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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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 던전 #10
“흐흐... 악어다 악어 크왕!”
“...유치하게. 누가 애인 줄 모르겠네요. 그게 그렇게 좋으세요?”
“그러엄! 이게 또 맛이 끝내주거든.”
축 늘어진 악어 주둥이를 붙잡고 들이대자 라디가 질색했다.
“...악어 고기도 먹어보셨어요?”
“물론이지.”
그때가 아마 초등학생이었을 거다. 아버지와 함께 아프리카 콩고에 갔을 때였던가.
맛있었지...
아버지가 미끼 대신 날 늪에 담가버린 것만 빼면!
남자는 강하게 커야 한다면서 내 발목을 붙잡고 휘적거리는데 무슨 아킬레우스라도 된 줄 알았다.
나도 한밤중 침낭 속에 불개미를 잔뜩 집어넣어 복수했지만.
“...다 왔군, 육지가 보이네.”
“이야 드디어 도착했네.”
“악어는 이제 지긋지긋해요.”
우여곡절 끝에 노를 저으며 유유히 나아간 지 삼십여 분이 흘렀을 무렵, 안개가 걷히니 저 멀리 뭍에서 한가로이 움직이는 모험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헌데 우리가 다가가자 어째선지 분위기가 급변했다.
“....!!”
“....!!!”
“.....?!”
멀리 떨어진 탓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점점 목소리가 뚜렷해졌다.
“정말이잖아?! 저거 봐!! 그린 앨리게이터를 잡았어!!!”
“대체 어떻게 저 무지막지한 놈을...”
“에이... 뭔가 해서 달려와 봤더니... 기껏해야 아성체잖아? 저 정도쯤이야 뭐...”
“야 이 등신아, 너는 뗏목 위에서 제대로 중심이나 잡을 수 있냐? 홉고블린도 못 잡아서 쩔쩔매는 새끼가. ...그나저나 허드슨네 조도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왜 안 보이지...”
“....”
소란을 무시하고 뗏목들이 정박되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한 상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어, 어서 오십시오!! 그린 앨리게이터를 사냥하시다니...! 상당히 관록 있는 모험가분들이시군요. 저희 오필리아 상단에서 대여한 뗏목이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헌데... 선체가 조금 파손됐군요. 이러면 배상금을 받아야 하는데...”
“....”
예상했던 일이다.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 건네자 상인이 눈썹을 움찔했다.
“이건... 뭡니까?”
“증서입니다. 아무르 씨가 그쪽에게 보여주라더군요.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디 한번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네 그럼...”
상인이 돌돌 말린 양피지를 건네받더니 위아래로 펼쳤다.
글귀를 읽어내려가는 그 낯빛에 점차 동요의 기색이 서렸다.
“이건...”
“이걸로 된 건가요?”
“아 예, 예... 최대한 편의를 봐달라고 쓰여있군요.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을 묻지 말라고... 별일이네 분명 아무르 님의 필체가 맞는데...”
그게 그런 내용이었나.
오는 도중 호기심을 못 이겨 슬쩍 펼쳐봤으나, 뜻을 알 수 없는 은어들로 가득 차 있어서 도무지 해독할 수 없었다.
보안이 발달하지 않은 세계이니만큼 이곳 상인들은 자기네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자와 기호로 문서를 작성했으니 당연하다. 일차원적이지만 손쉽게 서류가 위조되는 걸 방지하거나, 은어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증표가 될 수 있기 때문.
점점 주변에서 이목이 몰리는 탓에 얼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떨떠름한 시선으로 양피지와 날 번갈아 쳐다보는 상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왜,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좀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아무르 님하고 꽤 오랫동안 일을 같이 해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워낙 철저하신 분이시거든요. 돈 계산도 칼같이 하시고...”
“그런가요?”
“네, 말도 마세요... 상단 내에서도 깐깐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요. 오죽하면 돈 앞에서는 자기 부모도 몰라본다는 소문이... 아.”
“.....”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아 예 뭐...”
잠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상인이 짐짓 헛기침을 해 정적을 깼다.
“크흠 흠... 아무튼, 이걸로 뗏목 반납 수속은 완료되었습니다. 모험가님들의 앞길에 부의 신 라하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목함 안으로 들어가는 증서를 눈으로 쫓으며 발걸음을 돌리려던 차, 라디가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도란님, 도란님.”
“...왜?”
“저 악어... 어차피 전부 다 들고 가지도 못할 텐데 가죽만이라도 어떻게 팔 수 없을까요?”
“악어 말이야? 흠...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는데, 과연 받아줄까...?”
“.....”
상인의 귀가 쫑긋하더니 대자로 늘어진 악어를 힐끔 곁눈질하며 물어왔다.
“...혹시 그린 앨리게이터의 가죽을 매각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네, 가능할까요?”
“흠... 원칙상으론 불가능하지만 아무르 님의 전언도 있고 하니 뭐, 좋습니다! 그린 앨리게이터의 소재는 워낙 수요가 많으니까요. 대신 가죽만입니다.”
“감사합니다!”
라디와 손뼉을 마주쳤다.
*
“크흘흘... 이거 완전히 땡잡았네... 오늘은 어쩐지 만사가 잘 풀리는걸?”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물론이지! 고기도 얻고 돈도 벌게 될 줄이야! 여기까진 바라지도 않았는데.”
쩔그럭 쩔그럭 은화를 튕기며 묵직한 배낭을 돌아보았다.
산더미 같은 악어 고기를 쳐다보며 히죽거리자 아래쪽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거만 좋아하지 말고...”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생각보다 가격을 높게 쳐줬네요. 아무르 님의 전언 때문일까요?”
“그렇겠지?”
악어가죽을 팔고 받은 돈은 3실링 남짓. 시세를 약간 밑도는 금액이었으나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앞으로 한 달을 던전 안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크고 거추장스러운 가죽을 들고 다닐 순 없었으니까.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할 참이었는데 사주겠다면 이쪽에서 땡큐지.
“이게 다 내 덕 아니겠어? 사람이 살다 보면 사칭도 좀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안 그래?”
“으이구... 잘나셨어요, 아주.”
“아야야...! 아파!!”
“아프라고 한 거거든요?”
따끔거리는 팔뚝을 매만지며 울상 짓고 있자니 말톤이 목을 가다듬었다.
“험험... 자네들 내가 있는 걸 까먹은 건 아니겠지?”
“내가 널 왜 까먹어?”
“...낯짝도 두껍군. 애석하지만 지금부터는 집중하는 게 좋을 걸세. 지형이 바뀌었으니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네.”
“...그러고 보니.”
습지를 지나치자 주변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발이 푹푹 빠졌던 진창은 단단하게 다져졌고, 곳곳에 산재했던 물웅덩이 대신 괴기한 암반들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개중 일부는 무려 아파트 한 채에 비견될 만큼 거대한 것도 있다.
“장난 아니네... 만약 저들 중 하나가 똑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저희는 형체도 남기지 않고 으스러지겠죠. 혹시 모르니 조금 떨어져서 걷는 게 좋겠어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대체 갑자기 어디서 이런 지형이 튀어나와가지고...”
“흐흐... 이 정도면 약과일세. 내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던전 중 일부는 공간이 뒤틀린 곳도 있었지. 끝나지 않는 복도라던가 출구가 변화하는 미로 같은 것 말일세. 심지어 소문에 의하면 몇몇 던전은 시간마저도 뒤틀려 있다더군.”
“용케 살아남았네 너. ...근데 시간이 뒤틀리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흠... 그게 말로 설명하기는 조금 복잡한데 말이지.. 그러니까 그게 분명ㅡ.”
말톤이 뭐라 말을 하려 하긴 했으나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꼬르르륵...!
대화를 뚫고 뚜렷한 자기주장이 들려왔기에.
아래를 내려다보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 숙인 꼬맹이가 보였다.
“....밥부터 먹고 얘기할까?”
“.....그게 좋겠군. 내가 장작을 구해 올 테니...”
“괘, 괜히 배려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더 부끄럽잖아요!!!”
즉각 꼬맹이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따지고 들었지만, 나와 말톤 둘 다 대수롭지 않게 웃어 흘러넘겼다.
“괜찮아 인마, 그냥 단순한 생리 현상이잖아.”
“그러게 말일세.”
“그, 그럼 그렇게 웃지 말라고요!!”
“그래 그래, 미안해.”
“전혀 미안하지 않잖아요!! 애 취급하지 마세요!!”
투닥거리며 적당한 바위 아래 자리를 잡았다. 메이스를 어깨에 들쳐메고 땔감을 구하러 떠나는 말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묵직한 배낭을 내려놓자 그에 매달린 악어 고기가 출렁거렸다.
발치에서 단검을 뽑으며 물었다.
“꼬맹아, 혹시 악어 손질 가르쳐...”
“저, 저는 불을 지피고 있을게요...!”
라디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들을 긁어모았다.
나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평평한 돌 위에 악어 고기를 늘여놓고 해체를 시작했다. 아까 가죽을 분리할 때 대충 손질해두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려면 부위별로 나눌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목표하는 건 비단 살코기뿐만이 아니다.
“흐흐... 악어만큼 유용한 게 또 없지.”
칼자루를 짧게 쥐고 지방질 부위를 따로 분리해냈다. 이걸 깡통에 넣고 끓인 뒤 응고시키면 고체 기름을 얻어낼 수 있겠지. 이는 유사시 등불에 불을 밝히는 용도 외에도 상처 회복, 항균 효과에 더불어 미용 목적으로도 쓸 수 있다.
실로 악어 기름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피부 질환의 치료약으로 쓰여왔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고급미용 재료로 사용될 정도니 말 다 했지.
원래는 복잡한 정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아쉬운 대로 이걸 얼굴에 바르기만 해도 꽤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다.
꼬맹이도 좋아하겠지? 무려 여장이 취미인 녀석이니까.
“꼬맹아! 혹시 남는 병이나 깡통 같은 거 있냐? 담을 수만 있으면 돼.”
“음... 예비용으로 남는 양철통이 하나 있긴 있는데... 드릴까요?”
“그래.”
한데 모은 악어 비계를 녀석이 건네준 통 안에 집어넣었다.
꼬맹이가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미심쩍게 쳐다봐왔다.
“또 뭘 하시려구요... 미끼로라도 쓸 생각이세요? 하지만 이제 물가가 나오는 구역은 지났는데 새라도 잡는 게 아니면 이 정도로는...”
“아니, 이건 연고 겸 화장품으로 쓸 거다.”
“화장품이요?”
“그래, 악어 기름이 피부 미용에 끝내주거든! 한 번도 안 써봤어?”
“...그린 앨리게이터의 비계를 그런 용도로도 쓸 수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요.”
“흐흐... 속고만 살았냐 한번 믿어 봐.”
꼬맹이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봤으나 입가에 웃음을 지어 화답했다. 뭐,직접 써 보면 알 테지.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 려다가 말았다.
또 무심코 어루만질 뻔했네. 조심해야 하는데...
“.....바보.”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녀석이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벽안에 아쉬움이 서렸던 건 찰나의 착각이었을까.
허나 이대로 대화가 마무리될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와인빛 후드 아래서 연이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당장에라도 녹아 버릴 것처럼 희미한
“....도란님.”
“왜.”
“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
“...도란님 근처에 누군가가 사실은 수...”
“나 왔네.”
말톤이 장작을 한 아름 싸 들고 나타났다.
“어 그래 왔냐, 저기 모닥불 위에 내려놔. ...꼬맹아 미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흐... 내가 없는 사이에 또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길래...”
“별 얘기 안 했어요.”
라디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말톤이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도란, 잠깐 따라와 보겠나?”
“어... 나만?”
“그렇네, 한 명은 짐을 지키고 있어야 할 테니 말이야. 걱정 말게, 멀리 안 갈 걸세.”
“...잠깐 괜찮겠어?”
“....다녀오세요.”
라디는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마지못해 녀석을 혼자 내버려 두고 나오자 말톤은 어딘가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다만, 놈의 입매에선 언제나 맴돌았던 능청스러운 웃음 대신 사뭇 진지함이 묻어나왔다.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네가 따로 불러서 얘기할 정도면... 꼬맹이에 관련된 거야?”
“...그것도 있네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네. 일단 따라오시게.”
“.....”
말톤을 나를 이끌고 어느 기암 뒤로 데려갔다. 짙게 드리운 응달 탓에 이곳엔 눅눅한 이끼들이 잔뜩 돋아있었고, 쥐며느리와 민달팽이 등 자잘한 벌레들이 발치를 기어다녔다.
열이면 열 그냥 지나쳤을 법한 그런 장소.
녀석이 그중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것 좀 보시게, 도란.”
“갑자기? 대체 이런 곳에 뭐가 있다고... 어?”
유독 말톤이 지목한 곳 주변만 흙 색깔이 어두웠다. 마치 최근에 뒤엎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 같으면 멧돼지 소행이겠거니 넘어갔겠지만...
“옷가지...?”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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