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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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라디 #4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많던 꼬치구이가 벌써 동이 나 있었다.
우리는 포만감을 잔뜩 만끽하며 나른하게 늘어졌다.
편안한 침묵.
왁자한 모험가 무리가 근처를 지나갔을 무렵, 손가락에 묻은 육즙까지 쪽쪽 빨아먹은 뒤 입을 열었다.
“후으... 진짜 잘 먹었다. 역시 사람은 일단 주둥이에 뭘 처넣고 봐야 해.”
“흐... 웬일로 옳은 소리를 하시네요...”
“흐흐... 넌 제일 열심히 먹어댄 주제에... 그냥 솔직히 먹고 싶었다고 하지.”
“시, 신경 끄세요.”
꼬맹이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후드 사이로 언뜻 내비친 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다.
스스로도 부끄럽긴 한가 보지.
그렇게 안 먹겠다고 버팅기다가 결국 제일 열중해서 먹어치웠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역시 어린애들은 잘 먹고 잘 자는 게 최고다.
...나이는 성인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애다 애.
“자, 그럼 이제 던전 공략에 대한 얘기를 해 볼까?”
“안 그래도 슬슬 그 화제를 꺼내려고 했어요. 그럼... 말톤님.”
“알겠네.”
말톤이 등 뒤에 기대고 있던 배낭에서 각종 잡동사니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마 던전에 들어가기 전 서로의 소지품을 확인해두려는 거겠지.
“뭐해요? 멀뚱히 쳐다만 보고.”
“알았다, 보채지 좀 마라.”
나 또한 눈치껏 배낭을 탈탈 털어 안에 있던 짐을 잔디밭 위에 쏟아냈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다. 내 배낭에 들은 거라곤 기껏해야 여분 옷 한두 벌과 돌덩어리처럼 딱딱한 보리빵, 나눠 든 말톤의 텐트와 아리엘에게서 받은 연고가 다니까.
라디가 턱에 손을 괴고 내 짐들을 유심히 훑어봤다.
“....”
“....나도 알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네 표정만 봐도 알겠다.”
“무슨 표정인데요?”
“용케도 이런 장비로 여기까지 왔다는 표정.”
“용케도 이런 장비로 여기까지 오셨네요?”
“그러게.”
행군 도중 텐트나 침구류가 필요할 땐 언제나 말톤의 여분 장비를 빌려 썼다. 모 나무처럼 아낌없이 베푸는 녀석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라디가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에 몰두했다.
“흠... 그러면 텐트는 말톤님 걸 쓰고... 식량은...”
“.....”
집중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장난기가 돌았다.
슬그머니 그 앞에 대고 손뼉을 마주쳤다.
짝!!
“꺄아..! 씨, 씨발!! 뭐에요 진짜!!!”
“왤케 놀라냐. 다른 게 아니라 너는 짐 안 까냐?”
“하아... 주변을 좀 둘러보세요.”
“.....?”
딱히 이상한 건...
“언제 어디서 다른 모험가들이 짐을 채갈지 모르는데 적어도 한 명쯤은 주위를 경계하고 있어야죠.”
“......”
예리하네.
녀석의 말대로 이 공터에는 우리 외에도 각양각색의 모험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보는 눈이 많긴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서 나쁠 건 없지. 오히려 모험가는 살짝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한 편이 낫다.
내심 감탄하며 쳐다보자 녀석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자, 대충 확인했으니 이제 집어넣으셔도 돼요. 제 짐도 보여드릴게요.”
“그래.”
우리가 주섬주섬 내용물을 도로 집어넣자 꼬맹이도 배낭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가방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 상체를 기울이던 찰나, 곧바로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녀석의 손목을 낚아챘다.
“동작 그만. ...야, 너 뭐냐.”
“네? 제가 왜요?”
“아니, 세상에 이런 걸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냐. 너 혹시 전직 무장공비야? 주특기가 암살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이젠 별소릴 다 듣네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 정도쯤은 다 들고 다닌다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녀석의 배낭에서 나온 물건들이 가관이다.
면도날 달린 철선과 손잡이 없는 칼날, 육안으로 식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느다란 은실 뭉치와 끔찍한 해골 마크가 그려진 병이 수십 개...
동료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신고하고도 남았겠다!!
나와 말톤이 챙겨온 짐하고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의 장검과 메이스가 소꿉놀이 용품처럼 보일 정도. 평소에도 정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겉면이 번쩍번쩍 빛나면서도 은근히 사용감이 묻어나온다는 점이 소름끼친다.
...게다가 저 손잡이 없는 칼날은 대체 어디다 쓰는 건데?
“야... 설마 이거 다 독이냐?”
떨리는 손끝으로 잔디 위에 가지런히 늘어선 용기를 가리켰다. 두꺼운 천과 끈으로 밀봉된 깡통에서는 희미하게 상한 견과류 냄새가 풍겼고, 그 옆의 갈색 유리병 안쪽에는 시커멓고 탁한 액체가 남실거렸다.
차마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자니 녀석이 밝게 미소지으며 병을 들어올렸다.
“네, 맞아요. 이건 타르밀라란 타란툴라에서 채취한 건데 타쿤 반도에서만 서식하는 녀석이에요. 아주 귀한 거라고요! 제가 이걸 구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던지... 그러니까 그때가 분명 제가 막 성인이 됐을 무렵....!”
“아, 알겠다. 너도 그 거미도 대충 뭔지 알겠으니 일단 숨 좀 쉬고 말해라.”
녀석의 눈동자가 묘한 열기를 띠며 호흡이 가빠지길래 얼른 말을 끊었다.
저 증상은 그거다 그거. 말톤이 마물에 관련된 얘기를 할 때면 가끔 보이는 그거.
아무튼, 이걸로 이 꼬맹이가 어떤 녀석인지 확실히 알겠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곪아버릴 듯 이 치명적인 맹독들을 저리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뺨에 비비적대며 몸을 꼬는 놈이 정상일 리 없다!!
심지어 저것 중 몇 개는 값비싼 유리병에 담겨 있다. 분명 한푼 두푼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발품 팔아 구한 거겠지.
“...돌아버리겠네.”
아 얼탱이가 없다. 역시 크누트 길드에 정상인이 있을 리가.
말톤에 이어 홍 콩에 꼬맹이, 그리고 나한테 입단주를 처먹인 반 다크 홈의 가죽 본디지를 훔쳐 입은 모험가들까지.
지금까지 만난 크누트 길드원들은 어째 전부 정신 나간 놈들밖에 없다. 원래부터 비정상인 놈들만 꼬이는 건지, 아니면 그 입단주가 뇌에 반영구적인 손상을 끼친 건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크누트 길드가 음지에 숨어서 활동하는 이유는, 아직 세상이 그들의 뒤틀린 취향을 받아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젠 아예 병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자애로운 시선을 보내는 녀석을 목격하자 온몸에 닭살이 돋아올랐다.
너무 무섭다. 젠장.
“환장하겠네... 이 은색 통은 뭐야?”
“어어...!! 그, 그건 열지 마세요!!!”
“뭐, 뭣 씨팔!!! 설마 이것도 독이냐?!!”
화들짝 놀라 원통형의 금속 용기를 허공에 내던졌다. 해골 마크가 없길래 이건 안전한 줄 알았는데...!!
꼬맹이는 창백한 표정으로 뛰쳐나가 공중에서 통을 낚아채더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함과 동시에 앙칼지게 소리쳤다.
“휴... 다행히 안 터졌네... 갑자기 내동댕이치면 어떡해요!! 사람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내가 할 소리다 인마!! ...그래서 그건 뭔데, 설마 폭탄이라도 되는 거냐? 당장 있는 대로 다 불어! 이상한 거면 곧바로 파티에서 내쫓을 테니까!!”
그런 위험천만한 물건과 사상을 지닌 녀석과는 파티를 할 수 없다.
생각해 봐라. 세열 수류탄을 늘 호주머니에 휴대하고 다니는 관심병사를. 게다가 놈의 배낭 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병구류와 맹독이 즐비하다. 개중 몇몇엔 정성스러운 손글씨가 새겨진 라벨마저 붙어있고.
녀석이 앙심을 품고 한밤중 내 수통에 독을 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원인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테고.
꺼림칙하게 독병들을 바라보자 녀석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읊조렸다.
“피... 겁만 많기는.. 일반 모험가가 어떻게 폭탄을 가지고 있어요? 참수당할 일 있나....”
“야, 너 방금 뒤로 숨긴 거 뭐냐. 당장 이리 내.”
“시, 싫어욧!”
“이리 내!!!”
“꺄, 꺄악!!”
위에서 덮쳤다. 녀석이 재빨리 등 뒤로 숨긴 무언가 빼앗으려 했으나, 워낙 완강하게 저항하는 탓에 미수로 그쳤다.
“제길... 대체 뭐길래...”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쏘아봤다.
설마 녀석이 숨긴 물건이 폭발물이라면 그땐 정말 큰일이다. 화약이나 불 마석은 누구라도 별 수고 없이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만큼 나라에서 엄중하게 관리하니까. 만약 왕실의 허가 없이 불법으로 이를 제조하거나 유통한다면 즉각 처형감이다.
도적단이나 이교도의 손에 폭탄이 들어갔을 경우 벌어질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심쩍은 시선으로 녀석을 쏘아보며 내뱉었다.
“야, 너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거 폭탄 아니지?”
뜨끔!
어.
젠장.
“...아, 아닌뎨요?”
“혀 꼬였다 인마.”
급급하게 두리번거리며 횡설수설하는 게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심지어 후드 안쪽으로 뭔가 쫑긋쫑긋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신고하기 전에 빨리 말해. 너 그거 폭탄이지?”
“아, 아니라구요!!! 자, 자꾸 열 받게 할래요?! 증거도 없으면서 생사람 잡지 마세욧!!”
...수상한데.
뭐.
녀석이 잡혀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다만...
“야 인마... 네가 뭘 하든 딱히 관심은 없는데... 적어도 계약 기간에는 사고 치지 마라. 당부할게.”
“...말 안 해도 알고 있어요.”
“그래, 알았으면 됐다. 그래서 그건 대체 뭔데?”
천천히 시선을 떼고 좀 전에 내팽개쳤던 금속 통을 턱짓하며 묻자 녀석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아, 이건 나가의 심장을 말린 거예요.”
“스톱. 그래 너 이리 와봐, 일단 맞고 시작하자.”
“아니 왜 또 지랄이에요...?!”
“지랄? 야, 너 지금 지랄이라고 했냐? 같은 파티원이, 냄새만 맡았다 하면 마물들이 입에 침을 줄줄 흘리고 쫓아오는 물건을 가방에 넣어놓고 다니는데, 지랄? 너 진짜 지랄 맞게 한번 맞아볼래?”
주먹에 입김을 불어넣자 녀석이 황급히 손사래치며 변명했다.
“이, 이건 밀봉된 거라 괜찮다고요...! 게다가 제가 직접 햇볕에 널어서 건조하고 분말 형태로 만든 거예요! 한 번에 너무 많이 사용하지만 않으면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요!!”
“...내가 말톤이랑 이 마을에 오다가 그거 때문에 죽을 뻔했거든? 셋 셀 동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않으면 진짜 때린다. 셋... 둘..”
“그거잘쓰면마물유인해서쫒아낼수있어요!!!!”
“....안전한 거 맞아?”
“하으... 씨 진짜.. 방금 말했잖아요...!! 밀봉된 거라 용기가 파손되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요! 만에 하나 통이 망가져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버리면 되고 말린 분말이라 원물보다 효과도 훨씬 약해요!”
“.....”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지우지 않고 노려보자 녀석이 흐트러진 로브 앞섶을 고치며 덧붙였다.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만... 이 정도면 그냥 잔챙이 마물 한두 마리 불러모으는 정도밖에 안 돼요. 특정 조건에서 사용하는 게 아닌 이상 극적인 효과는 없다고요. 그마저도 효율이 낮아서 어지간해서는 잘 안 쓰고요.”
“....알았어. 대신 쓸 때는 항상 나한테 먼저 말하고 써라, 알겠지?”
“당연하죠.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홀로 모험가를 해왔다고 생각하세요? 다 노하우가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항상 그런 말 하는 놈들이 일찍 뒤지더라.”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은 참아야지.
어차피 계약을 맺은 뒤라 이제 물리지도 못한다. 녀석의 배낭에 들어있던 철조망도 내게 쓰이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는 여러모로 유용할 테고. 독이 있으면 사냥할 때 편리한 것도 사실이다.
제발 아무 탈 없기만을 바래야지.
...왜 내 주변엔 이상한 녀석들만 꼬이는 거지...?
속으로 푸념을 늘여놓으며 늘어졌지만 돌아오는 건 말톤의 측은한 시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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