 좋네.
“마을 밖으로 가는 거냐?”
“그럼 어디로 가게요?”
“아니 혹시 단골 가게라도 있을까 싶어서.”
던전에 대비해 물자를 새로 보충해야 할 테지만, 몇 배로 치솟은 물가 탓에 아는 상인이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뭔가를 구매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까 슬쩍 봤는데 5페니면 살 약초를 50페니에 팔고 있었다니깐?
녀석이 자리에 멈춰서더니 힐끗 날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저도 방금 이 마을에 도착했어요. 당연히 단골 가게가 있을 리 없죠.”
“그런 것치고는 길 찾는 게 능숙한데?”
“그쪽 같은 애송이 모험가도 아닌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아니 이 꼬맹이가.
말 한마디 질 생각을 안 한다.
티격태격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 초입 부근에 다다랐다. 좌우로 도열한 경비병에게 묵례하고 쪽문으로 빠져나오자 전방위로 어마어마한 행렬이 펼쳐졌다.
하긴 그 인파가 하루 만에 어디 갈 리도 없다.
손을 휘휘 내저어 암표를 구하고자 들러붙는 상인들을 떨쳐내고 천막 사이로 부지런히 걷다 보니 어느새 인적이 뜸해지는 구간이 나왔다.
허나 녀석은 발걸음을 늦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거기,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오세요.”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알고 있는 거야?”
“물론이죠.”
“...얼마나 더 가면 되는데?”
“하 씨... 거 참 말 많네. 그냥 따라오기나 해요. 얼마 안 걸리니까.”
“.....”
우뚝 멈춰섰다.
“야 꼬맹이, 일단 어디로 가는지만이라도 말해달라고. 무작정 따라가야만 하는 우리 입장도 생각해 봐.”
“아까부터 쫑알쫑알... 당신은 인내심이란 게 없어요? 차라리 원숭이를 데려다가 무장시켜 놓는 편이 낫겠네.”
“아니, 목적지 하나 가르쳐주는 게 그리 힘들어?”
“그 자그마한 두뇌로 열심히 생각해보세요.”
빠직.
“이 땅콩만 한 쥐새끼가 계속 열 받게 할래? 오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판 붙자.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서열을 확실히 정해두고 가자고.”
“바라던 바네요. 또 최루 스프레이 맛 좀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죠? 설마 그런 취향? 으... 성격도 더러운데 누가 아니랄까 봐 취향도 더럽네요.”
“내가 말톤도 아니고 그딴 거에 흥분하겠냐!!”
짊어졌던 짐을 거칠게 내던지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면 안 되니까 검집은 씌운 채로.
반면 녀석은 작은 놋쇠 통 같은 걸 손에 쥐고 슬그머니 배낭을 내려놓았다. 검을 중단으로 내세운 나에 비하면 꽤나 맥빠지는 자세였지만, 묘한 기백이 흘렀다.
후드 아래로 엿보인 입가가 굳게 다물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험험.... 자네들 이걸 잊은 건 아니겠지?”
펄럭.
막 발을 내디디려던 찰나, 말톤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흔들더니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싸우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게. 물론 벌금은 받아야겠지만 말이야 흐흐... 어디 보자..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에 따르면 파티 내 불화로 서로에게 상해를 가할 시 10실링의 벌금형에 처한다... 이거 초장부터 꽤 짭짤하구먼. 마물 사냥 따윈 안 해도 되겠어!”
말톤이 껄껄 웃어재꼈다.
나와 라디 둘 다 뜨악한 심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내게 그런 거액을 지불할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어제 받은 보수 덕에 지갑을 탈탈 털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이 꼬맹이 한 번 골려주고 10실링이라니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장사다.
반면 말톤쯤 되는 부자라면 벌금 따위 푼돈에 불과할 테지만.
갑의 횡포!
“...야, 말톤 너는 내 편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도 나름 친구라는 놈이...”
“어허...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적어도 이 계약이 끝날 때까지는 도란 자네도 예외 없이 여기 적힌 대로 따라줘야겠네.”
“...너 혹시 아까 2실링 받아 간 게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었냐?”
“흐흐...”
녀석은 조용히 웃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설마 한 달 내내 저 항목을 들먹일 생각은 아니겠지...? 그때는 단순히 생색내기용 조항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검을 거두자 꼬맹이도 스프레이를 갈무리하며 읊조렸다.
“하아.... 계약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그쪽은 제 손에 죽었어요. 애송이 씨.”
“내가 할 말이다 꼬맹아. 넌 나중에 두고 보자.”
내 언젠가 이놈의 버르장머리를 반드시 고치고 말겠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으르렁거리고 있자니 말톤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흠흠...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최고의 조합일세. 아주 잘 어울리고말고.”
“헛소리 말고 다시 걸어갈 채비나... 응?”
말을 하던 도중,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향하던 방향 쪽에서 매캐한 연기가 훅 끼쳐왔기에.
라디가 로브 앞섶으로 코를 가리며 읊조렸다.
“...거의 다 도착한 모양이네요.”
“저기가 어딘데.”
“정말 멍청한 질문을 하시네요. 어디일 거 같아요?”
“...설마 던전?”
“그럼 뭘 상상했어요. 놀이동산?”
이 세계에도 있는 거냐.
“야, 아까부터 니 말하는 꼬락서니... 알겠으니까 그거 좀 집어넣어 말톤.”
“히히.. 계약과 벌금일세 모험가들이여!!”
펄럭펄럭.
바람에 나부끼는 계약서를 애써 무시하고 물었다.
“야, 아까 준비할 거 많다고 당장은 던전에 못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냐?”
“네, 필요한 건 모두 저기서 구할 거예요.”
라디가 전방을 손짓했다.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소까지 도달하자 그곳엔 마치 축제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처에 늘어선 가마와 화로에선 다양한 먹거리가 노릇노릇하게 익어갔고, 각양각색의 무장을 한 모험가들이 몬스터의 소재를 등에 짊어지고 상인들과 흥정하고 있다.
상권이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선 방금 떠나온 마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뭐, 뭐가 이렇게 싸?”
물건들 가격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싸다.
물론 베라스틴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방금 살인적인 물가를 보고 온 터라 새 발의 피처럼 느껴졌다. 체감상 삼십 분 정도밖에 안 걸어온 것 같은데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꼬맹이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 팻말에 적힌 가격표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게 정상이에요. 이곳 근처는 거대 상단이나 길드 제휴 점포가 많아서 후려치는 상인들이 거의 없거든요. 아까 거기는 그냥 쓰레기 장사치들이 양심 팔아 장사하는 곳이고요.”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 관광지에서 외국인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거랑 비슷한 건가?”
완전히 부합하는 예시는 아니지만 얼추 비슷하겠지. 던전 소식을 듣고 멀리서 막 도착한 모험가들을 등쳐 먹으려는 속셈이 아니었을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선 뭘 사야 하는데?”
“...조금은 스스로 생각해보지 그래요?”
“아니, 던전에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일단 이것저것 챙겨오긴 했지만 혹시 빠뜨린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참나...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요?”
“괜히 아는 척해서 나중에 탈이 나는 것보단 낫잖아?”
“으음... 그건 그렇네요. 자존심만 센 멍청이인 줄 알았는데 웬일로 옳은 소리도 하고... 그럼 말톤 님, 우선 서로의 장비를 확인...”
”아, 그 전에 잠깐.“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