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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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 던전 #4
“정말! 다 젖었잖아요!! 그것도 하루에 두 번이나!”
“미안하다니까.”
“진짜... 도란님은 가끔 보면 너무 부주의해서 탈이에요! 어제 불침번을 설 때도 한밤중에 모닥불을 꺼뜨려서 얼마나 추웠는지 아세요?!”
“미안, 아니 그래도 그건... 아, 다 왔다.”
꼬맹이와 티격대며 공터에 도착하자 낮익은 텐트가 보였다.
“야, 말톤 물고기 잡아 왔다.”
“아니, 말톤님 제 얘기 좀 들어... 어?”
“말톤?”
허나 녀석은 그곳에 없었다.
“짐도 전부 놔두고 어디 가셨지...”
“뭐 장작이라도 구하러 갔겠지. 우리끼리 저녁 준비나 하고 있자.”
망태기에 담아두었던 물고기를 적당한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독을 사용했으니 반드시 내장을 제거해야 할 터, 복잡한 손질은 냇가에서 미리 해둔 덕에 한두 과정만 더 거치면 된다.
배낭에서 꺼낸 소금으로 간을 하고 있자니 꼬맹이가 옷가지를 주워들며 말했다.
“그럼, 전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그래.”
“혹시라도 엿볼 생각 마세요. 죽여버릴 테니까.”
“안 한다.”
내가 남자 옷 갈아입는 걸 봐서 뭐하냐.
무심하게 손을 흔들어 대꾸한 후 주변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발목에서 뽑아낸 코볼트 단검으로 겉껍질을 다듬어 매끄럽게 만들고, 생선의 눈 아래를 찔러 바늘 꿰듯이 통과시키면 이제 재료 쪽은 준비가 끝난다.
뒤이어 물에 젖어 묵직한 몸을 이끌고 공터 구석으로 다가갔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에 메말라 누레진 덤불을 휘저으니 손가락 끝에 검불이 잔뜩 딸려나왔다. 이제 여기에 낙엽을 더하면 그것만으로 훌륭한 불쏘시개가 완성될 터.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 뒤, 텐트 입구까지 마른 풀잎들을 끌고 오자 꼬맹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니 얘는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녀석이 옷을 갈아입겠다고 들어간 지 벌써 꽤 지났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별생각 없이 텐트의 가림천을 서서히 열어젖히자
“야, 너 들어간 지가 언... 거기서 뭐 해.”
“...제가 열어보지 말랬죠.”
“뭐 어때, 나 불 피울 건데 근처에서 장작 좀 구해다 줄래?”
“설마 아직도...? 하아... 진짜 바보네요.”
“뭐가.”
“...아니에요.”
녀석이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시선으로 빤히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주섬주섬 텐트 밖으로 기어나와 젖은 옷가지를 천막 위에 널며 읊조렸다.
“일단 이것부터 말린 다음... 아, 저기 말톤님 오시네요.”
“뭐야, 넌 어디갔다가 이제 오냐.”
“오, 벌써 먹을 걸 구해 온 건가?”
말톤이 수풀을 제치고 다가왔다.
녀석이 말라비틀어진 통나무를 우리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장작을 구하러 갔었네. 그리고 모험가들을 만나 조금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지 뭔가.”
“재미있는 얘기?”
“그럴세. 궁금한가?”
“뭔데 그래,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던전에 관련된 거야?”
“물론이네, 자네 플래시 골렘이라고 들어봤는가?”
“플래시 골렘? 그건 또 무슨...”
“설마 플래시 골렘이 이 던전에 있는 건가요?!”
돌연 라디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말톤은 시원한 웃음으로 화답하고는 태연하게 통나무 틈새에 단검을 밀어넣었다.
녀석이 메이스로 칼자루를 내려찍자 장작이 결대로 쩍 갈라졌다.
“그렇네. 2층에 나온다고 하더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 정도 마물이라면 저희의 목표로 삼아도 충분하겠어요.”
“.....”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야, 꼬맹아. 플래시 골렘이 뭐냐.”
“네? 설마 플래시 골렘도 모르는 건...”
“.....”
“아니 뭐... 원체 보기 드문 마물이긴 하니까요. ...녀석들은 암반이 널려있는 고산지대에 주로 서식하는데, 이마 한가운데에 요만~ 한 핵이 박혀 있어요.”
라디가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둘째 마디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 핵에 강한 충격을 가하면 엄청난 섬광과 함께 폭음이 발생하는데, 크기도 작아서 한 번에 많이 운반할 수 있고 연금술사한테도 비싸게 팔리는 소재에요. 더욱이 한두 개씩 소지하고 다니면 긴급한 상황에서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고요!”
“오... 그래?”
섬광탄 같은 건가 보다.
“...근데 자료에 그런 마물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었던가?”
“어... 그러게요? 분명 몬스터 명단 중에 플래시 골렘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말톤님?”
라디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쳐다보자 말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놈들의 서식지가 워낙 험난한 곳에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네. 게다가 돈이 될 만한 내용이라 그런지 당사자들도 외부에 전하지 않고 쉬쉬하는 모양이더군. 소문이 퍼져나가면 금세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 말이야.”
“하긴... 나 같아도 그러겠다. 근데 그러면 너는 그런 고급 정보를 대체 어떻게 구한 거야? 네 말마따나 어지간해서는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려 했을 텐데...”
“여성 모험가들한테 들었네. 길 찾기를 살짝 거들어주니 술술 말해주더군. 그쪽에서 지도에 플래시 골렘이 출몰하는 장소도 표시해주었으니 이따 라디와 함께 보게나.”
““......””
황당한 시선으로 쳐다봤으나 정작 당사자인 말톤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장작 모서리를 깎아 비늘을 만들었다.
이젠 그냥 어이가 없다.
“...진짜 재능이라면 재능이네요. 이젠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만약 말톤님이 보노보처럼 문란한 성격이었다면... 으... 여기 팔뚝에 소름 돋은 거 보여요 도란님?”
“그러게... 난 가끔 보면 이 새끼 취향이 독특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마물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동감이에요.”
“흐흐...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자, 장작은 준비 다 됐으니 받게. 구석구석 칼집을 냈으니 불에 잘 탈 게야. 난 조금 쉬고 있을 테니 뒷일 부탁하네.”
“그래, 고생했다.”
완성된 비늘장작을 받아들었다. 이렇게 미리 장작에 칼집을 먹여두면 화력을 훨씬 높일 수 있다.
말톤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고 난 뒤에는 품에서 부싯돌을 꺼냈다. 지하수로를 빠져나올 때 썼던 바로 그 물건. 죽은 모험가의 품에서 나온 거라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돈 주고 사기는 아까우니까.
꼬맹이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뭐 도와드릴 거 있어요 도란님?”
“아냐, 너도 그냥 가서 쉬고 있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잖아.”
“이 정도야 딱히 힘들 것도 없는데...”
“괜찮아 이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저도 제 할 일이나 하고 있을게요.”
라디가 무릎을 털며 일어나더니 배낭에서 칼날 붙은 철조망을 꺼내들었다.
“...덫이라도 만들게?”
“네, 저는 독을 다루는 능력 외에도 함정 설치가 주특기거든요. 지켜봐 주세요!”
녀석이 자랑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하긴, 짐승을 사냥하는 데 있어 독극물과 함정만큼 효율적인 수단도 드물겠지.
강한 마물들은 독에 대한 내성이 높아 효과가 반감된다고는 하지만, 유용하다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꼬맹이는 체구가 작으니 그 신체에서 오는 한계를 독과 함정으로 극복하는 거겠지. 만약 맹독이 발라진 볼트를 쇠뇌로 발사한다고 하면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터다.
나도 숲에서 생존할 때는 구덩이 아래 독개구리의 점액을 묻힌 작살을 꽂아두곤 했다. 야비한 짓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남는다는 건 결국 그런 거니까.
작은 몸으로 낑낑대며 철조망을 잡아끄는 꼬맹이가 대견해 보였다.
“...좀 도와줄까?”
“아뇨, 도란님은 불 피우는 거나 마저 하세요. 괜히 어쭙잖게 거들어주려는 것보단 그게 더 나아요.”
“그래, 알았다.”
다시금 눈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닥불을 피울 장소 주변의 잡초들을 정리한 뒤 장작을 세모꼴로 쌓았고, 그 아래 불쏘시개를 밀어넣었다.
다행히 부싯돌을 몇 번 맞부딪히자 어렵지 않게 불을 붙일 수 있었고, 꼬치에 끼운 생선을 바위 사이에 고정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느긋하게 배낭에 기대고 앉았다.
원래라면 거처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조리해야 하지만, 이 근방의 마물이라곤 끽해봐야 그린 모스 유충이 전부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불 피우는 게 능숙하시네요.”
“....다 끝났어?”
“네, 보다시피요.”
라디가 내 곁에 걸터앉았다. 녀석이 지나온 공터 주변에는 가시철조망으로 만든 장애물이 빙 둘러져 있다. 왕래하는 모험가들이 실수로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군데군데 나뭇가지를 박아 경계선을 표시해둔 데에서 녀석의 꼼꼼함이 엿보였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수통을 기울였다.
“...혼자서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왔으니까.. 너도 고생했어, 저거 엄청 무겁지 않냐?”
“라이트메탈로 만든 거라 보기보다 가벼워요. 대신 강도는 조금 떨어지지만요... 독이라도 발라둘까요?”
“...아니, 어차피 날이 밝으면 바로 떠날 텐데 굳이 독까지 묻혀 둘 필요는... 나중에 거처를 옮기게 되면 그때 생각해보자.”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검푸른 수풀을 비집고 새어들어온 소슬바람이 잔잔한 침묵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그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찌르르 노래하는 풀벌레.
팔을 뻗으면 어깨를 살짝 스칠 정도의 거리. 이 간격이 지금 우리 사이의 거리겠지.
적적하게 수통을 기울이며 시간을 죽이던 중, 옆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도란님.”
“왜.”
“고마워요.”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녀석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후드에 가려진 옆얼굴은 새빨간 화염 탓에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 작은 입술이 살포시 열린다.
“그때...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제 손 잡아주셨잖아요...”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손을 잡힌 건 처음이었는데... 솔직히... 조금 기뻤어요. 그때.”
“그냥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라디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한 떨기 가녀린 웃음을 지었다.
*
말톤이 냄새를 맡고 텐트 밖으로 기어나왔다.
“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가 했더니... 이거 기대되는군.”
“흐흐... 내가 언제 실망시킨 적 있나?”
“단연코 없지. 오늘도 포식하겠군.”
“...제법인데요? 이런 요리도 할 줄 알고.”
“그럼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가사를 담당해 왔는데.”
어렸을 적부터 집에 동생과 둘만 있는 일이 잦아 집안일에는 도가 텄다. 더욱이 아버지와 함께 온갖 오지에서 생존해온 경험 덕에 이런 야생에서 해 먹는 요리에도 익숙하고.
“자 다 구워졌으니 이제 먹자. 뜨거우니 조심하고.”
“잘 먹겠네 도란.”
“아, 고마워요...”
잘 익은 꼬치 하나를 라디에게 쥐여주었다. 이어 손안에 든 생선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자 말톤이 호들갑을 떨며 호평했다.
“오...! 이건...!! 역시 자네일세!! 내 이렇게 완벽한 생선구이는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군!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게... 간도 아주 적당하게 잘 됐어!”
“이, 이렇게 훌륭한 생선 요리는 처음 먹어봐요!!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먹었던 꼬치구이보다 맛있는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구아구.
말톤과 라디가 허겁지겁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내가 한 요리를 두 녀석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음... 내가 한 거지만 아주 잘 됐다.
이 세계에서 요식업을 했어도 나름 대성하지 않았을까? 물론 가게를 낼 돈이 없지만.
“...천천히 먹어라. 그러다 저번처럼 체할라.”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또 그런 실수... 켁, 크흡...!”
“자 여기 물.”
“가, 감사합니...”
그럴 줄 알았다.
라디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수통을 건네받았다. 왠지 익숙한 광경인데.
녀석이 목을 축이고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거 봐, 애 맞잖아 인마.”
“으으...”
꼬맹이는 부끄러운 듯 꼬치구이를 움켜쥔 채 몸을 떨었지만, 딱히 변명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툭 고개를 떨구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물든 게 제법 장관이다.
일부러 젠체하며 녀석의 어깨를 짚었다.
“뭐, 내가 워낙 요리를 잘하는 건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이제 패배를 인정하겠어?”
“저, 저도 요리할 줄 알거든요? 한 번 잘했다고 우쭐대지 마세요!”
“에이... 해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어. 고작해야 냄비 안에 재료들 몽땅 집어넣고 끓이는 스튜나...”
“다.음.번.에!! 제가 요리할 테니까 먹고 감동해서 질질 짜지나 마세요!!“
“그래 알겠다. 기대하고 있을게.”
“어어...?”
갑자기 시원스레 태도를 바꿀 줄은 몰랐는지 녀석이 입술을 벙끗거렸지만, 나는 그저 실실 웃을 뿐.
녀석은 곧바로 속았다는 걸 깨닫고 분한 듯 볼을 부풀렸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게 어른의 여유라는 거지.
약속 지켜라.
*
타고 남은 잔불이 어저러이 흩어졌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천장을 올려다보자 어느새 던전 내부는 까맣게 물들었다.
놀라우리만치 밝은 빛을 내뿜던 발광 이끼는 언제 그랬냐는 둥 조용히 잠들었고, 이따금씩 작은 불빛이 반짝거려 밤하늘의 별을 떠올리게 했다.
머나먼 유적지에서 문뜩 올려다보았던 밤하늘처럼 환상적인 풍경.
그 절경 아래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던전에서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네요...”
“확실히 멋들어진 풍경이군. 자네들 혹시 더 굉장한 걸 보고 싶지는 않나?”
“더 굉장한 거?”
“이것보다 더 말인가요?”
“그렇네. 얼마 안 걸릴 걸세.”
“음... 어떡할까...”
“어쩌죠....? 그렇다고 텐트를 두고 가는 건 좀 그런데...”
고민하던 찰나, 말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읊조렸다.
“어차피 이 시간대는 다른 모험가들도 취침 준비로 바쁠 테지. 텐트 주변에 함정까지 설치해뒀으니 몬스터도 걱정할 필요 없고. 잠깐이면 충분하네, 어떤가?”
“음... 그렇다면...”
나와 라디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후, 말톤이 우리를 데리고 향한 곳은 물고기를 잡을 때도 들렀던 냇가였다.
다만 한 가지, 그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우와...! 저것 좀 보세요 도란님!!”
라디가 내 소매를 잡아끌며 외쳤다.
“...그래, 보고 있다.”
잔잔하게 흐르는 냇물 위를 무수한 반딧불이가 유유히 배회하고 있었다.
투명한 물결에 비치는 수천수만 불빛은, 한여름 밤 하늘 위로 떠올린 풍등처럼 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다가 끝내 여울진 물살 끄트머리에 닿아 잘게 부서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이는 빛무리는 마치 은하수를 보는 듯했다.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무런 예고 없이 불어온 한 줄기 연풍에 길을 잃은 반딧불이가 떠밀려왔다.
라디가 내게 속삭였다.
“반딧불이가 빛나는 건 한순간이래요.”
쪽빛 바다를 품은 푸르른 눈동자에 황금빛 너울이 일렁였다.
“반딧불이의 불빛이 예쁜 건, 우리가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래요.”
라디의 작은 손바닥 안에 외로운 빛 하나가 담겼다.
“그래서래요.. 추억으로 남고 싶어서... 웃으며 작별하는 거래요.”
너무나도 덧없는 미소.
저 작은 불빛들은 알까?
그 애틋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