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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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던전 #7
“와 씨... 큰일 날 뻔했네.”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뻔했다.
“먼지를 떼려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꼬맹이의 머리카락에 티클이 붙어있기에 손으로 떼 주려 한 행위 자체는 괜찮았다고 생각하지만, 중간부터 분위기가 조금 위험했었다.
“이상한 오해라도 하면 어쩌지...”
아무리 실수였다고는 하지만, 어렸을 적 남자한테 고백한 트라우마가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어찌 됐건 나도 크누트 길드 소속. 혹시라도 내가 다른 길드원들처럼 이상한 성벽이나 취미를 가졌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것치고는 녀석도 조금 묘했는데...”
...모르겠다 시발.
될 대로 되라지.
혹시나 꼬맹이가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잡아떼면 되는 거고.
터벅터벅.
내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아까도 왔었던 작은 도랑.
멧돼지를 손질할 때 유심히 봐 뒀던 물체가 있다.
“찾았다.”
발치에서 단검을 뽑아 바위에 달라붙은 발광 이끼를 긁어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건 멧돼지 통 이끼 바비큐.
고기의 겉면을 이끼로 감싼 뒤 모닥불에 던져 넣으면 수분이 증발하는 걸 막아 촉촉하고 육즙 넘치는 고기를 맛볼 수 있다.
번거로운 과정 없이도 최상급의 육질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장점. 어제 꼬맹이가 서슴없이 만지는 걸 봤으니 독이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니겠지.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럼 이제 돌아갈...”
이끼를 한 움큼 들고 자리를 뜨려는 찰나, 저만치에서 열 명 남짓한 모험가 무리가 담소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야, 뭐 적당한 거 찾았어?”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아까 온 파티는 마법사도 섞여 있더군.”
“마법사는 안돼.”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모험가들.
대화 내용도 별다를 게 없었으나.
“......”
저건 도적이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장비의 불균형.
무릇 평범한 모험가라 하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장비를 마련하는 게 보통이다.
그럼 당연히 품질도 얼추 비슷해야 정상.
하지만 녀석들의 장비에선 일체의 통일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 헤진 레더아머를 입고 있는 녀석이 고급스러운 히터 실드를 들고 있는가 하면, 누가 봐도 F급 모험가로 보이는 녀석이 보석 박힌 칼자루를 쥐고 있질 않나...
셔츠 옷깃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금목걸이도 그렇고 어디 귀족 자제의 파티라도 턴 듯한 모습이다.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이끼를 줍는 척하며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래서 그 녀석들은 어디로 갔는데?”
“2층으로 이동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다음은...”
“쉿... 목소리 낮춰.”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녀석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열 명은 족히 넘는 무리.
저벅저벅.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흘러내린 식은땀이 콧잔등을 타고 미끄러진다.
놈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
툭.
“저기요.”
당황하지 마 도란.
“...네, 무슨 일이시죠?”
“이거 떨어뜨리신 모양인데, 그쪽 물건 맞죠?”
“아...”
그놈의 손에는 낯익은 나뭇조각이 들려 있었다.
모험가 패.
황급히 가슴팍을 만져봤으나, 있어야 할 게 잡히지 않았다.
남자가 패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흐음... 도란이라... F급 모험가시군요?”
“아... 네, 이거 뭔... 감사합니다.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침착하게.
“조심하셔야죠. 모험가가 자기 명패를 잃어버리시면 많이 곤란할 텐데.”
그가 방긋 웃으며 내게 목패를 건네주고 떠나려는 순간ㅡ
덥석!!!
“.......!!!”
“...앞으로는 다른 사람 얘기를 엿들을 때 더 주의하는 게 좋겠어요. 도란 씨.”
오한.
섬뜩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귓등을 타고 전해졌다.
“무슨 일이시죠 대장님?”
“아냐, 아무것도. 그럼 수고하세요.”
놈이 내 손을 놓아주더니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떠나갔다.
“......”
최소 A랭크.
나는 내 손목에 남은 다섯 줄기 시퍼런 멍 자국을 바라보며 못 박힌 듯, 한동안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
이미 어두컴컴해진 하늘.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텐트로 향했다.
“나 왔다. 좀 늦었...”
“아, 오셨어요?”
“....내가 뭘 보고 있는 거냐.”
지친 심신을 이끌고 야영지에 도착한 내 눈동자에 비친 건, 애벌레처럼 엉덩이를 쭉 내밀고 엎어진 말톤과 그런 녀석을 짓밟고 선 꼬맹이의 모습이었다.
라디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아... 이거요? 말톤님이 조금 기어올라서 손 좀 봐줬어요.”
“....쟤 지금 눈깔 뒤집혔는데 위험한 거 아냐?”
“괜찮아요, 그냥 잠시... 피곤한 모양이에요!”
“아니... 아무리 봐도 저거 입에 거품...”
“괜찮아요!”
“그래도 그렇...”
“괜찮아요.”
“.....”
“그쵸, 도란님?”
녀석이 화사하게 웃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래, 좋아 보이네.”
“네! 도란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투구 속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왠지 알면 안 되는 것을 알아버린 느낌.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키는 말톤을 애써 무시하고 이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우선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한 해명과 도적들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한다.
자리에 앉으며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저기... 좀전에 있었던 일은 말이야...”
“네? 무슨 일이요?”
“아니 그때 일 말야...”
“네...? 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까 멧돼지 해체할 때...”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희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냐, 아무것도. ...바비큐 할 건데 고기 감싸는 것 좀 도와줄래?”
“네, 그 이끼로 덮으면 되나요?”
“그래.”
잠시간 야영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금 거북하게 느껴지는 침묵. 슬쩍 고개를 들어봤지만 라디는 묵묵히 작업에 열중할 뿐, 길게 드리운 후드 탓에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지금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다 됐어요, 도란님.”
“그래, 그럼 이것도 부탁할게.”
내가 고기에 소금을 뿌리면 라디는 이끼로 겉면을 감쌌다. 내일 먹을 분량을 남겨두고 전부 모닥불 속에 던져넣자 예정된 적막이 찾아왔다.
“.....”
“....”
야영지엔 마른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요란할 뿐, 대화라고는 전무
“커어어어억!!!”
말톤이 기상천외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녀석은 제 목을 붙들고 가쁜 숨을 토해냈다.
“크헉... 흐윽...! 쿨럭!!”
“...야, 괜찮냐.”
“도, 도란 자넨가...?”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 저 기지배... 커흡!!! ...아, 아무것도 아, 아닐세...!”
말톤이 힐끗 라디를 올려다보더니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시선을 피했다. 삐질삐질 배어나오는 식은땀이 꼭 흘러내리는 촛농을 보는 듯하다. 아니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말톤님... 쓸데없는 소리는...?”
“아, 알고 있네...! 잘 알고 있네!! 잠자코 입 다물고 있을 테니 제발....!”
“똑바로 하세요. 말톤님.”
“흐윽...!”
말톤이 납작하게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꼬맹아 도대체 무슨 일이...”
“도란님은 알 필요 없어요.”
싸늘하다.
가슴에 따가운 눈초리가 날아와 꽂혔다.
지금 이 녀석을 건드렸다간... 상당히 좋지 않은 꼴을 보게 될 거란 건 분명하다...!
저기 꼬불꼬불 기어가는 말톤처럼.
“......”
짙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래도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지. 놈이 적절한 타이밍에 일어나준 덕에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어색함도 많이 줄어들었고.
“...왜 웃어요?”
“내가?”
“네.”
“...고기 먹을 생각에 기대돼서 그런다. 어디 함 익었나 볼까?”
도적 만난 얘기도 해야 하는데... 때를 놓쳐버렸다. 이따가 자기 전에 해두면 되겠지. 놈들은 이미 이곳을 뜬 모양이고, 주변에 모험가가 이렇게나 많은데 당장 허튼 수를 벌이지는 않을 테니까.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모닥불을 헤집어보니 하얗게 불탄 이끼 사이로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가 보였다.
“오오... 벌써 다 구워졌는데?”
“노릇노릇하게 잘 익었네요. 엄청 맛있어 보여요.”
“그래, 꼬맹아 거기 나뭇가지 좀 주워줘.”
“네, 잠시만요...”
나뭇가지로 고기를 집어 평평한 돌 위에 내려놓았다.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는 살코기를 썰자, 촉촉한 핑크빛 단면에서 육즙이 흘러넘쳤다.
꿀걱.
위장이 요동친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흠흠... 오늘도 감사히 먹겠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고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말톤이 한 점 입에 머금더니 감탄사를 남발했다.
“이건...! 별미로군!! 고기의 육즙이 그대로 남아있네...! 대체 자네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음... 진짜 맛있어요...! 꼭 마법 같아요! 제가 요리하면 이런 맛이 안 나오던데...”
“.....”
맛있다.
피를 잘 빼서 그런지 누린내도 전혀 없고 일반 돼지고기보다 훨씬 고소하다.
더욱이 아침부터 연속된 행군으로 지친 터라 더 별미다. 사실상 거의 공복이나 다름없었으니. 입안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살코기가 일품이다.
라디가 하얗게 타버린 이끼를 요리조리 들춰가며 읊조렸다.
“...이끼에 싸서 고기를 구울 생각을 하다니... 신기하네요. 전 상상도 못 했어요.”
“어, 처음이었어? 당연히 먹어 봤을 줄 알았는데.”
“음... 이런 방식이 있다고 옛날에 얼핏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런데 예상을 초월하네요. 멧돼지 고기가 이렇게나 맛있는 거였다니... 중독될 것 같아요.”
“흐흐... 그야 당연히 맛스럽겠지. 누구랑 같이 손질한...”
“말톤님.”
“...아무 것도 아닐세.”
“자꾸 기어오르시다간 정말로 죽는 수가 있어요.”
“살려주게...”
말톤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며 막 떠오른 궁금증을 입에 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꼬맹아, 나 지금 막 생각난 건데...”
“네, 말씀하세요 도란님.”
“발광 이끼가 죽은 마물의 양분을 먹고 자란다고 했잖아, 그럼 어떻게 천장에까지 나 있는 거냐. 그런 데 몬스터가 묻힐 수도 없을 텐데.”
“아, 그건 이끼들이 전부 연결되어 있어서 그래요.”
“연결되어 있다고?”
“네, 동시에 빛나고 어두워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발광 이끼들은 정확히 한 식물이라고 보는 게 옳아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개체들끼리도 신호를 주고받는다고 하네요.”
식물성 거대 슬라임 같은건가...?
“그러면 던전 내부는 밤낮이 다 같아?”
“그건 아니라네.”
말톤이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자네, 지금 이 던전이 몇 층까지 탐색 되었는지 알고 있나?”
“분명... 7층까지라고 하지 않았어?”
“맞네, 그리고 7층은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더군.”
던전 안에 눈이라니...
“...그런데 그게 왜?”
“발광 이끼도 생물인지라 추우면 활동이 뜸해진다네. 7층처럼 기온이 낮은 지역에선 낮이 하루의 절반도 채 안 되는 모양이야. 자연히 이곳과는 시차가 다를 수밖에 없지.”
“...그럼 불침번도 그만큼 오래 서야 한다는 얘기잖아. 게다가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곳이라니... 최악이네. 한겨울 야간 불침번만큼 끔찍한 게 없는데.”
“흐흐... 다행히도 우리가 그곳에 갈 일은 없을 테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A급 모험가 파티도 7층에서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고 하더군. S등급 모험가라도 오지 않는 이상 6층까지를 탐색 가능 마지노선으로 보고 있네.”
S급 모험가라... 저번에 숲에서 만났던 소녀라면 가능할까?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그때의 광경을 떠올리고 있노라니 말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슬슬 불침번 순서를 정해야겠군.”
“그러게요, 다들 얼추 식사도 끝난 모양이니...”
대화를 나누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다 보니 그 많던 고기도 반질거리는 기름 자국만 남긴 채 게 눈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남은 찌꺼기들을 대충 정리한 뒤, 제비뽑기로 불침번 순서를 정했다.
그 결과.
“씹탱.”
“흐흐... 오늘도 도란 자네가 수고해줘야겠네.”
“도란님은 제비뽑기에는 영 소질이 없으시네요...”
“아니 왜 또 난데...”
하필이면 초번이다.
평소라면 제일 반길 순번이지만, 이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시간을 잴 수단이라곤 말톤의 모래시계가 유일한 상황. 하필이면 모래가 떨어지는 시간도 어중간한 탓에 오늘부터 초번은 말번도 겸하기로 정했으니까.
....여러모로 불편함이 많다.
“흐흐... 그럼 난 이만 들어가보겠네.”
말톤은 숯으로 대충 양치질을 하더니 텐트 안으로 낼름 기어들어갔다.
“...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라디도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어깨를 짚으며 내뱉었다.
“같이 갈까?”
“미쳤어요?”
“네?”
“미쳤냐고요.”
“아니... 그 왜... 혹시 위험할까 해서...”
“...괜찮아요. 제 가방 앞쪽 주머니에 타린 약초 있으니까 필요하면 그걸로 벌레나 쫓고 계세요.”
라디가 훌쩍 떠나갔다. 도적 떼를 본 직후라 걱정되어 반사적으로 말을 꺼낸 게 화근이었다.
...하긴, 나도 학창시절 때 여자애들끼리 손잡고 화장실을 가는 모습을 보며 기겁하곤 했었지. 무슨 화장실을 같이 가냐면서.
아까 있었던 일도 있고 충분히 오해받을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꼬맹이의 배낭을 열며 다시 한번 스스로 되뇌었다.
“...그나저나 타린 약초가 어딨다는 건데?”
모닥불에 비추어가며 이 잡듯 배낭을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에선 지독한 전염병을 옮기는 벌레들도 간혹 존재하는 만큼, 야영할 때 방충 대책을 마련해 두는 건 필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흔하게 널린 타린 약초를 불에 태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
“여긴가?”
무심코 안쪽 공간 깊숙히 손을 집어넣자ㅡ
“어, 어...? 자, 잠깐 이건...!”
손가락에 와닿는 부드러운 감촉.
“여, 여성용 속옷...?”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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