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5화 (25/375)

〈 25화 〉 던전

* * *

[025] 던전 #1

“야 꼬맹이, 왜 벌써부터 죽상이야?”

“으윽...! 쟤들이 열 받게 하잖아요!! 빌어먹을 수전노 새끼들...!”

“진정해라.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저거 그냥 순 날강도들이라고요!!!”

라디가 씩씩거리며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길드 공인 물품보관소에 들렀지만 그 비용이 너무 비싸다.

무려 하루에 10페니!

한 달 보관료만 해도 무려 3실링이다!! 내 기준으로 두 달 생활비를 웃도는 금액. 지금 당장 쓰고 있는 투구와 맞먹는 가격이기도 하고.

장비를 하나 맞출 수도 있는 금액을 땅에 버리는 셈이다. 고작 병 몇 개 보관해준다는 이유로.

꼬맹이가 악을 써 가며 물품보관소 직원들에게 따지고 들었지만, 그들은 같은 말만 반복할 뿐 전혀 흥정해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수수료니 뭐니 하는 이유를 붙여 50페니를 추가로 떼어간 덕에 꼬맹이가 대로변 한가운데에서 난동을 피우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진귀한 광경이로군.

“...어쩔 수 없잖냐. 그래도 아까 거기가 그나마 제일 싼 모양이고... 던전 안에는 독을 가진 마물들이 잔뜩 출몰한다고 하니 그걸로 참...”

“네!! 바로 그거에요!!! 운이 좋으면 던전에서 희귀한 독초를 잔뜩 채집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자료에 따르면 5층부터는 포이즌 섀도우도 드물게 등장하는 모양인데 만약 한 마리라도 잡을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깽판을 놓을 것처럼 분에 겨워하던 녀석이 별안간 눈을 반짝이며 화색했다. 이 녀석에게 독이란 뭘까.

한숨쉬며 읊조렸다.

“꿈 깨 인마, 우리끼리 어떻게 5층까지 내려가. 지도에 따르면 4계층부터는 급격하게 강한 마물이 출몰한다는데. C급 모험가도 대형 파티가 아니면 엄두를 못 낼 수준이래잖아.”

“으... 그건 그렇지만...”

“흠... 도란...? 나도 자네한테 미리 해두고픈 말이 있는데 말이지...”

“뭔데?”

“사실은 7층에 나오는 마물 중 무그리드라는 몬스터가...”

“기각.”

“아니, 내 말 좀 들어보시게 도란. 그 마물이 말이야, 털이 아주 곱다고들 하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고들 하더군...! 아 그것뿐만이 아닐세! 그 몬스터가 무려...”

“제가 왜 포이즌 섀도우를 잡고 싶냐면요...! 얘가 아주 치명적인 맹독을 지니고 있는데 그 효과가 다른 생물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특하거든요! 아직 연구도 덜 된 생물인데 이런 곳에서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행운....”

“....”

지친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붓는 말톤과 꼬맹이를 마주하고 있자니 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앞으로 적어도 한 달을 이 둘 사이에서 시달려야 한다니... 뭐 덕분에 무료할 틈은 없겠다만...

“...지나갑니다.”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는 두 녀석을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다 보니 저 멀리 긴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온갖 독특한 무구를 장비한 모험가들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자 비로소 던전에 들어간다는 실감이 들었다. 당연한 노릇이지만 행렬 사이사이로는 여느 때처럼 잡상인들이 목청을 높여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코코 열매 팔아요!! 단돈 2페니!!!”

“시원한 과실수 팝니다!! 1페니입니다!!!”

“야, 저거 혹시...”

“무그리드의 교미 방법은 아직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포이즌 섀도우의 독은 아주 특별한 성질을 띠는데 햇빛에 닿으면 순식간에....”

미친.

정신 나갈 것 같아!!!

최대한 녀석들과 멀리 떨어져 행렬 꽁무니에 따라붙으려던 찰나, 수많은 인파 너머로 의아한 광경이 비쳐보였다.

“...야, 말톤.”

“듣고 있나 도란? 무려 그것뿐만이 아닐세. 고대 문헌에 따르면...”

“됐고, 그딴 건 나중에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저것 좀 봐봐.”

“흠... 뭔데 그러는가? 어디보자... 오오!! 던전 입구로구만!”

“...역시나. 저게 바로 그....”

던전.

상상과는 달리 던전의 입구는 꽤나 조촐한 외관이었다. 입구라고 해 봐야 커다란 바위 사이로 갈라진 틈새가 전부였고, 성인 두 사람이 지나가는 게 고작일 정도로 협소했다.

지도에서 보았던 그 거대한 규모의 시발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습.

다소 맥빠지는 광경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은 제법 장관이었다. 오전의 햇살이 내리쬐자 강철 갑주가 황금빛으로 번뜩였으며, 왁자한 소란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태도가 방종하기 짝이 없는 모험가들과 대비되어 썩 위엄이 흘렀다.

그들을 턱짓하며 읊조렸다.

“이야... 저것 좀 봐, 멋진데? 베라스틴에서 봤던 기사들은 그냥 깡패나 다름없었는데...”

“저들은 왕국군일세. 갑주에 새겨진 문양을 보면 알 수 있지.”

“왕국군? 어쩐지 포스가 남다르다 했다. 졸라 멋있네... 야, 너랑 쟤네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

“흐흐... 알고 싶나?”

“어, 엄청.”

“저들은 기껏해야 수습 기사들일세. 왕국군이라고는 하나 내게 견줄 수준은 아니지. 다만... 저기 왼쪽에서 세 번째 보이는가?”

말톤이 한 사내를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저자는 정규기사군. 수습 기사의 갑주를 껴입어 위장했지만 내 눈은 못 속이네. 아마 저 녀석이 진짜 경비 병력이고 나머지는 그냥 구색만 갖추는 용도일 걸세.”

“그래...?”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데...

역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다.

“대단하네... 야, 근데 쟤네들 진짜 수습 기사 맞아? 하나같이 겁나 쌔 보이는데. 눈빛 살기등등한 것 좀 봐.”

“아무리 배첼러 등급이라고 하더라도 자네보다는 강할 걸세. 왕국 기사단에 입단하려면 필수적으로 마나 소양을 갖춰야 하니까 말일세.”

“...아직은 기사들한테는 깝치면 안 되겠다.”

한 놈과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간 이곳저곳 전전하며 여러 경험을 한 탓에 대인전도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겪어봤지만, 아무래도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놈들과의 교전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야 사자도 맨손으로 때려잡는 놈들을 내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단순히 목숨을 부지해 도망가는 것쯤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를 제압하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궁지에 물린 쥐는 물기 마련이고, 내게 놈들은 쥐 따위가 아니라 살코기를 목전에 둔 호랑이와도 같으니까.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고.

당장 상대와 혈투를 벌일 일부터 염두에 두는 내 모습에 자조하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차, 새빨간 로브를 뒤집어쓴 꼬맹이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료라.”

근거는 없지만 어쩐지 이 녀석과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다. 숱하게 사람들에게 배신당해온 내가 이런 생각을 품다니 참 미련하기도 하지.

이상한 녀석이다.

만난 지 아직 하루밖에 안 됐고 처음엔 그냥 재수 없는 꼬맹이였지만, 적어도 이 녀석은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놈들과 달랐다. 나를 높은 곳에서 차갑게 내려다보던 그들과.

만약.

만약에 말이야.

이 녀석이 내 머리칼을 보고도 나를 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은 그런 꿈을 꾸고 싶다.

잔잔한 호수 위로 떠 오르는 부표처럼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짐짓 헛기침해 가라앉힌 뒤, 녀석의 어깨를 짚으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야 꼬맹아, 저기 기사들 진짜 멋있지 않냐? 저거 갑주 졸라 비싸 보....”

“.....”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뭔가 잘못됐다.

녀석의 입가엔 초승달처럼 쫙 찢어진 섬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귀기 서린 조소에서는 지독한 날비린내가 났다.

핏덩이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의 피비린내 같은­.

녀석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마다 느꼈던 위화감.

차마 두려워 제대로 직시할 수 없었던 이유.

라디의 내면에는 묵직하게 응어리진 원한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멍울지다 못해 흘러내리는 살의 앞에서 왁자한 모험가들의 소음도 한없이 멀어져갔다.

차갑게 얼어붙어 차마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찰나­

“...던전 탐색 용무로 오신 모험가분들이 맞으시죠?”

미지근한 바람이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저기요... 모험가님...?”

“네, 네...? 지, 지금 뭐라고...”

“던전 탐색 용무로 오신 분들이 맞으신지 물었어요.”

공무원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이 가판대 너머에서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네, 네.. 맞습니다! ...이렇게 세 명이 한 파티에요. 여기 신분증입니다.”

“네! 잘 받았습니다. 명단을 작성해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자가 모험가 패를 받아가더니 주섬주섬 양피지에 인적사항을 옮겨적기 시작했다. 깃펜을 놀리는 손동작이 어눌한 거로 보아 아직 일이 익숙지는 않은 모양.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자 꼬맹이는 후드를 꽉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을 덮은 로브 탓에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떨리는 어깨가 녀석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전해주었다.

지금 내가 녀석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

“....”

옷자락을 틀어쥐며 망설이던 찰나, 접수원이 모험가 패를 돌려주었다.

“자, 기본적인 수속은 이걸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입장료를 지불하시면 출입증을 발급해드리겠습니다.”

“입장료요? 잠깐...! 인당 1실링?!”

안내판에 적힌 문구를 보고 경악하자 접수원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네,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받아들였다간 자칫 인명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일부러 가격을 높게 책정하고 있습니다. 입장료는 모험가 기준으로 인당 1실링이지만, 가축이나 노예를 동반할 시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세금 때문인가.

비록 적은 비용은 아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선뜻 지갑을 열었다. 여기서 마찰을 빚었다간 던전 출입이 제한되는 걸로도 모자라서 기사들에게 제재라는 명목의 합법 폭행을 당할 테니까.

꼬맹이 상태도 신경 쓰이고.

“...감사합니다. 여기 출입증입니다. 던전 안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로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으니 분실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추후에 다시 입장을 하실 때도 예외 없이 비용을 지불하셔야 하니 이 점 꼭 유념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담백하게 출입증을 받아들고 기사들이 도열한 던전 입구를 몸을 틀었다. 당초에 설레었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녀석의 작은 어깨로 손끝을 뻗었다.

“꼬맹아...”

“.....”

“꼬맹아... 말 좀 해 봐라...”

애타게 불러 봤지만, 뿌리라도 내린 듯 녀석의 발걸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꼬맹아... 제발...”

짙은 로브 너머를 확인하기가 너무 두려웠다.

그때였다­

­뚝.

핏물이 맺혀 떨어졌다.

스멀스멀 배어 나오는 피.

새하얀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녀석의 눈물로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을 뻗고 있었다.

손끝이 맞닿자 작은 몸이 움찔했다. 갈 곳 잃은 손가락이 내 손등을 더듬어 강하게 맞잡아왔다.

내 온기로 조금이나마 녀석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길 바라며,

­꽈악.

한걸음.

또 한걸음.

우리는 던전에 들어왔다.

*

흔들리는 등불에 의지해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협소했던 외관과는 다르게 바위굴 내부는 마차 한 대가 지나가도 무리가 없을 만큼 널찍했다. 통로는 아래를 향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자욱한 습기 탓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들었다.

...이렇게 꽁꽁 숨겨져 있으니 그간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지.

이 세계에는 이러한 던전이 무수히 많다고들 한다.

저 깊은 심해에 가라앉은 고대 문명, 불타는 활화산의 비밀 대장간, 태양조차 등져버린 배반자의 왕궁과 정처 없이 길을 잃은 사람들 앞에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유랑자들의 도시 등...

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한 신비와 전설이 잠들어 있는 곳.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설화가 태아의 발길질처럼 태동하는 곳.

이 세계의 비밀을 하나하나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원인을 알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동굴 벽면에 늘어선 석유등이, 물기를 머금은 암석에 반사되어 풍등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눈을 껌뻑여 상념을 떨쳐내고 현 상황에 집중했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장소는 석회 동굴과도 같은 지형.

어두컴컴한 경사로는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아래로 뻗어나갔다. 종유석에 맺힌 물방울은 불빛을 반사해 금박을 입혀놓은 것처럼 번뜩였으며, 때때로 예고 없이 떨어져 발밑을 적시곤 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며 내려가던 찰나, 옆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오 뭐야, 좀 괜찮아졌냐 꼬맹아?”

“.....고마워요.”

“그래.”

이제야 조금 진정됐나 보다. 손떨림도 어느새 잦아들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까지 기사들을 증오하는 걸까.

녀석을 배려해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발밑 조심해. 자칫하다간 미끄러지겠다. 던전 1층에 도달하려면 조금 더 가야 된다니까 부지런히 걷고.”

“.....”

­끄덕.

투구에 맺히는 물방울을 닦아가며 하염없이 통로를 나아갔다.

그렇게 절반 정도 내려왔을 즈음, 꼬맹이가 우물쭈물하면서 재차 말을 걸어왔다.

“....저 ...도란 님...“

“응? 왜?”

“....손.”

아.

“...여기 다 내려갈 때까지는 잡고 가자. 미끄러우니까.”

“.....”

“...근데 여기 진짜 비현실적이지 않아? 꼭 은하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아. 옛날부터 이런 장소에 꼭 한번 와 보고 싶테에에에에엥­!!!”

“꺄악!!!”

찰나, 말을 마치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주위를 둘러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물웅덩이를 밟아버린 탓. 한창 사색에 젖어 있었는데...!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으며 제동하려 했지만 습기를 한껏 머금은 석회암은 비누칠한 복도처럼 미끈거렸고, 우리는 급류에 휘말리는 보트처럼 걷잡을 수 없이 아래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어...?! 어...!! 씨발!!! 미끄러진다아아!!!”

“뭐, 뭐 하는...! 아, 아아...!!”

“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덥석!

“...쌍으로 뭣들 하는 겐가.”

다행히 말톤이 늦지 않게 붙잡아준 덕에 워터슬라이드를 타는 일은 면했다. 이대로 쭉 미끄러졌다면 뼈가 부러지는 수준을 넘어 응급실 신세를 면치 못했겠지.

저만치 아래서 날카롭게 반짝이는 석순들을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와... 하마터면 던전 1층까지 직행할 뻔했네...”

“아니, 도란님 때문에 저까지 휘말렸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손 좀 놔 달라고 말한건데...!”

“미안, 갑자기 넘어질 줄 누가 알았겠냐.”

“으휴... 진짜 다 젖었네... 찝찝하게....”

꼬맹이가 무릎을 탁탁 털며 일어나더니 로브 끝자락을 쥐고 비틀었다.

쪼르르르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시선을 떼며 읊조렸다.

“야, 고맙다 말톤. 너 아니었으면 마물 구경도 못 하고 실려갈 뻔했다.”

“긴장을 늦추지 말게. 아직 다 도착한 게 아니니.”

말톤이 전방을 턱짓했다.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대여섯의 인영들이 보였다.

던전에서 복귀하는 모험가들이라 생각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찰나­

“....!!”

전신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음산한 동굴 내부에 비친 그들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껴 있었던 까닭.

마치 말라비틀어진 시체처럼, 생명이라면 응당 품고 있어야 할 한 줌의 온기조차 잊어버린 모습이다.

뒤이어 혼탁하고 창백한 안구와 시선이 마주쳤다.

후회와 원망, 좌절과 공포, 그리고 또 부정.

의지를 잃은 두 눈동자에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소멸하기를 반복했다.

“...도란님.”

어렴풋한 음성에 삐걱거리는 고개를 틀자 꼬맹이가 긴장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을 따라 양 손바닥을 내보여 적의가 없음을 알렸지만, 모험가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우리를 무시하며 지나쳤다.

­저벅.

“....윽.”

꼬맹이가 작게 신음했다. 그들이 교차하는 순간 불쾌한 땀 냄새와 썩은 송장의 악취가 훅 불어왔다.

그들 중 선두에 걷고 있던 사내의 배낭 뒤에는 상반신만 남은 여성의 시체가 녹자색으로 부풀어 오른 채 밧줄로 묶여있었다.

만약 던전 공략에 실패한다면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걸까.

방금 전 여성의 시체가 동료들의 얼굴과 겹쳐보이자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래, 이곳은 던전. 우리는 약초 따위나 줍자고 여기 온 게 아니다.

곧 다가올 거사에 앞서 다시금 각오를 갈무리하던 차­

“...저길 보세요. 도란님.”

라디가 내 옷소매를 툭툭 잡아당겼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시꺼먼 동굴 너머로부터 흘러나오는 밝은 빛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말톤이 배낭을 고쳐매며 읊조렸다.

“이제 다 도착한 모양이구먼. 저기가 아마 종착지일 걸세.”

“저게...? 좀 지나치게 밝지 않아?”

단순한 조명치고는 지상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아무리 등불을 많이 매달아두었다고 한들 이런 지하에서 마주할 법한 밝기는 아니다.

유심히 응시하고 있자니 라디가 입을 열었다.

“발광 이끼 때문이에요. 던전 일체에 걸쳐 발광 이끼가 서식하고 있다고 지도에 적혀 있었는데 못 보셨어요?”

“..아니 나도 읽긴 했는데... 그 발광 이끼라는 걸 본 적이 있어야지...”

“네...? 아무리 던전이 처음이라도 마물을 사냥하다 보면 흔히 봤을 텐데요?”

“.....”

입을 꾹 다물자 말톤이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 라디, 이 녀석은 그냥 원시인이라고 생각하게. 가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평소에는 삼척동자도 알만한 상식조차 모르니까.”

“...그건 그냥 바보라는 말을 돌려 말한 거 아니에요?”

“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네만... 뭐, 자네도 곧 알게 될 걸세.”

“....”

라디가 기묘한 생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날 올려다봤다.

쩝... 그거야 당연하지.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을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는데.

“...난 외딴 산골 마을 출신이라 아직 모르는 게 많아. 베라스틴으로 상경한 지 얼마 안 됐거든.”

“어쩐지... 억양이 조금 독특하다 싶었는데 그런 배경이 있었네요. 그럼 이번 던전 안에 있을 동안은 제 명령에 따라주셔야겠...”

“아니 그건 아니지. 내가 네 말을 왜 듣냐.”

“네...? 그야 당연하잖아요...? 아는 것도 없으시면서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거만하게 발을 내디디며 내뱉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전투 감각은 내가 훨씬 뛰어난데 당연히 내가 우선권을 가져야지. 우리 싸우러 온 거 잊었어?”

“터무니없는 소릴...! 도란님은 어제 저한테 졌잖아요?!!”

“그땐 갑자기 기습을 당해서 그런 거고. 제대로 맞붙으면 당연히 내가 이기지.”

“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그럼 당장 여기서 겨뤄 볼래요? 후배 모험가님?”

“오냐, 바라던 바다.”

­뚜드득!

어깨 관절을 풀며 녀석을 위협했다.

슬쩍 배낭을 내려놓으며 한판 맞붙으려던 찰나­

“자네들은 정말 심심할 틈이 없구먼... 지난번에 경고한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네.”

­펄럭펄럭.

말톤이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흔들었다.

“다들 잠시 잊은 모양인데... 이 파티에서 갑은 나일세. 본인들의 위치를 잘 파악하시게나.”

““.....””

...비겁한 새끼.

“....꼬맹이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그쪽이야말로 운수대통한 줄 아세요.”

녀석이 톡 쏘아붙이더니 배낭을 주워들고 앞길을 재촉했다.

나 또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종일관 티격태격대는 우리였지만ㅡ

“.....”

“....”

어느새 나와 꼬맹이 모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던전 1층에 도착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