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라디
* * *
[024] 라디 #5
서로의 장비를 점검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이 기울어진 황금빛 들판의 보리들처럼, 한없이 따스한 주홍빛 노을이 라디의 뺨 위를 물들였다.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습.
살며시 그림자가 기운 녀석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어릴 적 뛰어놀곤 했던 낙엽 쌓인 뒷동산이 떠올랐다.
신기한 녀석이다.
나와 닮은 점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지만, 녀석을 보고 있자면 유년 시절 한물간 추억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했다.
빨려 들어가듯 녀석의 후드 아래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파이어를 빼다 박은 듯한 두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만,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에선 아리엘에게서 보았던 것 같은 따스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축제가 끝나고 난 텅 빈 무도회장처럼 안타까운 쓸쓸함만이 풍겨 올 뿐이었다.
“....뭘 봐요.”
“...아니다. 그냥 뭐...”
“빤히 쳐다보지 마요. 기분 나쁘니까...”
“...야, 그러고 보니 너는 왜...”
“오래 기다렸나, 자 구해왔다네.”
말톤이 절묘하게 등장한 탓에 대화가 끊겼다.
“오, 드디어!”
“저도 좀 보여주세요!”
방금까지의 분위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녀석이 가져온 건 노끈으로 묶인 양피지 뭉치. 던전의 지형지물과 출몰하는 생물군이 상세하게 기록된 지도 다발이었다.
그간 소문만 무성했던 던전의 실체를 앞두고 두근거리던 찰나, 말톤이 잔디 위에 지도를 펼치자 검은 잉크로 빼곡하게 들이찬 선과 기호들이 보였다.
“우와... 이거 예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큰데? 저게 다 빈 공간이란 거 아냐. 베라스틴이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겠어.”
“저도 크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이렇게나 많은 모험가들이 몰려온 것도 이해가 가요.”
“흐흐... 이게 다가 아닐세.”
말톤이 양피지를 한 장 넘기자 그곳엔 숫자 둘을 나타내는 기호와 함께 전혀 다른 지형이 오밀조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녀석이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 던전은 복층 구조라는 모양이야.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강한 몬스터들이 나온다고 하네.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깊은 층은 7층까지라고 하지만, 그 이상은 너무 막강한 마물이 출몰해서 A급 모험가 파티도 공략에 차질을 빚고 있는 모양일세.”
“...미친, 이런 규모가 최소 7층까지 있다고...? 엎어지면 코 닿을 위치에 마을이 있는데 용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네...”
“그러게요... 이 정도 스케일이라면 점점 더 사람들이 몰려들 거예요. 장기적으로 봤을 땐 이곳에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요. ...지금이라도 온 게 다행이였네요. 이런 건 보통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이득을 보기 마련이거든요.”
“근처에서 던전이 발견된 게 천운이었네... 야 말톤, 근데 이거 층수는 어떻게 구별해놓은 거야?”
딱히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녀석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던전의 지형를 토대로 구분지어놓은 걸세. 듣자 하니 각 층마다 자연환경이 판이한 모양이더군. 당연히 출몰하는 생물군에도 차이가 있고.”
“신기하네... 말만 들어서는 가늠이 안 간다. 직접 봐야 알겠어.”
지하 던전이라고 하니 개미굴 같은 구조를 떠올렸지만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다. 지도를 들춰가며 확인해 보니 중간부터는 듬성듬성 공백으로 남겨진 부분이 눈에 띄었다. 사 층에 이르러서는 거의 백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아마 미탐사 구역이겠지.
말톤이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던전 안은 아예 고유의 생태계가 이루어졌다고 하더군. 코볼트나 고블린 같이 평범한 몬스터도 있지만 상당히 희귀한 마물도 심심찮게 목격되고 있는 모양이야. 개중엔 오래전에 멸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개체도 섞여 있네. ...이거 참 흥분되는군. 후후...”
...또냐.
어쩐지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나 싶더니 역시나였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리도 없는 노릇.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얘가 좀... 많이 아파. 그냥 네가 좀 이해해줘라.”
“...저도 말톤님이 어떤 분인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그나저나 이대로라면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겠는데요?”
“그러게... 고대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찌라시가 있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거 같고, 희귀 마물을 최대한 많이 잡아서 소재를 내다 파는 식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동감이에요. 솔직히 큰 기대를 하고 온 건 아니였는데... 마물 사냥만으로도 수입이 꽤 짭잘하겠어요. 그나저나...”
녀석이 제 덩치만 한 배낭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하기야...
“...한 번 들어가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전부 들고 갈 순 없어. 아쉽지만 들어가기 전에 물품보관소에 맡기고 가자. 소재 넣을 공간도 생각해야지.”
“우으... 하지만...”
“어쩔 수 없잖냐.”
이 짐을 전부 들고 던전에 들어가는 건 무리다. 녀석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알겠지. 물론 녀석이 주저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같은 하급 모험가들에겐 이게 전부다.
안정적인 소득도 없고 내일 살아있을 거란 보장도 없다. 하다못해 오랫동안 의뢰를 수행해온 중견 모험가라면 모를까, 떠돌이 생활을 일삼는 우리에게 안락한 집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고로 대부분의 모험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몸에 소지하고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현물보단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현금을 선호하는 이유도 이 때문, 아마 녀석도 이 배낭이 전 재산이겠지. 아무리 물품보관소가 있다고 한들 영문도 모르는 곳에 잘못 맡겼다간 한순간에 휴짓조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만약 성공적으로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왔더니 악덕 상인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모든 금품을 들고 날랐다고 하면 웃을 일이 아니다.
눈앞에서 도토리를 빼앗긴 다람쥐처럼 침울해진 녀석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기운 내. 좋은 델 찾을 수 있겠지. 오늘은 이만 해도 저물었으니까 슬슬 잘 준비하자.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필요한 물품을 구해야 하니까.”
“.....네.”
...진짜 다람쥐 아냐?
*
“일어나요. 벌써 해 떳어요.”
“아으으... 뭐야.. 꼬맹이냐...”
“다들 잠 깨세요. 준비할 게 많다구요.”
인정사정없는 손아귀가 날 흔들어 깨웠다. 졸린 눈을 비비며 천막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새벽 공기와 펄럭이는 텐트들이 보였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는 않았지만 저 너머에서 상인들의 부산스러움이 들려오는 거로 보아 곧 아침이 시작되겠지.
말톤에게서 빌린 침낭과 모포를 개고 있자니 꼬맹이가 말을 걸어왔다.
“그 투구... 잘 때도 쓰고 계시네요.”
“그래 이제 익숙해졌거든. ...왜, 문제 있어?”
“그냥 신기해서요. 얼마나 못생겼길래 잘 때도 안 벗나 싶어서요.”
“나? 겁나 잘생겼지.”
사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외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허나 녀석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손가락질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푸흣... 막 투구 벗겨봤는데 고블린이 있고 그런 거... 아얏!! 왜 때려요?!!”
“비유를 들어도 꼭 고블린에다가 하냐. 내 앞에서는 그놈들 얘기 꺼내지 마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마물 중 하나니까.”
“시발 진짜 성격 더럽네... 알고보니 고블린하고 사촌지간... 아, 알았... 악!!”
“인과응보다 이 새끼야.”
“.....”
“...미안하다. 내가 좀 심했다. 그러니까 그거 좀 집어넣어허억!”
치이이익!!
고작 몇 대 쥐어박았을 뿐이지만, 녀석은 눈동자에 짙은 독기를 피워올리며 내 얼굴을 향해 최루 가스를 분사했다.
재빠른 반사신경으로 허리를 굽혀 간신히 회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끝이 좋지 못했다.
“끄아아아악!!!!”
“마, 말톤?!!”
“어, 어어어?!! 마, 말톤님이 왜...!! 괘... 괜찮으세요?!!”
“으흐흐흑...!! 내 눈!!! 아, 앞이 안...!!!”
““......””
“너 때문이잖냐.”
“아뇨, 이건 명백히 그쪽 잘못이죠.”
결국, 최루 스프레이로 아침 세수를 대신한 말톤을 뒤로하고 꼬맹이랑 물품을 사러 나왔다. 아무리 나라도 눈물 콧물 질질 짜고 있는 녀석을 데리고 나오는 건 죄책감이 들었으니까.
“네가 그런 흉악한 물건을 뿌리지만 않았어도...”
“그쪽이야말로 절 먼저 때렸잖아요!”
“그럴 만했으니깐 그랬지.”
티격태격하며 걷다 보니 마차들이 왕래하며 다져진 길 좌우로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려는 노점들이 잔뜩 보였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던전 앞 시장은 바쁘게 쏘다니는 모험가와 상인들로 북적거린다.
꼬맹이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그래서, 뭐 살지는 정해놓고 왔어?”
“...알아서 뭐하게요. 그쪽은 그냥 얌전히 따라오기나 하세요.”
“까탈스럽기는... 아까 그거 가지고 아직도 꽁해있냐? 겉만 음침한 줄 알았는데 속도 좁은 놈이네.”
“그게 무슨...! 당신은 조금 더 섬세함이란 걸...! ...아니다, 그냥 제발 잘 따라오기나 해주세요. 일행으로 오해받기는 싫으니까 멀찌감치 떨어지시고요.”
“싫은데? 아예 찰싹 달라붙어야지.”
슬쩍 다가가 로브를 움켜쥐자 녀석은 담담하게 내게서 옷자락을 빼앗았다.
이번엔 그 어깨에 팔을 두르자 짜증을 터트리며 귓전에 대고 외쳤다.
“아 성가셔!! 그만 좀 하세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뭐 어때. 기왕 이렇게 된 거읍!!!”
“크,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제발!!”
“읍으븝!!”
“꺄, 꺄악...! 씨, 씨발 손바닥에 침 묻었어!!”
녀석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손을 떼더니 근처 잔디에 거칠게 문지르며 원망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봤다.
이내 멀찌감치 떨어진 채 걷기 시작하길래 손짓해 불러들였다.
“...야, 일로 와라. 안 잡아먹는다.”
“.....”
“같이 얘기를 해야 물건을 사든지 말든지 하지.”
“...아는 척하지 마세요.”
“이리 안 오면 소리 지른다. 셋... 둘...”
“씨발, 진짜 미친놈, 아주... 아, 아아아... 죄송해요!!”
“흐흐... 그래, 주목받기 싫으면 알아서 잘 해.”
“으윽...”
꼬맹이의 약점을 찾아냈다.
녀석은 이목을 끄는 짓을 극도로 싫어한다.
필요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항상 후드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것도 신경 쓰인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나?
...뭐 차차 알아가면 될 테지만.
“자, 그래서 일단 약초랑 붕대부터 구하면 되지?”
“하아... 네 그리고 해독약도 필요해요. 제가 가진 게 몇 개 있긴 한데 그걸로는 턱도 없을 거예요.”
“아, 여기 있다. ...붕대는 이 정도면 충분할 테고... 야, 해독제는 이거 사면 돼?”
“음... 조금 더 여러 종류가 필요하겠어요. 어제 말톤님이 가져다주신 자료에 포이즌 앤트가 출몰한다고 나와 있었거든요.”
“포이즌 앤트?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 근방에선 워낙 드문 마물이니까요. 포이즌 앤트는 굴을 팔 때 특유의 산성 물질을 내뱉는데 이게 땅을 오염시키고 식물에 독성을 띠게 만들어요. 그래서 이 지역을 지날 때 발목에 작은 상처라도 있다면 쉽게 중독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고요.”
“...박식하네.”
독에 대해서는 가히 전문가 수준이다.
뾰족한 고깔모자를 쓴 연금술사에게 비용을 지불한 뒤 해독제를 비롯한 의료품을 적당히 사들였다.
이후로도 노점 곳곳을 전전하며 필요 물품들을 얼추 다 구비하자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이건... 야, 너 아직 아침 안 먹었지?”
“아... 전 괜찮...”
“빨리 가보자!!”
녀석의 손목을 붙잡고 잡아끌었다.
천막들 사이사이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를 쫓아 달려가자 막 화로에 불을 지피고 있는 포장마차가 나왔다.
라디가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팔을 잡아땠다.
“아니,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그래봤자 자기는 안 먹겠냐느니 그런 말을 할 게 뻔하지 뭐. 너 그러면 키 안 큰다?”
“...몇 번을 말해요. 전 이미 다 큰 성인...”
“그래 그래, 거기 아저씨 이거 무슨 음식이에요?”
“어서 오세요 모험가님! 이건 미궁산 혼 고트의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입니다!! 든든한 하루를 시작하기엔 안성맞춤이죠! 거기, 다른 모험가분들도 어서 오세요!!”
“가격이 어디보자... 4페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호밀 빵 사이에 각종 채소와 두툼한 고기가 들어가 있는 모습이 썩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군침을 흘리며 지갑을 꺼내자 꼬맹이가 머뭇거리며 올려다봐왔다.
“...사게요?”
“그래, 이제 곧 던전에 들어가는데 든든히 먹어둬야지. 공복으로 전투를 할 수는 없잖아? 앞으로 당분간은 이렇게 푸짐하게 먹을 수도 없을 테고.”
“......”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땅바닥을 내려보았다. ...그렇게나 돈이 아깝나.
“야, 꼬맹아.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못 사준다?”
“아, 알고 있어요.”
“그래 그럼... 아저씨 여기 샌드위치 세 개 주세요! 하나는 포장해 주시고요.”
“네, 네! 알겠습니다 모험가님!!”
노점상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호밀 빵을 반으로 가르더니 채소와 고기를 넣어 우리에게 건넸다.
비용을 지불하고 받아든 뒤 덥석 베어물자 입속에서 감칠맛이 터져나왔다.
“....!! 야, 이거 진짜 맛있다. 너도 한번 먹어봐. 어제 먹었던 꼬치구이 수준인데?”
그때보다 덜 기름져서 아침으로 먹기에는 딱 좋다. 고기의 풍부한 육즙이 딱딱한 호밀 빵에 부드럽게 스며들어 수월하게 씹을 수 있는 데다가 야채도 신선한 걸 쓴 모양이다.
꼬맹이 녀석도 입맛에는 잘 맞는 듯했지만, 깨작깨작 먹는 게 어째선지 영 시원치 않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뭐... 앞으로 알아가면 되겠지.
이제 던전에 들어갈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