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3화 (33/375)

〈 33화 〉 던전

* * *

[033] 던전 #9

“아이고 이거 도란님이 아니십니까....! 누추하신 분이 이런 귀한 곳... 아니 아니,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로!!”

“오필리아 상단이야말로 왜 여기에... 그러니까 분명 성함이 아 뭐시기...”

“아무르입니다 도란님!”

“네, 맞아요 아무르 씨.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오... 영광입니다!! 아이고, 이거 말톤님도 있었습니까?! 반갑습니다!!”

“흐흐... 반갑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배가 불뚝 튀어나온 중년의 사내가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설마 던전 안에서 다시 조우하게 될 줄이야.

“저기... 도란님...”

라디가 소매 끝을 툭툭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아는 사이에요?”

“아... 너는 모르겠네. 던전 마을까지 올 때 호위했던 상인 중 한 명이야.”

“아, 그 도적 떼가 나왔다던 그때요?”

“그래.”

라디가 수긍하며 물러나자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헌데... 아무르 님은 상인 아니셨습니까? 이곳에는 어쩐 일로 와 계신 건지...”

“뭐, 저야 보다시피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거 돈벌이가 꽤 짭짤하군요! 누가 던전에서 뗏목으로 사업을 할 거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이게 다 틈새시장이란 겁니다! 원가도 별로 안 들어갑니다! 보십쇼!!”

상인이 팔을 벌려보이자 저 멀리 건장한 사내들이 통나무를 운반하고 있었다. 다만, 옷차림이 빈약한 게 딱 봐도 노예들이다. 얼굴에 혈색이 도는 거로 보아 제법 좋은 취급을 받는 것 같다만은...

어쨌거나 이건 기회다.

너스레를 떨며 부응했다.

“오호... 그거참 현명한 생각이군요! 마침 저희도 뗏목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층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이 습지를 꼭 가로질러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아이고 이런,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따라오시죠!!”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뒤돌더니 습지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와 라디는 잠시 눈을 마주친 뒤 씨익 웃고는, 헐레벌떡 상인을 뒤쫓았다.

그렇게 잠시 나아가자 그가 한 뗏목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자, 이게 지금 제가 보유한 뗏목 중에서 제일 좋은 녀석입니다! 무려 8인승짜리입죠!”

“과연... 확실히 튼튼해 보이네요. 이런 걸 대여하려면 가격이 어디 보자... 10실링?!!”

“흐흐... 비용은 조금 들지만 그만큼 안전하다고 자부합니다! 그린 앨리게이터가 나오는 이 습지를 건너가려면 이 정도는 필요할 겁니다!”

“그치만 저희는 돈이...”

“허허... 생명의 은인한테 돈을 받을 수는 없지요! 비용은 일절 필요 없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말톤 님과 도란 님께 제공해드리는 거니까요.”

“저,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아니, 어째서 이렇게까지...”

너무 친절하니 되려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무상의 호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있다면 그건 사기꾼이거나, 더 큰 무언가를 바라는 경우.

아무리 생명을 구해주었다고는 한들 그건 의뢰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손익 계산에 철저한 상인이 선뜻 이런 손실을 감내하고자 할 리 없다.

내 물음을 들은 상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슬쩍 속삭여왔다.

“사실은... 기왕 이렇게 된 인연, 왕실 특수부대와 친분을 맺어두면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앞으로도 저희 상단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 맞다.

이 사람,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지.

도적 떼를 무찌를 때 랭크에 맞지 않는 강함을 선보인 탓에 나를 잠행 중인 특수공작원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여전히 오해하고 있나 보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써먹어 볼까?

목소리를 낮게 깔며 읊조렸다.

“흠흠... 아무르 씨 그건 어디까지나 극비입니다. 모쪼록 비밀 엄수 부탁합니다.”

“흐... 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상인이 전율이 돋는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술 더 떠 덧붙였다.

“흠... 이렇게나 친절하게 협조해주신다고 하니 저희도 한 가지 정보를 알려드려야겠군요. 사실, 이 던전 탐색도 비밀 임무의 일환입니다...!”

“여, 역시나...!! 호, 혹시 아, 악마라도 출현한 겁니까?”

“아, 악마? 흠흠... 아직은 조사 단계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파견 나온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죠!”

“아, 악마라닛!!! 어쩐지 요즘 잠잠하다 싶었는데 이런 곳에 숨어있었을 줄이야...!”

“쉿!! 어디까지나 극비사항입니다! 왕국의 일급비밀로써 이 사실을 누설하게 된다면...”

“자,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돈에 친척은 물론이고 제 안사람한테도 절대로 누설하지 않겠습니닷...!”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내 친히 보고서에 그대의 공이 컸다고 적어야겠군요! 그럼 이 뗏목을 조금 빌려야겠는데...”

“얼마든지 가져가 주십시오!!! 악마를 무찌르는데 미약하게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크흠... 이거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마음만 받도록 하죠. 흠흠... 말톤, 우리가 보고서를 어디 뒀더라?”

상인이 산책을 앞둔 개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예, 옙!! 앞으로도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도란님이시라면 이 던전 3층에 암시장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그곳에도 저희 상단 사람들이 있으니 오시면 여러 편의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3계층까지 나아가면 물자를 보급할 필요가 있는 만큼, 상단과 연을 맺어두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이런 곳에서 횡재할 줄이야.

“아이고 이거 고맙습니다! 아무르 씨!!”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 여기 뗏목 대여증입니다! 습지를 건너가고 나면 정박하는 곳이 있을 테니 거기 있는 상인에게 이 증서를 보여주십시오!!”

남자가 양피지를 꺼내 깃펜으로 몇 자 휘갈기더니 곱게 말아 건넸다.

정중하게 받아들자 그는 손님을 맞겠다며 떠나갔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고 나니 성취감에 가슴이 뿌듯했다.

“뭐, 어떻게든 잘됐네. 안 그러냐 꼬맹... 아?”

“.....”

“..또 왜...”

“도란님.”

라디가 눈초리에 날을 세우고 올려다봤다.

“...왕실 특무부대를 사칭하면 사형인 거 알고 계시죠...?”

“...다, 당연하지.”

“보아하니 모르고 계셨네요... 진짜 겁도 없이...! 혹시라도 그쪽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누가 보면 목숨이 한 열 개는 되는 줄 알겠네요!! 잘못하면 진짜 큰일...!”

“흐흐... 잘 풀렸으니 된 거 아닌가. 어쨌든 도란 덕분에 이번엔 편히 건널 수 있겠군.”

“말톤님은 가끔 보면 너무 유하세요! 이런 건 조금 더...!”

“미안해.”

“어...?”

돌연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떨구자 라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생각이 모자란 탓에 너까지 휘말리게 해버렸다. 미안하다.”

“어, 어 어어어... 아, 아니 그렇게 주눅들 필요는...”

“미안해.”

“아, 아 아 괜찮아요! 괘, 괜찮으니까...! 마, 말톤님 빨리 어떻게 해, 해봐요! 도란님 상태가 이상해요...!”

라디가 손을 파닥파닥 휘저으며 당황했지만 말톤은 그저 웃을 뿐, 태연하게 읊조렸다.

“흠... 내가 보기에는 아주 정상으로 보인다만?”

“네? 이게 어딜 봐서... 도란님...?”

“미... 푸흡!”

“이런 씨발!!”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녀석이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녀석을 피해 정박되어 있는 보트 위로 얼른 올라탔다.

“아, 항복! 항복!!”

“나가 뒤지세요!!!!”

“떨어져! 진짜 떨어진다고!!”

“악어 밥이나 되세요!!!”

“사, 살려...! 말톤!!!”

“흐흐... 다 자네 업보일세. 감내하시게.”

“아아아악!!!”

*

결국, 대차게 미역을 감고 나서야 상황이 진정되었다.

라디의 화가 풀린 뒤로는 뗏목을 타고 노를 저으며 순탄하게 나아갔다.

끝이 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습지.

눅눅한 물안개가 낮게 내리깔린 호수는 군데군데 닻꽃이 자라나 선선히 흔들렸다. 갈대 우림을 헤집고 지나갈 때마다 이슬 맺힌 풀잎이 손등을 간질였고, 낮잠을 자던 수달이 화들짝 놀라 달아가곤 했다.

몽환적인 정경.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천천히 노질하고 있자니 불현듯 라디가 수면 아래를 손짓하며 팔을 두드렸다.

“와! 방금 엄청나게 큰 물고기가 지나갔어요! 크기가 도란님만 했던 것 같은데...!”

“어디 어디?”

“저기요!”

“진짜네 와...”

일렁이는 수생식물의 뿌리 사이, 거대한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 큼지막한 덩치는 원대한 호수의 규모와 맞물려 우리로 하여금 거인의 모형정원에 흘러들어온 듯한 착각을 주었다.

“타이거 피쉬로군. 덩치와는 다르게 온순한 녀석이니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래? 근데 저거 한 마리 잡으면 나흘은 끄떡없겠다. 색도 알록달록한 게 열대어 느낌도 나고...”

“...도란님은 짐승을 발견하면 먹을 생각부터 하시네요.”

“맨날 굶고 살다 보면 그렇게 돼. 그래서 싫어? 너도 항상 맛있게 먹었잖아.”

“싫다고는 안 했어요. 그냥... 잠깐!”

즉각 팔을 멈췄다.

­.....

자욱한 물안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연무 사이로 물거품 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꼬맹...”

“....”

라디는 눈을 감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집중했다.

이윽고 녀석이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착각인가?”

“꼬맹아 왜 그래?”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그래, 그럴 수...”

“도란님!!!!”

돌연 라디가 몸을 날려 나를 넘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뗏목이 크게 휘청거렸다.

­콰지직ㅡ!!

“뭐, 뭣...?!!”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 무지막지한 이빨.

­크르르르...!

“나, 나왔다!!!”

이 습지의 터줏대감이라 불리는 존재, 그린 앨리게이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구석에 주둥이를 들이민 채 쩝쩝 입맛을 다셨다.

만약 라디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늦었더라면...

즉각 동요를 가라앉히고 응수했다.

“이 새끼가 감히!!!”

­부웅!!!

손아귀에 쥔 노를 그대로 내려찍었다. 하지만 총탄도 튕겨낼 듯한 가죽 앞에선 흠집조차 내지 못했고, 놈은 내 투구를 서늘하게 노려보며 서서히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잔잔한 파문이 퍼져나가는 걸 기점으로 사방에서 갈대가 흔들렸다.

“모두 중앙으로 모여!!!”

샛노란 눈동자. 수십 마리의 악어 떼가 뗏목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동시에 두꺼운 안개벽을 뚫고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으아아아악!!!”

“허, 허드슨이 당했다!!”

“그, 그린 앨리게이터가 나타났다!!”

“갑자기 어디서... 크아악!!!”

“...젠장!”

뗏목을 타고 건너던 다른 모험가들도 마찬가지로 습격을 받는 상황. 이젠 도움을 청할 데도 없다.

“이 새끼들 전부 다 핸드백으...!!”

고함을 지르며 칼을 뽑아내려는 찰나, 라디가 내 입을 틀어막으며 귀에 속삭였다.

“...도란님, 녀석들은 소리에 예민해요. 그러니까...”

“여기선 다른 모험가들을 미끼로 쓰는 게 어떤가?”

“.....”

주위를 곁눈질했다. 사방에서는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장검을 도로 갈무리했다. 악어들은 후각에 민감한바,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이쪽으로 몰려들 테니 날붙이를 쓰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즉각 발치에 내려놓은 노를 다시 집어들고 후려갈겼다.

­뻐걱ㅡ!!

풀스윙!

통나무 위로 기어오르던 악어가 기세에 밀려 미끄러졌다. 뒤이어 다른 한 놈이 덤벼들었지만 자루 부분으로 콧잔등을 내려찍었다. 이어서 몰아치는 이빨. 사양이 거세된 잔혹한 눈동자.

“...이때다 하고 달려들기는...”

위협적이긴 하지만 저 주둥이만 조심하면 크게 다칠 일은 없다.

발끝으로 안구를 걷어찼다. 낡아빠진 샌들 너머 엄지발가락에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하는 놈을 그대로 밀쳐내고는 자세를 다잡는다. 목표는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두 마리.

­콰지직!!

­크르르르륵!!!

손에 쥔 노를 그대로 휘둘렀으나 놈의 아래턱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하던바, 즉각 날카롭게 다져진 단면으로 앞발을 내려찍었다. 그것만으로 녀석은 고통스럽게 버둥거리다 미끄러졌다.

이어 쩍 벌려진 주둥이 깊숙한 곳에 장대를 처박자 나머지 한 놈도 목구멍이 틀어막힌 채 수면 아래로 잠겨들어갔다.

“...성가시네.”

이런 상황에서 물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사지가 찢겨나갈 터, 놈들이 뗏목을 가라앉히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꼬맹아.”

“네.”

라디는 가볍게 시선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내 의중을 정확히 파악했다.

녀석은 우리의 배낭을 뗏목 중앙으로 모은 뒤, 쇠뇌를 격발해 덮쳐오는 악어들을 견제했다.

말톤에 이르러서는 메이스를 거머쥔 채 착실히 놈들의 두개골을 분쇄하는 중이다.

­빠각!!

­크르르르르륵?!!

­카르르륵...!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뗏목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미 더한 상황도 겪어봤다.

셋이 합심해 물 샐 틈 없이 방어해나가자 어느 시점부터 악어들의 공격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일격마다 확실하게 놈들을 무력화시키는 말톤 덕도 있겠으나, 도중부터는 모험가들의 피 냄새가 풍겨오는 주변으로 몰려간 탓이 클 거다.

기분 탓인지 수면의 색도 짙어진 느낌이다.

라디가 마지막 악어를 턱짓하며 말했다.

“...도란님, 이제 저 녀석만 처리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도란님...?”

노를 대신 검을 들자 라디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봐왔다.

그런 녀석에게 씨익 웃어 화답하고는 칼날과 함께 자세를 낮췄다.

나는 놈이 완전히 뗏목 위로 올라탈 때까지 기다렸고,

난폭하게 주둥이를 벌리며 접근해온 순간ㅡ

­푸확ㅡ!!

“.....”

차가운 칼날로 미간을 꿰뚫었다.

찰나 발밑이 기우뚱했지만, 즉각 녀석의 몸 위로 올라타 주둥이를 짓눌렀다. 이어 발목에서 뽑은 단검으로 척추를 단칼에 꿰뚫자 그 떨림 또한 서서히 멎어간다.

축 늘어진 악어 사체에서 내려오자 꼬맹이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어왔다.

“도란님...? 어째서...”

“흐흐... 그래도 이왕 싸운 거 전리품 하나 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겠어?”

좋은 생각이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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