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2화 (32/375)

〈 32화 〉 던전

* * *

[032] 던전 #8

“뭐 하세요, 도란님?”

“씨, 씨발!!!!”

“깜짝이야! 왤케 놀라세요?”

“아, 아니야 아무것도.”

어느새 라디가 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황급히 나풀거리는 천 조각을 배낭 깊숙이 밀어넣자 녀석이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이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나와 배낭을 번갈아봤다.

“그건... 제 가방이네요...?”

“타, 타린 약초!! 타린 약초를 찾고 있었어!!!”

“...네 그런데요? 너무 당황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 아니 아무리 뒤져봐도 못 찾아서 말이야...”

“잠깐 비켜 봐요.”

녀석이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주섬주섬 배낭을 뒤지더니 곧바로 초록색 풀떼기를 꺼내 건넸다. 내가 찾을 땐 아무리 들쑤셔도 안 나오더니...!

“여기 있어요. 앞주머니에다가 넣어뒀다고 말했었는데...”

“그, 그래 고맙다. 잘 쓸게.”

“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깨워주세요.”

“...그래, 잘 자라.”

다행히도 들키진 않은 것 같네.

라디는 조용히 텐트 입구를 열어젖히고 들어가...

...기 직전에 우뚝 멈췄다.

이내 손끝에 힘을 실으며­

“...도란님.”

“으, 응?”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

“제 가방에서 다른 걸 찾아보거나 그랬던 건 아니겠죠?”

섬뜩.

서리가 타고 오르는 듯 차가운 오한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 그럴 리가 있냐아. 거, 걱정 말고 잘 자라.”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니 수상한데...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요?”

“그, 그러엄.”

“...정말로?”

라디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허벅지 아래를 꼬집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나 믿지?”

“......”

꼬맹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가늠하더니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텐트 안으로 들어가... 려다가 말았다. 또 뭔데.

“왜 그래.”

녀석이 가림천을 부여잡고 한참을 우물쭈물 망설이다 입술을 뗐다.

“도란님, 아까 있었던 일 말이에요...”

아.

“그거 그냥 실수니까 도란님도 잊어버리세요. 그럼...”

녀석이 휙 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

그렇게 다시 또 야영지에 잔잔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찌르찌르 울어대는 귀뚜라미.

흔들리며 올라간 연기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실려 넓게 퍼져나갔다.

“...후우.”

차분히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짙은 타린 약초 향이 물씬 풍겼다.

조금 진정되는 느낌.

“몰랐어...”

설마.

꼬맹이가.

“여장 취미가 있을 거라곤...”

사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라디는 근본부터가 크누트 길드원. 그것도 최소 5년 이상 활동해온 은 랭크 회원이다.

“역시 크누트 길드에 정상인이 있을 리가.”

그곳은 본디지를 평상복처럼 입고 다니는 우락부락한 쌉마초맨들로 가득한 미친놈 소굴이다.

말톤 같은 이상성욕자가 아예 디폴트란 말이다.

그런 곳에서 정상인을 발굴해내는 건 이태원에서 윌리를 찾는 것보다 어려울 터.

녀석, 어쩐지 예쁘장한가 했더니 역시 내 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처음 얼굴을 들여다봤을 때 여장이 잘 어울릴 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본격적으로 진행 중이었을 줄이야.

하긴... 그 정도 변태는 돼야 말톤이나 홍 콩한테 간신히 견줄 수 있지.

“뭐 녀석이 비밀로 한다면...”

모르는 척 지켜주는 게 어른이겠지.

“완숙한 어른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야, 말톤 일어나 아침이야. 꼬맹이 너도 마찬가지고.”

어느덧 던전의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았다.

불침번 내내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다. 꼬맹이라도 앉혀놓고 떠들면 순식간에 지나갔을 텐데.

“기상! 기상!!”

군시절, 악몽과도 같았던 기상나팔 소리를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며 모포를 펄럭이자 라디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잘 때도 후드를 뒤집어쓰고 자는구나.

“으응... 벌써 아침이에요...?”

“그래 잠 깨라 인마.”

“으...”

비몽사몽 눈가를 부비적거리는 녀석에게 수통을 건네주었다. 잠결에 흐트러진 후드 탓에 뺨에 달라붙은 잿빛 머리칼 사이로 붉은 문양이 선명하게 엿보인다.

자고 일어나도 안 지워지는 걸 보니 페인팅은 아닌가?

“고마워요. 으윽...!”

­뚜둑!

“...나도 물 좀 주게 도란.”

“자, 던질 테니 받아.”

“고맙네.”

말톤이 목을 축이고 능숙한 손길로 모포를 개어나가며 말했다.

“...갈 길이 머네. 이르면 오늘 안에 2층 입구에 도달할 수 있을 테지.”

“다음 층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마물이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도란님은 늘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막상 몬스터가 출몰하면 못 싸워서 안달이시잖아요.”

“내가?”

“네.” “그럴세.”

“...내가 언제.”

“항상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스스로를 너무 지나치게 낙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일세. 자네도 정상은 아니라네.”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죠...”

“옘병.”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두 변태들한테 들을 소리는 아니다.

“...빨리 출발이나 하자. 엉뚱한 소리로 진 빼지 말고.”

손을 휘저어 화제를 종식한 뒤 일사불란하게 텐트를 해체했다.

마지막으로 모닥불을 꺼트리고 황금빛 들판을 뒤로한 채 다시 여정길에 올랐다.

무릎밖에 오지 않았던 들풀들은 이제 골반을 스칠 정도까지 자라났고,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산재해 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검집을 수평으로 세워 요령껏 수풀지대를 헤쳐나가며 읊조렸다.

“...야, 근데 진짜 넓다. 어떻게 지하가 이렇게 넓을 수가 있지?”

“흐흐... 아래층으로 가면 갈수록 규모가 곱절로 불어난다더군.”

“곱절? 분명 지도에 따르면 그렇게까지는...”

“지도라고 정확하게 모든 구역이 표기된 건 아니니까요. 미답사 구역까지 합치면 말톤님의 말이 맞을 거예요. 만약 저희가 숨겨진 유적지라도 발견한다면...”

“순식간에 떼부자 되는 거지 뭐, 흐흐... 야, 말톤 너는 돈 벌면 뭐 할 거냐?”

“흠... 나는 지금도 딱히 부족하지 않아서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네만... 잘 모르겠네. 아마 저축하지 않을까 싶네.”

“역시 돈 많은 새끼는 생각하는 것부터가 달라. 꼬맹아 너는?”

“.....”

“꼬맹아?”

“아, 네... 저도 그냥... 말톤님처럼 저축하려고요.”

표정이 어둡다.

“그런 거 말고, 인마.”

“네?”

“저축한 돈으로 뭘 하고 싶은데? 너도 하고 싶은 게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아예 단 하나도 없어?”

“...죄송해요. 평소에 돈을 쓴다는 생각을 안 해봐서...”

라디가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다 이내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죄송하긴... 야, 그럼 우리 돈 많이 벌면 같이 놀러나 가자.”

“네?”

“반응이 뭐 그래? 네가 좋아하는 독성 몬스터가 잔뜩 나오는 곳에서 사냥이나 겁나 하고 오자. 어때, 좋지?”

“그야 그건...! 저는 좋긴 하지만... 도란님이 득 볼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의기소침한 목소리.

“인마, 내가 득 볼 게 하나도 없긴 왜 없어? 나도 몬스터 잡아서 돈도 벌고 겸사겸사 네 얼굴도 보고 그러는 거지.”

“....그건 무슨 의미예요...?”

“무슨 의미긴 말 그대로지.”

물론, 이는 표면상의 구실일 뿐이다.

내가 녀석과 함께하려는 건 지극히 타산적인 이유 때문이니까.

이 세계에 오고 깨달았다.

이 지독한 수레바퀴에서 탈출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차별과 멸시, 모멸과 굴욕, 핍박.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건 이제 지쳤다.

최근 들어 어느 정도 모험가 일이 궤도에 올랐다지만, 여전히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신세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안락한 집, 따뜻한 음식과 여유로운 삶.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들이지만, 한순간에 송두리째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달았다.

또한 그것들을 되찾으려면 무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이건 그 첫걸음. 혼자서는 단시간 안에 강해지는 데 한계가 있다. 오죽하면 그 강하다는 용사도 동료가 있었겠는가.

단신으로는 무리여도 세 명이면 할 수 있고, 세 명이 무리면 그보다 많은 수를 불러오면 된다.

그리고 이 녀석은 말톤 다음으로 만난 인연.

지금은 계약으로 묶인 사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친분을 쌓아가는지에 따라서 추후 우리의 관계가 바뀔 수 있다.

반드시.

이번 던전 원정이 끝나기 전까지 이 녀석을 내 동료로 만들고 말겠다.

그런 각오를 담아 쳐다보자 라디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흐흐... 드디어 라디에게도 봄날....”

“제발 좀 닥쳐요 말톤님.”

“이거 원... 늙은이는 빠져야겠구먼.”

말톤이 너털웃음을 지으면 뒤로 물러났다. ...쟤 저러다 또 한 대 맞을 텐데.

“...도란님도 쓸데없는 소리 하시지 마시고요.”

“나? 내가 왜.”

“그야...! ...아니에요 됐어요.”

“뭐야, 싱겁게.”

“......”

“흐흐 좋구먼...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아, 다 왔군. 다들 저길 보게나!”

“아니, 저건 또 무슨...”

대화를 멈추고 올려다보자 전방에는 끝도 보이지 않는 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덤으로 뗏목을 타고 바둥바둥 노를 젓는 모험가들도.

“...시발.”

이제는 황당할 지경이다. 난 분명 지독하게 어둡고 비좁은 토굴에서 물밀 듯이 몰아치는 마물과 싸울 각오를 하고 던전에 들어왔는데 이건 그냥 모 생존 프로그램을 찍는 기분이다.

배낭을 내팽개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말했다.

“아니, 옘병 또 물을 건너야 해? 아직도 피라냐한테 물어뜯긴 엉덩이가 따끔거리는데.”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세. 이곳만 지나면 더 이상 물가를 마주하는 일은 없을 테지.”

“으음... 거리가 거리이니만큼 이번에는 뗏목이 필수겠어요... 보아하니 하층으로 가는 모험가들은 전부 이곳으로 몰려든 모양인데, 혹시 대여소라도 있는지 찾아볼까요?”

“그게 좋겠군. 이 정도 인파라면 하나쯤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걸세.”

“...진짜 얼탱이가 없네...”

아니, A급 파티도 이곳에 왔었다며. 던전에 보트를 가져올 사람도 없을 텐데, 그럼 놈들도 전부 뗏목으로 이 습지를 건넜다는 거야...?

빨빨대며 열심히 노를 젓는 A랭크 모험가들이라니... 참으로 맥빠지는 모양새다.

“아, 저기 있네요. 뗏목 대여소.”

“...진짜 있네.”

라디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정말로 뗏목 대여소라고 적힌 간판이 떡하니 자리했다. 흔해빠진 매대 하나 없는 초라한 외관이었지만, 나무 팻말 앞에는 흥정에 열을 올리는 모험가와 상인들로 붐볐고, 그 뒤로는 열 척 가까이 되는 뗏목들이 늘어서 있다.

절로 탄성을 자아내는 광경.

“와... 던전 속에서 장사할 생각을 하네... 게다가 엄청 본격적인데? 저 규모 좀 봐.”

“...지독하네요.”

“흠... 일단 대여료가 얼마인지부터 확인해야겠군.”

“제가 다녀올게요. 짐 좀 부탁해요.”

라디가 배낭을 내려놓더니 팻말이 적힌 곳으로 총총 걸어갔다.

허나 오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똥 씹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꼬맹아 왜 그리 죽상이야?”

“저 빌어먹을 수전노 새끼들이... 아, 왠지 기시감이...”

“...얼마인데 그래?”

“한 번 대여하는데 5실링이래요. 진짜 돈 앞에서는 지 애미 애비도 몰라볼...”

“스톱, 우리 꼬맹이 화난 거 알겠으니까 거기까지. ...어쩔 수 없지, 직접 만들어서 건너는 수밖에.”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열심히 나무를 베는 모험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삐까번적한 무구들을 장비한 채 도끼질이나 하는 신세라니... 뭐, 사실 말이 좋아서 모험가지 사실상 잡일꾼과 다를 바 없는 직종이니까.

“어이~ 한씨! 새참도 좀 자시면서 해.”

“고맙수. 이것만 마저 베고 먹겠수.”

“참... 한씨가 일을 참 열심히 하긴 혀.”

“C랭크나 되는 모험가면서도 말이야... 듣자 하니 딸내미가 곧 아가사 신전 견습 수녀로 들어간다지?”

“웜매... 겨 아직 여덟 살밖에 안 됐는데도 말이여? 경사 났네 경사 났어!”

“다들 고맙수.”

­따악! 따악!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건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꼬맹아, 나랑 말톤은 나무 좀 해서 올 테니까 여기서 짐 지키고 있어 줄래?”

“그럼 같이...”

“괜찮아, 오늘 텐트까지 짊어지고 오느라 고생 많았지? 조금 쉬고 있어.”

“그, 그래도...”

“어흠... 저기 도란? 꽁냥대는 건 좋은데 말이지...”

말톤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왜, 말톤.”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저길 보게나.”

눈살을 찌푸리며 앞을 쳐다보자 저 멀리 뗏목 대여소에서 한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정확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뭐야, 너 혹시 뭐 켕기는 짓이라도 했냐?”

“지금까지 계속 자네랑 같이 있었는데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왜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

“어? 저 상인이 분명 도란님을 부른 것 같은데요?”

“에이... 설마.”

내가 아는 상인이라곤 란스 한 명뿐이다. 최근 어디선가 트집잡힐 만한 짓을 벌인 적도 없고.

“도... 란...!”

“어?”

“도란님...!!!”

아.

저 사람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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