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6화 (26/375)

〈 26화 〉 던전

* * *

[026] 던전 #2

“씹탱, 눈부셔.”

그게 던전에 들어오고 내 첫 감상이었다.

입장하기 전 마지막으로 빛을 한껏 만끽하고자 태양과 눈싸움을 벌였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다. 시장에서 랜턴에 보충할 등유를 찾고자 분주히 돌아다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꼬맹이의 눈빛이 비로소 이해가 간다.

“...아니 이게 땅속이란 게 말이 되나...”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사방에서 밝은 빛이 뿜어나왔다. 발아래 돋아난 푸른 잔디가 가죽 샌들 사이로 발가락을 간질였고, 광활하게 뻗은 들판 위에는 수많은 모험가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시원한 산들바람이 땀방울을 씻어내자 나뭇잎과 잔디들이 물결 모양으로 살랑이며 청량한 기운을 흩뿌렸다.

이건 그냥 어디 초원에 서 있는 느낌이다.

라디가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기지개를 겼다.

“하으... 축축하고 음침한 동굴 속에만 있다가 바람을 맞으니 상쾌하네요.”

“아니 잠깐, 너는 왜 이렇게 태연해?”

“네? 뭐가요?”

“뭐긴 뭐야, 지금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잖아. 이 빛은 뭐야, 저 나무들이랑 잔디는 다 뭐고. 게다가 바람...?”

“낮이니까 당연하죠...? 뭐가 이상한데요?”

“뭐? 낮?”

어째 대화가 도통 맞물리지를 않는 것 같은데...

“잠깐, 잠깐만... 미안한데 우선 상황 정리를 좀 해보자. 나는 던전에 들어오는 게 이번이 처음이거든?”

“네...? 네, 알고 있어요.”

“지금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아?”

“이상한 거요? 딱히...?”

꼬맹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날 올려다봤다. 이 상황 속에서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 되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봐오니 나 혼자 이상한 나라에 흘러들어온 엘리스가 된 것만 같다.

말톤이 능청스럽게 읊조렸다.

“라디, 아까도 말했잖은가. 이 녀석은 그냥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놈이라고 생각하게. 상식이란 게 없는 놈이지.”

뜨끔!

정곡을 찌르는 말.

투구 속, 눈알을 굴려 힐끗 쳐다봤지만 놈은 그저 실실 웃고만 있었다. 뭔가 알고 말한 건 아닌 모양.

뭐... 녀석한테라면 솔직히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긴 하다. 나중에 한 번 떠보기라도 해야지.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니.

내가 녀석을 못 믿으면 대체 누굴 믿으란 말인가.

배낭끈을 움켜쥐며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자 라디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도란님, 뭐가 이상한지 말해주시면 답변해 드릴게요.”

“일단, 저거 왜 이렇게 밝아?”

아득히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높은 천장에선 차마 똑바로 직시하기 힘들 정도의 광량이 쏟아지고 있었다. 딱 한 가지 유별난 점이 있다면, 야외에선 태양광이 전부지만 이곳은 동굴 전체가 균일하게 빛나는 듯한 느낌?

눈가를 찌푸리며 유심히 살피자 천장 자체에서 빛이 쏟아지는 게 아니라 그에 달라붙은 이상한 덩어리에서 광채가 뿜어나오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 멀리 커다란 암반이나 벽면에도 동일한 발광체들이 달라붙어 휘황한 빛을 내뿜었다.

라디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 대답했다.

“저게 바로 아까 말씀드렸던 발광 이끼에요. 던전으로 분류되는 지형에선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식물이죠.”

“아니, 저게 흔하면 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본 건데? 기름 랜턴 대신에 다들 저걸 쓰면 되는 거 아냐?”

“정말로 모르는 거였네요... 발광 이끼는 몬스터가 풍부하게 서식하는 환경에서만 자라요. 그들의 부패한 사체를 먹고 자라니까요.”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 상업화하지 않은 거야? 저걸 병에 담으면 랜턴보다 훨씬 유용할 텐데. 몬스터 사체를 양분으로 주면 쓸모없는 소재도 처리할 수 있고...”

“예전부터 많은 연금술사가 발광 이끼를 양식하려고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어요. 인위적인 환경에서는 금방 죽어버리거든요. 게다가 수지타산을 계산해보면 기름 랜턴이 훨씬 싸게 먹힐뿐더러 조금 가격대를 높이면 훨씬 유용한 빛 마석이 있으니까요.”

꼬맹이가 명료한 어조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녀석의 얼굴을 마주보며 물었다.

“...그럼 아까 낮이니까 당연하다고 한 건...”

“발광 이끼는 하루의 절반 정도만 빛을 내뿜고 나머지 시간엔 평범한 이끼로 돌아가요. 즉, 지금은 이렇게 밝지만 곧 던전의 밤이 찾아오면 급격하게 어두워질 테니 조심해야 해요. 그때가 던전에서 제일 위험한 시기거든요.”

“왜 위험한데?”

“그야 당연히 캄캄하니까죠...? 몬스터가 다가오는 걸 확인하기 어렵잖아요. 야간에만 활동하는 마물도 있고...”

녀석이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바보가 된 것만 같다.

...실제로도 녀석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테고.

“더 궁금한 거 있어요?”

“...아니, 뭐 이 정도면 됐다. 대충 알겠어. 고맙다 꼬맹아.”

지천으로 돋아난 풀과 나무 등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더 이상하게 보여도 곤란하니까.

억지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디가 난처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엔 무식하다고 놀릴 셈이었는데... 그렇게 순수하게 반응하면 그러기도 좀 미안하네요. 앞으로도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드릴게요. 대신 그때마다 5페니씩 받을 거지만.”

“...야, 아무리 그래도 5페니는 좀 너무하지 않냐? 대체 누가 수전노인지 모르겠네.”

“헤헤...”

녀석이 혀를 삐죽 내밀며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좀전의 침울한 표정보다야 훨씬 보기 좋네.

“...그럼 일단 몬스터 잡으러 가기 전에 계획 좀 자세하게 짜보자. 지금 상황이 내가 예상했던 거랑 많이 다르거든? 이렇게 밝으면 수월하게 활동할 수 있으니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도 꽤 차이가 있을 테고.”

“좋은 의견일세.”

“네, 저도 동의해요.”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내려놓고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설마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뻐근한 어깨를 풀어주며 풀밭을 뛰노는 메뚜기를 시선으로 훑고 있자니 말톤이 주섬주섬 지도를 꺼내들었다.

아, 근데 그 전에.

던전에 들어오기 전, 노점상에서 구매한 전대에서 연고를 꺼내 라디에게 쥐여주었다.

“야, 이거 발라라.”

“아... 그.... 고마워요..”

녀석의 손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쭈뼛쭈뼛 연고를 받아드는 꼬맹이를 보고 있자니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일단 억눌렀다. 괜히 어쭙잖은 위로를 건넸다간 역효과가 날 뿐이니까. 이런 건 스스로 화제를 꺼내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녀석이 연고를 바를 수 있도록 내버려 둔 채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말톤, 여기 식물은 지상이랑 똑같아? 그렇다면 좋겠는데... 내가 숲에 대해서는 또 바삭하잖아.”

“흠... 아마 대체로 비슷할 걸세. 고립된 곳이라고는 하나 그리 오래전에 갈라져 나온 건 아닌 모양이더군. 생물군도 비슷한 듯하니 자네의 지식도 어느 정도 통용되겠지.”

“그래? 그렇담 다행...”

“...하지만, 다음 층부터는 지형이 판이하게 바뀐다고 하네. 지도에 따르면 산림들이 사라지고 바위산이 나온다고 하니 매번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할 걸세.”

“...이젠 별의별 게 다 나오네. 차라리 다른 대륙에 온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속 편하겠어.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갈지 정해야 할 텐데... 야, 이 근방에 좋은 사냥터 없냐? 기왕이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그건 걱정 말게. 잠시 기다리고 있게나.”

말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우리를 남겨둔 채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라디와 함께 고개를 기우뚱하며 쳐다보고 있자니 녀석은 저 멀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성 모험가 파티에게 다가가 잠시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들판을 가로지르는 놈의 손에는 작은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뭐 좀 알아 왔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가. 이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세.”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알맹이는 개차반이어도 허우대는 멀쩡했지.

맨날 보는 사이라 잊어버리고 있었다. 놈은 이래 봬도 엘프 특유의 곱상한 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여성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곤 했다.

그래봤자 마물박이지만.

“....그래서, 뭐라고 하던데?”

“이곳 세 번째 층에 암시장이 있다고 하더군.”

“암시장?”

말톤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럴세. 거기서는 밖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이나 소재가 가득하다고 하네. 물론 불법 용품도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는 모양이고.”

“...그럼 물가가 좀 비싸지 않을까? 이런 던전 속에 있는 시장이면...”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모양일세. 어차피 이곳에서 구한 모든 부산물을 가지고 올라가는 건 대규모 파티가 아닌 이상 무리지 않은가?”

“뭐... 그렇지.”

사람 한 명이 짊어질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다. 짐마차나 노예라도 부리는 게 아닌 한 일개 개인이 모든 짐을 운송하는 건 불가능하고, 등에 얹힌 게 많으면 많을수록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는 생존에 직결된 문제. 전혀 경시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험가들은 항상 딜레마에 시달리는 존재였다.

위험을 감수하고 저 마물의 이빨과 가죽을 벗겨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만족하고 물러날 것인가.

탐욕스러운 자들은 일찌감치 죽어버렸지만, 그렇다고 욕심 없는 이들은 대성하지 못했다.

벌이가 짭짤한 하이랭크 모험가쯤 되면 짐꾼도 여럿 따라붙고 아예 저들끼리 길드를 꾸려 막강한 몬스터도 사냥하고 한다지만 일반 모험가라면 꿈도 못 꿀 이야기.

따라서 모험가는 전투에만 출중할 것이 아니라 이런 사소한 구석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실로, 모험가들의 목숨을 제일 많이 앗아간 건 마물이 아니라 각종 벌레와 질병, 부패한 짐승 사체에서 나온 병원균 때문이니까.

말톤의 짙은 녹안을 응시하며 입술을 뗐다.

“...그래서, 부산물을 지상으로 못 가져가는 거랑 암시장이 무슨 상관인데?”

“그야 어차피 가지고 나가지 못할 거면 조금이나마 돈을 받고 파는 게 낫지 않겠는가? 곡식이나 의복 등 생필품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모양이지만, 몬스터의 소재는 염가에 거래되고 있는 모양일세.”

“오, 그래? 그러면 우리야 환영이지. 좋은 소재를 싸게 구할 수 있겠네.”

“바로 그걸세. 더욱이 물물교환도 제법 활성화되어 있다고 하니 꼭 금전이 아니더라도 만족할 만한 거래를 할 수 있을 테지.”

“좋아, 그럼 암시장은 꼭 들려보는 걸로 하고...”

“...저기, 말톤님?”

라디가 손을 들어올리더니 의아하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러면 저희도 그냥 밖에서 물건을 사다가 암시장에 팔면 되는 거 아니에요? 입장료를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마진이 꽤 남을 것 같은데... 여기서는 세금도 낼 필요가 없잖아요? 물론 불법이지만...”

“흠...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듣자 하니 지금 그곳은 한 세력이 주축이 되어 점거하고 있다는 모양이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 무리겠네요.”

라디가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방금 어느 대목에서..?

“...저기 꼬맹아? 나는 왜 안 된다는 건지 아직 이해를 못 했는데...”

“그야...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피며 입을 열었다.

“음... 보통 한 집단이 있으면 자기네 구성원 외에 다른 사람이 이득을 보는 걸 달가워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암시장을 한 세력이 점거 중이라고 하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큰 이득을 취할 때 방해하려 들지 않을까요?”

“아.”

“게다가 여긴 던전이라 공권력도 미치지 않는 만큼,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력으로 해코지를 한다거나 누명을 씌워 노예로 만든다던가... 애초에 생필품을 마차 째로 실어와서 장사를 하려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할 테고요.”

“...그러면 시세 차익으로 큰 이득을 보는 건 힘들겠네. 어디까지나 적당히 해야 한다는 거지?”

“네, 바로 그거에요. ...생각보다 이해가 빠르시네요?”

“당연하지 인마. 나 머리 좋아.”

내가 이 중에서 가방끈이 제일 길 거다.

라디가 눈쌀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글쎄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뭐라고 꼬맹아?”

“생긴건 멍청...”

­펄럭펄럭.

“청.. 청... 청순하네요...! 그, 그러니까 그거 좀 집어넣으세요 말톤님.”

“흐흐...”

말톤이 계약서를 꺼내 항목을 가리키자 라디가 식은땀을 흘리며 주저했다. 녀석도 벌금은 무서운 모양.

그나저나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야, 근데 너 그건 뭐냐.”

“뭐 말인가 도란?”

“그거, 네 손에 있는 쪽지.”

녀석의 손에는 곱게 접힌 양피지가 쥐여져 있었다. 아까 여성 모험가들과 대화를 나누고 받아왔던 쪽지. 혹시 희귀 마물의 서식지가 표시되어있는 약도일까?

내심 궁금해하던 찰나 녀석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거 말인가? 별거 아니라네. 던전에서 나오면 밤에 자기들 숙소로 놀러 오라며 주소를 적어주더군. 뭐, 나한테는 필요 없겠지만 말이야! 으하하핫!!!”

““.......””

나와 라디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는 이내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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